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21일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김해.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세례명은 안드레아, 그리고 ‘대건’은 관명입니다. 복자인 그의 증조할아버지 ‘진후(비오)’는 50세 때 교인이던 아들의 권유로 입교한 후 1791년의 박해 이래 여러 번 검거되어 고문과 귀양 등의 고난을 겪다가 1814년 충청남도 해미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이에 할아버지 ‘택현’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하여 그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준’은 다시 내포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심 깊은 순교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굳센 기질과 성심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적합한 소년을 물색하던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택되어 라틴어와 성직자로서의 기본소양을 배운 후, 12월 2일 한양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유방제 신부 편에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838년 말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해 사제품 받을 때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방 신부는 가장 늦게 선택된 소년 김대건의 마음을 잘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그가 "앞으로 조선 성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라고 굳게 맹세하는 모습을 보고 유학길에 합류시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만주와 내몽골 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되는데, 먼저 중등과정을 학습한 후 철학과 신학 과정을 차례로 이수해 나갔습니다.
그 무렵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기에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서게 되는데, 마침 김대건이 제독의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조선에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올라 1842년 2월 중순 마카오를 출항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가 양쯔강에 이르렀으나 중국 아편전쟁의 결과인 난징조약의 체결로 군함이 되돌아가자 그는 혼자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가 변문(평안북도 의주성 밖 만주와의 국경 지역에 있던 관문)에 이르렀을 때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의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는데,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입국을 서둘러 12월 29일 혼자서 의주 변문을 지나 입국했으나 중도에 신분이 발각될 위험이 생기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이듬헤 1월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는 백가점과 소팔가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1844년 12월 15일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그는 주교의 명으로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와서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러나 아직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그 혼자만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한 탄압의 분위기와 악화한 건강 때문에 천주교회의 수습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1845년 4월 ‘라파엘’호로 명명한 작은 배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출항하여 어렵게 상해에 도착한 그는 그해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신학교 성당에서 ‘성 안(安)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보좌로 첫 미사를 집전하게 됩니다.
1845년 8월 31일 그는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하여 천신만고 끝에 10월 12일 제주도에 표착한 후 다시 출항하여 강경 부근 황산포 나바위(현재 전북 익산)에 무사히 상륙하게 됩니다. 이후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인근의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쓰게 되는데, 하지만 의주 방면의 경비가 심해서 페레올 주교는 그에게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그는 선교사 입국을 위한 안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이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으며 천주교를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사실을 자백하자 감사는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 회의를 열고 그를 서울포도청으로 압송하도록 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출국한 일과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지만, 당시 일부 대신들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해 그를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몇몇 대신들은 그에게 부탁하여 개략적인 세계지도를 책으로 만들고 영국에서 만든 지도를 번역하여 2벌의 채색한 지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그는 천주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관리들에게조차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는데,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한편,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이 처형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1846년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여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그의 처형을 결정했고, 결국 그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순교 후 한강 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다가 40일 뒤 용감한 신자 ‘이민식(빈첸시오)’이 순교를 각오하고 몰래 유해를 수습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에 모셨습니다. 그 후 1901년 5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지시로 다시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 제대 밑에 안치되었다가 1951년 그의 유해 대부분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해 일부는 미리내 성지를 비롯해 전국 여러 곳으로 안치되어 가톨릭 신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79위와 함께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또한 2019년 유네스코 제40차 총회에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는데, 2021년은 성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축일은 일반적으로 순교한 날로 정하는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전례적으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습니다.
한편, 2001년에 개정 발행되어 2004년에 일부 내용이 수정 및 추가된 “로마 순교록”도 9월 16일 목록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해 기록하면서 9월 20일 전례 안에서 기념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축일을 7월 5일에 별도로 기념해왔는데, 이는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전례력 안에서 그날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로 경축해왔으나 2018년 전례력부터 동일 성인에 대한 대축일 중복을 피하고자 7월 5일 대축일을 폐지하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자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라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의 열성적인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 자세 때문에 천주교인들은 물론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수의 교회와 수도회는 물론 가톨릭 신자들의 수호성인과 주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주) 위 한국화들은 고(故) 탁희성(비오·1915~1992) 화백의 작품으로, 화백은 1960년 천주교에 귀의한 뒤 한국천주교회사를 지속적으로 연구했고, 성화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그림 작업에 앞서 역사적인 배경이 된 지역을 직접 답사하고 스케치하는 등 면밀한 사전 작업을 거쳤는데, 이러한 연유로 탁 화백의 작품은 교회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담아낸 역사화(歷史畵)로 소개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