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와 감리교회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근대역사는 당쟁, 부정, 부패, 쇄국, 망국, 식민, 분단, 전쟁, 빈곤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소망의 빛은 한 줄기 찾을 수 없던 절체절명의 시대였다. 그런 나라가 2021년에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 반열에 그 이름을 당당하게 올려놓았으니 망국의 한이 맺힌 지 111년 만에 이룬 쾌거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의 오명을 안고 있던 이 나라가 68년 만에 이룬 업적이기에 더욱 놀라웠다. 하나님의 은혜요 한민족의 저력이 빚어낸 알찬 열매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모르게 수고의 땀을 흘린 무명의 선진들이 있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올해 2025년은 한국감리교회는 선교 140주년을 맞이했다. 그 세월 동안 감리교회는 국가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역사의 기수였다. 그 중심에 미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공로가 있었다. 고종은 복음 전파를 금하고 교육과 의료에 국한하여 선교를 허가했기 때문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선교활동은 문맹국 조선에 구시대의 갑옷을 벗고 근대화를 향하여 힘차게 발돋움할 기회가 되었다. 오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이러한 선교의 결과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펜젤러의 선교활동을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에서 태어났다. 웨스터체스터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장로교회 부흥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다. 그 후 공립학교 교사로 있다가 사범대학 졸업 후 프랭클린 마샬대학에 재학 중에 랭캐스터제일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이때 감리교회로 적을 옮기고 1882년 감리교의 드류신학교에 입학했다. 1884년 엘라닷지를 만나 결혼하였고 1885년 한국선교사로 파송받아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그 후 그는 17년 동안 한국 복음화를 위하여 남다른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입국했을 때 20대의 아펜젤러는 키 180cm에 몸무게 90kg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1892년 안식년을 맞이한 그는 몸무게 63kg으로 홀쭉해졌다. 그때 그를 묘사한 글이 있다. “몸은 굽었고 얼굴은 초췌했으며 중년 밖에 안 되었는데 모습은 노인 같았다.” 이는 그가 한국 선교에 얼마나 헌신적으로 수고했는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바로 서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인해 외국인 여성의 입경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인천에 1달간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6월 21일에 인천에 재입국했다. 7월 19일에 서울에 들어왔고 29일에 정동에 도착했다. 5월에 들어온 스크랜턴 선교사가 구입한 주택의 한 공간을 예배처소로 구별하여 첫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10월 11일에 한국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정동제일교회의 창립일이 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한국감리교회의 공식적인 첫 교회로 140년 역사에서 감리교회의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한국 근대 역사의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고종이 윤허한 대로 교육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정식으로 학교 인가를 요청하고 1년 만에 학교부지와 교사를 마련하여 개교했다. 1885년 8월 3일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을 학생으로 받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여 명의 학생이 늘어났다. 1887년 고종은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사액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정부의 공식교육기관으로 인준받았다는 뜻이다. 그때 미감리회에서 선교비로 보내준 4천 달러를 가지고 서양식 건물을 건축했다. 1895년에는 조정에서 학비와 교사봉급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왕실 추천 학생을 받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위탁교육기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펜젤러는 교육만 하지 않았다. 복음전파의 기능을 충분하게 살려서 영어를 가르칠 때 성경을 본문 교재로 삼으면서 교육과 복음 선교를 달성했다.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은 아관파천,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충군애국적, 자주독립적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887년 아펜젤러는 한국 전역을 여행했다.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고양, 개성, 서흥, 평산, 황주, 평양을 둘러보았다. 1888년 4월에는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북부지방을, 10월에는 의주를 방문했다. 1889년 8월에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23일 동안 원주, 대구, 부산을 여행했다. 아펜젤러는 1888년 그해 1830마일(2945km)을 달하는 여행을 했다. 이는 선교현장을 답사한 여행이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문서선교에 힘을 쏟았다. 중국 선교사 올링거가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는데 그는 1887년 12월부터 배재학당의 교사이자 삼문출판사 사장으로 한국의 문서출판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정동예수교출판소, 미이미활판소, 한미화출판소로 불리기도 했다. 이 출판사는 학비가 없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벌 수 있는 일터가 되기도 했다. 이때 주시경(周時經)이 이곳에서 일하여 학비를 마련했고 한글 활자 조판업무를 담당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글성경 번역 사업에 집중했다. 영어, 독일어, 헬라어에 능통하여 언어의 천재였던 그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보고 성경을 번역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누가복음」(1890), 「보라달로마인셔」(1890), 「마태복음」(1892), 「누가복음젼」(1893), 「마가복음」(1895, 1898), 「마태복음」(1896, 1898), 「고린도전후서」(1898), 「신약젼셔」(1900)이다. 특히 1900년 9월 9일에는 「신약젼서」가 완간되어 감사예배를 드렸다. 1901년 아펜젤러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마치고 더욱 성경번역에 매진했다. 1902년 6월에 목포에서 성서번역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모이려고 했으나 목포에서 선교하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장기간 선교 현장을 비어둘 수 없다고 해서 목포에서 모이게 되었다.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는 먼저 목포로 갔다. 아펜젤러는 무지내교회 봉헌예배 참석하여 일본사람과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한 주 뒤에 출발했다.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목포를 향해 가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 때문에 함께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다가 그만 자신이 물에 빠져 순직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진정 한국의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온몸을 바친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빛나는 별이 되고 만 것이다.
미개했고 문맹국가였던 조선에 혜성같이 나타나 복음 선교의 텃밭을 가꾸던 조선의 농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 알의 밀처럼 썩어져 없어졌지만 하나님은 그 씨앗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다. 그의 제자 가운데 우남 이승만은 장차 건국의 대통령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주역이 되었다. 이제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200년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며 그런 희생과 헌신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선교대국으로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6).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
20대와 40대 아펜젤러 선교사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1885년 10월 11일 설립
한국선교본부가 있던 정동일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18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