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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전쟁, 정복, 파괴, 과거의 역사에서 강대국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데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 그랬죠. 그대는 강했으며 야망에 넘쳤고 서아시아 전역이 그들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죠. 이 제국의 수도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둘레만 20킬로미터에 달했고 18만명이 살았으며 거리엔 인도, 중국,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부터 온 상품들이 넘쳐났습니다. 바빌론은 오늘날의 맨해튼이었습니다.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정복자이자 건설왕이기도 했죠. 그는 바빌론이 세계의 중심임을 입증하기 위해 탑을 건설했습니다. 바벨탑입니다. 탑은 순전히 흙으로만 건설되었으며 오늘날의 30층 높이와 맞먹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 탑의 꼭대기에 도시의 主神인 마르둑을 안치했습니다. 마르둑은 모든 神들의 왕이기도 했죠. 하나 이 바벨탑 보다 후세에 더 유명해진 건 건축물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神이 아닌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이것, 바로 공중정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前 바빌론의 신전 에나겔에선 성대한 결혼식이 열립니다. 주인공은 바빌론의 젊은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과 동북쪽 메디아 왕국에서 온 아미티스 공주,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이 결혼식은 엄청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라 알주바위 바사/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장: 기원전 600년 경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메디아 국왕인 키악사레스와 연합하여 앗시리아 제국을 몰락시키려고 했습니다.
내레이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는 서아시아는 당시 바빌론과 앗시리아 동북쪽의 메디아 왕국은 팽팽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메디아 왕국의 키악사레스 왕이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써 세력 동맹이 깨지고 만 것입니다. 바빌론과 메디아 연합군은 앗시리아로 쳐들어갔죠. 결국 앗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수도인 나네베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맙니다.
팔라: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메디아와 바빌론의 강력한 동맹을 위해 메디아 공주인 아미티스와 결혼했고 기원전 612년에 앗시리아 수도인 니네베를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젊은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아미티스는 사랑스런 아내이자 또한 은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세상에서 누구도 가질 수 없고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선물을 아미티스에게 주기로 했죠. (공중정원 사진),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중정원입니다. 공중정원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훗날 그리스인들은 공중정원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그리하여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마우솔로스 능묘,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그리고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로도스의 크리이소스 대거상과 함께 바빌론에 있는 공중정원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마크 반 드 미에룹 교수 고고학자/미국 콜럼비아대학: 많은 그리스 작가들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이 웅장하듯이 공중정원도 멋진 건축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레이션: 사실 그리스인들 중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디오도로스 스트랍 에로소스와 같은 모험가와 군인들만이 운좋게 공중정원을 볼 수 있었죠. 이들은 자신들이 본 공중정원의 환상적인 풍경을 그리스인들에게 전했을 겁니다. 이곳이 그리스인들이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말한 바빌론입니다. 바빌론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1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죠. 한 때는 서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는 바빌론,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서 바빌론의 옛 영광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라크 바빌론 북쪽 왕국 유적), 단지 무너진 집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도로, 성채들 뿐이죠. 그나마 이 모든 유물들 조차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땅 속에 묻혀있었던 것들입니다. 그 잠들어 있던 바빌론을 다시 깨운 사람이 독일의 고고학자 콜데바이였죠.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독일의 고고학자 1899년부터 18년간 이라크 바빌론 유적발굴,
스테파니 달리 교수 고고학자/영국 옥스퍼드대학: 독일 발굴팀이 바빌론을 발굴했고 매우 훌륭하게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발굴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요새와 왕궁 대부분을 발굴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정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곳에 온 모든 방문자들은 공중정원은 어딨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내레이션: 콜데바이는 14년 동안 이곳에서 발굴을 계속했습니다. 그 역시 누구보다 공중정원을 찾고 싶어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돌로 된 아치와 이상한 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곳을 공중정원이라 단정했죠.
팔라: 1899년부터 세계 제1차 대전 초기까지 독일 고고학자 콜데바이는 바빌론시의 북동쪽에 있는 남쪽 왕궁이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는 아치형 방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14개의 아치형 방을 발견했고 그것이 공중정원의 기초라고 설명했습니다.
내레이션: 콜드바이의 주장은 한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것은 남쪽 궁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지하엔 이처럼 구운 벽돌로 견고하게 건축된 14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콜데바이는 이것이 공중정원의 물을 퍼올리는 기계실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테파니: 구운 벽돌로 쌓은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거대한 저장시설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벽돌에는 역청이 많이 발라져 있었고 아주 특별한 장소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콜데바이는) 매우 공중정원을 찾고 싶어 했기 때문에 아마도 이것이 공중정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 그러나 콜데바이의 주장과 달리 훗날 학자들은 이곳이 식량저장고이거나 지하 감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팔라: 그곳이 감옥이었다면 유대인 선지자 다니엘의 감옥으로 보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우스 왕의 명령으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내레이션: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공중정원은 바벨탑과 그리 멀지 않은 바빌론의 중심지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흙 무더기와 일부 복원된 잿빛 유적들만 즐비한 이곳, 그러나 이곳 어디쯤 공중정원이 있었을 것이고 2600년전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스 학자들은 공중정원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 포도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린 석류나무는 잔잔한 미풍에 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폭포수에서 튀는 물 방울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었다. 공중정원엔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유프라테스 강과 인접한 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팔라: 공중정원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넓은 기단이 있었고 그 위치가 유프라테스강 옆에 있어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안정된 물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발굴을 통해 콜데바이가 최초로 주장했던 공중정원의 위치는 왕궁 내부 알현실과 가까이 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죠. 때문에 최근 학자들은 유프라테스강과 인접한 성벽 안 쪽에 공중정원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왕궁 내에 여성거주지와 가깝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스트라보(Strabo)-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역사가 철학자, 실제로 1세기 그리스 학자 스트라보는 공중정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대한 이야기는 정원 양 옆에 수차였는데 수차의 임무는 하루 종일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퍼올려 정원에 붓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중정원은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건설했다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 만큼이나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고 논란은 많습니다. 과연 공중정원의 자리는 콜데바이의 주장이 옳을까요? 또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스테파니: 공중정원의 위치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궁과 정원 사이에 거대한 성벽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왕궁에서 나와서 바로 정원으로 갈 수 없었고 여러 겹의 성벽들을 통과해야 했을 것입니다. 왕실 정원이라면 왕이 왕궁에서 걸어 나와 바로 들어갈 수 있어야 왕실 정원인 것이죠.
내레이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스테파니 달리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공중정원은 바빌론이 아니라 바빌론 서북쪽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니네베 라는 도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립 이라크박물관 앗시리아 유물관), 니네베는 실로 웅대한 도시였습니다. 고대 오리엔탈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세운 앗시리아의 수도이기도 했죠. 니네베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기원전 700년경 세나 케립이 왕 위에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에 세나 케립은 방이 적어도 80개나 되는 왕궁을 건설했으며 도시의 영역은 700헥타르에 달했죠. 학자들은 훗날 그리스 사람들이 니네베를 바빌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바빌론은 神에게 향하는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니네베엔 神의 이름을 딴 성문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니: 세나 케립 왕이 니네베 성을 보수했을 때 성문들을 신과 여신들의 이름을 따 새로 짓거나 고쳤습니다. 그래서 니네베를 또 하나의 바빌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레이션: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관통하고 있는 티그리스 강,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유적), 강 주변에는 지금도 희미하나마 옛 앗시리아의 유적들이 평원의 황량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나 케립에 이어 기원전 7세기말 왕 위에 등극한 아슈르바니 세나 케립 왕은 앗시리아의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다 준다. 그는 왕궁을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도서관을 설립한 다음 온 나라 안에 있는 당시의 고대 문헌들을 모아 베껴 쓰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처럼 국가권력이 안정되자 지배자들은 전쟁보다 문화적 향유를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정원조성은 이제 앗시리아 왕들이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니네베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들은 당시 앗시리아인들이 정원을 어떻게 건설했는지 잘 나타냈죠.
스테파니: 영국 박물관에 있는 손상이 심한 부조 하나가 보존돼 있습니다. 또 박물관으로 가져오지 못한 사라진 그림 한 장이 있습니다. 이 두 이미지를 정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분명한 정보를 전해줍니다. 물이 수도교 끝에 이르러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며 갈래로 나뉘는 모습입니다. (니네베 정원 부조, 영국 박물관 소장),
내레이션: 실제로 이 부조를 보면 정원 전체에 어떻게 수로를 배치했으며 또 어떤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여 공급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물을 공급받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테파니: (주변) 산에서부터 니네베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수로시설이 있었습니다. 여러 하천들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고 정원의 높이에 맞게 물을 공급한 대단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것에 매우 경탄했을 것입니다.
내레이션: 니네베에서 40킬로미터 (이라크북부 자르완 수로유적) 떨어진 자르완, 지금도 세나 케립 왕 때 건설한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세나 케립은 이런 수로를 18개나 건설했는데 그 먼 거리를 방수와 수평을 유지하며 물을 끌어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앗시리아 왕들이 정원 꾸미기에 쏟아 부운 이런 엄청난 노력은 공중정원의 니네베 수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르베 르퀼로 박사 고고학자/프랑스 앗시리아학회: 문제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모두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고 했지 니네베의 공중정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왕궁 근처에 파라데이소스라는 정원이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레이션: 바빌론 왕의 알현실, 하지만 훗날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천하를 제패헸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그가 죽은 궁전 근처에 파라데이소스 라고 불리는 정원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한 파라데이소스라고 불렸다는 정원이 공중정원은 아니었을까요?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정복자였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미 오늘날 30층 높이에 해당하는 바벨탑의 건설자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결심한다면 공중정원은 얼마든지 건설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국립 아테네도서관), 그리스의 한 도서관, 우리는 이곳에서 공중정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또 한 명의 그리스 학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오도로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기원전 1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시실리 태생의 역사가였던 디오도로스는 세계 역사에 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제2권에서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원의 길이는 각 방향으로 123미터이고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졌고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극장을 연상시켰다.
콘스타티노스 코파니아스 박사 고고학자/그리스 아테네대학: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만들었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메디아 줄신이었고 고향의 산들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내레이션: 사막 한 가운데로 시집 온 아미티스는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는 심한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고 고향의 높은 산과 계곡, 맑은 물과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풍경을 몹시도 그리워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그런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죠.
하미드레자 사타리 교수/이란 시라즈대학 식물원: 고향의 풍경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을 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가 그리워하는 고향 풍경을 옮겨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바빌론의 건설자들은 사상 최고의 정원을 건설하는데 충분한 기술을 갖고 있었죠. 무겁고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그에 걸맞는 기반공사가 필요했고 건설자들은 충분한 깊이까지 모래를 파내야 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디오도로스는 공중정원 모습에 대해 꼭대기 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고 각 층에는 테라스가 있었다고 합니다. 각 층의 테라스 앞에는 돌기둥으로 된 복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레이션: 기반공사가 끝이 나자 기술자들은 먼저 지금 1미터 높이 5미터의 아치형 기둥들을 폭 123미터의 면적 위에 빼곡하게 세웠습니다. 그리곤 그 위에 견고한 돌판을 얹은 다음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테라스를 만들고 다음 층을 지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마치 경기장의 관람석을 연상케 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노스: 디오도로스는 복도는 천장으로 덮여 있었는데 천장에는 두꺼운 갈대를 한 층 깔고 그 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구운 벽돌과 시멘트를 덮었다 라고 합니다.
내레이션: 방수문제에 관한 한 바빌론의 기술자들은 최고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내려온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흙 건축기술을 통해 노하우를 갖고 있었죠. 먼저 흙 벽돌을 깐 다음 그 위에 납으로 된 판을 깔고 역청을 부어 덮었습니다. 그리곤 그 위에 흙으로 쌓아 나무를 덮었던 것입니다. (이라크 히트), 실제로 바그다드 서쪽 히트 지역엔 지금도 수천년 전 방식 그대로 역청을 채취하는 곳이 있습니다. (기원전 1800년 경부터 사용된 천연역청 우물), 사람들은 손에 흙을 묻힌 다음 재빨리 무른 역청을 뜯어서 건축 하단이나 배의 밑창에 바르곤 합니다. 처음엔 무르나 금방 단단해지고 접착력이 좋아서 방수효과엔 최고의 재료죠. 그렇다면 어떤 나무들이 심어졌을까요. 왕비의 향수병을 치료하고자 했으므로 당연히 왕비의 고향에 있는 꽃과 나무를 옮겨 오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곳은 바빌론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엑바타나였죠. 오늘날 이란 북부 하마단주의 주도인 이곳은 과거 엑바타나로 불렸으며 고대 메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이란 하마단 엑바타나), 해발 4000미터에 달하는 자그로스 산맥 중 1800미터 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서늘하고 강수량이 많은 곳입니다. (메디아 왕국유적), 주로 농경과 목축을 통해서 살고 있었던 메디아인들은 점차 국방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해 가면서 부를 축적했고 이곳에 거대한 궁전과 정원을 건설했죠. 그리하여 기원전 54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멸망될 때까지 엑바타나는 약100여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때문에 메디아의 궁궐에서 태어났던 아미티스는 사막과 달리 뚜렷한 계절 변화와 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 그리고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속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하미드 레자: 다른 지역보다 비가 많이 오고 습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나무와 풀이 잘 자랍니다. 이란 북부 지역에는 다양한 식생이 존재하며 잘 자랄 수 있는 요인으로 인해 풍부한 녹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역사적으로 이란 사람들이 갖는 낙원에 대한 묘사는 한결 같습니다. 천국은 푸른 녹지로 되어 있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가득하다. 그곳엔 꿀과 우유가 흐르며 수로 연못이 많다. 이런 이란인들의 낙원에 대한 인식은 고대 수많은 정원을 탄생시킨 배경이 됐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천국과 유사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싶어했죠. (이란 파사르가대 유적), 파사르가대 지금은 불모지와 다름 없으나 한때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였습니다. 파사르가대란 오늘날의 의미로 페르시아의 정원이란 뜻이죠. 놀라운 것은 이때 나온 가대, 즉 정원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정원이란 말이 여기에서 탄생됐던 것입니다.
세예드-아미르 만수리 교수 정원학자/이란 테헤란 대학: 16~17세기에 그려진 그림 중에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한 상상화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정원이 파사르가대 그리고 페르세폴리스에도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그러나 이 위대한 제국은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된 후 2300년 동안 평원에 버려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파사르가대 세계 최초의 정원수로 유적), 과연 이들은 어떤 정원을 건설했기에 훗날 유럽정원의 모델이 됐을까. 이것이 우리가 복원해본 파사르가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고대 이란의 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게 있습니다. 어디에든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있다는 것이죠.
세예드-아미르: 파사르가대 궁전에서 물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원에는 한 개의 수로와 정사각형 형태의 연못이 있는데 물이 정원을 휘감아 흐르게 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역활도 합니다. (이란 시라즈 에람정원), 고대 페르시아 정원, 즉 이란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의 양에 따라 정원의 규모가 결정됐죠. 보통은 맨 중앙에 수압에 의해 자연적으로 치솟는 분수대를 마련했습니다. 페르시아가 개발한 발명품이기도 합니다. 정원 곳곳에는 꽃을 비롯해 석류, 호두, 감 귤 등을 심었는데 이런 식물들 역시 수로의 방향에 따라 구역이 정해졌습니다. (이란 페르세폴리스 유적),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세폴리스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모든 영광과 예술이 하나로 모여 보석처럼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비탈을 깎아 15만 5천킬로미터의 구릉 위에 건설된 이 도시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페르시아의 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유적지 조사과정에서 이 건축물 곳곳에서 테라스, 즉 정원이 존재했음을 알게 됐죠.
세예드-아미르: (파사르가대에) 테라스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페르세폴리스에도 같은 형태의 테라스를 완벽하게 재현했습니다. 이 테라스들은 녹지였고 정원이었습니다.
내레이션: 궁전을 건설할 때 기술자들은 가장 먼저 수로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페레스폴리스는 산비탈에 있었기에 그곳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테라스에 흐르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곳은 건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사철 푸르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세예드-아미르: 페르세폴리스 벽면에서 이 유적을 볼 수 있는데 이란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메디아 시대로부터 온 문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그러나 공중정원은 나무를 구해오는 일부터 결코 쉽지 않습니다.
팔라: 아미티스는 고향이 이라크 북부나 이란의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고향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공중정원을 만들었고 전 세계의 나무를 모아 거기에 심었다고 합니다.
내레이션: 마차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짐꾼들은 석류나 야자 나무 등 200여 종류의 수목과 함께 온갖 진귀한 꽃들을 바빌론으로 옮겼죠.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나무들이 말라 죽지 않게 하는 것도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하미드 레자: 손쉽게 운반이 가능한 무게를 가졌거나 나무 크기가 클 경우 그 상황에 맞춰 분리하고 뿌리와 함께 운반했을 겁니다. 꽃을 피우는 나무와 겨울에 휴식기를 취하는 식물이 좀 더 옮기기가 쉽습니다.
내레이션: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엄청난 수량의 물을 어떻게 공급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기원전 1세기 그리스의 학자 스트라보는 바빌론의 기술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차는 정원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왔는데 계단과 평행하게 벌어져 있다. 수로였을 것으로 예상하나 아무도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스크류 펌프를 통한 물공급 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통은 그리스의 알키메데스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빌론에선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죠.
팔라: 기원전 40년경의 디오도로스는 공중정원이 7개 층으로 이루어졌고 꼭대기 층이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20미터가 더 높다고 했습니다. 맨 위 층에는 위에서 아래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내레이션: 이처럼 공중정원은 단지 하나의 정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비 아미티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방수문제 나무운반 수로의 배치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 등 바빌론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래 쌓아온 모든 지적 역량이 총결집된 예술작품이었던 것입니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은 혈관처럼 복잡하게 얼킨 수로를 따라서 정원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누구라도 이곳을 방문했다면 울창한 산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공중정원 내부엔 10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으며 그 방들의 중앙엔 너른 광장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천장을 통해 은은한 빛이 들어왔을 광장 가운데에는 더위를 식혀줄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공중정원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라는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가장 완벽한 파라다이스, 아미티스가 꿈꾸고 바빌론인들이 완성해낸 지상 최고의 낙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렀던 공중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아미티스 공주의 사랑으로 건설됐습니다. 먼 북방에 있는 산악국가에서 사막 한 가운데로 시집 온 아미티스가 향수병에 걸리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슬픔에 휩쌓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그녀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풍경을 고스란히 그녀 곁에 옮겨줌으로써 아내인 아미티스를 위로해 주고 싶었죠.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공주가 살았던 북방 메디아에 있는 수백종의 꽃과 나무들을 바빌론으로 가져왔고 그리하여 바빌론에 불가사의한 건축물 공중정원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마천루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엔 크고 장엄한 아름다운 이슈타르 문이 있었고 오늘날의 30층 높이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에사겔 신전과 공중정원이 바빌론의 스카이 라인을 형성했습니다. 바빌론의 영광은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바빌론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그가 죽은 지 43년만인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고 맙니다. 모든 것이 불타버렸죠. 바빌론의 상징이었던 바벨탑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군사용 전망대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파괴를 명령했다.
앤드류 조지: 바빌론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한 바빌론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그때까지 이미 1200년 간 수도였습니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바빌론 제국을 점령한 후에는 바빌론시는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방도시로 전락했습니다.
내레이션: 그 후 바빌론은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불길과 함께 바빌론의 영광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전설의 도시 바빌론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80회 위대한 바빌론 제3부 공중정원 에서 정리).
① 전쟁, 정복, 파괴, 과거의 역사에서 강대국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데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 그랬다. 그대는 강했으며 야망에 넘쳤고 서아시아 전역이 그들 손아귀에 있었다.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제국의 수도는 실로 놀라웠다. 둘레만 20킬로미터에 달했고 18만명이 살았으며 거리엔 인도, 중국,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부터 온 상품들이 넘쳐났다. 바빌론은 오늘날의 맨해튼이었다.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정복자이자 건설왕이기도 했다. 그는 바빌론이 세계의 중심임을 입증하기 위해 탑을 건설했다. 바벨탑이다. 탑은 순전히 흙으로만 건설되었으며 오늘날의 30층 높이와 맞먹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 탑의 꼭대기에 도시의 主神인 마르둑을 안치했다. 마르둑은 모든 神들의 왕이기도 했다. 하나 이 바벨탑 보다 후세에 더 유명해진 건 건축물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神이 아닌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이것, 바로 공중정원이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前 바빌론의 신전 에나겔에선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바빌론의 젊은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과 동북쪽 메디아 왕국에서 온 아미티스 공주,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이 결혼식은 엄청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② 기원전 600년 경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메디아 국왕인 키악사레스와 연합하여 앗시리아 제국을 몰락시키려고 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는 서아시아는 당시 바빌론과 앗시리아 동북쪽의 메디아 왕국은 팽팽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메디아 왕국의 키악사레스 왕이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써 세력 동맹이 깨지고 만 것이다. 바빌론과 메디아 연합군은 앗시리아로 쳐들어갔다. 결국 앗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수도인 나네베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메디아와 바빌론의 강력한 동맹을 위해 메디아 공주인 아미티스와 결혼했고 기원전 612년에 앗시리아 수도인 니네베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젊은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아미티스는 사랑스런 아내이자 또한 은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세상에서 누구도 가질 수 없고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선물을 아미티스에게 주기로 했다. 공중정원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훗날 그리스인들은 공중정원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마우솔로스 능묘,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그리고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로도스의 크리이소스 대거상과 함께 바빌론에 있는 공중정원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③ 많은 그리스 작가들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바빌론이 웅장하듯이 공중정원도 멋진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리스인들 중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디오도로스 스트랍 에로소스와 같은 모험가와 군인들만이 운좋게 공중정원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본 공중정원의 환상적인 풍경을 그리스인들에게 전했다. 이곳이 그리스인들이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말한 바빌론이다. 바빌론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1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 때는 서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는 바빌론,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서 바빌론의 옛 영광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단지 무너진 집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도로, 성채들 뿐이다. 그나마 이 모든 유물들 조차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땅 속에 묻혀있었던 것들이다. 그 잠들어 있던 바빌론을 다시 깨운 사람이 독일의 고고학자 콜데바이였다.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는 독일의 고고학자 1899년부터 18년간 이라크 바빌론 유적발굴,
④ 독일 발굴팀이 바빌론을 발굴했고 매우 훌륭하게 작업을 수행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발굴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요새와 왕궁 대부분을 발굴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정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곳에 온 모든 방문자들은 공중정원은 어딨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콜데바이는 14년 동안 이곳에서 발굴을 계속했다. 그 역시 누구보다 공중정원을 찾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돌로 된 아치와 이상한 방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곳을 공중정원이라 단정했다. 1899년부터 세계 제1차 대전 초기까지 독일 고고학자 콜데바이는 바빌론시의 북동쪽에 있는 남쪽 왕궁이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아치형 방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14개의 아치형 방을 발견했고 그것이 공중정원의 기초라고 설명했다. 콜드바이의 주장은 한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남쪽 궁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지하엔 이처럼 구운 벽돌로 견고하게 건축된 14개의 방이 있었다. 콜데바이는 이것이 공중정원의 물을 퍼올리는 기계실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했다. 구운 벽돌로 쌓은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거대한 저장시설 같은 것을 발견했다. 벽돌에는 역청이 많이 발라져 있었고 아주 특별한 장소인 것처럼 보였다. 콜데바이는 매우 공중정원을 찾고 싶어 했기 때문에 아마도 이것이 공중정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콜데바이의 주장과 달리 훗날 학자들은 이곳이 식량저장고이거나 지하 감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곳이 감옥이었다면 유대인 선지자 다니엘의 감옥으로 보인다. 다니엘은 다리우스 왕의 명령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⑤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공중정원은 바벨탑과 그리 멀지 않은 바빌론의 중심지에 있었다. 지금은 흙 무더기와 일부 복원된 잿빛 유적들만 즐비한 이곳, 그러나 이곳 어디쯤 공중정원이 있었을 것이고 2600년전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스 학자들은 공중정원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 포도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린 석류나무는 잔잔한 미풍에 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폭포수에서 튀는 물 방울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었다. 공중정원엔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유프라테스 강과 인접한 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중정원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넓은 기단이 있었고 그 위치가 유프라테스강 옆에 있어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안정된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발굴을 통해 콜데바이가 최초로 주장했던 공중정원의 위치는 왕궁 내부 알현실과 가까이 있다. 유프라테스 강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때문에 최근 학자들은 유프라테스강과 인접한 성벽 안 쪽에 공중정원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궁 내에 여성거주지와 가깝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⑥ 스트라보(Strabo)는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역사가 철학자, 실제로 1세기 그리스 학자 스트라보는 공중정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장 중대한 이야기는 정원 양 옆에 수차였는데 수차의 임무는 하루 종일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퍼올려 정원에 붓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중정원은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건설했다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 만큼이나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고 논란은 많다. 과연 공중정원의 자리는 콜데바이의 주장이 옳을까. 또 다른 주장도 있다. 공중정원의 위치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왕궁과 정원 사이에 거대한 성벽들이 있었다. 왕이 왕궁에서 나와서 바로 정원으로 갈 수 없었고 여러 겹의 성벽들을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왕실 정원이라면 왕이 왕궁에서 걸어 나와 바로 들어갈 수 있어야 왕실 정원인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스테파니 달리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공중정원은 바빌론이 아니라 바빌론 서북쪽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니네베 라는 도시에 있었다. 니네베는 실로 웅대한 도시였다. 고대 오리엔탈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세운 앗시리아의 수도이기도 했다. 니네베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기원전 700년경 세나 케립이 왕 위에 있었을 때다. 당시에 세나 케립은 방이 적어도 80개나 되는 왕궁을 건설했으며 도시의 영역은 700헥타르에 달했다. 학자들은 훗날 그리스 사람들이 니네베를 바빌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바빌론은 神에게 향하는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니네베엔 神의 이름을 딴 성문들이 많았다.
⑦ 세나 케립 왕이 니네베 성을 보수했을 때 성문들을 신과 여신들의 이름을 따 새로 짓거나 고쳤다. 그래서 니네베를 또 하나의 바빌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관통하고 있는 티그리스 강, 강 주변에는 지금도 희미하나마 옛 앗시리아의 유적들이 평원의 황량함을 지키고 있다. 세나 케립에 이어 기원전 7세기말 왕 위에 등극한 아슈르바니 세나 케립 왕은 앗시리아의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다 준다. 그는 왕궁을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도서관을 설립한 다음 온 나라 안에 있는 당시의 고대 문헌들을 모아 베껴 쓰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국가권력이 안정되자 지배자들은 전쟁보다 문화적 향유를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정원조성은 이제 앗시리아 왕들이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니네베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들은 당시 앗시리아인들이 정원을 어떻게 건설했는지 잘 나타냈다. 영국 박물관에 있는 손상이 심한 부조 하나가 보존돼 있다. 또 박물관으로 가져오지 못한 사라진 그림 한 장이 있다. 이 두 이미지를 정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분명한 정보를 전해준다. 물이 수도교 끝에 이르러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며 갈래로 나뉘는 모습이다.,
⑧ 실제로 이 부조를 보면 정원 전체에 어떻게 수로를 배치했으며 또 어떤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여 공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물을 공급받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 산에서부터 니네베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수로시설이 있었다. 여러 하천들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고 정원의 높이에 맞게 물을 공급한 대단한 시설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것에 매우 경탄했다. 니네베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자르완, 지금도 세나 케립 왕 때 건설한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나 케립은 이런 수로를 18개나 건설했는데 그 먼 거리를 방수와 수평을 유지하며 물을 끌어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앗시리아 왕들이 정원 꾸미기에 쏟아 부운 이런 엄청난 노력은 공중정원의 니네베 수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모두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고 했지 니네베의 공중정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왕궁 근처에 파라데이소스라는 정원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빌론 왕의 알현실, 하지만 훗날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천하를 제패헸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 생을 마감한 곳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그가 죽은 궁전 근처에 파라데이소스 라고 불리는 정원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한 파라데이소스라고 불렸다는 정원이 공중정원은 아니었을까.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정복자였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미 오늘날 30층 높이에 해당하는 바벨탑의 건설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결심한다면 공중정원은 얼마든지 건설이 가능했다. 그리스의 한 도서관, 우리는 이곳에서 공중정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또 한 명의 그리스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오도로스, 그는 시실리 태생의 역사가인데 세계 역사에 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제2권에서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다루고 있다. 정원의 길이는 각 방향으로 123미터이고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졌고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극장을 연상시켰다.
⑨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의 아내는 메디아 줄신이었고 고향의 산들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지었다고 한다. 사막 한 가운데로 시집 온 아미티스는 외로웠다. 그는 심한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고 고향의 높은 산과 계곡, 맑은 물과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풍경을 몹시도 그리워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그런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향의 풍경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을 앓지 않았나 생각한다.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가 그리워하는 고향 풍경을 옮겨 주기로 했다. 물론 바빌론의 건설자들은 사상 최고의 정원을 건설하는데 충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무겁고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그에 걸맞는 기반공사가 필요했고 건설자들은 충분한 깊이까지 모래를 파내야 했다.
⑩ 디오도로스는 공중정원 모습에 대해 꼭대기 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고 각 층에는 테라스가 있었다. 각 층의 테라스 앞에는 돌기둥으로 된 복도가 있었다. 기반공사가 끝이 나자 기술자들은 먼저 지금 1미터 높이 5미터의 아치형 기둥들을 폭 123미터의 면적 위에 빼곡하게 세웠다. 그리곤 그 위에 견고한 돌판을 얹은 다음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테라스를 만들고 다음 층을 지었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마치 경기장의 관람석을 연상케 했을 것이다. 디오도로스는 복도는 천장으로 덮여 있었는데 천장에는 두꺼운 갈대를 한 층 깔고 그 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구운 벽돌과 시멘트를 덮었다. 방수문제에 관한 한 바빌론의 기술자들은 최고였다. 그들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내려온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흙 건축기술을 통해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먼저 흙 벽돌을 깐 다음 그 위에 납으로 된 판을 깔고 역청을 부어 덮었다. 그리곤 그 위에 흙으로 쌓아 나무를 덮었다. 실제로 바그다드 서쪽 히트 지역엔 지금도 수천년 전 방식 그대로 역청을 채취하는 곳이 있다. 사람들은 손에 흙을 묻힌 다음 재빨리 무른 역청을 뜯어서 건축 하단이나 배의 밑창에 바르곤 한다. 처음엔 무르나 금방 단단해지고 접착력이 좋아서 방수효과엔 최고의 재료다. 그렇다면 어떤 나무들이 심어졌을까. 왕비의 향수병을 치료하고자 했으므로 당연히 왕비의 고향에 있는 꽃과 나무를 옮겨 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곳은 바빌론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엑바타나였다. 오늘날 이란 북부 하마단주의 주도인 이곳은 과거 엑바타나로 불렸으며 고대 메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 해발 4000미터에 달하는 자그로스 산맥 중 1800미터 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서늘하고 강수량이 많은 곳이다. 주로 농경과 목축을 통해서 살고 있었던 메디아인들은 점차 국방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해 가면서 부를 축적했고 이곳에 거대한 궁전과 정원을 건설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멸망될 때까지 엑바타나는 약100여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때문에 메디아의 궁궐에서 태어났던 아미티스는 사막과 달리 뚜렷한 계절 변화와 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 그리고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⑪ 다른 지역보다 비가 많이 오고 습도가 높은 지역이다. 이런 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나무와 풀이 잘 자란다. 이란 북부 지역에는 다양한 식생이 존재하며 잘 자랄 수 있는 요인으로 인해 풍부한 녹지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란 사람들이 갖는 낙원에 대한 묘사는 한결 같다. 천국은 푸른 녹지로 되어 있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가득하다. 그곳엔 꿀과 우유가 흐르며 수로 연못이 많다. 이런 이란인들의 낙원에 대한 인식은 고대 수많은 정원을 탄생시킨 배경이 됐다. 그들은 지상에 천국과 유사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파사르가대 지금은 불모지와 다름 없으나 한때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였다. 파사르가대란 오늘날의 의미로 페르시아의 정원이란 뜻이다. 놀라운 것은 이때 나온 가대, 즉 정원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정원이란 말이 여기에서 탄생됐던 것이다. 16~17세기에 그려진 그림 중에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한 상상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정원이 파사르가대 그리고 페르세폴리스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제국은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된 후 2300년 동안 평원에 버려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떤 정원을 건설했기에 훗날 유럽정원의 모델이 됐을까. 이것이 우리가 복원해본 파사르가대의 모습이다. 그런데 고대 이란의 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게 있다. 어디에든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있다는 것이다.
⑫ 파사르가대 궁전에서 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원에는 한 개의 수로와 정사각형 형태의 연못이 있는데 물이 정원을 휘감아 흐르게 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역활도 한다. 고대 페르시아 정원, 즉 이란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의 양에 따라 정원의 규모가 결정됐다. 보통은 맨 중앙에 수압에 의해 자연적으로 치솟는 분수대를 마련했다. 페르시아가 개발한 발명품이기도 하다. 정원 곳곳에는 꽃을 비롯해 석류, 호두, 감, 귤 등을 심었는데 이런 식물들 역시 수로의 방향에 따라 구역이 정해졌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세폴리스다. 고대 페르시아의 모든 영광과 예술이 하나로 모여 보석처럼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비탈을 깎아 15만 5천킬로미터의 구릉 위에 건설된 이 도시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페르시아의 궁전이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유적지 조사과정에서 이 건축물 곳곳에서 테라스, 즉 정원이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 파사르가대에 테라스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페르세폴리스에도 같은 형태의 테라스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 테라스들은 녹지였고 정원이었다.
⑬ 궁전을 건설할 때 기술자들은 가장 먼저 수로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다행히 페레스폴리스는 산비탈에 있었기에 그곳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테라스에 흐르도록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곳은 건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사철 푸르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페르세폴리스 벽면에서 이 유적을 볼 수 있는데 이란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메디아 시대로부터 온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공중정원은 나무를 구해오는 일부터 결코 쉽지 않다. 아미티스는 고향이 이라크 북부나 이란의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고향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공중정원을 만들었고 전 세계의 나무를 모아 거기에 심었다고 한다. 마차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짐꾼들은 석류나 야자 나무 등 200여 종류의 수목과 함께 온갖 진귀한 꽃들을 바빌론으로 옮겼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나무들이 말라 죽지 않게 하는 것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손쉽게 운반이 가능한 무게를 가졌거나 나무 크기가 클 경우 그 상황에 맞춰 분리하고 뿌리와 함께 운반했을 거다. 꽃을 피우는 나무와 겨울에 휴식기를 취하는 식물이 좀 더 옮기기가 쉽다.
⑭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건 엄청난 수량의 물을 어떻게 공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기원전 1세기 그리스의 학자 스트라보는 바빌론의 기술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수차는 정원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왔는데 계단과 평행하게 벌어져 있다. 수로였을 것으로 예상하나 아무도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스크류 펌프를 통한 물공급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보통은 그리스의 알키메데스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빌론에선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40년경의 디오도로스는 공중정원이 7개 층으로 이루어졌고 꼭대기 층이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20미터가 더 높다고 했다. 맨 위 층에는 위에서 아래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공중정원은 단지 하나의 정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비 아미티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방수문제 나무운반 수로의 배치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 등 바빌론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래 쌓아온 모든 지적 역량이 총결집된 예술작품이었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은 혈관처럼 복잡하게 얼킨 수로를 따라서 정원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누구라도 이곳을 방문했다면 울창한 산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공중정원 내부엔 10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으며 그 방들의 중앙엔 너른 광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천장을 통해 은은한 빛이 들어왔을 광장 가운데에는 더위를 식혀줄 목욕탕도 있었다. 공중정원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라는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가장 완벽한 파라다이스, 아미티스가 꿈꾸고 바빌론인들이 완성해낸 지상 최고의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렀던 공중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아미티스 공주의 사랑으로 건설됐다. 먼 북방에 있는 산악국가에서 사막 한 가운데로 시집 온 아미티스가 향수병에 걸리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슬픔에 휩쌓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그녀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풍경을 고스란히 그녀 곁에 옮겨줌으로써 아내인 아미티스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공주가 살았던 북방 메디아에 있는 수백종의 꽃과 나무들을 바빌론으로 가져왔고 그리하여 바빌론에 불가사의한 건축물 공중정원이 탄생했던 것이다.
⑮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마천루의 도시였다. 그곳엔 크고 장엄한 아름다운 이슈타르 문이 있었고 오늘날의 30층 높이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바벨탑이 있었다. 이 밖에도 에사겔 신전과 공중정원이 바빌론의 스카이 라인을 형성했다. 바빌론의 영광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빌론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그가 죽은 지 43년만인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바빌론의 상징이었던 바벨탑도 예외일 수 없었다. 군사용 전망대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파괴를 명령했다. 바빌론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한 바빌론 제국의 수도였다. 그곳은 그때까지 이미 1200년 간 수도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바빌론 제국을 점령한 후에는 바빌론시는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방도시로 전락했다. 그 후 바빌론은 재건되지 못했다. 불길과 함께 바빌론의 영광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전설의 도시 바빌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