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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2013 김경임 지음
안평대군의 이상향을 담아낸 안견의 그림 「몽유도원도」!
그 탄생의 배경과 유랑의 시간을 추적한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1447년 정묘년에 화가 안견에 의해 3일 만에 완성됐다. 조선의 황금시대인 세종조에 탄생한 이 서화는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때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893년 일본에 다시 등장한 이후 1950년 덴리(天理) 대학이 소장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는 어떤 의미를 담고 탄생하게 됐으며 어떻게 역사의 물결을 타고 유랑하게 됐는지 이 책에서 그 흔적을 찾아나선다.
이 책의 특징과 의미는
● 이제까지 「몽유도원도」는 화풍이나 그림의 내용 분석에만 치중하여 조명되어왔는데, 이 책에서는 「몽유도원도」의 시대적· 사상적· 문화적 탄생 배경을 살펴보며, 꿈의 주인인 안평대군의 삶과 문화적 이상을 추적하여 그림에 담긴 의도를 밝혀내고 있다.
● 교토 대학 나이토 고난 교수의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덴리 대학 스즈키 오사무(鈴木治) 교수의 『비브리아』(덴리 대학 도서관보)에 실린 내용에만 의존하여 「몽유도원도」를 해석하던 수준을 넘어 처음으로 한국 연구자의 시각에 의해 조사, 연구하여 「몽유도원도」를 총체적으로 조명했다.
● 고 박병선 역사학자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약탈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어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 관계에 쟁점으로 부각시킨 뒤 한불관계의 외교 회담에서 일순위가 외규장각 도서가 된 것처럼 이 책을 통한 「몽유도원도」의 존재 부각이 한일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책에서는 학문과 예술을 추구하고 많은 문객을 거느리며 「몽유도원도」를 남긴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의 삶을 복원해내고 있는데, 그의 묘소도 찾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의 유적 복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제1부 「몽유도원도」, 일본 땅에 나타나다
1928∼29년 무렵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라는 사업가는 교토 대학에서 정년한 나이토 고난 교수를 찾아가 한 고서화를 보여주었다. 나이토 고난 교수는 단번에 이 서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임을 알아보고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몽유도원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글이다.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과 함께 사라졌던 이 서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몽유도원도」은 1893년 11월 2일 자로 일본 정부가 발급한 감사증(鑑査證’. 우수 예술품이라는 일본 정부의 인증서)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해온 원래 소유자인, 가고시마의 사쓰마(薩摩蕃) 번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에 발급된 것이었다. 1931년 3월 22일부터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설립된 도쿄부 미술관에서 일반인에게 「몽유도원도」가 공개됐다. 이 전시는 조선 전 역사에 걸친 미술품이 골고루 전시됐는데 소조다 사이지가 「몽유도원도」를 출품했던 것이다. 이 전시에서 가장 찬사를 받은 「몽유도원도」는 조선 최고의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역사적 예술품이었지만,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대표하는 고서화로서 출품됐던 것이다.
제2부 조선의 황금기가 절정을 넘어가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이 개국하여 55년째 되는 해, 즉 세종의 치세가 절정을 넘어가는 1447년에 탄생했다. 문화 군주였던 세종의 지휘 아래 유교 국가의 기반이 되는 각종 제도와 문물이 정비됐는데, 1447년은 30년간의 상승 곡선이 절정을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다섯째와 일곱 째 왕자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병사했으며, 왕세자 향(珦. 문종)의 세자빈이 원손인 단종을 낳자마자 사망했다. 그 후 세손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새로 왕비와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다. 이런 정황에서 사직의 수성과 안녕을 위해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의 꿈을 꾸며 이를 「몽유도원도」로 그려 자신의 처신을 다짐하지만, 결국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린 향이 왕에 오르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
제3부 무릉도원 꿈의 주인 안평대군
세종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안평대군은 태종의 넷째 아들로 요절한 숙부인 성녕대군의 후사가 됐다. 따라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태종이 성녕대군을 위해 지은 대자암(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를 보관하고 있었을 사찰)과도 인연을 맺는다. 어린 나이에 안평대군은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어 학문과 예술을 추구하고 많은 문객을 거느리며 풍류를 즐기는데, 그는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나서 삼절(三絶)에 비유되곤 했다. 특히 송설체(松雪體.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 글씨에서 그는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조선 최고의 수집가로서 안평대군은 동진(東晋), 당, 송, 원, 조선, 일본에서 35명의 서화가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고 한다.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 즉 필명을 하사했는데, 이는 20대 초반에 학문과 예술에서 일가를 이룬 안평대군의 성취를 인정한 것으로, ‘게으름 없이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하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세종은 수양대군이 29세 되던 때에 ‘수양(首陽)’이라는 작호를 내리는데 이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고사한 백이숙제가 떠오르는 것으로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충절을 바치라고 명령했다고 볼 수 있다.
제4부 안평대군, 꿈속에서 도원에 노닐다
정묘년(1437년) 4월에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소요하는 꿈을 꾸고 이를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3일 만에 「몽유도원도」가 완성된다.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도원의 입구에 도달하여 무릉도원을 거니는데, 꿈의 배경은 1천 년 전 동진(東晋)의 시인 도잠이 노래한 「도화원기」였다. 도원은 단지 음풍영월의 자연이 아니라 절의의 시인 도잠이 제시한 은거지다. 따라서 안평대군이 도원에 도달했다는 것은 도잠의 은일과 절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는 그의 천성이 가리키는 산수 자연의 삶이 현재 궁궐의 삶과 조화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곧 왕자로서 활동해왔던 현실 정치에서 초연히 떠나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다.
제5부 「몽유도원도」 탄생하다
왕자의 사생활이 엄격히 감시되던 당시 상황으로 보건대, 무릉도원의 꿈을 그림과 찬문으로 남기는 것은 세종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림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이 그렸다. 그는 중국 여러 대가들의 화풍에 능했고, 또한 여러 화풍을 취합하여 자신만의 경지를 열었다. 「몽유도원도」가 북종파(북송대 직업 화가인 이지적 화풍) 화풍인 것으로 볼 때,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에서 북송 화가 곽희의 작품을 연구하며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그림을 완성시킨 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기(夢遊桃園記)」를 썼으며, 세종조 최고의 문사들을 비해당에 초청해 찬문을 짓게 했다. 그들은 당시의 유교적 현실에서는 쉽게 누릴 수 없었던 꿈과 도원이라는 이례적인 시제(詩題)를 두고 도가 사상가들이 예찬한 신선의 경지를 읊었다.
제6부 지상에서 무릉도원을 찾아내다
세종이 세상을 뜨고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창의문 밖 소나무 숲길을 걷던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보게 된다. 도원을 꿈에 본 지 3년이 지났건만 그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던 무릉도원을 지상에서 만난 것이다. 안평대군은 북악산 뒤쪽인 이곳에 별서를 짓고, 무릉도원 계곡이라는 뜻으로 무계정사를 열었다. 그리고 「무계수창시(武溪酬唱詩)」를 남기는데, 역시 무릉도원을 꿈에 본 이래 정치권에서 은퇴했음을 다시 밝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는 문종 즉위 이후에도 궁궐에 연연하는 수양대군에 대한 경고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제7부 계유정난으로 사라지고 흩어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반역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려던 고명대신들을 철퇴로 주살하고,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저택에서 체포하여 강화도로 압송한 뒤 교동도로 이송했다.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수양대군의 회유를 거절하고 교동도에서 죽음을 선택한 안평대군은 유체도 무덤에 관한 기록도 없다. 엄청난 재능과 부귀한 신분을 타고났으며 자신의 꿈과 결의를 찬양한 「몽유도원도」를 불후의 작품으로 남겼으나 그는 36세에 대역죄를 쓰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후 안평대군의 직계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교수형에 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학문과 예술, 삶의 현장인 비해당, 담담정, 무계정사도 없어졌는데, 특히 그의 서재가 있던 비해당의 1만 권에 달하는 서책과 고서화는 비해당과 함께 불탄 것 같다. 그렇다면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대형 서화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온전한 상태로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 안평대군이 어딘가 별처에 소중히 보관했기 때문은 아닐까?
제8부 기억과 역사 속에 떠오르다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일본 정부에 등록됐다. 이는 일본 근세 역사에서 활약했던 막말(幕末) 4현후(四賢侯)의 하나로 손꼽히는 걸출한 정치인이자, 가고시마의 사쓰마 번에서 배출한 최고의 영주로 숭앙되는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의 수석 가로(家老. 가신들의 우두머리)였던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徵)에게 감사증이 발급되면서였는데, 이는 「몽유도원도」가 시마즈 가문에 소장되어왔음을 말해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카리스마를 높이기 위해 막대한 보물과 토지를 부여하는 황실박물관을 건립하려고 소장품 확보를 위한 전국적인 보물 조사를 실시했다. 이즈음 1893년에 「몽유도원도」가 일본 정부에 등록되는데, 이는 400여 년 만에 시마즈 가문의 비장을 뚫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제9부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다
시마즈 가문이 「몽유도원도」를 소유하게 된 것은 1929년 「몽유도원도」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던 나이토 고난이 밝힌 것처럼, 임진왜란에 출전했던 사쓰마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전쟁 초반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대자암을 약탈하여 획득한 뒤 일본에 가져간 것이었다. 이후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수석 가로인 시마즈 히사나가에게 「몽유도원도」를 하사했으며, 히오키 시마즈가의 소장품이 됐을 것이다.
제10부 「몽유도원도」, 아직도 유랑 중인가?
「몽유도원도」는 히오키 분가에서 70여 년을 머물다 히오키 시마즈가가 1920년대 후반 세계 공황 때 파산하여 후지타 데이조(藤田禎三)에게 「몽유도원도」를 담보로 넘기면서 소유주가 바뀌었다. 이후 히오키 시마즈 분가는 다시는 「몽유도원도」를 되찾지 못하며, 이 서화는 가고시마의 사업가 소노다 사이지에게 매각되고, 그는 다시 이를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 넘겼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3년 정도 류센도에 보관되어 있다가 1950년 덴리교 2대 교주인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가 구입하여 오늘날 덴리 대학교 도서관에 수장하게 된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