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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시조 쓰기
이송희
우리 사회는 미디어 네트워크 문화가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시는 현재형이라는 말이 있다. 그 자장 속에서 오늘의 시가 창작되고 있다. 전통 서정시가 서정시의 동일화의 원리에 충실한 일관된 정서의 흐름을 심상으로 구축했다고 한다면, 오늘의 시는 이러한 일관된 흐름으로부터 이탈된 언어들이 다소 무질서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던져진다. 이는 디지털 문화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순간에 생산되고 빠르게 사라지는 문화적 속성과도 닮아 보인다. 순간의 제시가 관건인 시대에 문학은 어떤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오늘의 시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대해 끊임없는 변화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즈음, 우리는 시의 매우 중요한 장르적 요소인 ‘율격’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근대의 기계적인 음수율에서 벗어나 외형적인 운율보다는 심상에 의존하는 현대시에 이르러 외형적인 운율에 의존하는 시는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조’의 경우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인의 삶을 가볍고 얇게 압축해야하는 현대 사회의 담론을 일정한 틀을 갖고 있는 시조의 그릇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여전히 관건이 되고 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왜 시조이여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조가 기존의 형식에서 어느 정도의 변용을 허용하면서 운율을 잘 살릴 것인가? 운율을 잘 살리면 시조다운 시조가 되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 시조는 내용을 잘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인가를 문제 삼는 의구심과 함께 리듬에 대한 논의도 자연스럽게 언급되어 왔다. 이러한 물음은 시조의 현대성,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로 이어지며, 시조는 어디까지 왔고,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포괄된 논의로 확장된다. 시조는 음보율과 음수율에서 파생되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3장 6구라는 일정한 형식과 종장 첫 3글자, 5자 이상의 음보, 전체 4음보의 가락이 빚어낸 리듬은 시조의 불문율이다. 시조의 오래된 옷을 이 시대에 입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의견이 많이 있다. 정해진 시조의 리듬에 끼워 맞추듯 시조를 쓰는 것이 답이 아니라면 새롭고 참신한 내용과 표현으로 새로운 시조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이 말은 기존의 시조 리듬을 깨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조의 리듬이 어디까지 담아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시조의 내적 리듬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시조 쓰기에 대한 고민이 거기에서 시작된다. 현대 시조는 시조의 정형 안에서 내용 구성을 통해 자기만의 리듬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리듬에 맞춰 글자들을 풀어놓는 일이 아닌, 시조 형식에 충실한 시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결과를 독자와 향유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시조의 형식이라는 일정한 통제기제에 어떻게 말을 붙이는가를 내용과의 연장선상에서 철저하게 성찰하여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의 첫 머리에 젊은 시인 시조 몇 편과 최근 데뷔작 몇 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2.
첫날 밖의 다음날 모든 날의 이튿날 하루가 천천히 낡아가고 있다 그것을 쓰려고 한다 좋고 나쁜 또 다른 기분
어둠으로 끌리는 말 어둠으로 밀리는 밤 달아나는 사이 떠오른다, 첫 슬픔이 전체라는 책 첫은 자란다
책장을 넘기면 자꾸만 유일해지는 첫날 밖의 다음날 모든 날의 이튿날 없어도 있던 것처럼 검은 윤곽처럼 - 김보람, 「첫, 이튿날」, 시와표현, 2017. 11.
첫날이 아닌 모든 날을 이야기하는 제목부터 관심을 끈다. 화자는 이미 지나간 날이면서 낡아버린 날을 쓰려고 한다. 그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또 다른 기분과 같이, 양립되는 감정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두려움에는 용기가, 분노에는 용서가, 혐오에는 애착이, 열등감에는 우월감의 감정이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한다. 그래서 새로운 날은 역설적이게도 늘 낡아버린 날이 되고 만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늘 ‘첫’ 날은 낡아간다. 반복되는 ‘어둠’은 낡아간다는 이미지의 표현이다. “없어도 있던 것처럼”, “검은 윤곽”처럼 첫날은 낡아 간다. 그러므로 첫날은 자꾸만 유일해지는 날이다. 정말 첫날은 아니지만 첫날 같은 날이다. 어제와 그제와 과거도 있지만 어둠에 밀려 가버리고 또 오늘이 첫 날이 된다. 항상 새롭고 낯설 수밖에 없다. 시간의 무한한 연속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연속성 속에서 현재를 살아갈 뿐이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뿐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첫 날의 다음날 혹은 첫 날의 연장으로 읽힌다. ‘첫’이 자란다고 했으니 무한한 첫 날의 연장이다. 첫 날 밖의 다음 날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첫 날의 무한한 연장이고 첫 날의 다른 모습이다. 직관적인 언어표현과 불안한 음보가 존재하지만 낡아가고 있는 ‘첫’에 대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리듬으로 볼 수 있다.
점심엔 이걸 먹자 저녁엔 무얼 먹지?
두들기던 타자기에 늘어 붙는 한숨들이
재빨리 혀 끝에 모여 퇴근을 재촉한다
한 모금 들이키자 그제야 피어오른다
한밤중 봄꽃처럼 오므라졌던 내 입술이
쓴 맛을 맛보고서야 참 달다고 내뱉는다
불쾌한 쓴맛들은 내게로 와 득이 된다
말 빠른 맛의 궤도에 진입한 혀의 능력
하나로 점철되는 맛? 어디에도 없는 맛 - 이나영, 「쓰고 달다」, 열린시학, 2017, 겨울호
쓴 만큼 단맛을 느낄 수 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쾌락을 원하지 않는다. 쾌락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약기운이 다하면 우린 다시 고통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그저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이 단맛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사는 게 너무 쓰고 맵고 짜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평화나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일시적인 눈속임이고 망각이다. 말하자면, 고통 없이 강건한 원래적인 상태를 알 수 없고, 쓴맛을 모르고서 단 맛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고통 모두 온전한 자기 각성의 상태가 아니다. 인생의 아이러니와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쓰는 문학 역시 모두 결핍과 부재가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단 것도 쓴 것도 혼자만으로 온전할 수 없다. 시인은 ‘쓰고 달다’는 다소 이질적이고 서로 다른 맛의 조합으로 시조의 리듬을 생성한다.
움푹 팬 벼루 같은 밤, 그저 먹먹할 뿐 누가 붓 들었을까 번져 가는 바람줄기 말려볼 틈새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네
사라지지 않았는데 마지막이라 했네 어깨를 들썩이는 뒷그림자 굽어보며 강둑에 선 버드나무 머리칼만 흩날렸지
달빛 화선지처럼 펼쳐진 물결 아래
아래로 아래로만 깊숙이 박혀 있는
가슴 속 심지 같은 것, 아버지의 그 얼굴 이가은 「그 얼굴」, 시와표현, 2017. 12월호.
화자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가슴 속 심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기억하지 않고 추억하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다. 가슴 속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자, 먹먹한 밤과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시간이 밟힌다. 아래로 아래로만 박힌, 심지 같은 슬픔을 결국 어찌해 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다소 서정적이고 안정된 시상전개를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발표한 「둘도 없는 애인 재인」은 어감이 다르다. “너를 보면/ 도달하고 싶어져/ 힘껏 말야// 끓는점 잊은 물은 미지근한 온도에도/ 뽀그르, 미리 볼웃음 짓고 있으니 말야// 각진 마음/ 헤실헤실 녹아버린/ 얼음 같아//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이럴 수밖에 없이/ 냉각된 이 하루 속에 너마저 없었다면”에서 재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인데, 말장난처럼 ‘두 번이나(再) 반복된 사람(人)’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표현이 담겼다. “냉각된 이 하루 속”을 헤실헤실 녹여줄 ‘너’를 향해 힘껏 도달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스무 년 치 스스로를 양손으로 모아잡고 굽힌 허리 교육처럼 뻗은 팔은 계획대로 완벽한 스트라이크, 알람에 꿈을 깬다
‘이미’란 한 마디에 발끝이 걸려서는 일상은 공중묘기 데굴데굴 굴러가기 저만치 멀어져만 가는 볼링핀을 쫓아서
희망이 무첨가된 4분기 점수판에도 잘 닦인 소개서를 온 힘껏 굴려보냈어 트랙에 닿기 직전을 반짝이기 위하여 - 이중원, 「그 쇠공이 구르는 법」, 시와문화, 2017. 겨울호
화자는 꿈속에서 볼링공을 굴려 스트라이크를 친다. 볼링공을 잡듯 “스무 년 치 스스로”를 양손으로 잡고 그동안 배운 대로 허리를 굽히고 계획대로 팔을 뻗고 완벽한 스트라이크를 치지만, 그것은 꿈이었다. 첫 수에 많은 이야기들이 숨 가쁘게 담겨 있다. ‘이미’ 지나버린,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의 부사어에 발끝이 걸려서 잡을 수 없는 볼링 핀을 무너뜨리겠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상황이다. 일상에서는 “공중묘기”와 “데굴데굴 굴러가”는 상황을 잘 견뎌야 한다. 화자가 쫓아가는 볼링 핀은 쫓아갈수록 멀어져가는 삶의 목표다. “희망이 무첨가된” 아득하고 먼 길목에 또 한 번 “잘 닦인 소개서”를 힘껏 굴려보지만, 쉽지 많은 트랙 앞에 화자는 놓여 있다. “트랙에 닿기 직전” 반짝이기 위한, 쇠공의 화자가 여기 있다. 취업이라는 볼링 핀을 좇아 공중묘기와 데굴데굴 구르기를 반복하는 시적 화자의 안절부절 하는 걸음이 급박하게 담긴다. 내용의 전환이 무척 빠르게 일어난다.
오늘은 결심했지요, 당신과 함께 가기로 사산된 새끼 고래가 해변에서 부활하는 그곳은 은고사리 땅, 시작 없는 세상의 끝
북풍의 영혼들도 준비를 마쳤다네요 비워야 채워지는 평범한 진리를 익힌 암갈색 피크닉 상자도 잊지 말고 챙기세요
아무도 우리 여행엔 관심조차 없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당신이 돌아온 날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아파하고 있을 테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문지기처럼 종말 없는 예언을 찾는 중세기의 수도사처럼 출발은 도착 없어도 의미 있기 마련입니다
두 손을 흔드세요, 기약 없는 인사지만 눈물 없는 환송과 남겨진 존재를 위해 침몰한 범선의 항로를 잊지 못한 자를 위해 - 김상규, 「백색 돛의 항로」, 시와표현 2017, 12월호
‘백색’은 죽은 자의 혼령, 영혼의 존재를 표상한다. 북풍의 영혼들도 준비를 마쳤다고 했으니 이 범선은 죽은 자들을 위한 배로 보인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으므로 침몰한 범선은 침몰한 삶과 같은 의미다. 사산됐다는 것은 이미 죽어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시작이 없는 끝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화자는 인생을 소풍가듯 “암갈색 피크닉 상자”에 비유했다. 이 상자를 통해 “비워야 채워지는 평범한 진리를 익”혔다. 윤회나 환생도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인생의 미몽(迷夢)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느껴지는 듯하다.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이미 죽은 영혼이 다시 오는 것처럼.
방심하다 모인 감정 새 노트가 될 것이다 조만간 쓸 것이다 쓸 일이 있을 것이다 한 번만 사용한 서운함이나 두 번 볼 일 없으리라
쓰다 만 감정마다 X표 그리면서 뒷장을 기다린다 기다리다 뒷장이 된다 우리는 뒷장만 가졌다 버려질 것 알면서 - 김남규, 「이면지가 쌓인다」, 시조21, 2017, 하반기호.
이면지는 두 번 활용되는 종이다. 처음 썼던 감정은 폐기되고 다시 ‘새 노트로’ 써진다. 그 뒷면을 쓰는 것이다. 재활용은 시행착오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다시 쓰는 것이다. 이면지는 이면지로 재활용될 수도 있지만 그냥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만 사용한 서운함이나, 두 번 볼 일 없으리라고 말하고 있으니 다시 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면지는 기다리고 있다. 원래 앞장이 뒷장이 되고 뒷장이었던 곳이 앞장이 되는 것이 종이면서 우리 삶이다. “우리는/ 뒷장만 가졌다./ 버려질 것/ 알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면지로 활용된다. 처음 썼던 앞부분이 쓸모없게 될 때 이면지로 써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뒷장만 가진 존재가 된다. 다시 쓰기 부적당하거나 쓰임새가 없어진 것이다. 용지가 쓰임새가 있었으면 무엇으로든 쓰였을 텐데 쓰임새가 사라져버렸다. 표면과 이면, 그것이 뒤바뀌는 상황이다. 뒷장을 기다리다가 뒷전이 되는 존재다. “쓰다만 감정마다 X표”를 그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계속 부정하고 싶은 마음의 표시다. 자꾸만 감정을 버리다 보니 이면지가 쌓이는 상황이 반복된다.
빨리 와주세요, 빨리 파도치는 방파제
한 사내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다
달려온 구조대가 파도를 한 장 한 장 들춰냈다
끝끝내 아들은 미궁 속으로 사라지고
거액의 보험금을 아들 대신 안고 사라진 사내
몇 달 뒤
pc방에서 아들이 파도 앞으로 걸어 나왔다 - 정지윤, 「미궁」, 좋은시조, 2017, 겨울호
보험금을 노린 한 사내의 자작극을 그린 듯하다. 빨리 와달라고 구조대를 부른 후 파도치는 방파제에 주저앉은 사내의, “달려온 구조대가 파도를 한 장 한 장 들춰냈”지만 결국 아들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PC방에서 파도 앞으로 걸어 나온 아들, 포털을 통해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내는 보험금을 노린 사람으로, 화자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거액의 보험금을 아들 대신 안고 사라진 사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쓴 작품이다. 이런 사건·사고의 이면에는 누군가 이득을 취하고 무언가 개인적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고 없이 해고된 후 스낵카를 운전하는 사내 “힘겹게 독이 오른 간도 쓸개도 버리”고, “내장을 다 빼내도 잘라내도 죽지 않고” 꼿꼿이 살아가는 불사신 같은 존재를 해삼에 비유한 「해삼 같은 그 남자」 역시 시사적인 문제를 한 장 한 장 들춘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안 되고 내장을 다 잘라내도 죽지 않는 해삼에 비유된 사내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를 재생해서 살려내는, 강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다음은 제 3회 백수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신인의 노련한 리듬을 만나보자.
얼마나 간절해야 내 몸이 저리 휠까 당신의 깊은 심중, 전율처럼 콕 박힐까
노인은 접골원 앞에 꼬부라져 앉아 있다
마지막 화살일까 지팡이를 움켜쥐는 골목도 막다른 곳 나락 같은 담장 위엔
자벌레 제 몸을 휘어 한 걸음 내딛는다
한때 나는 애기살, 이미 떠난 통아 속 살 없는 사위 홀로 모질게 울었던가
깡마른 오늬바람이 손을 떨며 뼈를 챈다 - 이토록, 「활」, 좋은시조, 2017, 겨울호 (제3회 백수문학상 신인상 수상작)
고양이가 멀리 뛰려 할 때 몸을 움츠리듯이 활이 멀리 날아가려면 더 많이 구부려져야 한다. 시로 말하자면 상대방의 심중을 울리려면 활은 더욱더 구부려져야 한다. 심중에 감동을 주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독자들에게 내보내려면 활은 더 많이 몸을 구부려야 한다. 자벌레도 잔뜩 몸을 구부렸다 펴야 멀리 갈 수 있다. 애기살은 그냥 화살이 아닌, 작디작은 화살이다. 애기살을 감싸고 있는 통아는 활을 쏘면서 떨어져 나가는데, 이 애기살은 일반 화살보다 두 배 이상 멀리 날아간다. 작지만 비거리와 살상력이 더 크다. 더 멀리 날아가고자 하는 간절함, 더 멀리 뻗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저 노인처럼 등이 휘는 것이다. 휜다는 것은 그 만큼 삶이 간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휨은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더 멀리 날아가서 과녁에 제대로 박히기 위해 활이 더 구부러져야만 힘 있게 박힌다. 등이 휜 노인을 활에 비유한 이 작품은 단순한 기교가 아닌 노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통한 인생 전반의 통찰에서 우러나오는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용을 압도하는 언어의 힘이 이 시조의 리듬을 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지금까지 젊은 시조 시인들의 시적 감각과 삶에 대한 이해, 사물의 비유로 시상을 안정되게 전개하고 있는 두 부류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시조라는 정형으로서만 시조를 이해하고 있다면, 앞의 작품들 중 일부는 시조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각 장의 압축과 긴장보다는 한 수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연결문이거나 기존의 문법적 질서에서 다소 자유로워 보이는 시상전개,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산문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 등이 있기 때문이다. 종장이 명사로 끝나거나 짧거나 긴 음보 등도 거론될 여지가 있다. 문법적 논리와 율격적 휴지 사이의 긴장관계 행갈이나 연 갈이, 쉼표와 물음표, 말줄임표의 장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 일상적인 서술과는 다른 담론을 제시하는 대항적 자세가 없다고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시조에서는 순간에 생산되고 빠르게 사라지는 디지털 문화적 속성을 가진 이미지들 속에서 현대 시조 시인에게 던져진 물음과 모색이 절실하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시조가 일정한 주제의식을 담기 위해 기존 시조의 질서 안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기존의 규칙은 일정한 주어와 술어가 결합된 의미를 형성하지만 새로운 시조의 형태는 일정한 흐름이나 구조를 형성하는데 주술관계의 의미구조에 구속되지 않는 경향도 있다. 오히려 자유로운 이미지의 리듬 속에서 의미가 생성되고 그것은 보다 강한 리듬으로 재생된다. 시조를 선택하면서도 시조의 정형성을 벗어나려는, 다소 모순적인 의도에 대한 고민과 관심으로 시조 쓰기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시형의 정형과 일탈의 긴장을 섬세하게 다스리면서 시조에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가는 길이 우리 시조단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시조적인 것과 시조적이지 않은 것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한 과정들이 여기에 있다.
* 이송희 약력
2003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활성화지원금(2010)과 아르코창작기금(2013) 받음,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과 오늘의시조시인상 등 받음,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평론집 눈물로 읽는 사서함,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등이 있음, 전남대 국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