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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越 愛 2
씬 71. EXT. 포엠 앞 - 2000년 - DAY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편함을 열어보는 은주.
편지가 있다. 은주, 기대에 차서 편지를 꺼내 본다.
성현 소리>: 은주 씨가 보내준 아버지의 유작 집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고독을 알게 해준 그 후에 사랑을 알게 해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알게 해준 은주씨께도…….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인간이 갖는 가장 선한 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은주 씨는 착한 사람이에요……. 오히려 제가 미안해요.
편지와 함께 포장을 열면 97년도 은주가 사려고 망설이던 그 장갑이 함께 들어 있다.
은주, 표정이 밝아진다.
장갑을 꺼내 손에 끼어 보고 요리조리 살펴본다.
장갑으로 얼굴을 감싸보는 은주.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은주의 얼굴.
밝은 미소.
은주 소리>: 우린 둘 다 너무 쓸쓸하게 지내온 것 같아요……. 성현씨, 혹시……. 시간 있으세요?
씬 72. EXT. 월미도 놀이동산 - 1998년/2000년 - DAY
음악 계속되면서…….
파란 하늘, 따스하게 드리워진 햇살 속에서 성현이 놀이동산이 낯선 듯 두리번거리고 있다.
은주 소리>: 우선 편의점에 들어가세요. 그리고 맥주를 하나 집는 거예요.
맥주를 들고 나오는 성현.
똑같은 장소에서 맥주를 들고 나오는 은주.
은주 소리>: 아주 아주 시원하게 마신 다음…….
맥주를 소리 나게 탁 딴 다음, 맥주를 들이키는 성현.
맥주를 한 번에 다 마셨는지 숨이 찬 듯 카~ 하며, 맥주 캔에서 입을 떼는 은주.
은주 소리>: 자~ 이제 정신없이 뛰어야 해요~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두 사람.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지만.
은주 소리>: 바이킹 타는 걸 놓치면 안 되거든요!!! 심장이 마구 뛸 때 타는 게 제일 좋아요.
열심히 달려 온 듯 숨을 헉헉거리며 바이킹에 올라타는 성현과 은주.
사람이 얼마 없는 바이킹에 둘 다 옆자리는 비워둔 채로…….
천천히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프레임 아래에서 위로 수~욱 올라오는 바이킹.
성현의 모습이 얼어붙어 있다.
은주 소리>: 이 순간이 바로 !
다시 바이킹이 프레임 아래에서 올라오면 이번에 은주의 모습. 신난다! 아―-- 하며 손을 드는 은주.
위 아래로 움직이며 속도를 더하는 바이킹.
성현, 조금씩 바이킹을 즐기기 시작하는 듯 표정이 밝아진다.
바이킹 위의 성현과 은주의 밝은 모습이 서로 컷백 된다.
씬 73. EXT. 버스 정류장 - 1998년/2000년 - DAY (3시경)
성현 소리>: 이번엔 제가 멋진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성현. 옆에는 어떤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있다.
성현 소리>: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XX로 가는 버스를 타세요.
프레임 안으로 버스가 들어와 선다.
버스에 가려 성현과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화면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미묘한 변화 (버스가 녹슬고 낡은 모습으로 변하고 주변의 모습이 조금은 세월의 때를 느끼게 하는) 가 생긴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려하자 은주가 뛰어와 버스를 잡는다.
은주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면 벤치엔 할머니 대신 꼬맹이들이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씬 74. EXT. 가로수 길 - 1998년/2000년 - DAY (4시경)
해질 녘의 오렌지 빛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가로수가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길.
버스가 서면 성현이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버스가 출발하면 내린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성현 소리>: 버스에서 내리면 가로수가 하늘을 덮은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로수를 스치며 걷는 성현을 카메라가 트랙킹으로 따라가며 보여주고, 성현이 오른쪽으로 프레임 아웃 하면 다시 세월의 변화를 암시하는 아주 미묘한 변화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이 조금 자라거나 하는) 가 생기며 은주가 오른쪽에서 프레임 인되어 보여진다. 가로수 길의 아름다움에 취한 은주의 행복한 표정.
씬 75. INT. 전원카페 - 1998년/2000년 - 해질 녘 → 밤
목조 분위기의 옛스러워 보이는 카페.
천장에 커다란 원형 램프들이 아름답게 달려 있다.
카페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성현.
깔끔하고 푸근한 인상의 주인아저씨가 성현을 맞아 자리로 안내한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는 성현.
성현 소리>: 칵테일이 맛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면 전 항상 같은 자리에 앉죠.
내부 인테리어의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카페 안.
성현과 같은 자리에 역시 아주 미묘한 변화(톤이라든가)가 느껴지며 은주가 앉고, 그녀의 앞에 성현이 주문한 것과 같은 칵테일을 내놓는 주인아저씨.
전보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수염을 기르고 배가 좀 나왔지만 여전히 푸근한 인상이다.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하는 성현.
한 모금 살짝 마셔보고선 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은주.
성현 소리>: 이 카페에서는 연주와 노래를 즐길 수 있어요. 은주씨도 좋아하실 거예요.
카페에 마련된 무대에 주인아저씨가 올라가 기타를 집는다.
주인아저씨, 올드 팝 한 곡을 다른 밴드 멤버들과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은주의 카페에는 역시 나이를 조금 먹은 밴드 멤버들 (한두 명 정도는 다른 사람에 다른 악기 편성으로)이 올라와 같은 곡을 연주하고, 한 무명가수가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성현 쪽 밴드가 보여주는 연주 한 소절이 끝나면, 은주 쪽 밴드가 뒷 소절을 연주하며 노래는 계속되는 가운데…….
푸근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 성현. 하지만 조금씩 표정이 어두워진다.
역시 다소 쓸쓸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 은주.
성현 소리>: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은주 씨는 어땠나요?
은주 소리>: 고마워요……. 정말 즐거웠어요.
씬 76. EXT. 도심 거리 - 1998년/2000년 - NIGHT
빵빵~ 하며 휙 지나가는 자동차. 자동차가 지나가고 나면 보이는 성현의 모습.
복잡한 도심의 거리를 홀로 걸어가고 있다. 앞 씬 에서 나왔던 노래를 휘파람으로 조용히 흥얼거리면서 걷고 있다.
성현 지나가고 나면 동일한 거리에서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는 은주.
복잡한 도심의 풍경 속에 멍하니 무슨 생각인가를 하면서 걷다가 마주 오던 남녀와 툭 부딪힌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은주. 남녀는 지나가고 은주, 멍청히 뒤를 돌아보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은주의 시점처럼 보이는 거리의 풍경 속에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성현의 모습, (마치 동일한 공간에 두 사람이 스쳐지나갔던 것처럼 느껴진다.)
성현의 휘파람 소리가 잠시 들렸다, 사라진다.
성현의 모습도 focus out되며 사라져 가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은주, 차가운 바람이 은주의 머리에 스친다.
씬 77.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DAY(오후 2시경)
작업실에서 무엇인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성현.
잘 되지 않는 듯, 그리던 종이를 구겨 버린다.
새하얀 종이에 다시 그리기를 시작하는 성현.
그리던 도중 다시 구겨 던져버리는 성현. 졸고 있던 콜라가 깨어나 성현을 본다.
지친 듯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본다. 담배를 꺼내 무는 성현.
다시 새 종이를 꺼내 스케치를 시작한다.
씬 78.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편지를 들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주.
편지를 내려놓고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는 듯하더니 조금 미소를 짓는다.
성현 소리>: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콜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은주를 바라보고 있다.
콜라와 눈이 마주치는 은주, 갑자기 콜라에게 다가가 콜라의 머리를 잡고 흔들며
은주: 그냥 한번 보자는 건데 뭐~
은주, 콜라를 흔들다 놓고 후다닥 프레임 아웃 한다.
졸지에 남겨진 콜라만 어질어질~
씬 79. INT. 포엠 침실 - 1998년 - NIGHT
책상에 앉아 진지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성현.
모니터엔 전자 달력이 보이고, 날짜를 뒤로 뒤로……. 검색하면, 2000년 3월 20일.
성현: 토……. 요일…….
의자 뒤로 푹 기대어, 두 손을 머리 뒤로하고 빙긋이 웃는 성현.
은주소리>: 제주도로 오세요. 제 고향에 아름다운 바닷가가 있어요. 거기다 집을 짓는다면 정말 예쁠 거예요. ……. 문을 열고나서면 바로 바다와 만나는 그런 집이요. 집에서부터 맨발로 걸어나가면 모래가 사박사박 밟히는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성현, 스케치북을 집어 든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지는 바닷가 풍경. 바닷가 위에 집을 스케치하는 성현.
씬 80. EXT. 제주도, 은주의 집 - 2000년 - DAY
돌로 된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예쁘게 지어진 아담한 이층집이 보인다.
집 안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은주. 혜기를 앞에 태운다.
은주: 다녀오겠습니다.
혜기: (은주와 동일한 톤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은주 어머니, 어서 가보라는 식으로 손을 흔든다.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은주.
씬 81. EXT. 제주도, 바닷가 - 2000년 - DAY
즐겁게 달려오는 자전거. 은주 갑자기 무언가 발견한 듯 정지.
자전거를 세우자 폴짝 뛰어내리는 혜기.
바닷가로 향하는 혜기를 뒤로 한 채 시선이 가는 쪽으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은주.
이제 막 기초가 올라가고 있는 건물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작업용 테이블 위에 올려진 투시도를 발견한다.
잔뜩 쌓여있는 설계도 밑에 깔린 투시도. 주의 깊게 투시도를 들여다보는 은주.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나타난다. "저……. " 돌아보는 은주. 재혁이 서 있다.
은주, (성현이 아닐까 해서) 조금 당황한다. 낯설게 쳐다보는 재혁.
한동안 멍하니 서있는 두 사람.
재혁: 무슨 일로 ……. 누구 ……. 찾으세요?
은주, 아니구나, 하는 표정.
은주: 아, 아니요. 그냥……. 이 그림이요. (손짓해가며) 어쩐지 낯익은 그림 같애서요. …….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재혁: 네……. (담배를 꺼내며 혼잣말처럼) 제주도 참 좋네요.
은주: 여기 분……. 아니신가봐요.
재혁: 네. 공사 때문에 왔어요.
은주: 네……. 이 집, 직접 지으세요?
재혁: 공사만 내가 해요. ……. 친구가 설계한 집이예요. 이 곳이랑 잘 어울릴 거 같죠. ……. (미소를 띠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설계한 집이거든요…….
은주: (역시 미소를 띠며) 네…….
두 사람, 정적이 흐르자 조금 어색해 진다.
재혁: (웃으며) 제가 쓸데없이 말이 많네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그럼…….
은주, 따라서 꾸벅 인사한다. 괜히 어색해서 멀리 바닷가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은주.
은주: 혜기야!
은주, 놀고 있는 혜기에게로 걸어간다.
시간 경과
혜기가 짜증을 내는 모습이 보인다. 집에 가자고 조르는 혜기를 달래며, 이젠 약간 초조해 지는 은주. 시계를 자꾸 들여다본다. 결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은주.
은주: 그래, 가자.
씬 82. EXT. 제주도, 거리 - 2000년 - DAY
혜기와 걸어가다가 주춤 주춤 멈춰서는 은주.
은주: (조심스럽게) 혜기야, 혼자 들어갈 수 있지? 고모도 금방 들어갈게.
혜기의 의아한 표정.
가까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나오는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스크림을 혜기 손에 들려서 들여보내는 은주.
씬 83. EXT. 제주도, 바닷가 - 2000년 - EVENING
백사장에 홀로 뒷모습으로 앉아 있는 은주.
카메라 아주 느리게 서서히 round tracking …….
화면은 낮에서 서서히 불길한 피 빛으로 짙어지는 노을로 바뀐다.
마침내 카메라는 앉아있는 은주의 정면 얼굴을 잡는다.
쓸쓸함과 불길함이 뒤섞인 은주의 표정.
씬 84. EXT. 제주도, 은주의 집 마당 - 2000년 - NIGHT
방안에서는 오순도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 한 가족들의 소리.
은주 소리>: 한참을 기다렸어요.
툇마루에 앉아있는 은주. 괜히 발장난을 쳐본다.
은주 소리>: 왜 안 왔는지 안 물어볼게요.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보죠.
씬 85. INT. POEM 침실 - 1998년 - NIGHT
은주 소리>: 그래서 저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겠죠…….
스탠드 조명만 약하게 켜져 있는 침실. TV에서 <달려라 하니>가 나오고 있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성현. 생각에 빠진 듯 한 성현의 표정.
아무도 보지 않는 TV는 계속 진행되고, 은주의 깔깔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씬 86. INT. 공항, 제주 - 1998년 - DAY
북적거리는 신혼 여행객들, 관광객들의 모습.
요란하게 안내 멘트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성현이 안내 프론트로 걸어간다.
안내요원 앞에 선 성현.
성현: 성산포에 가려고 하는데요.
씬 87. EXT. 제주도 - 1998년 - DAY
혜기(5살)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가 아니라 이쪽으루~~ 어~~엉~"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 지 짜증스러운 목소리이다.
아이로부터 좀 떨어진 곳엔 성현이 앉아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성현. 성현: 앞에 소라껍질이 하나 놓여있다.
은주소리>: (웃음이 섞여있다) 소라 껍질 안에 천사가 잠을 자고 있다는 거예요.
성현이 소라고동을 주워서는 눈을 감고 귀에 가만히 대본다.
정말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그 때, 발에 무언가 느껴져 눈을 뜨는 성현. 발 앞에서 멈춰 서 있는 바닷게 한 마리.
바닷게 옆으로는 꼬마아이가 얼굴을 들고 성현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다.
혜기다. 성현이 혜기에게 따뜻하게 웃어 보인다.
혜기: 아저씨 뭐해요?
성현: (무안한 듯) 으~~응. 너도 한번 들어볼래?
혜기의 귀에 소라껍질을 대주는 성현. 혜기는 역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소라껍질에 귀를 기울인다.
성현: 무슨 소리가 들리지.
혜기: 슈~~우~ㄱ
성현: 그래. 천사가 잠자는 소리야.
혜기: 천사가 잠자는 소리요? 천사가 잠을 자요? 다시요. 다시 해 줘봐요. 아저씨.
성현이가 혜기에게 소라고동을 준다. 다시 귀에 갖다 대는 혜기. 이번에는 혜기가 소라껍질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야~~ 일어나 봐~~~ 천사야~~"
혜기 소리 작아지면서 두 사람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뒤로 빠지고,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성현과 혜기의 모습이 한가롭게 보인다.
멀리서 혜기를 부르는 혜기 엄마 목소리. 혜기는 아랑곳 않고, 소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성현의 발밑을 벗어난 바닷게가 쫄쫄쫄쫄.
이제야 혜기의 괴롭힘에서 해방된 듯 열심히 그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씬 88. EXT. 건널목 - 2000년 - EVENING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인 듯 가방을 들고 이어폰을 꽂은 채인 은주.
뭔가 혼자 생각하는 듯 한 은주의 표정.
신호등이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자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한다.
은주, 멍하니 서 있다가 어느새 불이 바뀌고 혼자 서 있음을 깨닫고 급히 길을 건넌다.
이 때 지훈과 한 여자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지나가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은 은주.
신호등은 깜박이고 어느새 저만치 가는 듯싶더니 사람들 틈에 묻혀서 사라져버린다.
은주, 지훈이 사라져간 방향을 보고 멍하니 서 있다.
사람들이 은주의 앞을 휙 휙 지나쳐 간다.
씬 89. INT. 책 대여점 - 2000년 - EVENING → NIGHT
위 씬과 동일 한 앵글로 멍한 표정의 은주.
은주의 얼굴로 피어 올라오는 하얀 김.
정숙(o. s): (다정하게) 배고팠지?
은주, 돌아보면 냄비 안에 막 끓인 라면이 맛있어 보인다.
정숙, 젓가락을 딱 소리 나게 갈라서 은주의 손에 쥐어 준다.
은주, 냄비에서 라면 한 가닥을 호로록 먹는다. 놓인 접시의 단무지를 하나 집으며,
은주: 김치는 다 먹었니?
정숙: 그럼, 그게 언젠데…….
은주: (단무지를 넘기다가 멍하니) 참……. 쓸쓸한가봐. 아까 길에서 어떤 남자를 봤는데……. 지훈씬 줄 알았어…….
정숙: (냄비 뚜껑에 라면을 가득 덜어 입어 넣으며) 그러게……. 소문도 없이 들어와서 결혼까지 한다니, 대단하지.
말을 마치자마자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보는 정숙…….
은주, 갑자기 사래가 들려 기침을 콜록 콜록……. 한다.
정숙, 휴지를 갖다 주고 물을 주며 수선스럽게 움직인다.
은주는 계속 콜록 콜록…….
정숙: (앉으며) 사실은, 주연 이한테서 전화 왔었어. 너 알고 있냐고…….
은주, 휴지로 코를 푼다.
은주: (사래 들린 목소리로) 어떻해……. 라면에 코 빠졌어…….
은주: 기침에, 눈물에, 우는지 웃는지…….
시간경과 - NIGHT
카운터 주변만 조그맣게 밝혀져 있다. 콜라는 어둠 속에서 새근 새근 자고 있다.
은주와 정숙의 앞 테이블에 치킨을 먹고 남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맥주 캔을 앞에 두고, 정숙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꽤 많이 마신 듯 두 사람 다 목소리가 크다.
정숙, 만화책을 펴서 한 손에 들고, 은주를 약 올리는 표정으로
정숙: 그래서, 맨 마지막에 누굴 택했냐면 말이야.
은주: (귀를 꼭 막고 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나, 볼꺼란 말야!!
정숙: (약 올리듯) 결국, 누구랑 됐냐면…….
은주: (여전히 귀를 막고) 안……. 돼……. !!
정숙: 그 옷 있잖아……. 그 옷 주머니 속에다가 남자가 편지를 남겼어.
은주: (귀에서 손을 떼며) 헤! 그럼, 그 편지에 고백을 한거야?
정숙: 그렇지~ 편지에 뭐라고 썼냐면…….
은주: (기대에 차서) 뭐라고?
정숙: (마치 성우처럼 목소리에 멋을 내서) "당신만을, 사, 랑, 합니다."
은주: (감동에 겨운 표정으로) 와~~ 너무 …….
정숙: (신나서) 너무 좋지?
은주: 너무……. (의외로 기운이 빠지며) 너무……. 슬, 프, 다…….
정숙: (의아해서) 왜? 너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구 난리였잖아.
은주: 하지만……. 그래도……. (힘없이) 동생도……. 그 남자를 사랑했잖아…….
정숙,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힘 빠지는 표정이다.
정숙: (누차 말했다는 식으로) 은주야, 쫌만 지나면, 생각도 안날 꺼야.
은주: (고개 푹 숙이고) 그래…….
정숙: (일부러 밝게) 세상에 얼마나 남자가 많은데~
은주: (한숨)……. 지금도……. 생각 잘 안나…….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두들 다 너무 멀리 있어…….
정숙: (생각에 잠겨 있다.) ……. (뜬금없이,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쉽게 변해가는~"
은주, 정숙을 보고 피식 웃는다.
은주: (노래) "슬픔 안은, 슬픔~ 안은 날~"
정숙, 은주를 보고, 씩 웃으며 은주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한다.
은주, 정숙: "잠이 들고 파~ (합창, 크게) 변하지 않는 세, 상을 꿈~꾸~며~~
은주와 정숙,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는다. 다시 한 번 눈을 맞추며, 큰 소리로, 은주, 정숙 "변, 하, 지, 않는, 세, 상을 꿈~꾸~며~~!!!"
깔깔깔 웃는 은주와 정숙.
은주, 기운을 내는 듯 털고 일어난다.
정숙도 함께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은주: (힘을 내서) 집에 가야겠다. (만화책을 집으며) 이거 나 가져간다.
정숙: 말은 바로 해! 빌려 가는 거지!
은주: 치, 짠순이!
정숙: 이 언니가 열심히 벌어야 우리 소원을
은주: (손가락으로 꼽으며) 1층엔 떡볶이 가게, 카페, 2층엔 만화방, 3층엔…….
정숙: 3층엔, 여성 전용 안마방!
은주: (푸하하 웃으며) 남자들은 출입 금지야?
정숙: 그럼!
은주: 맞아! 남자들은 도움이 안 돼!
정숙: 이제야 김은주도 정신을 차리는 구나!
은주: 집에 가서 두 발 쭉 뻗고 잠이나 푹~ 자야지!!
정숙: 장하다, 김은주!
은주와 정숙,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불 꺼진 책대여점을 나선다.
씬 90.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문소리 들리고 은주가 짐들을 들고 들어와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는다.
짐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은주.
멍하니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를 내려다 본다.
카메라 천천히 뒤로 빠지면서 책상 위에만 밝게 불이 켜져 있는 은주방의 일부가 보인다.
콜라는 방 앞을 왔다 갔다 한다.
잠시 후, 책상에 엎드려 있는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은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91. INT. POEM 침실 - 1998년 - NIGHT
은주의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현.
가방을 침대에 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편지를 펼친다.
편지 안에서 떨어지는 약도, 날짜 등이 쓰여 있는 종이, 지훈과 은주가 함께 찍은 사진 등.
은주 소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성현.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은주 소리>: 그 사람하고의 관계는 항상 기다림의 연속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어요.
열려진 문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콜라. 조르르 달려와 성현의 양말을 물어 당긴다.
은주 소리>: 그냥 그 사람이 제 곁에 있을 수 있게, 지훈 씨를 떠나보내지 않게 날 도와줘요.
반응이 없는 성현을 한번 올려다보고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콜라.
은주 소리>: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콜라가 낑낑대며 소파 한 귀퉁이를 물어뜯고 있다.
성현이 맥없이 콜라를 당겨 안는다.
성현: (멍한 표정) 그러지 마. 나중에 은주 씨가 살게될 집이야.
성현 앞으로 편지가 떨어져 있고 콜라가 성현의 품에서 벗어나 편지의 냄새를 킁킁 맡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 풍경이 쓸쓸하다.
씬 92. INT. 술집 - 1998년 - NIGHT
낡은 대폿집 분위기의 인적 없고 조용한 술집. 전구 몇 개로 밝혀져 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 몇 병, 순대볶음이 식어서 굳어 있다.
완전히 풀어진 재혁.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한다. 둘 다 술이 거하게 취한 분위기.
재혁: 너 입이 붙었냐? 왜 아무 말이 없어 인마.
성현: …….
재혁: 여자야?
술을 들이키는 성현. 재혁이 성현을 말린다.
재혁: 야, 너 너무 마신다.
성현: …….
재혁: 갈사람 같으면 보내 인마.
성현: 그래야겠지.
재혁: 맞구나. 여자 맞구나. (갑자기 흥분하는 재혁) 누군데?
성현: ……. 좋은 여자.
재혁: 말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성현: ……. (힘겹게 웃으며) 좋은 인연으로.
무언가 생각에 빠지는 성현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재혁.
한동안 그렇게 있는 두 사람. 갑자기 일어서는 성현.
재혁: (성현 이를 잡으려고 어정쩡 일어서다 놓치며) 야야. (성현의 뒤를 따라간다) 왜 말을 하다 말어.
이미 성현 이는 계산대로 가고 있다.
씬 93. EXT. 술집 앞 -1998년 - NIGHT
성현이 술집을 나선다. 재혁이 뒤따라 나온다.
혼자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리는 성현. 발걸음이 빠르다.
따라가다가 멈춰 서서 '저게……. '하는 황당한 표정을 하는 재혁.
씬 94. EXT. 지하철 벤치 - 1998년 - NIGHT
성현, 숨이 찬 듯 지하철의 플랫폼으로 올라온다.
은주와 만났던 그 벤치.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성현, 그 옆에 털썩 앉는다.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는 성현.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성현. 사람들로 복잡하다.
아직 술이 덜 깬 듯 눈살을 찌푸리는 성현.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여자의 모습, 은주다!
은주가 성현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는 성현.
천천히 일어난다. 미소 짓는 은주.
성현이 은주에게로 다가간다.
성현을 지나치는 은주. 열차가 '빠~앙'하고 들어온다.
은주를 돌아보는 성현.
성현소리>: 내가 그렇게 낯설어요?
은주, 성현이 앉아 있던, 남자의 옆자리에 앉으며,
은주: 지훈씨! 오래 기다렸지?
돌아 본 채로 굳은 듯 서 있는 성현.
은주는 지훈의 팔짱을 끼고, 서서히 멈추는 열차 앞으로 다가간다.
성현소리>: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출입구 문이 열리고, 무심히 성현 쪽을 한 번 돌아보는 은주.
두 눈이 마주치지만 은주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성현 소리>: 그렇게 바라보면 용기를 낼 수 없쟎아요.
은주, 지훈과 다정히 지하철을 탄다.
홀로 남겨진 성현.
씬 95.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몇 번이나 전화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은주. 마루를 왔다 갔다.
다시 전화기를 들어보다가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엎드린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으아아아아아----------------ㄱ!!"
한동안 그대로 있는 은주.
벌떡 일어난다. 은주 옆에서 떨고 있는 콜라를 바라본다. 복잡한 표정의 은주.
한동안 그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화기 앞에 앉는 은주.
심호흡을 한번하고, 전화기를 든다.
띡띡띡…….
조심스럽게 귀에 수화기를 대어 보면 지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훈소리(o. s.): 명륜동입니다.
급하게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은주.
지훈소리(o. s.):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은주: (수화기를 가린 채 은주가 조용히 나직인다.) ……. 지훈씨!
지훈: 은……. 주니?
놀란 은주, 전화기 후크를 누른다.
전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씬 96.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NIGHT
성현이 작업대에 앉아서 설계도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초췌한 모습의 성현.
성현 옆으로 놓인 와인 병에 와인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셔 버리는 성현.
책상 한 쪽에 놓여진 은주의 편지들과 털 귀마개를 바라본다.
마음을 잡으려는 듯 제도대 위에 놓인 설계 도면들을 뒤적거리는 성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펜을 들고 도면에 이리저리 선을 그어 고치는 성현.
속도를 내어 펜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춘다.
도면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도면들을 뒤집어 덮어 버린다.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는 성현.
씬 97.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가스불 위에 올려져 있는 주전자.
은주, 콜라 밥그릇에 먹을 것을 담아 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정리가 안 된 은주의 표정. 창문 앞에 서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 식탁에 앉는 은주. 멍하니 과일을 깎는다.
갑자기 "삐~~~익"하는 주전자 소리. 칼에 손을 벤다. 놀라는 은주.
아파하면서 손가락을 잡는데. 문 밖에서는 "딩동!"
주전자를 끄고 바쁘게 현관 쪽으로 나가는 은주.
문을 열자 놀라는 은주의 표정.
시간경과
조용한 은주집 실내.
은주의 손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있는 지훈. 은주는 멍하니 지훈을 바라본다.
지훈: (손을 잘 감싸며) 으이그~~ 조심하지. 안 아퍼?
은주: 괜찮아.
지훈: (은주 옆에 앉으며) 잘 지냈니?
은주: 으……. 응.
지훈: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은주: (무지하게 복잡한 표정) …….
지훈: (은주 얼굴을 들여다보며) 왜 전화……. 그냥 끊었니?
은주: (자리를 일어나며) 커피 마실까?
은주의 팔목을 잡는 지훈.
지훈: 아냐, 앉아 봐.
은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 있다.
지훈: (은주를 잡은 채) 나……. 원망 많이 했지?
은주, 엄청 커지는 눈. 숨을 가다듬는다.
은주: 지훈씨……. (마음을 가다듬고)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겠지…….
지훈: (긁적긁적) ……. 알고 있었구나.
잡았던 손을 가만히 푸는 지훈.
은주: …….
지훈: (은주 얼굴을 들여다보며) 결혼……. 그렇지……. 막상 결혼하려니까 니 생각 많이 나더라구. 사실 나……. 결혼, 다시 생각하던 중이었어.
은주: (머뭇머뭇) 어……. 잠깐, 잠깐만……. (숨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나……. 지훈씨 떠나고……. 굉장히 오랫동안 힘들어했었어.
지훈: ……. 그래……. 미안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은주……. 야…….
은주: ……. 미안해.
지훈: 뭐가…….
은주: (무슨 말을 막 하려고……. ) 음…….
지훈: 은주야…….
지훈, 마치 은주의 손을 잡으려는 듯 은주에게 손을 내민다.
은주,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책상 위에 있는 성현에게 선물 받은 장갑이 보인다.
은주, 책상으로 다가가 장갑을 가만히 만진다.
은주: (작은 소리로) 나 지금 꼭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있어……. (담담히) 미안한데……. (모기만 한 소리로) 돌아가 줄래……. (어색하게) 반가웠어…….
은주가 고개를 돌린다. 조금은 황당한 듯 그냥 씨-익 웃는 지훈.
다시 뒤돌아서는 은주.
은주 한숨을 길게 내 쉰다. 복잡함의 극치에 다다른 표정.
씬 98.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NIGHT
조용한 작업실 내에 노란 전등만이 밝혀져 있다. 제도대 위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열려진 한쪽 서랍에 은주의 편지와 털 귀마개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드르륵 닫히는 서랍.
한쪽에서 깨끗한 새 제도 용지를 꺼내 제도대 위에 펼치며 제도대에 앉는 성현.
성현소리>: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힘들었다면 일찍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제도 자를 능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려지는 투시도.
쌓여 가는 도면들. 평면도, 측면도…….
성현의 컴퓨터 화면 속에 떠오르는 時越愛의 형태.
성현의 소리>: 은주 씨 첫 번째 편지 기억하세요?
POEM에서 행운이 가득하길 빈 다구요.
은주 씨를 알게 된 것이 저에겐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성현 뒤편에 놓인 창으로 이른 새벽 아침이 보인다.
씬 99. EXT. POEM 앞 - 1998년 - 이른 새벽
POEM 현관을 나서는 성현.
성현 소리>: 이번에는 제가 빌어드릴께요. 당신의 사랑에 행운이 가득하길 빕니다.
우편함 앞에 서서 우편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문다.
후~~우 길게 내뿜어지는 하얀 연기.
수염으로 지저분한 성현의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씬 100. INT. 은주집 - 2000년 - 새벽
창 밖으로 새벽 기운이 스며드는 은주의 방.
머리끝까지 덮여있는 은주의 이불. 확 걷어내는 은주.
머리는 온통 엉클어졌지만 눈은 말똥말똥. 벌떡 일어나는 은주.
화장대 위에 있던 편지함을 꺼낸다.
편지함을 뒤집어 성현의 편지들을 수북이 쏟아놓고 뒤적이기 시작한다.
씬 101. INT. 복덕방 - 2000년 - DAY
복덕방 아저씨, 탁상시계가 고장이 났는지, 시계를 책상 위에 마구 분해해 놓고 다시 조립을 하고 있다.
문이 끼익 열리며 은주가 들어선다.
은주: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시계를 고치는데 열중하여 은주를 힐끔 보고 그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은주: (아저씨 눈치를 살피며) 저기요. 아저씨……. 이전에 poem에 살던 사람이요. 저 살기 전 에요……. 어디로 이사간지 혹시 아세요?
아저씨: (손을 멈추고 은주를 바라보며) 왜 이제 와서야 그걸 물어?
은주: 네?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고치는데 열중하는 아저씨, 뭐라고 뭐라고 혼자 궁시렁거린다.
은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어정쩡 주저하며 서 있다.
아저씨: (갑자기 고개를 확 돌려 은주를 보며) 그 때, 그 때 그러니깐, 그 친구는 오지도 않고 이모라는 분이 다 정리하고 갔어.
은주: 왜요?
아저씨: (귀찮다는 듯이) 몰라. 이모님이 짐꾼 몇 명 데리고 와서 다 실어 가더라구.
은주: (좀 집요하다 싶게) 그래요? 아저씨, 그럼 연락처는 혹시 모르세요?
대답 없이 은주를 빤히 쳐다보는 복덕방 아저씨. 은주의 간곡한 표정.
잠시 후 아저씨,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알겠다는 듯이,
아저씨: 이모님 연락처는 어디 남겨져 있을 텐데…….
뒤적뒤적 옛날 서류를 뒤지는 아저씨. 반가운 표정의 은주.
씬 102. EXT. 캠퍼스 - 2000년 - DAY
낯선 곳에 들어선 듯 어색한 은주.
AUDIO>: 전화를 누르는 소리가 삑삑 들리고, "이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안내도를 발견하고, 건축과 건물을 찾는다.
씬 103. INT. 과 사무실 - 2000년 - DAY
과사무실 문이 보인다. 똑똑!
조교(O. S.): 네.
문이 열리고, 은주가 들어서서 꾸벅 인사를 한다.
은주: 저……. 뭐 좀 여쭤 볼게요.
조교, 무심히 쳐다본다.
은주가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눈길이 벽면으로 멈춘다. 천천히 다가가는 은주.
조교: 무슨 일로…….
조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가까이 가보는 은주.
완성되어 색까지 다 입혀진 아름다운 집 한 채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하단에 98. 3. 時越愛 라고 쓰여 있다.
한동안 그림 앞에 멈춰서 있는 은주.
움직이지도 않고 멍하니 있다.
재혁 소리>: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설계한 집이거든요…….
은주의 눈이 촉촉해 지고 있다.
재혁(O. S.): 저……. 혹시…….
은주, 뒤돌아 돌아보면, 재혁이 서 있다.
씬 104. INT. 택시 - 2000년 - DAY
도로 위를 달리는 택시.
그 안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은주.
재혁소리>: 교통 사고였어요…….
은주소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지훈씨를 떠나보내지 않게 날 도와줘요.
재혁 소리>: 대학로에서 누굴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정신을 번쩍 차리는 은주.
은주: (너무나 다급하게) 아저씨 좀 빨리 가실 수 있으세요?
기사: 네……. 지금 가고 있…….
은주: (말 자르며) 빨리요……. 아저씨……. (소리를 지르며) 빨리!!!
기사: (은주를 힐끗 보며) 예…….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달리는 택시.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종이를 꺼내 편지를 써 내려가는 은주.
씬 105. EXT. POEM 앞 - 2000년 - DAY → 해질 녘
택시가 서고, 은주가 급하게 내려서 POEM을 바라본다.
편지를 움켜쥐고 우편함 쪽으로 달려가는 은주.
택시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은주가 돌아서서 택시를 향해 힘껏 달려온다.
택시를 마구 두드리는 은주. 쾅쾅쾅!
은주: 아저씨~~
택시가 끼익~ 선다. 창으로 얼굴을 내민 은주가 다급해 보인다.
택시 기사의 두려운 얼굴 표정.
기사: 왜~ 그~래요?
은주: 아저씨 봉투 있어요? 아무 거라도 좋아요.
기사: 봉투요? 이거밖에 없는데…….
주섬주섬 박스를 뒤지던 기사.
누런 봉투를 꺼낸다. 월급봉투인지. 그 안에서 만 원짜리 지폐들을 꺼낸다.
인사도 없이, 낚아채듯 봉투를 받는 은주.
얼른 차를 움직이는 기사. 먼지를 내며 멀어져 가는 택시.
우편함으로 달려가는 은주.
우편함을 조심스럽게 열고 편지를 넣는다.
입구를 살며시 닫고 나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숨이 고르지 않은 초조한 표정이다.
은주: 제발 빨리. 제발!!
숨까지 멈추고 있는 듯 한참을 그렇게 있는 은주. 천천히 우편함 입구에 손을 대본다.
편지가 갔을까? 열어보기가 두렵다. 몇 번을 망설이지만 결국 입구를 못 열어본다.
우편함 옆에 그대로 무너지듯 앉아 버리는 은주.
초조함을 달래려는 듯 눈을 꼭 감는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손을 모아 쥔다.
은주: (중얼거리듯, 대사가 가의 들리지 않는다) 제발……. 제발 빨리. 편지가 빨리 가야돼요. 제발……. 제발……. 성현씨가 이 편지를 받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은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은주. 울음이 복받쳐 흐른다) 성현씨, 거기 가면 안돼요.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편지가 늦지 않게 해 주세요……. 빨리……. 제발……. 빨리…….
시간 경과 (해질 녘)
중얼거리는 은주의 입술. 흐느껴 울진 않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
한참을 운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눈물이 멈춰지지 않는다.
이젠 기도도 멈추고,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힘없이 일어서는 은주.
우편함에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그저 잠시 간절한 마음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본다.
발길을 돌리는 은주.
은주소리>: 가면 안돼요. 거기 가지 말아요.
몇 발짝 옮기다 안타깝게 뒤를 돌아본다. 다시 우편함을 바라보는 은주.
다시 돌아서서 우편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은주소리>: 죽으면 안돼요. 성현씨. 미안해요.
점점 멀어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은주.
이제 저만치 멀어진 은주의 뒷모습. 우편함 주위로 휘리릭 나뭇잎들이 날린다.
신비로운 느낌의 바람이 우편함을 감싼다. 길지 않게…….
씬 106. INT. POEM 침실 - 1998년 - 아침
고요한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새소리라도 들릴 듯 평화로운 느낌이다.
한쪽에서 時越愛 그림과 도면들을 정성스럽게 정리하는 성현의 손길.
그림을 다시 꺼내 가만히 바라본다.
건축과 사무실에 걸려 있던, 아름답게 완성된 時越愛의 그림을 가장 첫 장에 두면서 가만히 스케치북을 덮는 성현.
창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는 성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편함에 시선을 둔다.
씬 107. INT. 은주집 - 2000년 - 아침
은주가 침대에 엎드려 있다. 밤을 새운 듯 부스스하다.
성현의 목소리>: 오늘은 전철안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가세요. 하긴 또 잃어버리면 제가 찾아드리면 되죠 뭐.
쭈~욱 뻗어진 은주의 팔. 한 손에는 성현이 찾아주었던 녹음기가 힘없이 쥐어져 있다.
위~~~~~~~~~~~~이~~~잉~~~
한참을 플레이되는 녹음기.
tape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깍!
성현의 목소리>: 오늘 은주 씨를 보고 나니 참 묘한 기분이더군요.
은주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는다.
성현의 목소리>: 갑자기 2년 뒤의 제 모습에 대해 궁금해 졌어요.
넋이 나간 표정의 은주.
성현의 목소리>: 2년이 지난 뒤에도 은주 씨 주변에 제가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은주.
성현의 목소리>: 우리는 만나질 인연은 아닌 가봐요?
위~~~~잉~~~~
눈을 꼭 감는 은주.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은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울먹이며) 가면……. 안돼요…….
FADE OUT.
씬 108. INT. 대학로(은주의 회상) - 1998년 - DAY
FADE IN.
창가에 앉아있는 은주와 지훈. 침울한 표정의 은주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지훈.
지훈: 은주야. 기운 내.
은주: …….
INSERT. 거리에서 카페 쪽으로 다가가는 성현의 뒷모습.
지훈: 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건데, 이렇게 무겁게 하기야?
은주: 지훈씨……. 기분이 이상해.
지훈: 왜 그래? 겨우 3년인데 뭐.
은주와 지훈이 앉아있는 창문 밖으로 성현이 Frame In 되어 나타난다.
은주: 이상하단 말야. 불안해 모든 것이~
카페 쪽으로 다가서는 성현. '끼~~~익!' 순간 성현의 몸이 허공에서 Frame Out되어 버린다.
은주와 지훈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씬 109. EXT. 카페 앞 길 (회상 계속) - 1998년 - DAY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군중을 이룬다.
심하게 다친 성현이다. 머리를 다쳐 얼굴이 엉망으로 피투성이이다.
이제 막 죽을 것 같은 모습의 성현. 주변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성현이 힘겹게 고개를 움직인다.
카페 안의 은주를 향하는 성현의 눈빛.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성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러나 카페 안에서 성현을 바라보는 은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FADE OUT 길게…….
은주소리>: 가지 말아요. 성현씨. 제발 부탁이에요. 사랑해요.
씬 110. EXT. POEM 앞 - 2000년 - DAY (3시경)
FADE IN.
(씬 1과 같은 장면)
현관문을 열고, 커다란 짐을 잔뜩 끌어안은 여자가 걸어 나온다.
한 발로는 문을 지탱하고, 조심스럽게 돌아서는 정숙. 얼굴이 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씬 111. INT. POEM 거실 - 2000년 - DAY
은주, 거실 탁자 위에 있던 편지지를 접으려다가 다시 펼쳐 몇 자 더 적는다.
편지를 가방에 넣는 은주. 콜라를 품에 안고, 집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깨끗한 욕실도 확인하고, 여기저기 둘러본다.
휑한 거실에 소파만 남아있다. 가만히 다가가서 소파의 흠을 만져보는 은주.
(씬 91에서 콜라가 물어뜯은 자국)
은주: (옆에 있던 콜라를 바라보며) 네가 그랬니?
콜라는 마치 지가 그랬다는 듯 한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본다.
그 때 밖에서 부릉거리는 용달소리와 눈이 내릴 거 같으니 빨리 가자는 운전기사의 재촉소리, 어서 나오라는 정숙이의 큰소리가 들리면,
은주: (밖에 대고 외치며) 네, 갈게요.
못내 아쉬운 듯 방 불을 모두 끄고, 집을 나서는 은주.
씬 112. EXT. POEM 앞 - 2000년 - DAY
은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책들을 잔뜩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 나온다.
입에는 카드봉투를 물고 있다.
은주를 쫓아 나오는 까만 강아지 한 마리.
집 앞 우편함 앞에 서는 은주. 카드를 입에 문 채 어떻게 넣어야 할지 난감해 한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유난히도 상쾌하게 느껴진 은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기분 좋은 표정의 은주. 옆에서 강아지도 폴짝폴짝 뛴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 은주.
갑자기 콜라가 왈왈 짖는다. 한 눈을 파는 사이 어디론가 달려 가버리는 콜라.
은주는 어리둥절 콜라를 부르려고 하다가, 입에 문 카드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콜라가 포엠 앞에서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있다.
가만히 서서보고 있는 은주. 의아하다.
콜라와 함께 은주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은, 성현이다.
콜라, 폴짝폴짝 뛰며 좋아한다.
성현, 우편함 앞으로 다가와 서며, 은주가 떨어뜨린 카드를 집어 들고 은주에게 건넨다.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환하게 보인다.
은주, 카드를 받으며 살짝 미소. 누굴까 하는 표정.
잠시 어색한 두 사람.
성현, 머뭇머뭇 주머니에서 은주에게 봉투 하나를 내민다.
누런 봉투 겉봉. <(주)대상운수 박상기 기사 ₩500,000> 라고 적혀있는 위에 볼펜으로 몇 줄 그어 지워져 있고, <한 성현> 이라고 고쳐 쓴 은주의 글씨(급하게 쓴 듯 마구 날려져 있는 글씨).
성현: (쑥스럽게) 지금부터 …….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의아해 하는 은주.
성현과 은주의 얼굴에 눈이 한 두 송이씩 떨어진다.
성현과 은주 주변을 도는 카메라. 성현 목소리가 main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간간이 들려온다.
약간은 어색하게 이야기하는 성현.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은주.
카메라가 점점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ending credit이 올라간다.
조금씩 떨어지던 눈발이 점점 커지면서 함박눈이 되고 있다.
정숙소리(o. s): 은주야―- 아저씨 열 받았다. 빨리 와!
아랑곳 않고 이야기하는 두 사람.
은주가 놀랍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밝게 웃는 모습이 보이고 성현, 함께 웃고 있다.
용달기사가 울리는 클락션 소리.
이젠 카메라가 제법 멀리 빠져 화면에 두 사람이 작게 보인다.
두 사람의 주변에서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 콜라. 계속 이야기하는 두 사람.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캐럴이 끝나면서 DJ 소리 이어진다.
DJ소리>: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은 만큼 오프닝 곡을 빙크로스비의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로 준비했습니다. 다가오는 1999년 12월 25일! 날씨. 눈 펑펑. 아주 큰 눈이 예상된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예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죠. 누구나 한번쯤은 기대해 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