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 입구에 서면 가장 눈길을 끄는게 위엄있게 서있는 은행나무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꼽히는 퇴계 이황, 그리고 역시 당대의 학자이자 김굉필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가 앞장서서 이 서원을 지었다. 그리고 서원 건립을 기념하면서 심은 나무가 저 나무다.
1600년대 초반에 심은 나무가 400년 넘게 세월이 흐르니 저렇게 커다란 노거수가 됐다.
우리나라 절집이나 향교, 서원에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서원이나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이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위용을 자랑하는 은행나무는 서울 성균관의 은행나무, 도산서원: 퇴계 이황의 은행나무,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의 은행나무,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의 은행나무 , 해남 녹우당
: 고산 윤선도의 은행나무, 아산 고불 맹사성의 은행나무, 전주향교의 은행나무 등이 있는데
다행하게도 대부분 내가 둘러본 것들이다. 이런 은행나무를 가지고 책을 쓴 이들도 있다.
보통 은행나무가 덩치가 커지면서 밑동이 거대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렇게 옆으로 기괴할
정도로 넓게 퍼지는 은행나무는 드물다고 한다.
그리고 은행나무 뒤로 드디어 서원이다. 조선 서원 건축의 백미라는 도동서원이 이제 모습을
드러낸다. 서원 앞에 짓기 마련인 누각이 첫 번째 건물이다. 이름은 수월루
도동서원 은행나무의 위용








도동서원의 간판건물 수월루



제각

김굉필 유물전시관. 그러면 김굉필이 어떤분인지 알아보자
본관은 서흥(
瑞興), 자는 대유(
大猷), 호는 사옹(
蓑翁)·한훤당(
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
文敬)이다.
김종직(
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
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
李克均)에 의해 유일(
遺逸)로 천거되어 주부(
主簿)·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
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
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
鄭夢周)·길재(
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
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
治人)보다는 수기(
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
이장곤(
李長坤)·
김안국(
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
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
광해군 2)
정여창(
鄭汝昌)·조광조·
이언적(
李彦迪)·이황(
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
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
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
象賢書院), 순천(
順天)의
옥천서원(
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
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
경현록(
景賢錄)》《가범(
家範)》 등이 있다.





첫댓글 웅장한 자태에 기죽어 가는 내 모습......
저만 느낀건가요???^^
은행나무가.. 내나무였음.. 가지치기 했을텐데.. 아마도 보호수라서 아무도 손 못대고 방임되는것 같은느낌이네요~ 그래도 웅장함만은 살아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