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채수영 14> - 때려서 사람 만들기
때리면 일시적으로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계속 행동을 바꾸려면 계속 때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람은 노예형 인간이다.
일전에 한 대안학교의 안내책자를 읽다가 발견한 문구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학교는 입학할 때, 자기가 잘 못 하면 맞을 매를 가져와야 한다. 더러는 조금 아프기는 해도 데미지가 없는 회초리를 가져오지만, 간혹 당구 큐대나 몽둥이를 가져와서 정말로 낭패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학교의 규율과 기본예절을 지키지 않거나 공부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 하면 자신이 가져온 매로 맞는다. 그렇게 해서 공부의 성과를 내고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어 준다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아니 동의하는 어른들이 있는 것 같다. 설마 아이들이 스스로 가고 싶어 하겠는가. 그 학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꽤나 많았던 것으로 안다. 물론 속사정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매가 아닌 다른 동기부여 방법이 있었을 것이고, 그 학교만의 여러 가지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때리는 것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맞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거나 잘 못 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습관이 된다. 즉 반복해서 채찍의 위협이 있어야 행동을 수정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큰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자식에게도 같은 방법을 쓸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아이들이 맞아서 행동을 바꾸는 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샨티학교에서도 회초리를 든 적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르 2011년, 개교한 해였다. 여행학교가 주된 슬로건인 우리학교는 11, 12, 1월 3개월을 인도 네팔로 이동학습을 갔다. 여행지에 대해서는 준비를 하고 갔지만 여행 중에 어떤 활동을 할지는 준비가 부족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가장 큰 배움이었다. 어찌어찌 두 달 간의 인도여행을 마무리하고 네팔로 넘어왔다. 포카라에 머무르면서, 마지막 미션인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트레킹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문제가 터졌다. 한 녀석이 등산용품점에서 옷을 훔치다 걸린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십대들의 교복으로 까지 불리던 노스페이스 파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즉각 모여서 샨티대화(평화대화)를 했다. 그런데 웬걸, 훔친 사람이 한명이 아니었다. 맨 먼저 도난에 성공한 녀석의 자랑질에 제이, 제삼의 모방범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치밀하지 못한 녀석이 걸린 것이었다. 결국 도난에 가담한 친구들만 모아서 트레킹은 취소하고 회개의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학교 카페를 통해서 부모님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고, 돌아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도난이 범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했고, 유럽이나 북미 같이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녀석들이 우리보다 못 살지만 선량한 네팔에서 도난을 저지른 게 괘심했고, 도난에 가담한 친구와 가담하지 않은 친구를 어떻게 차별해서 훈계할지 고민이었다.
교장샘과 학부모회장님이 회초리를 들자고 했다. 나는 즉각 반대했다. 아이들이 뉘우칠 수 있는 활동은 필요하지만 체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뾰족한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다수 부모님의 침묵어린 동조로 회초리를 들게 되었다. 당시 대표교사였던 나는, 때려야 한다면 내가 때리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믿고 학교에 맡겼는데 아이들이 잘 못을 했다면 학교의 책임이니, 학부모회장님이 나를 때리고 아이들에게는 내가 회초리를 들겠다고 했다.
입국일, 인천국제공항에는 한 무리의 어른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네팔에서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90여일 만에 입국하는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 반겨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무도 웃을 수가 없었다. 입국게이트를 나오는 아이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분위기가 싸해졌다.
모두들 공항4층 구석으로 이동했다. 거기는 청소부만 간간이 지나갈 뿐 인적이 드문 공간이었다. 학부모회장님이 미리 물색해놓았다. 인천국제공항에 그런 곳이 있을 줄이야...
다들 둘러앉아서 교장샘과 학부모회장님의 말씀을 차례대로 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 학부모회장님은 가져온 싸리나무 회초리 중에서 가장 튼실한 놈을 골랐고, 나는 바지를 걷어 올렸다. 다섯 대였다. 한 대는 부모가 잘 못 키운 죄를 뉘우치며, 두 대는 학교가 잘 못 가르친 죄를 뉘우치며, 세 대는 선량한 네팔사람들에게 반성하며, 네 대는 국가적 망신을 반성하며, 다섯 대는 학교의 망신을 반성하며...
‘짝’하고 첫 번째 회초리가 내 종아리에 떨어졌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수치스러움보다 너무 아팠다. 해병대 출신의 학부모회장님은 불의를 못 참는 분이었고, 이런 불의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회초리를 날린 것이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은 얼어붙었다. 가오가 있지, 나는 차마 다리를 만지지는 못 하고 다섯 대까지 꾹 참았다. 내 종아리에는 다섯줄의 시퍼런 피멍이 그어졌다. 아파서 바지를 내리지도 못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학부모회장님으로부터 회초리를 건네받았다. 이제 아이들의 차례다. 첫 번째 친구가 바지를 걷고 원 가운데로 들어왔다. 눈가가 촉촉했다. 내가 맞는 것을 보고서는 두려워서 생긴 눈물인지, 반성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의 번쩍 든 팔에서 첫 번째 회초리가 내려왔다. 그리고 모두들 얼음땡이 되었다. 모두의 예상이 빗나갔다.
첫 번째 친구는 종아리의 통증을 예상했고, 지켜보는 친구들과 부모님들은 마음의 통증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때리지 않았다. 그냥 시늉만 했다. 회초리가 종아리에 닿기만 했고, 닿을 때마다 크게 한 대, 두 대, 세 대... 외쳤을 뿐이다. 친구들도, 부모님들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묘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도 잠시 때릴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학부모회장님으로 부터 회초리를 건네받는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프면 다시는 도난의 ‘도’자도 꺼내지 못 하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라도 잘 못을 하지 않도록 각인시켜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믿음을 거스를 수 없었다. ‘때려서라도 바로 세우겠다.’ ‘맞아야 바뀐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때리면 바뀌는 게’ 더 무섭고 두려웠다. 맞아서 반성하고 바뀐다면, 반드시 그 아이의 마음엔 폭력이 정당화될 게 뻔했다. 나는 학교를 떠났으면 떠났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정답은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그날 회초리를 들지 않고 훈화 말씀만 있었다면 그냥 쉽게 잊혀 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회초리를 든 것까지는 잘 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논리가 아니고 믿음이니까.
졸업생이 나를 보러 왔었다. 첫 번째로 종아리를 걷어 올린 친구였다.
“샘, 그때 왜 안 때렸어요?”
“나는 니네가 맞아서 반성할까봐 무서웠어...”
* 유료구독이라고 놀라지 마세요. 읽기만 하셔도 됩니다.
다만 한명이라도 유료구독자가 있어야 빵꾸 내지 않고 약속을 지킬 것 같아서...
- 구독료 : 월 16편에 편당1천원, 월 1만6천원.
- 연재기간 : 12월23일(월) ~ 2월14일(금) 8주간.
- 납부방법 : 월납이 원칙, 열 편 이상 맘에 드는 글이 있으면 납부해야 함.^^
- 납부문의 : 채수영 010 4552 3864
- 글감 : 샨티학교 이야기, 십대와 교육 이야기, 그리고 내 주변 얘기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