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궁(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 묘소 보탑
사당은 화려하지만 뒷쪽의 묘소는 의외로 고요하다. 사당과 묘소가 일체이기는 하지만. 닛코(日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묘소와 사당 도조궁(東照宮), 한중일 왕들의 세계관과 백성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볼 만한 곳이다. 엄청난 크기와 화려함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중국과 일본의 왕릉 문화와 아담한 봉분에 고향의 억새를 심어 보통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동구릉의 태조릉이 얼마나 다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1.방문지 대강
명칭 : 日光東照宮
위치 : 〒321-1431 栃木県日光市山内2301
입장료 : 2,400엔(보물관 포함)
방문일 : 2023.8.28
2. 둘러보기
2-1에 이어서 정리한다. 여기서는 주로 묘소 근처를 둘러본다.
화려한 사당을 앞에 두고 묘소는 200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 사당을 끼고 가야 한다. 조선통신사도 왔다는 이곳, 인조의 선물이 묘소 바로 앞의 유일한 장식물로 있어 조선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침략자인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사신을 금지당하자 조선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정작 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와는 정적 관계에 있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므로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물리치고 정권을 차지한 도쿠가와는 정작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하니 국제적인 공인이 아쉬운 형편이라 조선과의 관계회복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외교가 재개된 후에도 그의 묘소 참배를 꺼리는 통신사 일행에게 간청하여 유람케 하고, 인조조에는 국왕의 선물도 받았다. 치제 후에는 태워버리는 제문까지 남기도록 하여 보관한 것은 조선을 중시하고 외교관계가 아쉬운 일본의 입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한중일이 사후 세계 인식에서 서로 얼마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사후 세계관은 개인의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생전의 삶과 통치에도 반영된다는 것을 거꾸로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이를 대하는 백성의 자세에서 또한 그 세계관 차이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숭배에 관한 조선의 입장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어 첨부한다.
"계사년(1653, 효종4) 7월. 동래 부사 임의백(任義伯) 때이다. “차왜 귤성정(橘成正)이 말하기를,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을 평정하고 창업하여 기반을 열었으니, 단지 일본인들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오래도록 사모할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태평한 것이 덕천가강의 덕이 아님이 없기에, 귀국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6년 전에 덕천가강을 위해 대마도에 권현당(權現堂)을 특별히 지었고, 전 대군(大君)의 재임 때 더욱 장려하여 우두머리 승려 1인을 정해 보내 원당(願堂)에 분향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도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향을 올리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송사(送使) 1선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이에 답하기를, ‘신하가 사사로이 원당을 지어 그 주군(主君)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이 일은 너희 나라 안에서 스스로 행한다면 그래도 혹 괜찮겠지만, 결코 다른 나라에 알려서는 안 된다. 응당 줄여야 할 배를 줄이지 않고 또 요청하여서는 천부당한 배를 요청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며 준엄하게 물리쳤습니다.”라고 장계하였다. - 응당 줄여야 할 배는 언삼선(彥三船)을 말한다. -
회계하기를, “역관들로 하여금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들의 생각을 돌리게 함으로써 이후에 상벌의 자료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역관들로 하여금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들의 생각을 돌리게 함으로써 이후에 상벌의 자료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권현당(權現堂) :
권현(權現)이란 일본 풍속에 귀신이 현령(現靈)하는 자를 말한다. 광해군 8년(1616)에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죽자 이듬해 일광산(日光山)에 장사하고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란 신호(神號)를 받았고, 인조 23년(1645) 궁호(宮號)를 받아 동조궁(東照宮)이라 칭하였다. 막부(幕府)에 충성을 표하기 위해 각 다이묘〔大名〕들이 자신의 영지에 동조궁을 지었는데, 여기서의 권현당은 대마도주가 자신의 영지인 대마도에 덕천가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변례집요(邊例集要) 2집)
당문. 국보
당문 처마 조각들
처마 밑 잠자는 고양이 조각. 네무리네코(眠り猫). 세 마리 원숭이 조각과 함께 이곳의 가장 명물인 조각이다. 히다리진 고로(左甚五郞)의 작품으로 고양이 뒤의 참새 조각과 더불어 공존과 평화를 상징한다. 예민한 고양이도 잠잘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에 도쿠가와가 잠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이 조각을 공개한다는 광고가 요란하다. 그가 잠들어 있으니 오늘의 참배객도 조용히 하라는 요구가 아닐까. 막상 살펴보면 어디까지가 고양이인지도 잘 모르겠다. 작은 것, 섬세한 것에 탐닉하는 일본인들의 기호로도 읽힌다.
잠자는고양이상.
207개의 계단. 삼나무가 울창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우리 왕릉은 소나무가 지키는데, 이곳 왕릉은 삼나무가 지킨다. 임진왜란은 소나무와 삼나무의 싸움이라는 말도 있다. 소나무로 만든 단단한 배가 삼나무로 만든 무른 배를 대파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배의 우수성을 알게 된 왜인들은 한국의 무인도에 들어가 소나무배를 건조하여 돌아갔다는 말도 있다.
위로 죽죽 하늘로 뻗고 있는 삼나무와 온갖 지상의 물상을 관여하며 구부러지고 공이가 생기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소나무에서도 문화적 차이가 느껴진다. 삼엄한 삼나무와 자연스러운 소나무, 다양성의 힘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을까. 왕릉 곡장의 도래솔 또한 작은 봉분과 함께 조선왕릉의 문화를 보여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 오쿠미야 옥탑. 8각 5단의 돌계단과 3단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계단 위에 묘소인 ‘보탑’이 있다.
묘소. 앞의 조각품은 인조가 보냈다는 삼구족이다. 후일 다신 만든 것이긴 하지만.
묘소인 보탑. 이곳에 이르느라고 207개의 계단과 삼나무 숲길을 걸어왔다. 정작 묘소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아 허망한 느낌도 든다. 불교식 화장법이라 그런 거 같다. 도쿄 조죠지사에서 보았던 후대 쇼군들의 묘지군보다는 크고 단독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국 도쿠가와도 한줌 땅에 묻혀 있는 셈이다.
묘소보다 사당에서 이곳에 이르는 길이 더 멀고 길다. 거기다 높은 길을 계단까지 포함해 걸어 올라야 하기 때문에 걷는 동안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는 요구를 하는 거 같다. 묘소는 작고 수수하고, 사당은 크고 화려하다. 결국 묘소 장식도 후대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후손들이 자기 권력을 확대 유지하기 위해서 선인의 묘소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인다.
니꼬궁에는 임란 후 조선통신사가 1636, 1643, 1655년 모두 세 번 다녀갔다. 1636년에는 유람으로 나머지 두 번은 제사에 참예차 왔다. 1643년에는 봉물을 가져왔는데, 도쇼쿠에 있는 조선종과 이에야스 묘 앞에 있는 삼구족(三具足)이다.
종에는 예조참판 이식(李植)이 찬하고 사직(司直) 오준(吳竣)이 쓴 종명(鐘銘)이 새겨져 있다. 삼구족은 화병, 향로, 촛대를 말한다. 보탑 앞의 세 조각품이 그것이지만 인조 당시의 것은 아니고 화재로 소실되어 다신 만든 것이다 이들은 1643년 이에츠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에도에 온 것이다.
돌아가는 길. 내ㅕ가기도 버거울 만큼 계단이 가파르다.
#니꼬도조궁 #도꾸가와이에야스묘소
첫댓글 글과 사진을 보니 직접 여행하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와서 정리하다 보니 놓친 부분이 많네요. 가기 전의 공부가 중요한데 항상 허겁지겁이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