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단기4292년(서기1959년)음력10월5일 이명기의 부친에 대한 효와 이명기씨의 생질부인 부인원씨에 대한 동네주민들이 만들어준 표창문이다.
동리의 화합과 효를 향한 마을주민들의 모습을 볼수가 있다. 마을주민들에 의한 표창문이 남아있는 좋은 자료이다.주덕읍지를 읽다가 옮겨왔습니다.
중원군 주덕면 엄동부락(中原郡 周德面 奄洞部落)이라 하여 당시 충주시와 합쳐지지 않아 당시의 명칭인 중원군이라는 명칭이 새롭다
엄동부락민들의 이름으로 준 효자 이명기씨의 표창문
우씨(右氏)는 자기(自己)의 부친(父親)께서 중풍증(重風症)으로 십유여년(十有餘年)을 와석불기(臥席不起)하시와 심고 (沈痼) 중(中)에 봉양지규(奉養之規)와 시탕지절(侍湯之節)의 근근불태(勤勤不怠)하엿쓸뿐 부친봉양(父親奉養)키 위(爲)하야 하절(夏節)이면 구육(狗肉)을 건포(乾脯)하야두고 봉양(奉養)하며 동절(冬節)이면 계저육(鷄猪肉)은 풍질(風疾)의 해(害)된다해셔 필(必)히 황육(黃肉)으로 봉공(奉拱)하며 기(其)의 부친(父親)을 봉양(奉養)키 위(爲)하야 전여답간사오두락(田與畓間四五斗落)을 기(其)의 생질(甥侄)을 무도공제(無賭控除)하엿스며 병부(病父)께서 수풍(漱풍)을 요청(要請)하실 시(時)에는 부친(父親)을 업고 동내(洞內)로 일주회(一周回)을 하며 또난 부친(父親)께서 기세(棄世)하신 즉시(卽時)로 부친(父親)을 봉양(奉養)하엿따난 공뢰(功賴)로 그의 생질부(甥侄婦)에게 의롱일태(衣籠一台)을 선사(善賜)하엿스며 생가(生家)의 후(后)을 계속(繼續)하기 위(爲)하야 일본(日本)의 재(在)한 사촌(四寸)을 초래(招來)하야 성혼(成婚)을 시키며 물질적(物質的)으로 보조(補助)하야 한 세대(世帶)을 설립(設立)하엿스매 이거션 모도가 효심(孝心)으로부터 나온거시입니다. 여사(如斯)한 선행(善行)은 금세(今世)에 한 모범(模範)이 될만하기로 본부락일동(本部落一同)으로부터 미적(美績)을 표창(表彰)하난 바입니다. 檀紀四二九二年 陰十月 五日 奄洞部落一同
이동연의 부인 원씨에게 마을주민이름으로 준 감사장
우부인(右夫人)은 이동연군(李東然君)에 부인(夫人)이며 이명기씨(李命基氏)의 생질부(甥侄婦)인데 기(其)에 외조부(外祖父)게셔 중풍증(重風症)으로 십유여년(十有餘年)을 와석불기(臥席不起)하시와 심고중(沈痼中) 대소변(大小便)을 밧어내난 동시(同時)에 죠곰도 염추(厭醜)하난 태도(態度)가 읍스며 외조부(外祖父)게셔 항상(恒常)걱졍이 심(甚)하신데도 불구(不拘)하고 더욱히 화순(和順)한 태도(態度)로 충고(忠告)하며 봉양(奉養)하난 범백(凡百)과 시어(侍御)하난 범절(凡節)이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며 일호(一毫)도 나태(懶怠)함이 읍스매 여사(如斯)한 선행(善行)은 우리 부락(部落)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드러내여 타인(他人)의 모범(模範)이 될만함으로 본부락일동(本部落一同)으로부터 감사(感謝)한 뜻을 늑기어 약간(畧干)의 물품(物品)으로 감사(感謝)함을 표(表)하는 바입니다. 檀紀四二九二年十月五日 奄洞部落一同
첫댓글 족보가 너무 복잡해서
생질부가 중풍증 으로
앓고 있는 외조부의 똥 오줌을 받아 내어 그 효행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물품과 감사장을 받은 건지
족보가 복잡하네요...
저는 며느리 사랑이 지극하신 우리 시어머니께 감사장을 드리고 싶네요^^♡♡♡
맞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씨족사회였으니 있을수 있는 일이지요
시어머님 생신때 감사장 하나 만들어 드리세요 어머님이 좋아하실겁니다.
캬~~!! 양반이 쓴건데 어려운 한자가 많은걸로 봉께유......^^
제가 봐도 그런것 같습니다...^^
옛어른들은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꽤 애썼네요.
그런 사람들이 적어서 독려차원이였일까? 아님 널리 일반화된 사회의 모습일까?
궁금해지네요.
제 생각에는 독려차원...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