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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장 12-14절. 교회 문제 수습과 감사
1. 지난 시간에는 <용서하고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성도들 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며, 신앙이 훌륭하신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윗이나, 바울 사도와 같은 분들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원수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죄인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고난을 받은 후에, 디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1) 12-13절에서 바울 사도는 과거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돌아온 이후, 자신이 어디로 전도 여행을 해왔는가 그 경로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돌아온 이후 에베소에서 56년 오순절까지 있다가, 에베소에서 떠나 드로아에 갔습니다.
(2)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려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문제를 수습하러 갔던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디도가 드로아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마음이 아주 편치 못했습니다.
“디도가 혹시 고린도 교회에서 창피나 당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게 복종해서 교회 문제가 잘 수습되었는지?” 너무도 궁금했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드로아 전도를 중단하고,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떠나갔습니다.
(3) 마게도냐에서 아마도 빌립보에서 바울은 마침내 디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소식이 아닌, 성공의 소식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디도의 중재로 잘 수습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1년 반 동안 고생해서 설립해놓았던 고린도 교회가 파멸되어버릴 위험 속에서, 기사회생하여 다시 바울의 지도를 받게 되고 정상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디도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었던 것입니다.
(4) 14절에서, 이제 바울은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수습 소식을 듣고, 개선장군처럼 기쁨으로 본문의 편지(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습니다.
3. 오늘 설교의 제목은 <고린도 교회 문제 수습과 감사>입니다.
12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when I came to Troas for the gospel of Christ and when a door was opened for me in the Lord,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Ἐλθὼν δὲ εἰς τὴν Τρῳάδα εἰ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
having come now to the Troas for the gospel of the Christ
‘이르매’(Ἐλθὼ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ome) 과거에 확실히 이른 사실을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καὶ θύρας μοι ἀνεῳγμένης ἐν Κυρίῳ,
and door to me having been opened in Lord
‘열렸으되’(ἀνεῳγμένης)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opened) 이미 열려진 것을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1)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중간방문) 이후 에베소에 되돌아와 ‘눈물의 편지’(중간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13절).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한 것은 이 약속 때문이었으나,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발생한 은장색들의 소동 때문에 약속보다 다소 일찍 왔습니다(행 19:23-41).
(2) 한편, 바울의 드로아 방문의 목적은 디도와의 만남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3) 그런데,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이후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중간편지)를 보내 그 결과가 대단히 궁금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드로아 복음 전도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의 복음 전도로 드로아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행 20:6-12)
(4) 그러나 바울 사도는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안 때문에 복음을 전도를 중단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에 지장이 될 정도로, 이미 설립한 고린도 교회의 안부 문제는 사도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즉, 교회 내부의 목회 문제가 평안해야, 불신자 전도가 능력있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교회 내부의 평안은 교회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내부의 문제가 평안해야, 가장의 직장생활이나 사업이 잘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습니다.
2. 드로아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했던 지역입니다.
드로아(Troas)는 트로이(Troy)에서 6km 떨어진 외항(外航)이었습니다.
3. ‘내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란 말씀은, 바울 사도의 인생 여정이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1) ‘복음’이란 단어 대신에 다른 말을 넣어 봅시다.
예컨대, ‘가정’이라든가, ‘자녀’라든가, ‘부모’라든가, ‘아내’라든가, ‘남편’이라든가, ‘명예’라든가, ‘돈’이라든가, ‘건강’이라는 단어를 넣어 봅시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만납니까?
나의 삶은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나의 인생 여정은 무엇을 위한 여정입니까?
우리가 무슨 직장 일을 하거나, 무슨 가정일을 하거나, 학교 공부를 하거나, 시험 준비를 하거나,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3.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 본 절에서 ‘문이 열렸다’는 것은 ‘복음 전도의 기회가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한 문이 활짝 열렸다는 것은, 바울이 전도할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또 모인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인생 여정을 뒤돌아보면, 이처럼 문이 활짝 열린 경우가 거의 드물었습니다.
제1차 전도 여행 때(행 13-14장), 13장의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에서는 유대인들이 비방하고 핍박하여(45절, 50절) 쫓겨났고, 14장의 이고니온 전도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해서 도망했고(5절), 루스드라 전도 시에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제2차 전도 여행 때( 행16-18장), 16장의 빌립보 전도에서는 매를 실컷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났고, 17장의 데살로니가 뵈뢰아 전도에서는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니까 밤에 도망했고, 18장의 고린도 전도에서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총독 갈리오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 때(행 19장), 에베소 전도에서는 수 만 명의 우상숭배자들과 이방인들이 연극장에 모여서 바울을 죽이려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의 복음 전도의 인생길은 문이 활짝 열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좋은 환경입니까?
그러나, 이처럼 외부적으로 좋은 환경을 만났더라도, 심령이 편치 못하므로, 복음 전도를 중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또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이 있어도,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16장에서도,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으나 성령님의 제지를 받았고, 비두니아로 가서 전도하려고 했으나 역시 성령님이 허락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하라는 환상을 보고, 그곳으로 가서 전도했습니다(행 16:6-10).
이와같이 인간의 열정만으로는 전도도 안 되고 주의 일도 안 되고, 성령님이 허락하셔야 하고, 주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우리도 아무리 복음을 위한 일이고, 좋은 목적을 가진 사업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문을 열어주셔야 성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주님이 약속하셨더라도, 우리가 구해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구해야 하리라.”( 렘 27:28, 겔 36:37)
(3) 본 절에는 비록 바울이 전도자로 헌신한 사람이고, 지금 드로아에서 복음 전도의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고린도 교회와 디도에 대한 염려 때문에, 드로아 전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가는 ‘인간 바울의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가 비록 사도였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13절.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had no rest for my spirit, not finding Titus my brother; but taking my leave of them, I went on to Macedonia.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οὐκ ἔσχηκα ἄνεσιν τῷ πνεύματί μου
not I have had rest in the spirit of me
직역하면 ‘내 영혼 가운데 내가 안정을 갖지 못해서’란 뜻입니다.
‘갖지 못해서’에서 동사(ἔσχηκα)는 완료형으로서(I have had) 이미 안정을 갖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τῷ μὴ εὑρεῖν με Τίτον τὸν ἀδελφόν μου,
in the not to have found my Tutus the brother of me
‘만나지 못하므로’에서 동사(εὑρεῖν)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found) 과거에 만나지 못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을 작별하고
ἀλλὰ ἀποταξάμενος αὐτοῖς
but having taken leave of them
‘작별하고’(ἀποταξά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leave of) 단호하게 작별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마게도냐로 갔노라
ἐξῆλθον εἰς Μακεδονίαν.
I went out to Macedonia.
‘갔노라’(ἐξῆ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I went out) 과거에 마게도냐로 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은 드로아에서 며칠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이 다 되도록 디도가 도착하지 않자, 바울의 심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마음이 불안하여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떠나갔습니다.
2. 이토록 바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의 두 가지였습니다.
(1) 첫째, 고린도 교회에 대한 불안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바울은 두 번째 방문을 취소하고, 대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직접 방문을 피하고 편지로 대신하였는데(1-3절), 만일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지난번 방문 때 있었던 가슴 아픈 일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불행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2) 둘째,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는 것이 혹시 디도의 신변에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닌가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전하는 일 외에도 당시 기근으로 빈핍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강도들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드로아에 머무를 수 없었고, 마게도냐로 떠났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드로아 전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에 갔을 때, 심사가 어떠했을까요?
3. 바울은 그때의 불편한 심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5절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바울의 심령은 심히 불편했다는 말씀입니다.
목회자는 마음이 평안해야,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평안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엡 6:15)
그런데, 목회자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평안한 복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이 교인들끼리의 싸움이나, 목회자에 대한 비난 때문에, 불편하다면, 평안의 복음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나, 구역예배인도자가 누구와 다투었다든지, 중직자가 목사를 비방한다든지 하면, 평강의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다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사람과 맺힌 것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화목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심지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22-24).
4. 바울 사도는 드로아에서 아무리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고, 받외부적인 핍박이 없었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심령이 편치 못하므로, 막상 전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것은 목회자가 주변에 근심 염려된 일이 없어야, 주의 일을 마음 놓고, 전심전력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6장에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히브리파 교인들과 헬라파 교인들 사이에 과부 구제 문제로 불화가 발생하니까, 사도들이 복음 전하고 기도하는데, 전념하지 못하고, 구제 업무와 분쟁 수습 문제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싸우고 불화하게 되면, 부모가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지장이 되는 법입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직장생활이나 학교 공부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화(家和)는 만사성(萬事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직을 가진 분들끼리 싸우면, 목회자가 피곤합니다.
목회자가 어느 편을 들 수도 없고, 또 목회자의 언행을 괜히 곡해해서, 성도들끼리 싸움이 더욱 비화되고 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성도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목회자를 도와드리는 것이고, 주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서로 화목하십시오.
목회자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십시오.
그래야,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화목하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부흥발전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2-13절만 보면, 마치 바울 사도가 실패자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14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 때문에 승리했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승리의 감사 찬송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심령이 불편해서 실패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anks be to God, who always leads us in triumph in Christ, and manifests through us the sweet aroma of the knowledge of Him in every place.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Τῷ δὲ Θεῷ χάρις, τῷ πάντοτε θριαμβεύοντι ἡμᾶς ἐν τῷ Χριστῷ
to however God thanks, the (One) always leading in triumph in the Christ
직역하면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란 뜻입니다.
‘이기게 하시는’(θριαμβεύοντι)은 현재 분사로서(leading in triumph) 현재 이기게 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καὶ τὴν ὀσμὴν τῆς γνώσεως αὐτοῦ, φανεροῦντι δι’ ἡμῶν ἐν παντὶ τόπῳ·
and the fragrance of the knowledge of Him, making manifest through us in every place
‘나타내시는’(φανεροῦντι)은 현재분사로서(making manifest) 현재 나타내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1.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NIV: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항상 참여케 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But thanks be to God, who always leads us as captives in Christ’s triumphal procession and uses us to spread the aroma of the knowledge of him everywhere.)
(1) 여기서 ‘개선 행진’(triumphal procession)이란 로마제국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부하 군인들과 전쟁포로들을 이끌고 축하를 받으면서 행진해 들어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때 시민들은 개선행렬을 지켜보면서 환호하는데, 거리의 공기는 온통 향을 태우는 향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을 관통하는 ‘이그나티안 가도’(Via Ignatia)에 들어온 것을 회상하면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Wiersbe)
(2) “이기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θριαμβεύοντι)는 로마의 황제나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면서 군중들에게 구경시키는 개선 행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승승장구하는 장군의 영광에 참여하는 병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2.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불화와 디도의 무소식을 생각할 때는 드로아 전도를 포기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환경을 바라볼 때는 불안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바울이 아무리 사도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역시 인간인지라 자신만 바라볼 때는 불안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연약한 바울도 주님을 바라볼 때에는, 항상 승리의 찬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13절에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마게도냐로 갔노라”와 14절에서,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씀 사이에는 바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절망과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승리의 커다란 대조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4장에서, 물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물속에 빠져가다가,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다시 물 위로 걸어간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군대와 전쟁할 때에, 모세가 팔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모세가 팔을 내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아말렉 군대에게 졌던 것과도 같은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
환경이 불안할 때가 있습니까?
이때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좌절될 때가 있습니까?
이때가 바로 주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에서,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불안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낙심하고 좌절될 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3.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이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1)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바울 사도의 지금의 여건은 불안하고 평강이 없지만, 그러나 주 안에서는 감사와 찬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감사와 찬미는 환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을 쫓아내고, 억울하게 점쟁이 장사꾼들에게 몰려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깜깜한 감옥 속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나타나고, 다시 간수의 가족을 전도하는 복음 전도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서 4장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어둡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역사하시고,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아무리 내 능력을 갈고닦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찬송가 342장에서,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고 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당해도 예수님 의지하고, 가정의 어려움을 당해도 예수님 의지하고, 병들어도 예수님 의지합시다.
주님을 의지할 때, 난간과 불행과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대로 있으나, 예수님 의지함으로 마음에 믿음과 힘과 지혜를 얻어서,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 때문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뛰어넘어, 문제를 능히 짓밟고 해결할 수 있는 믿음과 힘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예수님께서는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증언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도, 주님께 붙들려 쓰임 받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향기와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2) “각처”란 말씀은 어디를 가든지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은 우리를 통해 주님의 향기와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5.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여기서 '냄새'는 로마 황제가 개선할 때 길가에 향을 피워 향기를 내는 것이나, 쥬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 신전까지 개선 행진을 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관례를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을 향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데, 사실상 자신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은 연약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전도사역을 승리로 이끄시고, 자신을 도구로 삼아 생명과 사망의 냄새를 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에서 ‘지식’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사랑과 봉사의 종교라고 하지만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냄새란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마늘 옆에 가면 마늘 냄새가 나고, 된장 옆에 가면 된장 냄새가 나고, 술집에 가면 술 냄새가 나고, 꽃집에 가면 향기가 나고, 병원에 가면 알콜 냄새가 나고, 외양간에 가면 소똥 냄새가 납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 옆에 가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점쟁이 옆에 가면 귀신 섬기는 냄새가 나고, 정치가 옆에 가면 정치가 냄새가 나고, 사업가 옆에 가면 사업가 냄새가 나고, 학자 옆에 가면 학자 냄새가 나고, 예술가 옆에 가면 예술가 냄새가 납니다.
바울 사도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게 했습니다.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들은 바울의 실체를 알아보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공중 앞에서 떠듦으로 바울이 괴로워서 전도를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냄새가 나서, 이렇게 말하는 귀신을 바울이 점하는 여종에게서 쫓아내었습니다.
창세기 27장에는, 에서가 그 아들의 옷의 향취를 맡고, 축복하면서,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향취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4장 30절에서, 야곱은 그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 사건으로 세겜 사람들을 죽였을 때, “너희가 나로 이 땅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즉 생명의 향기-를 나타내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냄새가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썩는 냄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개선행렬에서 나타나는 향기로 인하여 시민들이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것처럼,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향기가 사방에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를 통해 복음의 향기가 소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전해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향기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에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성도님들과 자손들이 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