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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89. [역경의 열매]
장상 (1-28) 70년 삶 한약 보자기에 짜면 ‘감사’ 두 글자 떨어질
살아온 70년의 삶을 한약 보자기에 넣고 꼭 짜면 '감사'라는 두 글자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 삶의 여정에는 높고 낮은 굴곡이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삶의 순간순간,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삶은 결코 혼자만의 땀과 성실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것을 잘 안다. 많은 사람이 전해준 크고 작은 사랑의 힘은 엄청났다. 신앙의 눈으로 삶을 돌아보면 "내 은혜가 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아로새겨진다.
이 지면이 그동안 내가 받은 은총과 신뢰, 사랑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다시 한 번 내 존재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의 장이 되길 바란다. 내 삶에는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인생에 큰 학습의 기회가 됐다.
첫 번째는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3·8선을 넘으면서 인민군에게 붙잡혔지만 천사 같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일이다. 이 일로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일찌감치 감지했다.
두 번째는 건강을 자신하다가 뜻하지 않게 수술을 받은 일이다. 이 경험은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여서 언제든 깨지고 금이 갈 수 있음을 절감케 했다. 그래서 부서지고 깨지고 금간 것은 생명의 손길로 싸매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재창조 안에서만 온전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은 2002년 여름에 불어닥친 청문회 돌풍이다. 이때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삶에 대해 한없이 진솔해지는 경험을 했다. 자신의 전부인양 소중히 여겼던 명예나 체면, 자존심은 어느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인정하느냐에 의존하는 삶은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것은 신앙인에게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내게 신앙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는 훈련과 단련이 필요하다고 여기셨다고 믿는다. 청문회 돌풍까지 포함한 모든 나의 삶 속엔 하나님의 선물인 엄청난 은총이 있었고, 그 은총의 통로가 된 사랑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전혀 투정할 수 없다.
생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에 철들면서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질문은 선물을 주신 자에게 그 주신 뜻을 묻는 것이었다. "내 필생의 사업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젊은 날부터 오늘날까지 나를 사로잡았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며 학문과 삶이 일치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수학과에 들어온 후 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기도 했다.
내일을 꿈꾸는 사람은 영원히 젊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난 꿈을 꾸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바람이 씽씽 불어대는 큰길 가에 있었다. 기차를 바라보며 아득한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떠남에 대한 불안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 겹쳤다. '저 기차를 타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세상은 참으로 넓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과도 가깝고 신의주와도 가까운 북쪽 지방이어서 겨울이 무척 추웠던 곳. 그러나 따뜻하고 서정적인 추억을 갖게 해준 내 유년의 아름다운 장소는 그리운 고향 평안북도 용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1939년 태어났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 [역경의 열매] 장상 (1) 70년 삶 한약 보자기에 짜면 '감사' 두 글자 떨어질
* [역경의 열매] 장상 (2) 압록강변 삭풍 몰아쳐도 어머니 따라 새벽기도
* [역경의 열매] 장상 (3) 38선 넘다 산속에서 인민군 만나 기겁
* [역경의 열매] 장상 (4) 황해도 아주머니 도움으로 총살 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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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1939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 △이화여대 수학과 △연세대 신학과 △예일대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약학 박사 △이화여대 총장, 국무총리 서리 △현 민주당 최고위원
***[역경의 열매] 장상 (2) 압록강변 삭풍 몰아쳐도 어머니 따라 새벽기도
"아들이 아니면 어떻습네까? 춘향이같이 희고 예쁘기만 한데."
어머니는 산파의 아들이 아니라 딸이란 말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아기를 발길로 냅다 차고 홱 돌아누우셨다고 한다. 아기는 오돌오돌 떨다가 감기에 걸렸고, 어머니는 그날부터 음식을 안 드셨단다. 산모가 밥을 먹지 않으니 젖이 나올 리 없었다. 어머니는 혼인 10년 만에 언니 란을 낳고, 다시 10년 후에 나를 낳으신 것이다.
산모가 아기를 나몰라라 한다는 소문이 친할머니에게까지 전해졌다. 할머니는 평북 선천에서 선교사를 만나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이다. 할머니는 불같이 호통을 치시며 넷째 아들집 대문을 열어젖히셨다.
"넷째 듣거라. 아무렴 네가 하나님 선물을 뭘 이러캉 말캉 하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머니는 그제야 하나님께 자식 선물을 달라고 10년을 기도해놓고 아들이 아니라고 투정하는 것에 가책을 느끼셨다. 이 이야기는 이미 열살이었던 언니에게 전해 들은 것이다. 할머니는 기도가 생활이셨다. 개천의 좁은 다리를 건널 때 내가 겁을 내면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뭐가 겁나간"하시며 먼저 걸어가셨다. 할머니의 별명은 '띠띠 할머니'였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후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그 옛날 할머니가 이미 심오한 신학을 터득하고 계셨다는 것에 놀라곤 했다. '생명이란 모두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가르침이 인생의 긴 여정을 헤쳐오면서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내 속에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라'고 쩌렁쩌렁 소리치시는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한 분이었다. 일본에 유학해 영문학을 공부한 인텔리였지만 학문보다 낭만적인 일에 관심이 더 많으셨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어떤 영상도 떠올릴 수가 없다.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되던 해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무래도 나는 일찍 어른 세계에 들어섰던 것 같다. 언니는 이미 커서 서울에 가 있었기에 어머니는 내게 참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이미 나는 아버지 없이 살아야 하기에 아끼고 저축해야 한다는 아이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몇 번 이사를 했는데 용암포 정거장 근처에 살던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용암포에 있는 중앙교회에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나가 놀 수도 없는 추운 겨울 새벽, 어머니의 기척을 느끼면 잠이 깬 채로 누워 갈등했다. 혼자 있기는 무섭고 매서운 새벽 바람을 맞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온몸을 털옷으로 뚤뚤 말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겨울 압록강변의 바람은 정말 매섭고 차가웠다. 교회에 가선 엄마 품에서 실컷 자다가 오는 것이 내 겨울날 새벽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낭비하는 것을 죄악이라 여기셨는데 알뜰하게 돈을 모아서 오로지 두 딸 교육에만 쓰셨다. 언니를 서울로 유학시켜 진명학교에 다니게 했고 감리교신학대학에도 보냈다. 어머니는 딸들 공부를 위해 연백평야에 땅까지 사두셨다. 하지만 전쟁이 나고 휴전이 된 후 그 땅은 갈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어머니가 월남을 결심하신 것은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 살기 위험해진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딸의 공부도 염두에 두셨다.
신앙으로 교육하신 어머니는 늘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성실하게 다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열심히 배우면서 살라고 가르치셨다.
***[역경의 열매] 장상 (3) 38선 넘다 산속에서 인민군 만나 기겁
어머니는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보다 사람은 큰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과거와 현재의 어려움에 눈물 흘리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괴로워하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잘 웃는 나는 힘든 상황에도 내일은 멋있을 거라 꿈꾸며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얼굴을 보고 어려웠던 초년 시절을 짐작하는 이는 드물다.
1947년 봄. 유년의 뜰을 떠나 긴 여행이 시작된 해이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의 어린 나는 어머니와 함께 헤쳐가야 할 험난한 인생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패망하고 러시아와 공산당이 기세를 펴기 시작했지만 얼마 동안은 38선을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들어서자 38선을 넘으려면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모녀는 언니가 있는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항상 바라보기만 하던 기차에 올랐다.
38선을 무사히 넘으려면 위장을 해야 했다. 우린 빨래터에 가는 모녀처럼 굴기로 했다. 어머니는 빨랫감처럼 보이는 옷 보따리 하나를 들고 계셨고 나는 성경 찬송가 보따리만 들었다. 우리가 전혀 빨래하러 가는 모녀같지 않아 불안했다. 빨래하러 가는 딸에게 세일러복을 입히고 성경 찬송까지 들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고지식하고 거짓말이라곤 할 줄 모르는 분이라 제대로 위장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편이라 우리는 산길에 익숙한 안내자를 자꾸 놓쳤다. 안내자는 몇 번 "빨리 따라오라우!" 재촉하더니 어디선가 우리 모녀를 두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어머니와 나는 방향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산길을 헤맸다.
"거기 누구요?"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산짐승을 만난 것보다 더 기겁했는데, 나무를 헤치더니 길고 검은 총을 든 세 남자가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인민군이었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끌려 막사로 갔다. 빨래터에 간다고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그걸 믿을 리가 없어 보였다. 인민군과 관련된 잔인하고 무서운 소문을 전해 들은 터라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어데 가나요?"
인민군 중 하나가 어머니를 쏘아보며 물었다. 번갯불이 번쩍 하는 것 같았다. '엄마…빨래터…' 나는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어머니를 쿡쿡 찔러댔다. 어머니는 당황하지도 않고 똑바로 인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남에 갑네다."
어머니 대답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져 눈을 감아 버렸다. 이미 어른스러워진 내게 어머니는 너무나 철없는 사람 같았다.
"이남엔 왜 갑니까?"
어머니 대답에 흥미를 느낀 인민군이 다시 물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입네다."
나는 어머니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흐트러짐 없이 당당했던 것이다. 인민군들이 저희끼리 시선을 주고 받았다. 이 아낙이 왜 이렇게 겁이 없는가 하는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살려면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민군에게 뒷간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는 움막 같은 뒷간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더러운 곳에서 기도해서 죄송해요. 저희를 살려주세요."
온몸과 맘을 다해 간절히 기도했다. 뒷간 옆 짚더미 위에 시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도망쳐야겠는데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걷기도 힘들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4) 황해도 아주머니 도움으로 총살 모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돌아오니 인민군 셋이 여전히 어머니를 가운데 세우고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한 마을 아주머니가 먹을 것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초막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것이 참 안됐다며 혀를 차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점심 광주리를 인민군에게 건넸다.
"저 사람들 처치하고 나면 밥맛 없을 테니, 그냥 보내는 것이 어떻갔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죽여봤자 뭐하갔소. 그냥 보내주면 내 오후에 중참을 더 가져오리다."
인민군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더니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오라우. 이남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테니."
어머니와 나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 인민군이 앞서고 그 뒤를 우리가 따랐다. 우리 뒤엔 총을 든 두 명이 있었다. 호위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포로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월남하던 때가 화창한 봄날이었음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곧 두 갈래 길을 만났다. 하나는 러시아 공산당들이 지키는 길이고, 하나는 남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가기만 하면 된다고 인민군이 말해 주었다. 가시철망에 빨간 헝겊과 흰 헝겊이 걸려 있었다. 그 철망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논두렁을 따라가면 피란민 수용소에 닿는다고 일러주었다.
그들이 등 뒤에서 총을 쏠것 같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통수가 쭈뼛 섰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성경 속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기둥이 되거나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등에 총을 쏘지 않았다. 왜 인민군들이 우리 모녀를 죽이지 않고 3·8선까지 데려다 주었는지 지금도 설명할 길이 없다. 어머니가 당당히 대처하지 않고 각본대로 빨래터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황해도 아주머니는 모녀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따뜻한 모성을 지닌 천사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모녀가 인민군에게 붙잡히고도 삼팔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임진강과 연평도를 통해 월남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인민군에게 잡히거나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어머니는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후로 어머니 기도엔 "삼팔선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이란 말씀이 보태졌다. 나 또한 삼팔선에서 살아나온 것이 지금도 하나님이 도우신 구원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작정 38선을 넘어왔지만 언니를 찾을 길이 막막했다. 어머니는 언니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미군정청 근처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군정청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감리교신학교에 다니는 장란을 아느냐고 물었다. 장란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일이다. 모녀는 어렵게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는 작은 고모네를 찾았다. 다음날 아침, 언니가 고모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어머니와 두 딸은 기뻐서 얼싸 안고 울었다.
피란민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지만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한글과 구구단을 가르쳐서 성경은 줄줄 읽을 수 있었다. 9월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난 후에 삼광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후 졸업할 때까지 초등학교를 네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5) 홀로 남겨졌던 유년기… 나를 일찍 철들게 해
후암동 버스 종점의 산동네 해방촌에 산 적이 있다. 이북에서 온 피란민들이 판자촌을 이룬 곳이었다. 당시에는 풍로에 밥을 했는데 어머니는 숯과 불쏘시개가 없어서 무척 힘들어하셨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아이들이 딱지 치기 하는 것을 발견했다. 불쏘시개로 두툼한 딱지만큼 좋은 것이 없어 보였다. 하루종일 딱지 치는 연습을 하고 해방촌 딱지 놀이판에 뛰어들었다. 내가 딱지를 모조리 쓸어가자 어안이 벙벙해하던 아이들의 얼굴들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큰 시련이 다가왔다. 언니가 장위동 근처의 연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 언니를 따라 이사를 갔다. 당시 장위동은 서울 밖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오동나무를 끓인 물을 먹이는 등 온갖 민간요법을 써보았지만 언니는 누워서 지내야 할 정도로 아팠다. 위병에서 위궤양으로 넘어가더니 나중엔 병이 악화돼 위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언니가 한 달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했다.
"상아, 언니의 병을 치료해서 꼭 돌아올테니 잠시만 너 혼자 지내야겠다."
어머니는 위독한 언니를 데리고 황급히 서울로 떠나셨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픈 언니를 챙기시느라 어린 나는 안중에도 없으셨다. 곧 온다던 어머니는 여러 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언니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쯤 돌아올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혼자 버려졌다. 아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학교 친구인 박길남네 집 제일 끝방에 살고 있었다. 만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나는 잠잘 때면 무서워서 푹푹 찌는 여름에도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기도하다 잠들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기쁘게 해드리려고 공부를 열심히 해 2학년을 마치며 1등 성적표를 받았다. 학기 중엔 학교 선생님들이 돌봐주기도 했는데 여름방학이 되면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눈만 뜨면 학교로 가서 하루종일 운동장을 헤매다가 정거장에 나가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다음번 도착하는 기차에 어머니가 꼭 타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유년의 아픈 기억이 기찻길 위에 있어 지금도 기찻길을 보면 공연히 마음이 스산해진다.
곧 쌀과 먹을 것이 바닥나고 말았다. 박길남의 어머니가 먹을 것을 주기도 했지만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운동장에 나갔다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운동장에 놀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난 선생님의 동생이었고, 키가 웃자라서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국어책을 읽어주고 산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런 학교놀이를 무척 재미있어 했다. 날이 갈수록 애들이 늘어났고 나중엔 동네 아이들이 전부 모여들 정도로 학교놀이는 인기였다. 그때 어렴풋이 내가 가르치는 일을 잘할 수 있고 즐긴다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선생 노릇을 하며 아이들에게 집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가난한 동네였기에 쌀은 가져오지 못해도 감자 옥수수 가지 오이 등을 가져왔다. 그렇게 혼자 남겨져 살아남으려고 고심하던 그 순간들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길어야 서너 달이었겠지만 어린 내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나는 한순간에 철이 들어버렸다. 이미 사람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 고독한 존재이며 혼자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장상 (6) 말기암 언니 치유 기적 이후 내 신앙·신학에 커다란 영향
오지 않는 어머니와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린 내게 힘겨웠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때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식이 아플 때 죽음을 경험하는 부모의 심정, 그걸 알고 난 뒤에야 열 살 때 홀로 남겨졌던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성적이 좋아 4학년으로 월반한 뒤 드디어 어머니가 오셨다. 언니 병이 호전되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얼마나 간절히 언니의 병을 고치기 바라셨고, 그를 위해 동분서주하셨는지 알았기 때문에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언니는 나보다 열 살이 많으니 스무 살이었다.
어머니가 언니 치료를 위해 애쓰시던 때, 광복 후 첫번째 삼각산 집회가 제일기도원에서 열렸다. 어머니는 언니를 집회에 데리고 가셨다. 그곳에서 언니는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유의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언니가 말기암에서 치유된 사건은 나의 신앙과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언니는 결혼해 자녀를 일곱이나 두었고 중학교 수학 선생인 형부의 박봉으로 일곱 자녀를 교육하기 어려워 일찍이 브라질로 이민을 갔고 지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5학년에 올라가 반장 선거를 하는 날이었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이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를 반장으로 지목하셨다. 나는 당연히 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애가 반장이 되고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선생님, 왜 여학생이 반장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진지하게 묻자 선생님은 "공부는 상이가 잘하지만 쟤는 기운이 더 세다. 청소할 때나 아이들을 대할 때는 그 아이가 더 잘할 거다. 그 대신 너는 반장을 머리로 이기면 되지 않겠니?"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뿐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절실하게 인식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교육 받을 기회가 있지만 당시는 달랐다.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오로지 공부를 통해 삶을 해결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학교와 사회가 학비도 받지 않고 오히려 장학금을 주며 돌봐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게 늘 입버릇처럼 당부하셨다. "사회가 널 키웠으니 나중에 크면 사회에 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게는 공부가 낙이고 가장 좋은 놀이였으며 취미였다.
6·25전쟁이 나자 다시 학교 교육이 중단됐다. 일제와 해방정국 신탁통치로 이어지는 혼란시대를 살아왔어도 6·25전쟁이 가장 살벌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연천으로, 대구로 그리고 대전으로, 다시 서울로…. 피란살이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살아남는 것이 가장 큰 문제여서 어머니는 땅콩장사, 포도장사를 하는가 하면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그런 와중에 숙명여중에 들어가던 때의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대와 흥분 가운데 시작된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서울에서 잘 자란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란을 다니며 판잣집을 전전하던 나와 서울의 숙명여중 아이들은 전혀 달랐다. 나는 새 교복을 맞출 돈이 없어 치마는 남대문 구제품 가게에 가서 비슷한 모양으로 적당한 것을 고르고, 블라우스는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다. 교복은 숙명의 것과 비교해서 옷감과 색감이 모두 처졌다.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영 딴판이었다. 말끔해 보이던 그 교복이 숙명여중에 가자 졸지에 초라한 옷이 되어 버렸다. 다른 아이들의 하얀 포플린 깃과 잘 맞는 스커트는 참 예뻤다. 어머니가 밀가루 포대를 양잿물에 여러 번 삶아 만드신 블라우스니 친구들의 하얀 포플린 블라우스와 비교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때부터 내가 좀 더 예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장상 (7) 숙명여중 수석졸업 영광… 낡은 교복에 고민
숙명여중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서울시장상을 받게 되었을 때 교감선생님이 부르셨다.
"상이야. 그날 손님도 많이 오실텐데, 그 교복 말이다. 새로 해 입을 수 없겠니?"
남대문 구제품 가게에서 사 입은 옷이 졸업할 무렵에는 낡기까지 해 더욱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 든 옷이었다.
"이 옷 입고 공부했으니 이대로 졸업하고 싶어요. 선생님."
"그렇겠지."
교감선생님이 미안해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담임선생님이 졸업식 전날 줄 선물이 있으니 내일 일찍 오라고 하셨다. 다음날 여느 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학교에 갔다. '무슨 선물일까?' 선생님은 숙명학생들이 신는 자주색 새 양말과 돈을 주시며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오라고 하셨다. 그 시절 난 형부가 신던 양말을 줄여서 신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어느새 예쁜 여학생이 돼 있었다. 목덜미가 상쾌했다. 선생님은 이발하고 돌아온 나를 기숙사로 데리고 갔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선배가 자기가 입던 교복을 들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 교복 누구 줄까 했는데 네 키가 커서 내 옷이 잘 맞을 것 같네. 한번 입어보렴."
선배 언니는 다정하게 옷을 건네주었다. 나이에 비해 덩치가 커서 그랬는지 언니 말대로 옷이 딱 맞았다. 그 교복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내가 큰 상을 받는다고 좋아하시던 어머니와 언니는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등교할 때와 딴판으로 완전히 산뜻한 여학생으로 변신해 있어 깜짝 놀라셨다. 옷이 날개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언제나 미소로 떠올려지는 즐겁고 행복한 날이다.
숙명여고에 입학한 뒤에도 좋은 날이 계속됐다.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 걱정을 안해도 되니 학교 다닐 맛이 났다. 내가 웃음을 잘 터뜨리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태어난 것은 참 다행이었다. 부질없는 염려를 길게 하지 않고 마음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편안한 성격이다. '밝고 다숩고 씩씩하게'란 숙명의 교훈처럼 나는 더욱 밝고 다숩고 씩씩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것이 바로 학교 그리고 교회와 신앙이었다.
인간적인 것에 기준을 두면 부럽고 욕심이 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신앙인에게 하나님의 기준이 더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통해 그와 같은 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한 셈이다. 하나님은 돈 많은 사람을 더 예뻐하고 돈이 적은 사람을 홀대하지 않는 공평하신 분이라고 확신했다. 신앙은 맘을 풍요롭게 했고 그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새벽길을 걸어 교회에 가서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열심히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뒤 학교로 향했다. 아침에 기도를 하면 마음이 다져져서 그날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태어나는 환경은 선택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랏님이라도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릴 수는 없다. 하루는 더도 덜도 없이 24시간인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교회에 들러 잠시 기도했다. 하나님께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일과를 마친 뒤 보고하는 셈이었다. 그것은 고3까지 계속되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8) 대학 3학년 때 4·19혁명 계기 신학도의 길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교감선생님이 부르셨다. 이화여대 수학과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줄 뿐 아니라 대학원에도 보내주고 후에 교수로 채용할 것이라고 했다. 수학을 잘하는 내게 그 이상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이화여대 수학과 58학번.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싱싱하고 풋풋하게 기억되는 젊은날들이 있다. 내겐 대학 시절이 바로 그렇다. 어머니는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로 늙으셨고, 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관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확고한 신념 없이 밀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수학과에 진학했지만 이화여대에 오자 그곳이 여성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임을 알았다.
이화여대에 메이퀸 축제라는 것이 있었다. 해마다 개교기념일 행사에 맞춰 퀸을 뽑았다. 메이퀸이 되려면 외모뿐 아니라 키는 160㎝ 이상이어야 하고 성적도 우수하고 신앙이 돈독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했다. 각 과에서 먼저 학과 퀸을 뽑은 뒤 거기서 대학 전체의 메이퀸을 선발했다. 수학과 퀸을 뽑는 날 일찌감치 집으로 갔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내가 수학과 퀸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해서 어리둥절했다. 얼마 후 5월31일 메이퀸이 중심이 된 행렬에 섰다. 친구들이 그냥 나가면 수학과 망신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화장도 하고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나갔다. 쑥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던 현영학 교수님은 "깜짝 놀랐네. 상이도 가꾸니까 괜찮네"라고 하셨다. 그날 친구들은 너무나 재미있어했고 나만 몸둘 바를 몰랐다. 지금도 그 기억은 장난스럽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 시절 YWCA 활동은 부전공과 같았다. YWCA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국제적 여성 단체였다. 방학이면 '상록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4년 대학 시절 여덟번의 방학 중에 일곱번을 농촌 계몽을 가거나 전도를 다녔다. YWCA를 중심으로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직업과 삶의 철학이 일치되기를 바랐다.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항상 내 필생의 사업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의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라고 나 자신에게 묻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대학 3학년 때 일어난 4·19혁명이 내게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에 대한 관심도 키워갈 때였다. 신촌에서 돈암동 집을 향해 걸었다. 종로5가쯤 다다랐을 때 총성이 들렸다. 가슴이 아팠다. "아! 하나님. 이 나라의 젊은이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근처 교회로 들어갔다. 오랜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려니 비상계엄령이 선포돼 통행이 금지됐다. 다시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캄캄한 밤을 지샜다. 당시 나의 기도와 고민의 주제는 '민족과 신학'이었다. 철야기도하는 동안 수많은 고민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주님. 제가 신학을 하길 원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도 바울을 부르시듯 저를 붙잡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사실 내가 신학 공부를 망설인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학비 문제였다. 긴 밤의 뜨거운 기도 끝에 새벽이 밝아올 즈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너 언제는 돈 쌓아놓고 공부했니?" 그날 이후 모든 고민을 접었다. 비록 앞길이 막연해보여도 신학의 길로 가고 다음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9) “섬기는 법 배우라” 기숙사 사감으로
수학과를 졸업한 뒤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수학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폭 넓게 배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수학과 수석은 물론 사범대 수석도 지켜냈다. 수학과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였다. 도리어 학부에서 수학을 공부한 것이 훗날 신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사고를 갖게 했다.
많은 사람이 공부하면서 장학금 혜택을 받지만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장학금은 엄청난 은총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시절을 거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언제나 장학금을 받았다. 이화여대에 입학할 때 전학년 수학과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3학년에 올라가면서 신학을 하기로 결심한 뒤 수학과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수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고 장학금은 마땅히 수학을 계속할 학생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화여대를 졸업하는 날 당시 학과장이신 송옥형 교수님이 부르셨다. 송 교수님은 책상 서랍에서 통장을 하나 꺼내 건네셨다.
"무슨 통장이에요?"
"그 통장에 3, 4학년 네 학기 동안의 네 장학금을 저금해 두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네가 수학과에 온 것은 성적이 우수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너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네가 수학 공부를 계속하지 않는다 해도 과의 약속은 변할 수 없는 거 아니겠니?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구나."
그 장학금은 우수한 학생을 수학과에 유치하기 위해 수학과 교수 4명이 자신의 월급을 헐어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수학과에서 주는 장학금 외에 특대생 장학금과 문교부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학생과의 처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학금을 저축했다가 다시 주시다니 그때 감격은 잊을 수 없다. 장학금은 배움을 지속하게 해주는 선한 뜻과 선한 손길을 받는 영광이자 축복이며 책임으로 느껴졌다. '그 선물이 지닌 선한 뜻과 선한 손길이 헛되지 않도록 평생을 감사하며 살 것'을 하나님께 약속 드렸다.
신학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었다.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에 1주일 동안 농촌계몽 활동을 갔다 오니 전보가 놓여 있었다. '장상 기숙사 사감으로 발령'. 한번도 사감이 되겠다고 생각한 일이 없기에 놀랐다. 기숙사는 학생처 소관이어서 학생처장을 찾아갔는데 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총장실로 가보라고 했다.
"장상 들어와."
김옥길 총장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교수님, 저는 사감을 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 알지. 너는 신학공부 하고 싶어하지. 그러나 하나님을 공부할 사람은 인간 섬기는 법부터 배워야 해. 기숙사에 종교 담당 사감이 필요한데 네가 가서 해봐."
결국 예정에 없던 기숙사 사감으로 2년이나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예상치 않던 기숙사 사감 생활을 마치고 그토록 가고 싶던 신학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숙사 사감으로 지낸 시간은 훗날 내게 보상을 해주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기숙사 사감 경력을 인정받아 몇 년간 기숙사 카운슬러로 일할 수 있었고, 박사과정 학비와 생활 공간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은 멀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장상 (10) 신과대 편입시험날 박준서와 첫 만남
연세대학 신과대에 학사 편입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한 교수님을 만나러 갔더니 "서울 법대 나온 눈이 똑바로 박힌 남학생이 온다네"하며 '똑바로'를 강조하셨다. '누군 눈이 삐뚤게 박혔나?' 내심 교수님이 남학생을 선호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편입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어떤 남학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신과대가 있는 언덕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걸어 내려갔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신과대학이 어느 건물입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신과대학 건물을 가리켰다. 그가 꾸벅 인사를 하고 헐레벌떡 뛰어 올라갔다. 다행히 늦게 온 그에게도 시험 볼 기회가 주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눈이 똑바로 박혔다'는 박준서란 사람이었다. 편입한 친구들은 여학생 2명과 남학생 6명이었다. 오랜 시간 열망하고 기다리던 신학공부였기에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동기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남자 동기생들과도 잘 지냈다. 그들은 지성인인 동시에 신사였고 모두 소탈하고 착했다. 박준서도 솔직하고 소박한 친구였다. 신학에 관심을 갖고 신학자가 되길 간절히 꿈꾸는 동지를 만난 것이 즐거웠다.
난 신앙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배웠다. 또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존재이며,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나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교회와 학교의 어른들로부터 참 많은 선물을 받았다. 사랑과 신뢰….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런 이유로 한 번도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뭘'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랑과 신뢰를 자양분으로 곧게 자랄 수 있었다. 언제나 당당했고 그로 인해 원래의 나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나를 키워준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은 꿈을 이루는 것뿐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
"늘 그랬듯 맨손인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가진 것이 없으니 무엇을 잃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
1966년 미국의 10개 대학에 원서를 냈다. 김활란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당신 생각보다 간이 부었어." 내가 명문대만 뽑은 걸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선생님은 학교 목록을 죽 보시더니 웃으며 추천서를 써주셨다. 그 덕에 10군데에서 입학 허가서가 날아왔다. 예일대학 신학대학원의 장학금이 가장 좋아서 그곳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홀로 계셔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웠다. 유학을 앞두고 여비도 마련하고 혼자 남을 어머니 생활비도 준비해야 했기에 하루에 세 군데에서 가정교사를 했다. 새벽 5시 원남동에서 가르치고, 오전에 다락방 일을 하고, 점심에는 명동에서 가르치고, 다시 다락방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 연희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당시 교파를 초월한 선교단체인 다락방전도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뒤부터 어머니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매일 밤 자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연로하신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67년 김포공항을 떠나며 내가 이화여대에서 받은 큰 은혜를 돌아와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7년 만에 돌아오마 하고 떠난 유학길은 10년 가까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11) 박준서의 은근한 애정공세 내 마음 움직여
"미스 장은 남자친구는 많은 것 같은데 좀 알아보니 실속은 없더군요."
어느 날 연세대 교정에서 그런 말을 툭 던진 남학생이 있었다. 나의 좋은 친구 박준서였다. 웃어넘겼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매너가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 특유의 순수함이 은근한 매력이었다. 마치 학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고 세상의 보통 남자들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면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하던 때에 신학을 선택한 것도 특이했다.
"왜 사법시험 안 보고 신학을 해요?"
그런 질문을 지겹게 받았을 텐데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는 건 저랑 별로 안 맞는 일입니다. 법관이 되는 게 저한테는 좋아 보이지도 않구요"하며 소탈하게 대답했다. 그가 내게 특별하게 잘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다. 섬세한 성격이었고 나와는 좀 반대였다. 후에야 그가 내게 관심을 많이 표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채기 시작했다.
"미스 장에게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틸리히 좋아하시죠?"
그는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책 세 권을 내밀었다. 원서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책값도 비싸던 때였다. 우리는 지금 고인이 되신 서남동 교수의 조직신학 강의를 듣고 있었고 마침 틸리히의 신학을 공부하던 참이었다. 그 책이 갖고 싶었지만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미스터 박, 미안해요. 너무 비싼 거라 받을 수 없네요."
그런데 그가 극구 받으라고 우겼다. 꽤 고집이 있는 사람 같았다. 할 수 없어 한 권만 갖겠다고 했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언젠가 합쳐질테니까."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혹시 내게 관심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을 뿐이었다. 남학생들은 대체로 두 종류였다. 나를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거나 아니면 골탕 먹이려 하거나. 그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듯했다. 그에게 호감이 갔으나 애써 외면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는 서울 토박이로 유복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이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가 예일대 신학대학원의 입학허가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속으로 '어머, 나도 보냈는데' 하고 신기해했다. 그후 내게도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운명이란 느낌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저 낯선 미국 땅에 좋은 동료 하나 있으니 든든하다는 생각에 머물려고 했다. "너 박준서 때문에 예일대에 가는 거 아냐?" 친구가 놀렸을 때 깜짝 놀라는 자신이 쑥스러웠다.
그 박준서와는 미국 뉴헤이븐에서 재회했다. 예일대 신학대학원에 나보다 1년 먼저 유학 온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생활에 의문이 생기면 언제나 그가 조언해주었고 친구로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와 인연이 많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항상 내가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있었다.
미국 유학을 가기 전 그의 집을 방문했다. 보낼 것이 있으면 전해주려는 마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때 나를 혹시 며느리 될 사람이 아닐까 하며 유심히 관찰하셨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미국에 홀로 공부하는 아들 곁으로 젊은 여자가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 혹시 인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몇년 후 아들이 장상이란 여학생과 결혼하겠다고 알렸을 때 놀라지도 않고 허락하셨던 것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장상 (12) 예일대서 시험문제 오류 지적… 교수 “네가 옳다”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예일대학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게임이 시작됐다.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기숙사의 창이 큰 독방을 배정받았다. 사과 궤짝 위에서 공부하던 내게 근사한 책상이 생긴 것이다. 첫날 그 널찍한 책상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하니 정말 미국에 온 실감이 났다.
첫날의 기쁨도 잠시, 곧 미국에서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며 공부하고, 낮이면 눈에 불을 켜고 수업을 들었다. 또 오후엔 도서관에서 밤 늦도록 공부했다. 공부하는 순간의 충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수학이 큰 힘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수학 공부가 신학에 많은 도움이 됐다. 수학적 지식은 다 잊어도 그걸 통해 키워진 논리적 사고는 확실히 보탬이 됐다. 조직신학 시험을 치를 때였다. 24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해 교수에게 제출하는 테이크 홈 시험이었다.
경제적 빈곤 문제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주제로 하는 긴 문제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이상했다. 문제를 읽고 또 읽었다. 문제 자체가 논리에 벗어났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문제에 맞는 답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오류였다. 내가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가란 생각도 했다. 박사과정의 조교를 찾아가 "문제가 아무래도 논리에 맞지 않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조교는 맹랑한 학생이라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되묻는데 자신이 없어서 대답도 못하고 돌아왔다. 며칠 후 윌리엄스 교수가 나를 불렀다. 큰일났구나. 마음을 졸이며 교수를 찾아갔다.
"미안하다. 네가 옳았다. 내 문제에 잘못된 부분이 있더구나."
연구실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자 윌리엄스 교수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선뜻 인정하는 교수가 그렇게 신선해보일 수 없었다.
"모국어도 아닌데 질문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찾아내다니 참 놀랍구나. 네게 A를 주겠다. 너를 지켜보겠다."
수학 덕을 본 일은 또 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윌리엄 머독 교수의 공관복음 세미나에서 최근 나온 논문을 비평하는 시간이었다. 신학계에서 손꼽히는 하버드 신학 리뷰 논문을 읽다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논문은 공관복음서 설교에 대해 통계적 접근을 시도한 것인데 내 눈에 띈 것은 역시 통계였다. 그 논문은 잘못된 방법으로 통계를 내고 그것에 근거해 가설을 증명하고 있었다.
열심히 준비해 드디어 발표 날을 맞았다. 그 수업은 프린스턴대 종교학과 학생들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공동 세미나였다. 여학생은 나 혼자였다. 내가 논문의 오류를 지적하자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저 동양 여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분위기였다. 머독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머독 교수는 자신 있으면 반박 논문을 써보라고 했다. 교수는 내 반박 논문을 하버드 신학 리뷰에 게재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호에 세미나에서 내가 지적한 대로 그 논문의 오류를 밝힌 다른 학자의 논문이 실렸다. 그 일로 나는 미국 교수와 동료 대학원생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다. 아시아 여자여서 처음엔 평가절하 대상이 되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처신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터득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13) 나홀로 새벽기도… “정신 이상” 소문에 곤혹
미국적인 신앙생활과 한국적인 신앙생활엔 차이가 있었다. 새벽기도를 하는 습관이 있던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예배실인 마퀸드 채플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곤 했다.
예배실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버룻이 있는 난 그렇게 해야 상쾌한 느낌으로 하루를 맞을 수 있었다. 혼자 채플에 앉아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성경을 읽기도 하고 소리 내어 기도도 했다. 그런데 청소부가 동양 여학생이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는 소문을 냈다. 그후 기숙사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에 예배 장소는 상관없었다.
미국 대학에선 재벌가의 자녀라도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 모두 헐렁하게 입고 온 종일 공부한다. 그들이 말끔해지는 날은 시험이 끝났거나 특별한 교내 파티가 있을 때였다. 물론 한심하게 파티만 하는 학생들도 없진 않았지만 미국을 이끌어가는 건 소수의 공부벌레들이었다. 내가 가진 자부심과 자신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매일 자극을 받았다. 우선 학습량이 어마어마했다. 학문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기쁨과 고충을 완벽하게 맛보는 3년을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보냈다.
'내 인생에 학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학교로부터 등록금 전액과 얼마간의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받는 장학금은 빠듯했지만 그래도 십일조를 내고 한국의 다락방전도협회와 신암교회에 후원금을 보냈다. 그 돈으로 책도 사야 했고 한국에 있는 어머니께 용돈도 부쳐드려야 했다.
장학금을 절약하며 썼지만 늘 부족했다. 그래서 기회 닿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3년 내내 교내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1969년 여름방학을 마칠 무렵, 3주 동안 살길이 막막했다. 학교 근처의 직업소개소에서 무슨 일이든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예일대학원생이 아무거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다. 소개소에서 일러준 대로 아침 6시 어느 장소로 갔다.
흑인 남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번호표를 받고 미니 버스에 올라탔더니 흑인 남자뿐이었다. 얼마 후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전기제품 부속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내가 배치된 곳은 소켓을 만드는 곳이었고 나는 포장을 맡았다. 동양 사람은 나 하나였다. 몇 초 안에 포장을 완성하지 못하면 작업 라인이 막혀 돌아가지 않았다.
처음엔 서툴러서 애먹었지만 하루 만에 적응이 됐다. 일하면서 평소 버릇대로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그런데 다들 조금씩 따라 하다가 나중에는 다 같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그들과 신명나게 찬송을 부르며 일했다. 점심은 각자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는 시간도 없고 돈도 절약할 셈으로 매일 땅콩 버터를 바른 샌드위치를 준비해 갔다. 어느 날 흑인 여자가 내게 와서 베이컨과 온갖 푸성귀가 든 풍성한 샌드위치를 주었다. 사양했더니 자기가 싸는 김에 2인분씩 가져와 나눠 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인정 많은 고향의 아낙 같았다. 피부색을 초월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3주 후 공장을 떠날 때는 공장 사람들이 파티도 해주고 브로치 선물도 주었다. 그들의 마지막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너는 겨우 3주 하고 가지만 우리는 30년을 여기서 일해야 한다. 네가 부럽다." 그들은 내가 가는 날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다. 3주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14) 1970년 박준서와 결혼… 삶·학문의 동반자 얻어
1969년 크리스마스 방학이었다. 만 서른이 되었다. 학생들은 모두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집으로 가 홀로 기숙사에 남았다. 그해 겨울은 참 외로웠다. 외롭다는 느낌은 사춘기 시절에도 잘 몰랐던 것이다. 친구 바바라는 "상에게 남자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아직도 공부할 것이 까마득히 남았는데…. 만약 결혼을 한다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박준서가 찾아왔다. 함께 캠퍼스를 산책하다 벤치에 앉자 그가 불쑥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을 떠날 때 어머니가 준 사파이어 반지라고 했다. 그의 프러포즈는 갑작스러웠다. 미국에 올 때 갖고 왔다니 오랫동안 간직해온 반지였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싱겁기도 한 프러포즈를 받고 많이 놀랐지만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결혼 문제로 기도하면 할수록 박준서는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배필이란 확신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이런 사람이 있는데 어떡할까요' 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쓰는 것이 멋쩍어 나쁜 조건만 썼다. 어머니의 답장이 날라왔다. "상이 보아라. 너는 내 딸이니까 내가 잘 안다. 너는 공부는 A지만 신붓감으로 B다. 내가 보기에 네가 쓴 불평은 불평이 아닌 것 같다. 나이가 찼으니 결혼하거라." 그의 집에서도 유학 간 아들이 혹 서양 여자와 결혼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이미 서울에서 얼굴을 본 한국 여학생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1970년 8월15일. 우린 예일신학대학원 마퀸드 채플에서 결혼했다. 영원히 함께 갈 가장 믿음직한 친구, 삶과 학문의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당시 난 프린스턴신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남편은 하버드대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할 계획이었다. 9월이 돼 새 학기가 되자 우린 이산가족이 돼야 했다. 남편은 하버드대에 나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2주에 한 번씩 만났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첫 번째 겨울을 맞았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새벽 일찍 출발한 남편에게 연락이 없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 마자 그는 "난 괜찮아"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보스턴 지역에 폭설이 내려 도로가 빙판이 돼 있었는데 커브길을 돌다가 그만 자동차가 미끄러져 도로변 나무를 들이받았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휴지처럼 구겨져 곧장 폐차장으로 보낼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다친 데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얼마나 놀라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일이 있은 후 더 이상 이렇게 오가며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조건 프린스턴으로 합치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이미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구약학으로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결국 남편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으로 왔다.
우리의 진짜 결혼생활이 시작됐다. 신학대학원 내의 하지홀로 이사했다. 그 기숙사는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프린스턴대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의 관계는 그만큼 긴밀하고 오래된 것이다. 그 기숙사는 독신자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주방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끼니 준비에 드는 시간이 아까워서 일부러 부엌이 없는 기숙사를 원했다. 우선 결혼한 학생을 위해선 아파트보다 학생기숙사가 훨씬 싸니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용감한 선택이었지만 그게 시간적으로 훨씬 경제적이란 계산이 나왔다.
***[역경의 열매] 장상 (15) 박사과정 종합시험 앞두고 큰아들 출산
1973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코스워크를 마치고 박사과정의 중요한 관문인 종합시험을 3주 앞두었을 때 큰아들 찬우를 출산했다.
"상이와 준이 어제 인터테스터먼털 보이(Intertestamental boy)를 낳았습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제임스 매코드 총장은 채플 시간에 우리가 아기를 낳은 사실을 알렸다. 구약과 신약시대 사이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르는데, 내가 신약학을 전공하고 남편이 구약학을 전공해서 매코드 총장이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5월18일 출산했는데 시아버지는 한국에서 5월28일 출생신고를 하셨다. 빛날 찬(贊), 도울 우(祐) '찬우'란 이름을 시아버지가 지어 보내주셨다.
아이는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지만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출산 후 이전 생활의 질서는 여지없이 깨졌고 학업은 점점 늦어졌다. 초조함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했다. 조교로 한 클래스의 강의도 맡고 채점을 도우며 클래스의 그룹 토론을 맡아 장학금을 받지만 주말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아이를 키우는데는 깊은 사랑과 정성이 필요했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끝없이 사랑을 주고 만져주고 안아줘야 한다. 그저 기저귀만 갈아주는 것이 육아가 아니다. 관심으로 키워야 하기 때문에 아기에게 자신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남편과 아기 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분담했다. 남편은 낮에 공부하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낮에 아기를 보고 남편이 돌아오면 도서관으로 가서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육아와 공부 외에는 모든 것을 생략하며 살았다.
한때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남편의 지도교수인 앤더슨 교수 집에서 살기도 했다. 앤더슨 교수 부부는 부모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미국에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부부들을 보면 대부분 부인들이 학업을 포기한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 사이에는 남편은 Ph.D. 학위를 받고 부인은 PHT(Push Husband Through·뒤에서 남편이 학위를 받도록 밀어준다는 뜻)를 받는다는 농담이 있다. 남편은 내가 힘들어할 때면 결코 포기하면 안 된다며 느슨해지려는 내 마음을 붙들어주었다.
75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창 바쁠 때 마침 시어머니가 미국으로 오셨다. 오랫동안 편찮으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되시자 미국에 오신 것이다. 시어머니는 그때 64세였으나 현명하고 젊은 사람처럼 감각 있는 분이었다. 시어머니가 만지면 무엇이든 생기 있게 살아났다. 살림이란 단어가 '살리다'의 명사형임을 느끼게 하는 분이셨다. 그때부터 시어머니가 우리 살림을 도맡으셨다. 이때 시작된 시어머니의 살림 주도권은 우리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시어머니가 살림을 맡아주셨기 때문에 논문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는 마음 놓고 학교와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다.
77년 2월 드디어 고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여비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학교 구내서점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이 구내서점은 학생들에게 책을 외상으로 주기도 했다. 우리는 책 욕심이 많아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외상으로 가져다 보았는데 그게 엄청난 빚으로 불어난 것이다. '어떻게 귀국 여비를 마련하지?' 박사학위를 마치기 전에는 학위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장상 (16) 남편,공장 야간 경비 서며 부부 학비 벌어
결혼한 유학생 부부의 경우, 남편이 공부하면 아내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뒷바라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부부가 공부를 했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책임감 강한 남편은 나보다 더 애를 썼다. 남편은 밤에 공장을 지키는 경비원 일을 하기도 했다. 한곳에 앉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큰 공장을 쉬지 않고 걸어다니며 지키는 일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돌아온 남편의 얼굴은 언제나 핼쑥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곧바로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남편을 보면 내가 공부하는 아내인 것이 미안했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자동차는 있어야 했다. 우리가 소유한 자동차는 워낙 값싼 중고차여서 계속 말썽을 부렸다. 겨울이 되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배터리 수명이 다 돼 재충전이 되지 않았다. 기온이 내려가면 영락없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궁리 끝에 남편은 저녁마다 자동차 배터리를 떼내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들고 나가 차에 연결했다. 배터리가 얼지 않아 다행히 시동은 걸렸으나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 배터리값이라야 20달러 정도였을텐데 말이다.
국회 청문회 때 한 국회의원이 물었다. "10년 동안 유학생활을 한 걸 보면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순간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큰 실례가 된다는 것을 그분이 내게 상기시켜 주었다. 유학 시절 돈 없이 공부하던 남편과 내게는 자연히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배었고, 이 습관은 귀국 후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박사학위를 마친 어느 날 귀국여비 문제로 고민하며 큰아들 찬우를 데리고 교정을 걷다가 매코드 총장을 만났다.
"그래 언제 한국에 돌아갈 건가?"
"비행기삯이 비싸서 당분간 힘들 것 같습니다. 필라델피아로 가서 여비를 준비해 돌아가기로 했어요."
우린 간단히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열흘쯤 지난 뒤 난데없이 5000달러짜리 수표가 집으로 날아왔다. 미국 장로교 본부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동화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최근에 우연히 만난 사람 있죠? 아마 그분이 도우셨을 겁니다."
그 순간 산타 복장에 천사 날개를 단 매코드 총장이 떠올랐다. 그분이 5000달러나 되는 큰돈을 교회 기관을 통해 구해 주신 것이다. 우린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구하고 서점에 진 빚을 갚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말처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귀국할 때 한국은 유신정권 말기였다. 당시엔 외국 언론을 통해 한국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라 상황이 더 위태롭게 느껴졌다. 결혼식 때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던 예일대 닐스 달 교수는 귀국을 간곡히 만류했다. 미국에서 가르치다가 상황이 나아지면 귀국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긴 유학 시절에도 언제나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했다. 사람들이 걱정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곳은 여전히 고국입니다. 고국만큼 살 만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게는 10년 동안 학수고대하며 나를 기다리는 친정어머니가 계셨다. 유학생활 동안 기쁜 일이 있거나 내 힘이 약해질 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공부가 끝나는 대로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17) 귀국 직후 정부서 ‘큰아들 국적 정리하라’ 통보
1977년 2월27일 고국 땅을 밟았다. 10년 만에 만나는 딸을 보고 어머니가 눈물을 비치셨을 때 가슴이 메었다. 늘 자기 사는 게 먼저였던 딸. 그러나 귀국하고도 어머니를 모실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전보다 많이 약해지셨고 늙으셨다.
그해 3월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신학을 공부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책을 펴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없는 상황에 강의 준비하랴, 전세 얻어 이사를 하랴, 미국에서 부친 이삿짐은 밀어닥치고 정말 경황이 없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던 때 법무부로부터 1장의 공문이 날아들었다.
'국적정리서약서'였다. 큰아들 찬우는 73년 5월 미국 프린스턴에서 태어났다. 미국은 속지주의를 택하는 나라다. 따라서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이는 누구나 미국 국적을 갖게 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국내나 외국 어디에서 태어나든 대한민국 국적을 갖게 된다. 찬우는 부모는 한국인이고 태어난 곳은 미국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본인이나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중국적자가 된 것이다.
법무부 장관 명의로 된 국적정리서약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위의 사람은 부모가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출생함으로 대한민국 국적과 외국 국적을 동시에 취득하게 된 이중국적자인 바 국내에 체류함에 있어 국적관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향후 2개월 이내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주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명백한 의사 표시를, 외국인으로 거주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 국적 이탈 허가 신청을 이행해 국적 정리를 할 것을 서약하며 만약 기간 내에 이를 정리하지 못할 때는 어떤 조치를 받아도 이의 없음을 서약합니다."
공문 내용은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택이 불가능했다. 미국의 경우 당사자가 18세가 되기 전까지는 본인도 미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고 더구나 부모가 대신 포기시켜 줄 수도 없게 돼 있다. 찬우는 당연히 대한국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적을 포기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2개월 내에 국적 정리를 하지 않으면 어떤 조치를 받아도 이의 없음을 서약하라'는 공문은 77년 유신정권 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우리에게 무척 위압적이었다.
그후 25년이 지난 2002년 7월. 내가 총리서리로 지명을 받자 언론은 아들의 국적을 미국 국적으로 선택해 국가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 국적을 선택한 파렴치한이라고까지 했다. 귀국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정신없이 지내던 때인데 그 공문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네 살짜리 아이의 국적 정리부터 했겠는가? 법무부의 국적정리서약제도는 77년 3월부터 실시하기 시작한 후 1년도 안돼 중단됐다. 미국에서 출생한 18세 이전 사람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한국 국적을 포기하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모순을 발견하고 78년부터 17세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하도록 제도를 바꾼 것이다.
또 다른 문제가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 총리서리가 장남 출생 10일 후에 이미 한국 국적을 포기시켰다는 것이다. 졸지에 난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호적을 보니 우리 아이가 73년 5월18일 출생했고, 10일 후 5월28일 '국적 상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적이 전산화된 후 우리는 호적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줄 몰랐다. 생후 10일 후의 국적 상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루 종일 기자들의 힐문에 곤욕을 치른 남편은 한 가지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전산화되기 전 손으로 쓴 호적 원본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통 집안을 뒤져 수기로 된 구호적등본을 찾아냈다.
거기엔 우리의 기억대로 73년 5월28일 '미합중국 국적 취득'이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에서 출생한 후 서울에 계셨던 시아버님께서 5월28일 출생신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수기로 된 호적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미합중국 국적 취득을 '국적 상실'로 둔갑시킨 것이다. 행정적인 실수였다.
***[역경의 열매] 장상 (18) 든든한 응원자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나로 하여금 신앙과 꿈을 갖고 바르고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훈육하셨다면, 시어머니는 그 에너지를 사회에 쏟게 하셨다.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안정돼 갔다. 나와 남편은 월급을 몽땅 시어머니께 드렸고 시어머니는 그 돈으로 저축을 하고 살림을 꾸리셨다. 시어머니가 나를 적극 밀어주시는 계기가 된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여성신학을 강연했을 때, 그 자리에 이태영 여사가 계셨다. 이 여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강의가 끝나자 이 여사가 내게 오셨다.
"당신 누구요?"
"이화여대에서 강의하는 장상입니다."
"신학의 놀라운 발전이군요. 새로운 인재를 만나 반갑습니다. 지켜보겠소이다."
그 후 YWCA 실행위원회에서 그분을 종종 뵈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가정법률상담소 자원봉사를 가셨다가 이 여사를 만났다고 한다. 이 여사는 장상이 며느리라는 소리를 듣고선 시어머니를 붙잡고 30분 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날 어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너무나 자랑스럽게 한마디 하셨다.
"얘, 너는 이제부터 살림에 절대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마. 사회 나가서 마음껏 일해라."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 조금 전에 이태영 박사를 만났다. 장상은 사회의 큰 일꾼이니 내가 잘 도와주면 그것이 곧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하시더라. 얼마나 열성적으로 말씀하시는지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 그리 말씀 안 하셨어도 네가 능력 있는 거 다 아는데 말이다. 앞치마 이리 내놓아라."
한국에 돌아온 후 시누이 집에 얹혀 살다 다섯 번째 이사한 곳이 이화여대 앞 무궁화아파트였다. 친정어머니를 더 이상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어서 수유리에서 모셔왔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두 아들, 부부가 함께 오밀조밀한 공간에서 복닥거리며 지냈다. 귀국 2년 만에 친정어머니를 모셔왔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대만족이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한집에 사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두 어머니는 한집에서 13년을 친구처럼 지내셨고, 나중에 친정어머니가 3년간이나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의 병시중을 다 해주셨다. 그때 시어머니의 헌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980년대가 되면서 나의 활동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대학원 교학과장 보직을 맡은 상태에서 교내 여러 위원회 위원으로 일했고 학교 밖의 일도 했다. 하루를 48시간처럼 살았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내겐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었다. 그 무렵 세계YWCA와 세계장로교연맹 실행위원과 위원장 자격으로 5대양 6대주를 누볐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언제나 보람이 있었다. 귀국해서 교수가 된 후 가르치는 일이 내 적성에 맞는 직업임을 확인했다. 대학원 교학과장으로 4년 넘게 일한 후 85년 2월에 임기를 마쳤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이젠 연구에 매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즈음 자주 지쳤고 쉽게 피곤을 느꼈다. 종합검진을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교수 한 분이 유방암 수술을 받으셨다. 동료들과 병문안을 갔다. 그분이 우린 모두 40대 중반이니까 유방암에 걸릴 수 있다면서 자가진단을 해보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19) 종양 제거수술… 병상서 되찾은 신앙
집으로 돌아와 교수가 얘기해준 대로 자가진단을 해보았다.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았는데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의 딱딱한 부위가 만져졌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5% 정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6개월간 지켜봅시다"고 말했다. 6개월간 불편한 맘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의사에게 지금 확인해달라고 말했더니 확실한 것을 알려면 오픈을 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오픈하세요"라고 말했다.
1986년 9월2일. 진단을 받은 이틀 후 수술실에 들어갔다. '별거 아니겠지'하면서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수술 후 종양이 초기이긴 하나 악성임을 알았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워낙 초기였고 건강한 체력이기에 종양만 제거한 후 항암치료는 받지 않았다.
병상에서의 시간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매일 짤막한 병상일기를 써가며 삶과 신앙을 성찰했다. 10대에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20대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30대엔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서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쉬지 않고 계속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이 병들면 몸이 병들고,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드는 것이다. 내 영혼이 방향을 상실하고 생명의 샘물을 놓쳐버리고 갈급해 하는 나 자신이 보였다.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이, 길을 잃은 양과 같이 영혼의 갈급함과 방황이 있었다. 몸에 생수와 영양분을 공급하듯 영혼에도 생수와 영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피가 순환되면 몸의 에너지가 통하듯 신앙의 생기가 삶에 흘러야 한다.
어느 날 새벽, 병실에서 누군가 기도하라고 흔드는 것 같아 꿈에서 깨어났다. 또 어느 날은 새벽에 누군가 가슴을 치는 느낌이 있었다. '숙제하는 아이처럼 얻어맞아야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느냐?' 나는 깨어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느꼈다. 몸을 흔드는 느낌, 가슴을 치는 느낌,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병상의 경험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이 아니라 새 세계가 열리는 밝은 느낌이었다.
소중한 것은 역시 신앙이었다. 정직해지는 생의 순간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신앙뿐이었다. 바로소 육체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기쁨을 잃었던 것이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흐느끼면서 기도를 했다. 가장 낮은 몸짓으로 간절하고도 깊은 마음으로 신앙고백을 했다. "… 사랑의 주님, 내 삶은 47세로 끝났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받는 생명은 또 하나의 삶을 위한 새로운 생명이라고 여기겠습니다. 다시 주신 생명에 감사하고 헛되이 살지 않고, 덧없이 살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병은 내 몸에 상처를 남겼지만 아픔이 아닌 은혜의 징표이다. 버려두지 않는다는 은혜의 징표 말이다. 육체의 걸림돌이 신앙의 디딤돌이 되는 순간이었다.
퇴원해서 집에 돌아오니 친정어머니가 "상이, 어디 갔다 오냐?"고 하셨다. 어머니는 딸이 병원에 갔다는 사실도 모르셨다.
"병원에 갔다 왔어요."
"젊은 사람이 무슨 병원에 가넨?"
어머니는 그때 이미 조금씩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내가 회복기를 보낼 무렵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시고 말았다.
***[역경의 열매] 장상 (20) 척추측만증 수술 큰아들 하반신 마비 청천벽력
두 아들과 나는 아들과 어머니 사이라기보다 친구 같았다. 눈높이를 같이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애썼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에서 공부하는 찬우의 자세가 왠지 힘들어 보였다. 자세를 똑바로 하라고 주의를 주면 본인도 노력하는 것 같은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키가 한 해에 10㎝ 이상 쑥쑥 자랄 때였기에 더 걱정됐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찬우의 척추가 S자형으로 휘는 척추측만증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악화된 상태지만 꾸준히 물리치료를 하면 된다고 했다. 찬우는 하교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두 시간씩 물리치료를 받았다. 총명해서 기대를 많이 했던 큰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에 우린 많이 상심했다. 찬우는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수술밖에 길이 없었다.
찬우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1989년에 수술을 했다. 10여 시간에 걸친 힘겨운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 고쳐 본다고 이리저리 다니느라고 병이 더 악화된 것이 모두 내 탓인 듯해 괴로웠다. 엄마가 일을 한답시고 살뜰히 보살피지 못해서 아이가 고통을 겪는다는 자책감은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다행히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했다. 몸을 부딪치는 심한 운동만 하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찬우는 회복실로 옮겨졌지만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의사의 말과 달리 하반신에 마비가 왔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는 것을 찬우도 알고 있었다.
"엄마, 나 마비가 온 거지?"
찬우의 힘없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이 우리를 후려쳤다. '하반신이 마비되다니'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도 없었다.
"찬우야. 너 하나님 믿지?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실 거야."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병원에서 수술을 다시 해야겠다고 했다. 수술과정에 척추신경이 눌린 것 같아 다시 수술해서 풀어야겠다는 것이다. 그 끔찍한 수술을 다시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던 김숙자 전도사님이 기억 났다.
그분은 신유의 은사를 특별히 받으신 분이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오신 김 전도사님은 찬우 다리를 주무르며 오랜 시간 기도를 해 주셨다. 남편과 나 또한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순간 아이의 무릎이 전기가 통한 듯 뜨거웠다. 우리는 그곳을 붙잡고 더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 찬우는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왔다. 그때 우리는 병을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체험했다. 그때의 감격과 감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후 남편과 나의 신앙과 신학은 크게 달라졌다. 우리에게 이 일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적 체험이었다.
남편과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고쳐 주셨다고 믿는다. 자식이 아플 때 부모는 자신이 아플 때보다 더한 통증을 경험한다. 고통스러웠지만 진실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이의 몸을 상하게 했던 병마가 아이의 영혼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회복됐고 우리 가족은 엄청난 시련을 굳건히 이겨냈다. 그 아이의 건강한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심정이다.
***[역경의 열매] 장상 (21) 꿈에서도 내 신앙 채찍질하신 어머니
아이들이 커가니 집이 꽉 차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두 할머니 방을 오가며 잠을 자고 공부를 했다. 누나가 6명인 남편이 외아들이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서 집안 행사가 많았다. 좁은 아파트에 30명이 넘는 가족이 모이면 발디딜 틈도 없는 북새통이었다. 우린 새 집을 마련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시어머니가 살림을 잘해주셔서 무사히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은행가의 아내로 살아오셔서 그런지 시어머니는 은행에 저축하는 것을 최고의 투자로 여기며 살림을 하셨다.
목동의 넓은 아파트로 갈 생각을 하면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동으로 이사갈 날을 잡은 후 예기치 않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몸이 약할 대로 약해진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노환으로 몸져 누우셨고 찬우까지 발병했다. 이런 상황에 나도 수술 후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무궁화아파트에 당분간 더 머무르며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목동아파트를 1년간 전세를 주었고 이듬해 이사해 그곳에서 10년간 살았다. 집안에 우환이 겹쳐 계획했던 이사가 늦어진 것이다. 이사 계획을 세워놓고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늦어지는 경우는 누구나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인데 국무총리 지명 인사청문회에서는 '위장 전입'으로 몰아갔다.
주민등록 이전보다 다소 늦게 이사한 것은 주민등록 허위 신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도 이미 나와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나쁘게 보니 언론과 청문회에서 이것도 위장 전입으로 둔갑되었다. 미분양 상태의 아파트를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투기를 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1년 뒤 목동아파트로 이사 갔을 당시에도 적지 않은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로 비어 있었다.
시간이 어머니를 날로 쇠잔하게 했다. 1904년에 태어나 85년이란 시간을 살아오신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떠나셔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방문을 열고 매일 그랬듯이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어머니 저 학교 갔다 와요." 조용히 아기처럼 쌔근쌔근 주무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은 어느 날보다 편하게 일을 했다. 그런데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누가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이 발이 무거워졌다. 그때 집에서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였다. "어멈아, 빨리 들어와라." 택시를 타고 단숨에 집에 도착하자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어멈아. 몇 분 전에… 가셨다."
'가. 셨. 다….' 나는 그 자리에 무너져 어허허 울었다. 시간은 멈췄고 흐르는 것은 눈물뿐이었다. 발을 잡아당기던 어머니의 손길이 다시 느껴졌다. 언젠가 떠나실 날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멎지 않았다. 어머니께 죄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들은 친정어머니를 모신다고 칭찬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시어머니 편을 드는 딸이었다. 어머니가 떠나시는 날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이 끝까지 제 할 일만 한 딸이라는 자책을 하게 했다.
한동안 어머니가 보고 싶어 꿈에서도 뵙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머니는 평소대로 방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계셨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왜 그렇게 기도를 오래 하세요"라고 물으니 "네가 기도 안 해서 대신하느라 그러지"라고 하셨다. 돌아가셔서까지 어머니가 내 신앙을 채찍질하시는구나 싶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역경의 열매] 장상 (22) 신앙 없었다면 이겨낼 수 없었던 시련들
이화여대 교수로서 맛본 즐거움 중 하나는 마음에 맞는 동료들을 만나 생의 친구가 된 것이다. 연령이나 생각이 비슷한 동료 교수들끼리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힘들 때는 모여 격려해 주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 중 비슷한 연배였던 이동원(가족사회학) 신승애(물리학) 김수지(정신건강간호학) 김초강(보건교육) 이종미(식품영양학) 교수 등 전공은 다양했지만 모두가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은퇴 후 각자의 전공을 살려 노인복지시설이나 정신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고 싶어했다.
우린 3000만원씩 갹출해 1988년 경기도 양주의 토지 1만여평을 매입했다. 평수는 크지만 대지는 적고 녹지보존지역으로 임야와 잡종지가 많아 경제성은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노인복지나 정신장애시설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회봉사를 하자는 순수한 꿈이 아니었다면 살 필요가 없는 땅이었다. 93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뜻을 모은 6명의 동료 교수들은 복지법인을 만들고 이 땅을 복지법인에 기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부동산기부승낙서'를 작성하고 인감도장까지 첨부한 후 기쁜 마음으로 성탄 전야를 보냈다.
사회봉사를 하려는 뜻에서 시작한 그 일은 내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된 이후 언론의 부풀리기식 보도를 통해 부동산 투기로 완전히 날조되었다. 땅값은 6명의 몫을 모두 합해 4억원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34배 상승한 50억원대 땅으로 보도하면서 나를 50억원대 땅 투기의 장본인으로 왜곡시켰다. 사회봉사의 꿈은 졸지에 시세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돼버린 것이다. 사회봉사를 하겠다는 좋은 뜻을 부동산 투기로만 몰아가고픈 사회, 우리 사회의 마음밭이 좋은 씨앗이 뿌려져도 자랄 수 없을 만큼 황폐함을 발견하고 정말 서글펐다. 왜 그랬을까? 양주 땅은 본래 뜻대로 대길사회복지재단에 기증됐다. 현재 그곳에 호스피스 시설이 세워졌다.
누군가 "당신의 삶의 뿌리는 어디인가?"를 묻는다면 자신 있게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게 신앙이 없었다면 위기가 왔을 때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었고 세상살이의 어려움 때문에 목표를 잃고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신앙이 내게 용기를 주었고 꿈을 주었다. 어릴 때 꿈을 품기 시작한 후로 지금 이 순간까지 내일을 여는 꿈을 꾸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게 신앙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80년에 이화여대 대학원 교학부장 보직을 맡으면서 학교 일을 열심히 했다. 한국사회가 진정 선진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지도층을 재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 잠재력, 여성지도력을 충분히 활용할 때 국가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95년엔 정보과학대학원 원장을 맡아 여성최고지도자과정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모교를 섬길 기회를 주셨다. 96년 6월21일. 이화여대 제11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사회는 내가 이대 최초의 기혼 총장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새로운 소명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비전을 가진 사람인가를 논해주길 바랐다.
총장시절 완벽한 총장을 꿈꾸지는 않았다. 다만 시대가 가는 방향을 직시하고, 공동체에 꿈과 비전을 불어넣음으로써 미래를 향해 다함께 전진케 하는 항해사가 되고 싶었다. 새삼스레 깨닫게 된 한가지 진실은 '꿈이 삶을 이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준 것도 신앙과 꿈이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자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장상 (23) 남북정상회담 수행 53년만에 고향땅 밟아
나에겐 7세 이전의 사진이 없다. 그것은 북에서 성경과 찬송가만 들고 월남했던 삶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2000년 6월 13∼15일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 수행원으로 선정돼 유년의 모든 것을 두고 떠나온 고향 땅을 53년 만에 방문했다. 고향 평북 용천 근처에도 못 갔지만 북한 땅을 밟는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서울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 여러 수행원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남한 여성을 대표하는 특별 수행원으로 이희호 여사와 함께 창광유치원, 수예연구소, 평양산원 등을 방문하고 북한 여성계 대표들을 만났다. 떠나는 날 오찬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의 제안으로 모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그때 제일 뒤에 서 있었는데 수행원 중 유일한 여자라 소프라노인 내 목소리가 두드러졌나 보다.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뒤에 서 있던 나를 이희호 여사 옆에 서게 했다. 나는 이희호 여사 옆에 서서 그분과 손을 잡고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그 순간 찍힌 사진으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떤 관계이기에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연한 그 일이 왜 그리 심각하게 해석되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북한 땅을 떠나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헤매다 가나안에 들어가던 일을 생각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면 모든 게 다 잘될 줄 알았으나 그후로도 정착하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반세기 동안 헤어져 있던 민족이 다시 만나 함께 살기 위해서 고뇌하고 인내하며 진정한 평화를 찾아가는 길은 아직도 굴곡이 많은 광야의 길이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총장 6년의 시간도 지나고 보니 한걸음에 달려온 것 같다. 2002년 6월 새 총장이 선출된 상태였기에 그해 1학기부터는 서서히 이임을 준비했다. 그러던 7월11일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됐다. 이미 대학에서 책임이 실질적으로 끝난 상태여서 수락했다. 8월14일 나의 이임식과 12대 신인령 총장 취임식이 열렸다. 단상에 앉아 6년 전 취임식을 떠올렸다. 순간 빌립보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이 스쳐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좇아가노라" 이화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그 뜻에 최선을 다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온 6년이 그렇게 마감되고 있었다.
총장 취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도였듯이 나는 이임식을 마치자마자 작은 교회를 찾아가 기도했다. 내 기도는 넘치는 감사로 충만했다. 배우가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선다 해도 조명이 없으면 그 배우의 연기는 빛날 수가 없다. 지난 6년간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 이화를 비추지 않았다면 그것은 수고로 끝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한다. 또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그는 내가 총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언제나 굳건히 나를 지켜 주었다. 자신도 연세대 교수로 대학원장, 교학부총장으로, 학회의 회장으로 바쁜 삶을 살았지만 언제나 나의 일을 진정으로 염려해주고 공정한 마음으로 도와주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24) 대학총장 6년 마라톤 완주 후 사상 첫 여성 총리 서리 임명
2002년 7월11일 신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보도에 신선한 충격이란 말과 국정 경험이 없다는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청문회 이후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은 임기가 7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왜 총리직을 수락했느냐는 것이었다. 총리직을 제안받았을 때도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가 7개월밖에 남지 않아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6년간의 총장직을 마무리하고 있던 터라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총장을 그만두면 1년 정도 충분히 휴식하면서 교수로 돌아갈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 내게 총리직 제안은 갑작스럽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내 자신과 우리 사회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국가공직자로서 봉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여러가지로 망설여지고 걱정도 됐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총장재임시 입각 제의를 받은 일은 두어 번 있었다. 그때마다 거절했던 이유는 내가 맡은 6년의 총장 임기를 누구보다 충실하게 해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나는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대의명분에 약하다. 선배인 손승희 선생이 "장상이를 설득하려면 대의명분을 내세우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고 공정하게 일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총장으로 인사를 할 때 청탁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여야 대립이 치열하고 여러 국정과제가 난마처럼 얽힌 상황이라지만 당리당략을 떠나 사심 없이 7개월을 일한다면, 그것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나라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대로 원칙을 지키며 일한다면 어떤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을 위해 평생 애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 의원 수의 5.4%로 세계적으로 보면 120개국 중 96위를 차지하고 있다. 내게는 여성이 정치와 고위 공직에 더 많이 참여해 일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7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지만 내가 총리를 함으로써 여성들이 고위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확대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지명받을 때는 청문회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못했다. 60여년 살아온 내 삶이 문제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직과 성실을 본위로 원칙에 충실해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내게 있었다. 총리실에 가 있는 20일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국무총리 서리 업무에 충실히 임했다. 국무회의, 포스트월드컵 대책회의, 광역지방자치단체 선거 당선자 간담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에 참석했고 국회의장단,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전직 대통령 예방 등도 했다. 또 국정 전반을 파악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청문회가 시작됐다. 나는 청문회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우선은 인사청문회에 대한 준비이지만 근본적으로 국정 전반을 학습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총리실에 도착하면 먼저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믿고 왔습니다. 제게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후 업무를 시작했다.
취임 직후부터 언론에서 나를 둘러싼 의혹을 확대하는 것을 보면서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언론에서 나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지만 나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삶을 살지 않았으니 의혹도 곧 밝혀질 거라 생각했다. 청문회장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25) 결론 정해놓고 진실에 귀막은 청문회 충격
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해석해 몰고 가는 청문회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진심이 전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나의 학력에 대한 의혹 문제만 해도 그렇다. 취임 직후 언론기관에 배포된 나의 일부 이력서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으로 잘못 기재된 것에 대해 학력 위조 의혹이 제기되었다. 나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우리나라 학제로는 전문대학원에 속하며 미국 장로교회에서 설립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신학교육기관이다. 내가 직접 작성한 모든 이력서나 저서 등에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라고 정확히 기재돼 있다. 물론 나는 그 모든 자료를 청문회 위원들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내가 대학의 행정 책임을 맡으면서 비서가 이력서를 대신 작성하다가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으로 잘못 기재하는 오기가 일어났다. 비서는 내가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기록한 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을 기록하면서 예일대학교의 경우와 같다고 착각하고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으로 오기한 것이다. 이런 착오는 미국 사람들도 흔히 하는 일이다. 비서가 작성한 이력서를 점검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내 불찰이다. 이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기회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언론과 청문회는 단순한 학력 오기를 학력 위조로 비화해 문제를 확대시켜 갔다.
프린스턴대에는 신학대학원이 없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미국의 공인기관에서 신학과 종교학과 학교 순위를 낼 때 항상 최상위권에 들어간다. 전 세계 장로교 신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신학대학원이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동창회에서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신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명성을 안다면 학력 위조라는 오해가 얼마나 근거 없고 희화적인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대부분 언론은 이 성명서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가 학력 위조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그 자체에 정말 놀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실체적 사실, 진실과는 상관없이 특위위원이나 언론이나 모두 제기된 의혹을 부풀려서 부도덕한 쪽으로 결론 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 바른말을 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내 성격이다. 잘 참다가도 어느 순간 여과되지 않은 바른말을 하고 마는 기질이 내게 있다. 청문회 이후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다시 보면서 내가 다섯 번 맵게 대답한 것을 보았다. '모독적으로 들린다' '소설 쓰지 마라' '선거운동하지 마라' 등 뼈 있는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은 당당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건방지다고도 했다. 건방지다는 비난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건방진 사람인가. 어떤 점에서 겸손하지 못했는가'라는 심각한 반성을 했다.
청문회(聽聞會)는 말 그대로 듣는 자리여서 미국에서는 아예 'Hear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청문회는 듣기보다는 묻는 청문회였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도 들으려 하지 않는 청문회였다. 청문회는 왜 존재하는가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장상 (26) 국무총리 인준 부결 뒤 긴 성찰의 시간
이틀간의 청문회가 끝났다. 그동안 수고한 직원들에게 이제 점수를 따고 못 따는 것은 다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져본 기억이 없던 난 진통은 있겠지만 인준되리라고 생각했다.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 상황이 나쁘게 돌아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사람은 '설마'에 사는 법이다. 비관보다는 낙관의 심정으로 퇴근했다.
다음날 아침. 의원들이 공정하고 사심 없이 평가해 주리라 기대했다. 투표 결과를 TV로 보지 않았다. 좀 궁금하긴 해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4시쯤 부결 소식을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비서실장과 수석들의 표정을 보고 '아 그렇게 되었구나'라는 인식과 함께 담담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표를 써서 비서실장 편에 청와대로 보냈다. 국무총리의 공백으로 인한 국정 혼란을 어떻게 할지 염려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주저하고 있는데 기자들이 몰려왔다. 참으로 부담스런 일이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한 기자가 언론에 대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많이 아프지만 성숙의 기회로 삼겠다'는 말을 했다. 진심이었다. 개인뿐 아니라 언론 정치권 우리 사회 전반이 진솔하게 성찰하고 성숙해지는 기회가 된다면 이 모든 고통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합청사를 떠나오면서 이제는 내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청문회 현장에 있으면서 온 정신을 그곳에 쏟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어떻게 비난받고 있는가를 객관화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청문회를 지켜본 가족들은 좌절과 울분과 실망으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괜찮아 괜찮아 그 속에서 잘 나왔어" 하며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인준 부결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충격 때문에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처음에는 충격 때문에 아픔을 느낄 수 없지만 서서히 온몸에 피멍이 들고 아파오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마음이 아팠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고 혼자 남았을 때 서재로 들어갔다. 소리 내 울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다. 두 시간을 무릎 꿇고 앉아 있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인데. 정말 울고 싶은 순간 나를 위해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돌이 마구 날아오는 한복판에서 그 돌을 맞은 경험, 갑작스런 돌풍에 휩쓸리다가 팽개쳐진 느낌,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서 있는 경험이었다.
청문회 파동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사회, 정치와 언론의 행태, 인간의 본성, 남이 울면 같이 울 수는 있지만 남이 웃으면 함께 웃기는 어려운 인간 심성.
내게는 청문회를 둘러싼 일련의 일들이 인간이 만든 엄청난 돌풍 같았다. 그 돌풍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목숨처럼 지켜오던 모든 것.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 경험 모두 생소한 것이었다. 돌풍에 무엇이 날아갔는가. 돌에 어디가 다쳤는가. 이런 자문과 함께 자신과 겸허하게 마주하는 순간이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장상 (27) 시련 지나고 가족 사랑 더욱 깊어져
시간이 지나면서 '부덕의 소치'라는 말이 내게 진솔한 의미로 점차 다가왔다. 총리서리 임명 이후 일련의 일들이 결국은 내 부덕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게 전개된다 해도 그것을 바람직하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이고 결국 내 부덕의 결과인 것이다. 나는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참으로 죄송스럽다.
하나님 앞에선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 더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보면서 찬송가 349장을 조용히 불렀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말 없이 찬송과 기도를 드려야만 했다. 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우선하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되묻게 됐다. 하나님 뜻에 대한 나의 순종과 헌신은 전혀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됐다.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명상하다가 어느 날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소리가 있었다.
"너 듣거라. 60평생 네 삶을 내가 이끌었다. 네가 성실해서 오늘이 있는 줄 아느냐? 실은 나의 은총이 넘쳤느니라. 네 성실, 네 근검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준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겸허히 순종하고 헌신하라."
나는 이 시련이 시련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신앙적으로 깊어지는 성장과 성숙의 기회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런 시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더욱 겸허해지고 진실해지고 용감해지기 위해 필요하다면 더 늦기 전에 시련을 거친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심정, 내일을 위한 연단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심정에까지 이르렀다.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아서 크고 작은 좌절과 고초에서도 흔들림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릴수록 뿌리는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의 돌풍을 일으킨 분진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휘말렸던 돌풍 속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선 나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 곳곳에 상처 받은 사람, 억울한 사람, 뜻하지 않게 온당치 않게 크고 작은 돌풍을 만나 피해를 본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은 나보다 더 가슴 아파하며 청문회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작은아들은 내가 안쓰러웠던지 "엄마는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잃어버리지 않은 것도 있어요. 가장 소중한 거요. 아버지가 정말로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말해주었다. 내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아들도 고마웠고 무엇보다 남편에게 고마웠다. 나는 가족이 있어 다시 설 수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청문회 돌풍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자 내 생일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이메일과 전화로 내게 따뜻한 축하를 보내주었고 가족들이 정겨운 생일잔치를 열어주었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남편이 생일선물이라며 오뚝이 두 개를 건네주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씩씩하게 이겨내라는 격려가 담긴 선물이다. 사실 몇 번 넘어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근데 왜 두 개야?" 내가 물었다. "당신과 나."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일으켜주는 도움 주는 짝이 되라고 하나님께서는 남과 여를 창조하셨다.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은 그 창조 질서의 깊은 섭리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역경의 열매] 장상 (28·끝) 인생길 걷다 넘어졌지만 주님 붙드심으로 털고 일어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넘어지는 연습을 한다. 아기가 걸음마 연습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가. 그렇지만 우린 넘어진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일어섰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걸어가다 넘어지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으면 실패지만 일어나면 넘어진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주님이 붙들어주심으로 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청문회 경험은 우리 사회를 깊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2005년 2월 38년간 몸 담아온 이화여대에서 마지막 수업을 했다. 난 은퇴가 아니라 졸업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삶의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정년 후 남은 시간의 한계성이 느껴졌다. 생전의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은 "하나님, 사랑하는 조국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로 기도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분의 기도문은 내게 감동을 주며 내 나라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나 역시 "하나님,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나는 한국인인 것이 좋고 우리 민족이 훌륭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한정된 시간 안에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회 갈등, 불신, 분열…. 그 가운데 정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 신뢰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국민들이 다 살고 싶어하는 살맛 나는 나라가 되길 바랐다. 먼저 사회의 기강과 신뢰가 확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정치 영역을 통해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사실 이를 결단하기까지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민했다. 정치 입문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더욱 망설여졌다. 매일 긴시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삶이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2006년 2월27일 민주당에 입당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절실한 과제 두 가지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전제로 하는 통일이 그 하나이고 도덕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사회 통합을 이루는 것이 또 하나다. 이 두 과제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하며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도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도덕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지역 세대 이념의 갈등을 넘어서는 사회 통합은 민족 통합을 위한 가장 큰 힘, 기초가 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나는 이상향을 꿈꾸듯 살맛 나는 세상을 꿈꾼다. 정직해서 손해 본다는 느낌이 없는 세상, 고지식하다고 핀잔 받지 않는 세상, 믿었다가 큰코 다치지 않는 세상,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는 불신을 극복하고 정부와 지도자를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상을 꿈꾼다. 꿈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훌륭한 지도력이 발휘된다면 우리나라는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바울을 좋아한다.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아름다운 편지 글로 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성경 구절은 어린 시절 내가 제일 먼저 외운 구절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좌우명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부탁은 오히려 기뻐하기보다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강조됐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삶을 의미한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이 말씀을 붙들고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