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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점의 동궐도는 채색과 배경산수의 표현에서 약간의 차이만 보일 뿐, 규모와 표현 방법이 동일한 작품이며
두 점 모두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여 본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아대소장본
동아대 소장본은 현재 16폭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나 원래는 고려대소장본처럼 16개의 화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총 길이는 가로 584cm, 세로275cm이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30년(순조 30) 8월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이 불탔다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환경전이 그려져 있어 1830년 이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는 창덕궁 후원 내의 연경당(演慶堂)이 28년(순조 28)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배치도에는 연경당이 없다.
궁궐지에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이 24년(순조 24)에 소실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경복전기(景福殿基)로 불탄 자리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동궐도 는 1824년 경복전이 소실된 후부터 28년 연경당이 건립되기 이전까지의 기간 중에 그려진 것이다
.동궐도 화법 및 평가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시각으로,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 부분의 묘사방식은 남종화(南宗畵)의 준법을 따르고 있으나,
채색을 써서 입체적으로 그린 건물의 표현과 자연스러운 원근 처리 등에 있어서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작품은 도화서 화원들의 원숙하고도 절묘한 기법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으로서
《궁궐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 보다 입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과학기술사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각종 건물·시설·명칭 등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동궐도는 당시에 유행했던 화풍을 파악할 수 있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자료일 뿐만 아니라,
건축·조경·과학기술사·궁궐사 등 각 분야의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화려하고 장엄했던 조선후기 궁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옛 모습을 잃은 현재의 궁궐들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약도)
좌하에 돈화문이, 좌측에 궐내각사 와 선원전이, 중앙에 인정전 선정전이
대보단
위로부터 징광루 정훈각,가운데가 대조전과 희정당
돈화문과 회화나무
선정전과 궐내각사
왼쪽 인정전
창덕궁 仁政殿 동편의 궐내각사
동궐도에 따르면
인정전 서편과 동편, 남쪽에는
외조(外朝), 즉 궐내각사(闕內各司)로 불리는 여러 관청이 있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관청 중에서 육조(六曺)는 궁궐 밖에 있었으나 아래 건물은 궁궐 안에 있었다.
정승급 대신들이 회의하는 빈청(賓廳, 匪躬廳),
임금의 비서인 승지들이 근무하는 승정원,
언관(言官)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대청(臺廳),
문한을 담당하는 홍문관(弘文館),
제찬(制撰)과 사관(史官)의 임무를 담당한 예문관,
옥새와 인장을 관리하는 상서원,
의복과 용품을 담당하는 상의원,
음식과 그릇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
의식을 치를 때 장막 등을 공급하는 전설사,
궁궐의 청소를 담당하는 전연사(典涓司),
말을 관장하는 태복시(太僕侍),
내관(內官. 宮官. 內侍)들이 거처하는 내반원(內班院),
세자가 공부하는 시강원(侍講院),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내의원
등은 궁궐 안에 있었다.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경복궁의 경우 궐내각사는
근정문과 흥례문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 국립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동궐도에 따르면
먼저 2품 이상의 대신과 비변사 당상, 그리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여 회의하는
빈청은 인정전 동남방에 있었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정도의 비교적 큰집이다.
원래는 온돌이었으나, 숙종 때 온돌을 철거하고 판헌(板軒, 마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반 신하들이 사용하는 궐내각사 중 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편이고,
한적한 곳에 독립되어 있어서 특별히 예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순종 대 이후 이 건물은 어차고(御車庫)로 이용되었다.
어차고 안에 순종이 일제 강점기에 타던 자동차, 왕조시대의 각종 가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마 중에는 정조가 수원 화성에 행차할 때 탔다는 가마도 보인다.
우리가 수원능행도 병풍이나 능행반차도에서 보는 가마와 그 모습이 같다.
어쨌든 어차고는 궁 안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동차 길을 만들기 위해 인정전 남쪽 전당들이 헐려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창덕궁이 순종 재위기간과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변용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동궐도를 보면
빈청 뒤쪽에 한 칸짜리 조그만 집이 있다. 회장실인 측간(厠間)이다.
그리고 빈청 담 밖에 우물이 있다.
신하들이 근무하는 곳이므로 물과 회장실은 필수였을 것이다.
빈청에서 나와 북으로 올라가면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선정전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빈청에서 회의를 마친 대신들은 이 길을 따라 임금을 만나기 위해 선정전으로 갔던 것이다.
연영문을 중심으로 서편으로
대청(臺廳) 은대(銀臺) 상서성(尙書省) 문서고(文書庫) 당후(堂后)
우사(右史) 선전관청(宣傳官廳)이 차례로 있다.
대청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궁궐에 들어왔을 때 대기하면서 서로 협의하는 회의 장소다.
대청 바로 위에는 은대가 있다. 은대는 승정원의 별칭이다.
도승지 부승지 등 승지(承旨)와 7품 하급관리인 주서 (注書)가 속해 있다.
승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하고 상소문을 왕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비서기관.
왕이 내린 문서와 왕에게 올라간 모든 문서들을 기록하여 「승정원일기」를 편찬했다.
주서의 근무소는 승정원 북쪽에 있어 堂后라고도 한다.
주서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예문관 사관(史官)과 함께 임금의 언행을 기록했다.
그래서 승정원과 당후는 서로 인접해 있고 당후와 右史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우사는 바로 예문관에서 파견된 사관을 말하는데 좌사(左史)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는 행동을 기록했다.
尙書省은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없으나, 승정원과 나란히 붙어 있고 또 그 앞에 문서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승정원의 도서를 관리하는 곳으로 보인다.
선전관청은 선전관이 근무하는 곳이다.
선전관청은 군무(軍務)와 관련되는 왕명을 출납하고,
표신(標信, 조선후기 궁중에 급변을 전하거나 궁궐 문을 드나들 때 쓰던 문표)을 관장하며 취라(吹螺)와 군악(軍樂)을 관장하는 곳으로 말하자면 임금의 호위를 맡은 관청이다.
선전관청에는 무과에 합격한 자 중에 서 가문이 좋은 사람이 들어갔다.
그 반면 무과에 합격한 뒤 가문이 좋지 않은 사람은 수문장청에 들어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선전관청에는 60명의 조라치(照羅赤)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노란 옷을 입고 초립을 썼다.
이상 여러 관청이 임금의 편전인 선정전에 가까이 있는 것은 항상 임금과 가까이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연영문 동편으로는
공상청(供上廳), 주원(廚院), 궁방(弓房), 장방(長房) 정청(政廳), 내반원(內班院)이 배치되어 있다.
공상청은 궁중의 음식 재료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주원은 궁중의 음식과 그릇을 제조 공급하는 사옹원의 별칭이다.
사옹원에서 쓰는 그릇은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사옹원 분원(分院)에서 직접 제조해서 공급했는데 분원에서 만든 사기(沙器)는 최고급품으로 인정받았다.
궁방은 궁에서 쓰는 활과 화살촉을 만드는 곳이고,
장방은 원래 부리(府吏)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옥관(獄官)의 문초를 받은 죄인들을 가두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다.
정청은 인사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문관의 인사는 이조(吏曹)가 맡고, 무관의 인사는 병조가 맡았으나, 담당관원들이 궁궐에 들어와 인사를 처리했다.
인사이동이 있을 때는 조보(朝報)라는 관보(官報)를 발행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내반원은 내관(內官) 즉 거세된 내시(內侍)들이 거처하고 내시부(內侍府)라고도 한다.
내시는 궁중의 음식 감독, 문 관리, 왕명 전달, 청소, 정원관리 등 잔심부름을 한다.
내시는 고려시대만 해도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내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정치 간여를 막았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내시가 되었고 후손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갔다.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일명 내시의 산)에 천여 기가 넘는 내시와 궁녀의 무덤이 훼손되고 있다는 취재보도가 나왔고, 2002년 3월에 초안산의 집단묘역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은대와 대청, 선전관청, 공상청, 사옹원 등은 모두 없어지고 넓은 빈터에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의 재발견 - 창덕궁 김영대
성정각과 관물헌, 중희당이
연경당과 부용지 일원
옥류천
인정전
존덕정,폄우사, 아래에 어수당 애련정 의두합
중희당 삼삼와 승화루
진선문 인정문 양지당 선원전, 궐내각사
후원
고려대에서 동궐도 영인본을 보고 난후에 서울대에서 복사본을 보고
바로 ‘동궐도’다 라고 외치는 학생들을 보니 역시 백번 듣는 것보다는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선현들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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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통의 고려대,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조화를 잘 이룬 교정은 마치 유럽의 성을 보는 듯하고
박물관의 잘 전시된 유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박물관, 부산시 서구 동아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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