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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파에 나타나는 한국의 정형시, 시조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사)한국문협 부이사장)
1. 들어가는 말
1930년에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은 우리문학사에서 순수서정시를 게재했던 잡지로 잘 알려져 있다. 순수시는 개인의 정서에 중점을 둔 시이며, 《시문학》은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의 경향을 많이 받은 잡지이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창간호가 발간된 후 1930년 5월과 1931년 10월 3호를 끝으로 종간돼 아쉬움이 크지만 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크다. 그런데 순수시 잡지로 알려진 《시문학》에 우리의 정형시, 시조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논문에서는 《시문학》에 실렸던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에 대해 살펴보고, 아울러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에 나타나는 시조형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문학》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제1호는 편집에 급한 탓으로 연구 소재가 없이 되었다. 앞으로는 시론, 시조, 외국 시인의 소개 등에도 있는 힘을 다하려 한다."라고 적고 있다. 1930년 영랑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며 편집과 재정을 맡았던 광주 광산 출신 용아 박용철은 이미 《시문학》 1호에 「비 내리는 날」이라는 시조를 발표했다. 2호에도 박용철은 「우리의 젖어머니」라는 3수로 된 연시조를 발표했고, 수주 변영로 역시 「고운 산길」이라는 제목 아래 3편의 시조를 2호에 발표했다. 또 박용철은 「애사哀詞 중에서」라는 큰 제목 아래 「그대의 돌아가신 날」 등 6편을 제3호에 실었다.
영랑은 1호에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 2호와 3호에 각각 「사행소곡 5수」 등 제목부터 사행소곡라고 이름 붙인 다수의 사행시를 《시문학》에 발표했다. 「오-매 단풍 들것네」로 잘 알려진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도 역시 4행 2연으로 된 시이다. 영랑은 유독 4행시를 많이 남겼다.
시조가 초장, 중장, 종장의 3장을 갖춘 시인데 반해 영랑이 주로 쓴 이런 사행시는 말 그대로 네 줄로 된 시이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 각 장이 4음보이고 종장의 첫 음보는 3글자(3음절), 두 번째 음보는 5글자(5음절)에서 7글자(7음절)까지라는 규칙이 있지만 4행시는 자유로운 시다. 4행시라 하여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
김영랑이나 김현구의 4행시는 거의 4음보 율격으로 되어 있다.
“《시문학》지가 3호로 종간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시조가 실렸을 것이고 김영랑 시인도 어쩌면 시조를 창작하였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족적을 봐서도 그렇다.”고 유헌 시조시인은 말하고 있다. 강진 출신 김현구도 《시문학》 2호와 3호에 시조처럼 각 행을 4음보로 처리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김영랑의 사행시와 함께 김현구의 사행시도 살펴보고자 한다.
용아 박용철이 34세로 요절했고, 영랑과 현구는 한국동란의 희생자가 돼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한국문학사에서는 아쉽고, 또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정인보가 시문학지에서는 번역시만 발표했다는 점도 아쉽다. 정인보는 1926년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제창했을 때 이병기, 이광수, 이은상 등 당대 최고의 시조시인들과 국민문학파라는 이름으로 시조부흥운동을 펼쳤던 문인이다. 전조선문필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정인보는 순수 우리말을 주로 골라 쓴 시조 46편의 『담원시조집』을 출간할 정도로 시조를 사랑했지만 《시문학》에서는 그의 시조를 찾을 수 없다.
2. 《시문학》에 게재된 시조
《시문학》을 통해 활동했던 시인들은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김현구, 신석정, 허보, 변영로 등 9인이다. 《시문학》은 순수시를 표방하며 1920년대의 프롤레타리아문학과 국민문학파에 대한 변별적인 특성으로 어떤 목적성이 없는 순수서정을 추구했다. 그런 《시문학》에 시조가 실려 있으나 그 동안 누구도 시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박용철은 《시문학》 1호에 「비 내리는 날」이라는 시조를 발표했고, 2호에는 「우리의 젖어머니」라는 3수로 된 연시조를 발표했고, 수주 변영로는 「고운 산길」이라는 제목 아래 3편의 시조를 발표했다. 또 박용철은 「애사哀詞 중에서」라는 큰 제목 아래 「그대의 돌아가신 날」 등 6편을 제3호에 실었다. 시문학파 시인들도 사랑하여 시문학 잡지에까지 실었던 시조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시문학》을 1920~30년대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 영역(領域)의 잡지로만 생각하여 시조시인들이 접근을 하지 않은 점도 있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시조를 소홀히 평가했다는 깊은 반성도 해야할 것이다.
시조는 신라의 향가를 근간으로 하여 고려 중엽에 만들어지고 고려말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천 년 전통의 우리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시조는 4음보의 율격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나라 어휘 중에는 주로 3글자(음절), 4글자(음절)가 많아 우리 민족의 언어 호흡에 가장 잘 맞는 형식이고, 짧고 외우기 쉬워 전파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시조가 오늘날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시가로 이어지기까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조에 대한 사랑이 끊이지 않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한국의 대표적 시가문학으로 소개할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지금껏 이어져 온 ‘시조’가 분명하다. 시조가 품은 압축과 절제, 긴장과 이완의 묘미야말로 세상 어느 곳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한국인의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고 있다. 한국의 현대시조는 개화 시조의 출발점으로 육당의 「국풍사수(國風四首)」(1907)라는 견해가 통설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래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1906년 7월 21일)에 두어야 한다는 박을수와 남궁억의 「무제(無題)」(1906년 봄)로부터라는 견해(서벌) 등의 이론이 제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최초의 현대시조로 1906년 7월 21일에 발표된 대구여사의 「혈죽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남궁억의 다음 작품이 최초로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기초 다져 놓고
청초호靑草湖 자유수自由水를 영嶺 너머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 강산을 이뤄놓고 보리라
-남궁억, 「무제(無題)」 전문
중부대 교수였던 신웅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남궁억 선생의 이 시조는 1906년 봄에 쓴 작품이다. 1906년 7월 21일 사동우 대구여사의 「혈죽가」에 앞서 발표되었다. 육당의 국풍 4수(1907)와 함께 개화 시조의 출발점으로 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이 없는 시조인데 시조시인 서벌이 ‘무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개화기 시조는 형태상 고시조의 형식이나 내용상은 독립, 저항, 비판, 개화, 신문명 등 시대 정신을 담고 있어 고시조와는 확연히 구분된다.”고 했다.
아동문학가이며 시조시인인 허대영은 “「무제(無題)」는 남궁억 선생이 1906년 7월 20일 개교한 양양 ‘현산학교’에서 ‘국문’과 ‘한문’을 가르친 이홍영 선생의 일기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한 시기는 ‘남궁억 선생이 양양군수로 부임하고 봄의 전춘회 장소에서’라고 하였다. ‘전춘회’란 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모임이므로, 신문에 게재된 것이 7월 21일이었던 ‘혈죽가’보다는 몇 달 앞선 작품이다. 작품 출처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905년에 을사늑약에 의해 한국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했으며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분개해 자결했다. 1906년에는 최익현,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했다. 이러한 시기, 이 시조에는 설악산의 돌을 날라서 독립의 기초를 다져놓고 청초호 물을 영 너머로 실어 넘겨 자유 민주주의 강산을 이루겠다는 남궁억의 강한 의지와 염원이 나타난다. 초장은 독립과 민족주의 사상, 중장은 자유와 민주주의 사상, 종장은 자강·개혁인 근대화사상을 말하고 있다. 남궁억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06년 1월 강원도 양양군수로 부임하자 그해 7월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작품은 현산학교를 설립하기 전에 썼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일단 현대시조가 시작된 것은 1906년이라고 볼 수 있고, 1926년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라는 운동을 벌였던 최남선 때문에 현대시조에 대한 인식은 문단에 잘 알려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박용철은 아래와 같은 시조를 《시문학》1호에 게재했던 것이다.
기세도 없이 온 하루 내리는 비에
내 맘이 그만 여위어 가나니
아까운 갈매기들은 다 젖어 죽었겠다
-박용철, 「비 내리는 날」 《시문학》 1호
위 시조는 박용철의 「비 내리는 날」이다. 제목이 있는 현대시조이며 단시조이다. 단시조는 시조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고, 순간의 감정을 진솔하게 노래하는 단시조는 정서 중 절정의 한순간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이다. 3장 6구 12음보의 짧은 글이지만, 그 의미만은 얼마든지 길 수 있는 언단의장(言短意長)의 형태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비 내리는 날의 감상에 젖은 서정시조라고 할 수 있다. 《시문학》에서 표방하는 순수라는 집필 방향과 맞게 어떤 목적이나 교훈성이 없는 순수한 개인감정을 읊은 순수시조인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비 내리는 날 그리움으로 내 맘이 여위어 간다는 것과 갈매기들이 다 젖어 죽었겠다고 비에 젖은 갈매기를 상상하며 연민과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
비 끝에 개인 하늘 물들 듯이 푸른빛을
나뭇잎 겨르며도* 제철 일러 수줍은 듯
엷어 덜 짙은 채 더욱 고와 보이더라
*
뫼 빛도 곱거니와 엷은 안개 더 고와라
고달퍼서만 걸음 뜨랴** 빨리 걸어 무엇하리
늘잡다*** 올길 늦기로 탓할 줄이 있으랴
*
골마다 기슭마다 뿌린 듯한 붉은 꽃들
제대로도 고운 뫼를 헤프게도 꾸몄고야
어느 뉘 집에 묻히랴 집 사를가 하노라
*겨르며도: 서로 견주어도
**걸음 뜨랴: (걸음이) 더디고 느리겠느냐
***늘잡다: 기한이나 길이 따위를 넉넉히 늘려잡다
-수주 변영로, 「고운 산길」 3수 《시문학》 2호
수주 변영로의 「고운 산길」은 세 수가 실렸는데, 이것을 단시조 3편으로 보아야 할지, 연시조 3수짜리 한 편으로 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계절이 다른 것 같아 단시조 3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처음의 작품은 ‘비 끝에 개인 하늘 물들 듯이 푸른빛을/ 나뭇잎 겨르며도* 제철 일러 수줍은 듯/ 엷어 덜 짙은 채 더욱 고와 보이더라’라고 하여 비 개인 하늘이 나뭇잎과 푸른 빛을 겨눈다고 보았다. 제철 일러 수줍은 듯의 의미는 아마 새잎이 날 때가 아닐까. 그 나뭇잎이 엷어 덜 짙은 것이 더욱 고와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종장에서 시조의 형식이 어긋나 있다. ‘엷어 덜 짙은 채’ 부분인데 종장 첫 구의 규칙을 깨고 있다.
초장: 3/4/3(4)/4
중장: 3/4/3(4)/4
종장: 3/5/4/3
의 시조형식에서 종장의 첫 구는 ‘3/5’가 되어야 정상인데 여기서는 ‘2/4’로 되어 있어 파격을 보이고 있다. 중간 작품은 ‘고달퍼서만 걸음 뜨랴 빨리 걸어 무엇하리’라고 하여 중장 첫 구, 첫음절이 5글자(음절)이라 표준 글자수에서 2글자(음절) 늘어난 상태다. 내용은 산도 곱지만 그 산에 깔린 엷은 안개가 더 곱다는 뜻으로 이것을 감상하며 빨리 걷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산책을 걷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여유를 부려 올길이 좀 늦기로서니 탓할 것이 있겠느냐는 내용이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에서는 골마다 기슭마다 뿌린 듯한 붉은 꽃들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냥 두어도 고운 산인데, 이렇게 꽃들이 피어 아주 많이 화려하게 꾸며졌다고 한다. 이렇게 붉은 꽃들이 누구의 집에 묻히면 집을 그 불에 태워 버릴 것만 같구나라며 봄꽃의 붉고 화려함을 불에 비유하여 찬양하고 있는 시조다. 세 번째 작품이 기본 형식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다.
*
자유의 푸른 하늘은 우리의 젖어머니
우리는 어둠 속에 엄마를 찾아 우니
아직도 젖 먹고 싶은 어린 영웅 들이다
*
자유의 푸른 하늘은 우리의 젖어머니
우리는 시퍼런 칼 피를 보는 싸움에서
얼굴에 칼 흔적 있는 사나이가 되련다
*
자유의 푸른 하늘은 우리의 젖어머니
가벼운 솜자리를 어느 결에 걷어차고
우리는 찬 돌 위에서 어린 꿈을 맺는다
-박용철, 「우리의 젖어머니」(소년의 말), 《시문학》 2호
위 작품은 박용철의 「우리의 젖어머니」(소년의 말)라는 연시조이다. 한 제목에 3수를 연이어 쓰고 있다. 괄호() 속의 ‘소년의 말’은 부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각 수의 초장은 ‘자유의 푸른 하늘은 우리의 젖어머니’라며 반복을 하고 있다. 반복은 강조하고 싶을 때의 표현법이다. 여기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그 하늘은 소년을 키우는 젖어머니라고 비유한다. 첫째 수에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엄마를 찾아 우는 아직도 젖먹고 싶은 어린 영웅들이라며 시조 속의 화자는 아직 어린 소년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수에 오면 ‘우리는 시퍼런 칼 피를 보는 싸움에서/ 얼굴에 칼 흔적 있는 사나이가 되련다’며 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그래서 얼굴에 칼 흔적도 마다않는 용감한 사나이가 되리라 결심한다. 셋째 수에서는 ‘가벼운 솜자리를 어느 결에 걷어차고/ 우리는 찬 돌 위에서 어린 꿈을 맺는다’며 소년의 편안한 자리를 걷어차고 고난의 찬 돌 위에서 꿈을 실행하며 꿈을 맺는다는 내용의 시조다. 1930년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실린 박용철의 연시조다.
아직은 엄마의 젖이 먹고 싶은 어린 소년이지만, 꿈을 실현하는 멋진 사나이가 되기 위하여 시퍼런 칼 피를 보는 싸움에서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로 따뜻하고 가벼운 솜자리를 걷어차고 차가운 돌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고난의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꿈을 실현시키겠다는 포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소년들에게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서 벗어나 멋진 사나이가 되기 위하여 칼 싸움터의 고행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맞서라는 교훈이 들어있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고, 차가운 현실을 뚫고 가야하는 자신을 소년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일 수도 있다.
초장 3/4/3(4)/4
중장 3/4/3(4)/4
종장 3/5/4/3
이 평시조의 율격이다. 같은 제목에 평시조가 한 수만 있으면 단시조라 하고, 여러 수의 작품이 있으면 연시조라 한다. 위 시조가 연시조인 경우다.
첫째 수는 ‘초장 3/5/3/4, 중장 3/4/3/4, 종장 3/5/4/3’으로 되어 있고
둘째 수는 ‘초장 3/5/3/4, 중장 3/4/4/4, 종장 3/5/4/3’이며
셋째 수는 초장 3/5/3/4, 중장 3/4/4/4, 종장 3/5/4/3’으로 초장에서 4자(4음절)가 들어갈 둘째 음보자리에 한 글자가 많아져 5자(5음절)가 들어갔지만,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의 우리의 전통적 시조 운율에 아주 잘 맞는다. 특히 종장 음절 수를 잘 맞추어 시조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
*
여위고 식었다만 다름없는 그대이심을
눈 감아 숨 거두니 주검이라 부른다냐
이같이 가까운 길이지만 돌아서 다시 못 오느냐…(그대의 돌아가신 날)…
*
서럽다 말을 하랴 돌이켜 생각 우스워라
어젠 듯 만지던 손 사그라진 재가 되단 말까
이 헛됨 아노라건만 설움 또한 어찌하리…(그대를 불에 사르다)…
*
두툼한 입술 가에 웃음 늘 떠돌건만
구슬인 듯 트인 맘에 눈물 아롱 안 가시데
한 아침 이슬이런가 이내 자취 일러라…(티 한 점 없는 그대시더니)…
*
벗이라 사랑하고 언니같이 도와줄 때
철없는 아기더니 저버림만 많았어라
뉘우침 새로웁거늘 어디 가 펴보리오…(전에 지나던 일을 생각고)…
*
만나면 낯빛 살펴 살이 붙고 여윔 걱정하고
행여 때 아닌 때 꺾일 새라 아끼더니
네 먼저 버리단 말까 꿈인 듯만 싶어라…(내 몸의 약함을 몹시 걱정하더니)…
*
앞서 와 살펴보고 얌전한 집 추어주련*
새집 들어 설레는 밤 같이 앉아 웃어주련
첫 손님 안 보이신다 기쁠 것도 없어라…(새집에 드니 문득 더 그리워진다)…
*앞서 와~추어주련: 새 집을 먼저 와 살펴보고 좋은 집이라고 칭찬해주라는 뜻.
-박용철, 「애사哀詞 중에서」 6편 《시문학》 3호
박용철의 「애사哀詞 중에서」는 이 작품의 화자는 아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 사람이 애인인지, 친구인지, 선배인지 이 작품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던 이의 죽음이라 슬픔은 더욱 곡진하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그대의 돌아가신 날’이라며 사랑하던 이의 죽음 앞에서 죽은 이를 바라보며 그 죽음을 안타까와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그대를 불에 사르다’며 화장하는 그대의 육신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에서는 ‘티 한 점 없는 그대시더니’라며 삶에서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음을 상기하는 내용이다. 네 번째 작품에서는 ‘전에 지나던 일을 생각고’라며 벗같이, 언니같이 살뜰히 보살펴 주어도 저버림 많았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그 뜻을 펼쳐도 받아줄 그대가 없음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다섯 번째 작품에서는 ‘내 몸의 약함을 몹시 걱정하더니’라며 내가 약하다고 많은 걱정을 하며 아껴주던 그였는데 나보다 먼저 떠남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섯 번째 작품에서는 ‘새집에 드니 문득 더 그리워진다’며 새 집에 이사와도 제일 먼저 와 축하해 줄 그가 없기에 기쁘지 않다는 내용이다. 죽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생각하며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상으로 《시문학》에 게재된 시조 작품을 살펴보았다. 박용철의 단시조 7편과 3수짜리 연시조 1편이 실렸고, 변영로의 단시조 3편이 실렸다. 단시조가 10편, 연시조가 1편 총 11편의 시조작품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시문학》에서 우리의 전통시조를 존중했으며, 시조의 순수문학적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시조문학사에서도 1930년대의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에 보이는 시조형식
보이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어이/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같이
님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 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 손끝으로/ 깨치나니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달프다/ 속삭이느뇨
저녁때 /저녁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어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흐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다문다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날개로다
보슬보슬/ 가을 눈이/ 날개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으며/ 밤을/ 새운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앞에/ 누워서/ 희미한/ 별을
-김영랑, 「사행소곡 7수」 《시문학》 1호
「사행소곡 7수」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행과 눈물과 늦가을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주를 이루고 있다. 꿈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자의 작별과 애상, 여행길에서의 외로움 등 고독함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전체적인 부위기는 어둡고 쓸쓸하다. 개인의 감정을 읊은 서정시라고 볼 수 있으며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또는 ‘보슬보슬 가을 눈이 날개를 치며’ 같은 표현들은 시문학파가 추구하던 유미주의가 드러나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품이 한 수 한 수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허리띠/ 매는/ 새색시/ 마음씨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날의/ 내 가슴/ 아지랑이/ 낀다
흰날의/ 내 가슴/ 아지랑이/ 낀다
못 오실/ 님이/ 그리웁기로
흩어진/ 꽃잎이/ 슬프랬든가
빈손 쥐고/ 오신 봄이/ 거저나/ 가시련만
흘러가는/ 눈물이면/ 님의 마음/ 젖으련만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이라서
내 숨결/ 가벼웁게/ 실어/ 보냈지
하늘 끝을/ 스치고/ 휘도는/ 바람
어이 해서/ 한숨만/ 몰아다/ 주오
향내/ 없다고/ 버리시려면
내 목숨/ 꺾지나/ 마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대의 발끝에/ 졸고/ 있을걸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빛나는/ 잔물결/ 헤아릴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흰날: 희떠운 날. ‘희떱다’는 성에가 슬다시피 되어도 겉으로는 호화로운 모습을 뜻함. ‘희떱다’의 준말로 ‘희다’가 사용됨.
-김영랑, 「사행소곡 5수」 《시문학》 2호
이 작품 「사행소곡 5수」에서도 전체적으로 볼 때 님을 그리워하는 모습의 작품이다. ‘눈만 감으면 떠오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라며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 넘은/ 달 그림자/ 마음 아이/ 서러워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 데 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에 씻긴/ 찬별을/ 바라보았습니다
빈 호주머니에/ 손 찌르고/ 폴· 베를레ㅡ느/ 찾는 날
온몸은/ 흐렁흐렁/ 눈물도/ 찔끔 나누나
오!/ 비가 이리/ 쭐쭐쭐/ 내리는 날은
서러운/ 소리 한 천 마디/ 썼으면/ 싶으리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여울에/ 희롱하는/ 갈잎
알만/ 모를만/ 숨쉬고/ 눈물 맺은
내 청춘의/ 어느 날/ 서러운/ 손짓이여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갯풀/ 수줍어/ 고개 숙이네
한낮에/ 배란 놈이/ 저 가슴/ 만졌고나
뻘건/ 맨발로는/ 나도 자꾸/ 간지럽고나
-김영랑, 「사행소곡 5수」 《시문학》 2호
앞의 「사행소곡」 보다는 각 수의 모습이 조금 더 독립된 내용으로 짜여있다고 볼 수 있다. 김영랑은 《시문학》1호에는 「사행소곡 7수」를 《시문학》2호에는 「사행소곡 5수」를 《시문학》3호에는 「사행소곡 5수」를 발표하고 있어 총 17수를 실었다. 이 외에도 4행을 중첩하여 쓴 작품들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사행소곡」 17편만 살펴보려 한다. 김영랑의 4행시 역시 한 행이 3음보로 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4음보로 되어 있어 있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 3장으로 되어 있고, 초장 4음보, 중장 4음보, 종장 4음보이다. 그렇다면 시조 3장을 한 장씩 한 행으로 나열하여 3행으로 썼을 경우, 4행시는 3행으로 된 시조 율격에 한 행을 더 추가하여 썼다고 볼 수 있다. 김영랑의 4행시인 사행소곡에서 시조의 종장격인 4행의 형식을 살펴보자.
삶은/ 오로지/ 바늘/ 끝같이
이슬같이/ 고인 눈물/ 손끝으로/ 깨치나니
가을은/ 애달프다/ 속삭이느뇨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가슴은/ 간곡히/ 입을/ 다문다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뫼 앞에/ 누워서/ 희미한/ 별을
흰날의/ 내 가슴/ 아지랑이/ 낀다
흘러가는/ 눈물이면/ 님의 마음/ 젖으련만
어이 해서/ 한숨만/ 몰아다/ 주오
철없는/ 그대의 발끝에/ 졸고/ 있을걸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외론 밤/ 바람에 씻긴/ 찬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러운/ 소리 한 천 마디/ 썼으면/ 싶으리
내 청춘의/ 어느 날/ 서러운/ 손짓이여
뻘건/ 맨발로는/ 나도 자꾸/ 간지럽고나
사행소곡 17수의 끝행만 모아보았다. 간혹 3음보도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4음보가 주를 이룬다. 김영랑이 「사행소곡」을 쓰면서 굳이 시조를 닮으려 노력한 것은 아니겠지만,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음보율은 시조를 닮아 있다.
위에서처럼 김영랑의 사행시의 끝행만 살펴보면 17수 가운데 9수가 시조의 종장 첫 음보처럼 3글자로 되어 있다. 또 ‘철없는/ 그대의 발끝에/ 졸고/ 있을걸’ ‘외론 밤/ 바람에 씻긴/ 찬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러운/ 소리 한 천 마디/ 썼으면/ 싶으리’에서는 좀 더 확연하게 시조의 종장을 닮아 있다. 마지막 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행이 4음보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숨에도/ 불려갈 듯/ 보ㅡ하니/ 떠 있는
은빛/ 아지랑이/ 깨어 흐른/ 머언 산둘레
굽이굽이/ 놓은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해어진/ 성의 돌에/ 떨던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돌 위에/ 깔리어 갑니다
홋홋 달아오른/ 이 얼굴/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님이여/ 가없는/ 나의 마음을/ 아십니까
-김현구,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시문학》 2호
내 마음은/ 물 위에/ 뜬 갈매기/ 서러운 갈매기
날마다 날마다/ 아득한 물결/ 사이에/ 떴다 잠겼다
외로움이 잦아/ 푸른 그림자/ 흐른 물에/ 떨치고
하늘에/ 솟아 끝없는/ 한탄을/ 노래하느니
-김현구, 「물 위에 뜬 갈매기」 《시문학》 2호
하늘에/ 쇠북 소리/ 맑고 향기롭게/ 굴러가듯
비둘기/ 하얀 털에/ 도글도글 미끌리는/ 저녁 햇빛,
마음이/ 비추일 듯/ 환한 꽃잎이/ 언덕에 곱게 지고
누리*는/ 지금 빛나는/ 설움에/ 젖어 있다
「누리의/ 아름다운 모든 것/ 그 빛난 목숨/ 짧아야
서러워하는 사람/ 마음속에/ 길이/ 산다고」
때가/ 나직한 소리로/ 노래 부르고/ 지나가며
눈물같이/ 예쁘게 달린/ 꽃을/ 따가버린다
*누리: 세상
-김현구, 「적멸」 《시문학》 2호
눈 감고/ 생각하면/ 고향 길/ 삼천 리
푸른 산/ 구름 밖에/ 머나먼/ 길이라오
나그넷길/ 곤한 몸/ 산기슭에/ 쉬이면
옷깃/ 스쳐가는 바람아/ 내 눈을/ 붙이고저
-김현구, 「눈 감고 생각하면」
오는 날은/ 꼭 가오리/ 내 기어이/ 떠나가리
눈물이/ 길을 가리운들/ 가기야/ 못 가랴만
애달피/ 떠나는 몸이/ 못 잊는/ 이 마음
님이여/ 그대 버리고/ 내 어이/ 차마 가리
-김현구, 「애별哀別」
먼저 김현구의 사행시를 살펴보면, 제일 앞 작품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와 「적멸」은 4행시 두 연으로 표현된 시다.
김현구의 4행시들도 모두 시조의 음보인 4음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의 4행시의 마지막 행들도 보면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와 ‘님이여/ 가없는/ 나의 마음을/ 아십니까’도 4음보로 되어 있고 둘째 음보에서만 글자 수가 조금 모자랄 뿐이고 전체적으로 시조와 아주 닮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적멸」도 4음보의 율격을 지니고 있다. 1연의 마지막 행인 ‘누리*는/ 지금 빛나는/ 설움에/ 젖어 있다’와 2연의 마지막 행 ‘눈물같이/ 예쁘게 달린/ 꽃을/ 따가버린다’도 4음보의 율격으로 시조의 형식과 닮아 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마지막 행은 ‘하늘에/ 솟아 끝없는/ 한탄을/ 노래하느니’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시조의 종장(3/5/4/3)과 일치한다. 시조가 종장의 첫 음보만 세 글자로 굳히고 둘째 음보는(다섯 글자에서 일곱 글자), 그리고 다른 곳은 한 두 글자 많거나 적어도 괜찮기 때문에 김현구의 이 작품 마지막 행은 시조형식이라 볼 수 있다. 「눈 감고 생각하면」이란 작품에서는 마지막 행이 ‘옷깃/ 스쳐가는 바람아/ 내 눈을/ 붙이고저’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첫 음보가 세 글자가 아닌 두 글자로 되어 있긴 하지만 4음보로 되어 있고 첫 음보를 제외한 곳은 모두 시조형식에 맞는다. 「애별哀別」 마지막 4행은 ‘님이여/ 그대 버리고/ 내 어이/ 차마 가리’라고 하여 이 곳 역시 시조의 종장과 일치한다.
이렇게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에서는 4음보를 보이고 있으며 이것들은 시조의 4음보 형식을 닮아 있다. 4행시라고 하여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4행시이면서도 2음보로 된 것도 있고, 3음보로 된 것도 있다. 그런데 김현구나 김영랑의 4행시들은 거의 4음보로 되어 있고, 4음보는 시조의 기본 율격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시조와 많이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시문학》이 3호로 폐간되지 않고 좀 더 오래 이어졌다면 그들의 작품 율격이 시조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짙고, 그들이 시조를 많이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4. 나오는 말
이상으로 《시문학》에 게재된 시조와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를 살펴보았다. 《시문학》에는 박용철의 단시조 7편과 3수짜리 연시조 1편이 실렸고, 변영로의 단시조 3편이 실렸다. 단시조가 10편, 연시조가 1편 총 11편의 시조작품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문학을 지향했고 자유시만을 중요시했으리라 생각했던 《시문학》에서 우리의 전통문학인 시조를 존중했으며, 시조의 순수문학적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시조문학의 역사에서 1930년대의 소중한 자료의 발견이라 생각되어 이번 발표가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강진 출신의 시인인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 음보에서 시조의 형식인 4음보를 발견함으로써 이들이 시조형식과 많이 닮은 자유시를 썼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조에서 4음보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또 이들이 4행에서 3행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시조를 사랑하고 창작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인 시조의 형식은 신라의 향가형식 10행으로 된 10구체, 8행으로 된 8구체, 4행으로 된 4구체 중에서 4구체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행의 4구체인 향가에서 3행의 시조로 변했으므로 《시문학》이 폐간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박용철이 3행으로 된 시조를 게재했듯이 김영랑과 김현구의 4행시들도 3행의 시조형식으로 발전하여 게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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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 「전남 시문학의 문학사적 위상과 가치」 『시문학파의 위상과 가치』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 3. 2016. 13~38쪽).
유성호 「『시문학』의 문학적 위상과 가치」『시문학파의 위상과 가치』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3. 87~101쪽)
이경수 「김현구 시에 나타난 공간 표상의 변모와 그 의미」『시문학파의 위상과 가치』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 3. 2016. 103~134쪽).
임환모 「영랑 시 읽기의 즐거움」『시문학파의 위상과 가치』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 3. 2016. 135~179쪽).
오세영 「왜 시문학인가?」『시문학파의 표층과 심층』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 1. 2012. 13~32쪽).
정과리 「이른바 ‘순수 서정시’가 출현한 사태의 문화사적 의미」『시문학파의 표층과 심층』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 총서 1. 2012. 33~48쪽).
유헌 「시문학지(詩文學誌) 시조를 담다」 (강진신문.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