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쯤이야 / 최미숙
막내아들과 가기로 했던 캠핑이 취소됐다. 몇 주 전부터 잔뜩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하필 계획했던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까지 비바람이 친다는 일기 예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마음을 접었는데 토요일 아침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해가 비친다.
부스스한 얼굴로 애꿎은 날씨를 원망하다 베란다로 향했다. 진즉부터 치워야겠다 마음먹었던 화분에 화풀이라도 하듯 소매를 걷어붙였다. 크고 작은 분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공간이 답답해 자꾸 눈에 났다. 허리도 안 좋고 일이 많을 것 같아 선뜻 나서지 못했는데 도와줄 아들이 있어 잘됐다 싶었다. 그래도 한때는 초록의 광 팬이 되어 화원과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는데 막상 없애려니 서운했다. 내 오랜 친구가 되었고, 꽃과 향기로 행복을 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열정이 식었는지 들여다보는 횟수도 줄었다.
단단하게 뿌리를 박은 놈은 필요한 사람가져가게 통째 버리고 나머지는 뽑아 줄기를 부러뜨렸다. 베란다가 온통 흙과 찢긴 식물로 가득했다. 집에 놔둘 것 몇 개만 한쪽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남편이 현관에 두면 아들이 카트에 실어 쓰레기 분리 수거장으로 날랐다. 그동안 죽어 나간 놈 때문에 빈 화분도 꽤나 됐다. 종지만한 것부터 항아리 크기까지 많기도 했다. 거기에 받침까지 더하니 나조차도 놀랄 정도다. 땀으로 범벅인 아들과 남편이 타박하는 데도 할 말이 없어 웃고 말았다.
살아 있는, 그것도 한창 꽃을 피우는 식물까지 댕강댕강 분질러 버렸으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장미 허브의 강한 향이 일하는 내내 코를 자극하며 아우성인데도 어쩔 수 없었다. 함께했던 그동안의 내 수고도 녀석들과 함께 사라졌다.
처녀 시절, 결혼해 넓은 집에 살게 되면 예쁜 정원을 가꾸리라 마음 먹었다. 시간 여유가 생기자 야생화와 실내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하나씩 들이기 시작했다. 좀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는 본격적으로 공간을 채웠다. 제발 좀 그만 가져오라는 남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내가 소망했던 바를 이뤄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아침마다 초록 식물을 보면 흐뭇했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화분을 갈아 엎고 분갈이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지옥 같던 마음이 차분하고 평안해지기도 했다. 주말 아침,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식물 앞에 앉아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씩 자라 마침내 꽃을 피우며 조급해하지 말라는 교훈을 넌지시 던지는 녀석들에게 한 수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자식 키우듯 정성스레 가꾸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나이가 들수록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좋아 보인다. 빈자리 없이 꽉 찬 화분이 빠져나간 베란다가 다시 휑하지만 마음은 개운하다. 그러다 보니 집안 곳곳 눈에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음이 동하는 날 또 한바탕해야겠다.
결국 피를 봤다. 사기 화분 하나가 현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아들이 나와 남편은 손도 못 대게 하며 치웠지만 쓰레기 봉지를 묶다 길쭉하게 삐져나온 조각에 오른쪽 가운뎃손가락 매듭 위를 베었다. 순간 살 사이로 피가 방울방울 배어 나왔다. 식물에게 준 상처의 대가였다. 그래, 오늘 내가 한 일을 용서해 준다면 그 정도쯤이야.
첫댓글 결론이 너무 귀엽습니다.
식물이 상처 받은 이야기네요.하하. 너무 창의적입니다. 그동안 소임을 다했으니 잘 떠났을겁니다.
공간이 환해졌겠어요. 새롭게 기분전환하시고 가볍게 지내시는 것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그래요, 맘 가시는데로 하심이 최고인 듯합니다. 마무리가 참 좋습니다.
나도 이것저것 키우다가 다 정리했습니다. 철마다 대표 화분 하나 사서 놓고 보다가
꽃이 지면 치웁니다. 엊그제 노란 국화화분 하나 가져 왔습니다..
화분관리도 부지런해야 하는데 참 여성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