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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51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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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또 다시 주님 성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번 대림절도 속절없이 보내 버렸구나! 오시는 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 못했구나!’하며 울적해 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복음의 위로가 참으로 큽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오 복음 1장 23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몸소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인데, 그뜻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다.’랍니다.
네 개의 초가 모두 환하게 밝혀진 대림환을 바라보며,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하던지요. 하느님께서 더 이상 멀리 계시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신답니다. 하느님께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 멀고먼 예루살렘 성지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내 안에 현존하신답니다.
또 다시 맞이한 이번 성탄,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찬미하면서, 그저 탄복하면서, 아기 예수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그분의 지극한 겸손, 극도의 자기 낮춤을 내 생활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도 혼자로구나. 주님께서는 내게서 너무 멀리 계시는구나. 나는 철저한 외톨이,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큰 착각입니다. 우리의 영적 식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우리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 밀착 동반하고 계십니다.
세상살이에 바쁜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성령께서 우리 삶의 매 순간 안에 충만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근심걱정으로 인해 우리 시야가 가려져서 그렇지,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 앞서 걸으시며 길잡이가 되어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하늘을 찌르는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올해 대림특강을 가는 곳마다 교우분들께 시 한편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김종삼 시인(1921~1984)의 어부입니다. 과감한 생략을 통한 여백의 미를 강조한 60년대 대표 시인이십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와 음악과 술이 전부였던 시인께서 극도로 남루하고 누추한 삶속에서 건져낸 시라서 그런지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지만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날마다 출렁입니다. 풍랑에 뒤집히는 날도 있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날을 찬찬히 짚어보니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는 않습니다. 견디다 보면 언제 그랬내냐는듯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푹풍우가 지나갑니다. 기다리다 보니 기적처럼 화창한 봄날도 찾아옵니다.
임마누엘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 안에 머무를때, 어떠한 처지에서든 우리네 인생을 화창한 봄날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 주님, 그리고 우리 성모님 꼭 붙들고, 그분들 은총과 도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대림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내 등뒤에 주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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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받는 행복의 힘>
[회복탄력성]의 저자 ‘김주환’교수가 KBS 아침마당에 나와 강연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옮겨봅니다.
우리의 삶은 온갖 역경과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역경을 이겨낼 잠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바로 이 마음의 힘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합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음으로써 예전보다 높은 성취와 자기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탄력성을 누구나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고무공처럼 강하게 되튀어 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리공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산산조각 나서 부서져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중요한 요인인 회복탄력성의 발견은 1950년대 중반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행해진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50년대까지 카우아이 섬 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습니다.
연구자들은 1955년에 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정환경과 사회 환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그후 20여 년간에 걸쳐 추적 조사한 연구 성과들이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결과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학습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아이들이 전과자나 미혼모가 됐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 또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 참여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이클과 메리(이상 가명)는 매우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이클이 미숙아로 태어났을 때 그의 엄마는 10대 소녀였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매일 싸웠고, 결국 엄마는 8세 된 마이클과 세 명의 동생을 버리고 섬을 떠났습니다.
메리 역시 5세부터 10세 사이에 여러 차례 신체적ㆍ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엄마는 심한 정신병으로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이클과 메리는 성공적인 청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18세 무렵 높은 도덕성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이었으며 학교에서 매우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동시에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학생회장을 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워너 박사가 쓰기를 이들은 어떤 부모가 자녀를 키우든지 자신의 자녀가 닮았으면 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미 워너 박사는 이 예외적인 현상에서 무언가 배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연구대상자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201명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분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대부분이 문제아로 성장했을 거란 기대와 달리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자신감과 긍정성을 지닌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오래 고심한 끝에 그들에게는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공통된 속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 불렀는데, 잊혀져갈 뻔했던 연구에서 그녀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미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터득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준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할머니가 될 수가 있어도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로부터 참다운 인정을 받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 많은 고난을 잘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버리는 약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조: 김주환 저, 『회복탄력성』, 위즈덤하우스, 2011/ KBS 120209 아침마당. 행복의 비밀]
카인과 아벨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카인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한 대로 살아가고 인정받으면 인정받은 대로 살아갑니다. 죄를 저질러서 행복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복을 잃었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라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하느님에게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행동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해야만 좋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께 인정받아 행복했다면 절대 아벨을 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자신들의 처지에서 만족하고 행복하였다면 절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신창원이 한 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왔어 빨리 꺼져’ 라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결국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잘 받아들이고 빗나가게 하지 않는 방법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행복해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요셉도 성모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기대를 잔뜩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이나 모든 어려움을 인내와 사랑으로 잘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에 보복하지 않고 덮어주려 했고, 또 천사가 꿈에서 일러준 대로 자신의 육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뜻은 그만큼 하느님도 인정하시고 자신도 인정받고 있음을 잘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정받는 행복을 잃기를 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는 불만족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구원은 행복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 주위의 구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CF에서 “가장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만큼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가장 큰 유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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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되어있다.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개입하시고,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항상 ‘흔적’을 남기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놀라운 일’ 또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제1독서: 이사 7,10-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사야 예언자는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하였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이사 7,9)고 하면서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어떤 ‘징조’를 청하라고 한다(11절). 그러나 아하즈는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그 징조는 그 왕이 신앙이 없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할 징조이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3-14절).
그러나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이어주신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을 저버리심이 없이 인간의 계산과 계획을 뒤집어 놓으시고, 오직 인간들이 당신의 ‘길’을 따라 걷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더 믿으라고 하신다.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동정녀’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 복음에(1,22-23) 따르면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사실 마리아는 이사야서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마리아의 모성은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그 아들은 그녀가 이름지어줄 만큼 그녀에게 속해있고, ‘임마누엘’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상 어떤 인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그 도구 역할을 실현시킨 사람은 없다.
또한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살과 피’로써 실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잉태와 탄생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징조’의 신비스러운 면이 드러난다. 한 동정녀가 있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 아들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사심 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그 가문을 이어주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그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간적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둘째 신앙의 요소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말로 여호수아(Jehoshu'a)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말의 번역임을 알고 있다.그리고 구원하실 백성은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 18,15-18) 교회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명칭은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고 번역하고 있다. 이 명칭은 예수보다 더 명확하게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시키지 않고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셋째 신앙의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기에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러나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잉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요셉(19-20절)의 눈에까지도 부정한 여인,거짓된 여인으로 비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혹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믿는 이들 모두의 용기 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이 진정 ‘임마누엘’을 실현시키고 그분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협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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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제안합니다. 제안도 주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을 청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임금의 폐쇄적인 태도 앞에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표징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 은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이 약속된 표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일을 두고 무척 고민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아기 탄생을 앞두고 요셉이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시련은 마리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주님께서 그에게 혼인과 사랑과 행복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보여 주고자 개입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민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동정 잉태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태어난 그 아들,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은 인간과 친교를 맺고 당신 현존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이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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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그 계획대로 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과정에서의 일들을 가리킵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 7장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을 메시아 강생 예언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예언으로 해석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설명되어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신 적은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사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입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느님”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임마누엘’이라는 말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분”(콜로 1,15)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에 대해서, “그러면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떨어져 계셨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쪽에서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창세 3,8) 그 두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한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을 보면, 백성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그러면서 백성들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 혼자서만 하느님께 다가갑니다.(탈출 20,21) 백성들이 하느님을 무서워하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인간들이 두려움 없이 하느님께 다가가려면 우선 먼저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으로 인간들 대신에 죗값을 치러서 인간들의 죄를 없애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렇다면 인간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는 예수님께서 없애 주십니다. 인간들이 할 일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다가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고집부리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왜 나에게 오시지 않는가?” 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함께 계시는데도, 자기 자신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으로 “나는 죄가 없다. 그래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은 교만한 위선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성모님 한 분만 예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도 ‘회개의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21,3-4)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묵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사는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은 세례를 받을 때 시작되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크게 누리다가,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회개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행복을 체험하기는커녕 죄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막 살면서, “내 마음은 편하고 즐겁다.” 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가엾은 하루살이의 허무한 즐거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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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마누엘>
오늘 복음에 앞서 천사의 수태고지와 마리아의 응답을 먼저 살펴봅시다. 루카 복음 1,26-38절의 말씀을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습니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러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 당시 유다 사회는 약혼한 처녀가 불륜으로 임신하면 파혼 당할 수도 있었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형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천사에게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응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초인적인 믿음과 완전한 신뢰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철저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은 우리가 평생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요셉을 봅시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두 약혼자는 각기 부모의 집에 따로 살면서도 법적으로는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약혼식을 치르고 약 1년 후 남자가 약혼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혼례식을 올리는데, 마리아의 경우 요셉의 집으로 가기 전에 이미 아기를 잉태했기 때문에 당대 유다 혼인법에 따라 요셉이 마리아한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소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혼인 당사자의 간음이나 불륜이 드러나 고발이 이루어질 경우에, 율법은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젊은 청년 요셉이 사랑하던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혼비백산했습니다. 얼마나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웠을까요?
마리아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꿈이 산산 조각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약혼식 때 신랑은 신부에게 결혼지참금을 주고, 이 결혼지참금은 신부 소유의 재산이 됩니다. 그런데 이 약혼이 깨어지는 경우에는 먼저 파혼을 제기한 쪽이 결혼지참금의 권리를 포기하며 벌금까지 물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자신을 배신했으니 율법대로 처벌하겠다며 분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은 마음속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경제적 손해와 사회적 지탄을 모두 자신이 떠안으려고 합니다. 요셉은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의로움을 선택합니다. 자신에게 정신적, 물질적 고통과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요셉은 과연 하느님의 의로움을 닮은 사람입니다.
율법과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마리아와 아기,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자 한 요셉은 분명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이 말씀을 들은 요셉은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따르려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따른 그들은 가정을 꾸미고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됩니다. 이 위대한 응답으로 마리아에게 성모님이란 칭호가 붙여지고 세기를 통하여 공경 받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예수님을 기르신 양부시요 동정의 모범이시며 의인으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 요셉을 본받아 하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고 순종하면 하느님께서는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보답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올 성탄에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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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의로운 사람 요셉 이야기입니다. 먼저 천사가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요셉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 결과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신뢰한다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때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마저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신 것으로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눈앞의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을 살며 힘들어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만 있다면, 그동안 볼 수 없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새롭게 품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하였지요. 오늘은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에 관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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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
돌아가신 어머니는 밥 인심이 좋았다. 명절 때도 고향에 못 간 동네 사람들을 데려다 아침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집 근처에 장애인이 살았는데 그 아버지마저 병이 나서 몸져누웠다. 그러자 어머니가 한 달 가까이 밥을 해서 나르신 적도 있었다.
어렸을 때 한번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모르는 사람들이 마루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들의 행색이 남루하고 얼굴도 무서워 얼른 뛰어 내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사람들은 밥을 동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다.
“엄마! 그런 사람들 더럽고 무서워. 우리 집에서 밥을 안 먹었으면 좋겠어.”
그러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못쓴다. 세상에서 배가 고픈 사람이 제일 불쌍하단다. 엄마는 밥하는 재주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라고 평생 그런 일들이 왜 힘이 안 드셨을까. 그래도 힘든 기색 한 번 없으셨던 어머니가 해 주시던 따듯한 밥이 그리워진다.
오늘 복음은 처녀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가 하느님의 특별한 뜻이라는 것이 요셉에게 알려지고 고민하던 요셉이 마리아를 맞아들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젊은 청년 요셉이 사랑하던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에 혼비백산했다. 얼마나 요셉은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웠을까. 믿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당시의 율법에는 처녀가 임신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요셉이 얼마나 고민하고 힘든 결단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남모르게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이 말씀을 들은 요셉은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또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은 우리가 깊이 평생 묵상해야 할 주제이다. 마리아는 천사의 자세한 말씀을 듣고 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했다.
이것은 초인적인 믿음과 완전한 신뢰이다. 철저한 순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철저한 믿음의 자세이다.
고통스런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늘 기억하고 닮아야 하는 자세인 것이다. 한 여인의 위대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인류가 구원을 받은 역사는 오늘날에도 우리 신앙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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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의로움>
마태오 1,18-2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의로움>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것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품는 것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을
품는 것
하느님의 사람을
품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사람을
품음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것
하느님과
하느님 사람인 너와
하느님 사람인 내가
함께
임마누엘을
이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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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빅 아멘….>
언젠가 광주에서 한 형제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형제에게 고3 딸이 있는데, 언제부터 인가 그 딸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딸이 대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시험 보고 나서 병원에 가자고 달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딸이 학교에서 쓰러져 버렸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었습니다. 종양이 뇌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고, 얼굴 마비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면 종양은 없어지지만, 얼굴 마비는 그냥 남아 있는데, 완전히 고칠 수 없다는 의사를 말을 들었답니다. (갈등) 대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고, 수술한다고 해도 딸의 얼굴 마비 증세는 그대로 남는다고 하고, 수술을 안 하면 딸이 죽을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제인 저는 “대학시험보다 수술은 해야 한다.”라는 뻔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제가 “103위 성인 호칭기도와 함께 묵주 기도를 103일간 하니까, 딸을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했습니다. 형제도 성경을 찾아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말씀”을 붙들고 “아멘” 하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딸의 수술을 잡았는데 대학시험 날이고, 왜, 딸이 수술을 받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수술 날짜를 미뤘습니다. 12월 6일로 미뤄지고, 또 병원 의사 선생님의 사정으로 12월 11일로 수술이 미루어졌습니다. 저도 103위 성인 호칭기도와 묵주의 기도를 하면서 그 딸을 위해 기도를 했고, 또한 그 형제도 광주에서 매일 미사를 참례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언제부터인가 미사에 참례한 순간, 그동안 하느님의 말씀에 무관심했고,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또한 어디에 있든지 그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면 가슴이 후련하면서 3일 동안, 이 말씀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너는 병 고침을 이미 받았다.” “너는 병 고침을 이미 받았다.” “너는 병 고침을 이미 받았다.”(3번)
그리고 저는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형제는 말씀을 붙들고 살다가, 12월 9일 병원에서 수술을 위해 입원하라는 연락을 받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음날에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뇌종양이 있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더라.”라는 것입니다. 결국, 뇌종양이 스스로 깨끗이 없어졌기에, “얼굴 마비도 곧 풀리고, 귀도 잘 들릴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 두레박이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매 미사 전에 103위 성인 호칭하고 미사 봉헌하고, 또한 묵주 기도뿐만 아니라 다른 기도를 바치기 전에 먼저 103위 성인 호칭기도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천사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라는 구세주의 탄생에 관한 말씀이 성모님의 “아멘”이라는 순명으로 사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요셉 성인이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구세주의 잉태”라는 사실로 큰 위험만 당하실 줄 알았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 마리아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3가지 이름을 주십니다.
1) “예수”라는 이름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2) “그리스도”라는 이름 :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구세주이시다.
3)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요셉 성인은 천사를 통해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까지 잘 보호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면 손해 보지 않는다.’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운님들 중에 살아가는데 앞길이 막막하거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답답하시면 하느님 말씀을 통해 주신 예수, 마리아, 임마누엘“ 이름을 부르며 “아멘”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극복의 힘’이라는 뜻으로 ‘Big Yes(빅 예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빅 예스’는 “내가 할 수 있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서, “안 될 것도 되게 하는 능력을 얻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빅 아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빅 아멘”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기에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오니,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이라는 하느님의 이름 앞에서, 마음의 소원(내적 기도)을 끊임없이 “빅 아멘” 하고 외쳐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은총 충만한 날을 기다리며, 햇살 가득한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곳마다 싸우고 갈라졌던 고운님들의 어두운 영혼이 치유되고, 병든 육신이 낫게 되고, 그리고 고운님들의 삭막한 마음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103위 성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을 부르며,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저희는 부족합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103위 성인들과 함께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이라는 하느님 앞에서 “아멘”이라고 외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준비하시기를 주님의 아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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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53)
♧♧ 시편 68편 10절….
"하느님, 당신께서는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마른 당신 상속의 땅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넉넉한 비...’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정착시키신 후 농경에 필요한 단비를 때에 따라 적절히 흡족하게 내려 주신 것(신명기 11장 14절. 참조)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이는 그 이전에도 광야의 생활 가운데서 만나, 메추라기, 바위에서의 물, 대적으로부터 보호, 전쟁에서의 승리하게 해주심 등을 통하여 베푸신 하느님의 보호와 주신 은혜를 의미합니다.
* 메마른 당신 상속의 땅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기서 ‘당신 상속의 땅’이란 하느님께서 만민 중에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삼으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하느님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며 튼튼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신명기 32장 2절. 에제키엘서 34장 26절. 참조) 그러므로 이 또한 다윗이 하느님을 가리켜 ‘우리 위하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20절).’라고 찬미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 시편 68편 11절….
"당신의 무리가 그 위에 살고 있으니 하느님, 당신께서 가련한 이를 위하여 호의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 당신의 무리가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당신(주님)의 무리’란 말은 ‘주님의 군대’ ‘주님의 군사’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신앙의 용사들인 하느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 시키신 후 가나안 땅에 정착시켰음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당신께서 가련한 이를 위하여 호의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련한 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영적으로 주님만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보가 구체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까지 광야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호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좋은 것’ ‘선한 것’이란 말인데, ‘은사’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나안의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주고자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백성 곧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참된 보호자와 돌보시는 분이심을 잘 나타내 줍니다.(마태오 복음 6장 25절-3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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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어느 교육에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일반인들이 많이 참여하는 교육에 저 역시 참석했었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이 교육 내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침 일찍 교육장에 들어갔을 때 어색함이 가득했습니다. 저와 같은 종교인은 하나도 없고, 다들 회사나 정부 기관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모두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고 의자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낯선 공간에서의 교육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교육장의 분위기는 냉랭했고, 이런 곳에서 이틀 동안 함께 교육받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순간, 어떤 한 분이 교육장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분 역시 교육생이었지요. 그런데 이분이 오자마자 어색한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인사를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분 덕분에 서로 인사도 나누게 되었고, 강의 전에 교육생 모두는 낯섦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교육시간이 되어 나타난 강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번 기수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다른데요? 가장 뛰어난 모범 기수가 되겠어요.” 한 사람으로 인해 공간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라는 말은 해도, 자신이 그렇게 바꿔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분위기는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가정이라는 공간, 일터의 공간, 신앙의 공간 등을 기쁨과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공간을 우리가 잘 꾸려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닌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의 역할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나의 역할이 있는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 소식,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메시지. 모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의 활동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과 예측을 모두 뛰어넘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각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역할, 요셉의 역할, 천사의 역할. 그들 각자가 자기 자리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지금의 내게도 주어집니다. 내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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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
우리나라에서 경치 좋은 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요? 호텔, 카페, 골프장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책을 보니, 이탈리아에서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장애인 시설이나 어린이 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그러한 경치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지역 주민들이 들고일어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떠올려 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디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느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즉, 약자에 더 관심을 두느냐, 강자에 더 관심을 두느냐의 차이는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약자에 대해 우선적 관심을 두셨고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자에 관해 관심도 없고 약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다했다며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이 연말에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약자에 관심을 기울여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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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운전면허 시험은 필기와 도로 주행으로 이루어집니다. 필기시험은 컴퓨터 앞에서 문제를 풀면 됩니다. 20문제 중에서 14문제만 맞추면 합격입니다. 도로 주행을 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예상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기시험 전에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는 문제가 나왔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모든 시험은 어렵고, 합격한 모든 시험은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탄생이 다가옵니다. 지난 대림 4주간을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미리 밝혀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소중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지려면 하느님께 따져야 했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은 야곱에게 14년 동안 노동을 시켰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작은딸 라헬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7년 동안 일한 야곱은 결혼식에 큰딸 레아를 아내로 얻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억울했지만,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의 집에서 7년 더 일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부하는 전쟁터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습니다. 자신들은 더 좋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어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대림 제3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이들을 돌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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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가정 교회의 ‘영원한 배경’이신 의인 요셉>
-참 크고, 깊고, 고요하신 분-
대림2부 6일째 12월22일 저녁성무일도 ‘오 후렴’도 은혜롭습니다. 마침내 대림 4주일 영롱히 빛나는 대림촛불 4개가 주님께서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 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오늘 대림 4주일 복음의 주인공 의인 요셉이 만민의 임금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흡사 요셉 축일처럼 느껴지는 오늘 전례 분위기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에 ‘산처럼!’ 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흡사 성 가정 교회의 영원한 배경이신 의인 성 요셉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참 닮고 싶은 성가정 교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배경이 되시는 산같은 배경의 요셉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저녁 불암산!’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크다/깊다/고요하다/저녁 불암산!”-
언젠가 저녁 고요한 시간, 저녁 불암산을 감동깊게 바라보며 써놓은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시를 바탕으로 어제 다시 소원이란 시를 써서 집무실 게시판에 붙여 놓고 좌우명 삼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아/크고/깊고/고요하신 분
내/영원한 연인戀人/그분을 닮고 싶다”-
내 영원한 연인, 그분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아버지라도 좋고, 예수님이라도 좋고, 의인 성 요셉이라 해도 좋습니다. 참으로 크고 깊고 고요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의인 성 요셉을 닮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지되는 의인 성 요셉은 정말 이런 분입니다.
첫째, 의인 성 요셉은 참으로 큰 분입니다.
산같이 큰 사랑의 분입니다. 성 요셉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된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랐을 까요. 그러나 성 요셉의 대응은 극히 침착했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성 요셉의 큰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사랑이 참 감동적입니다. 내 안위보다는 마리아가 우선입니다. 참으로 평범한 듯 하나 참 큰 비범한 사랑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랑의 반영입니다. 하여 의로운 사람, 요셉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둘째, 의인 성 요셉은 참으로 깊은 분입니다.
바다같이 깊은 희망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초연한 자유를 누립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침묵중에 들려 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기울입니다. 귀기울여 들을 때 겸손이요 깊어지는 내면입니다.
깊이는 바로 겸손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가볍고 자만심 가득한 아하즈 임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요셉의 깊은 겸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도 가능합니다. 참으로 산같이 큰 사랑에 바다같이 깊은 희망의 사람, 의인 성 요셉입니다.
이런 요셉이었기에 하느님의 전폭적인 신뢰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해 당신의 속내를 요셉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 놓으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치 하느님의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참 깊은 겸손의 사람 의인 요셉입니다. 들음의 사람이자 대화의 사람인 요셉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이런 주님과의 끊임없는 들음과 대화의 기도요 더불어 깊어지는 내면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의인 성 요셉은 참으로 고요한 분입니다.
그대로 믿음의 사람, 내적 평화의 고요의 사람입니다. 바로 믿음의 순종이 고요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구체적으로 순종의 여정,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이런 여정과 더불어 저절로 고요도 깊어집니다. 깊은 바다는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존재 자체로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하느님의 현존과도 같은 크고 깊고 고요한 의인 성 요셉입니다. 이런 고요한 내적평화의 요셉을 통해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임마누엘 이름인지요. 예수님뿐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또 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참으로 임마누엘답게, 요셉처럼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이니 순종의 절정입니다. 순종은 구원의 길이요 순종을 통해 주님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사는 지름길은 항구히, 충실히 의인 성 요셉의 덕을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 역시 의인 성 요셉처럼 참 큰 사랑의 사람, 참 깊은 희망의 사람, 참 고요한 믿음의 사람, 즉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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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도구삼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몸통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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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대림초 네 개에 불이 모두 켜졌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거의 다 차오른 것이지요. 이와 함께 우리의 기다림도 보름달처럼 충만해집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아무것이나 청하여라."(이사 7,11)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징이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아무것이나"이란 말씀에는 "무엇이라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것이 진리와 선, 정의에 입각한 바람이라면, 우리 안에 떠오르는 것은 곧 주님께서 떠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우리가 원하고 청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안에 사는 영혼은 자신의 바람이 곧 하느님의 바람임을 감지하고 겸손히 순종합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참조;마태 1,23; 복음 환호송, 영성체송)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 무려 네 차례나 이 구절이 등장합니다. 반복은 강조와 집중의 의미를 지니지요. 육화와 강생의 신비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연한 표징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이처럼 성탄에 가까워질수록 전례는 우리를 더 단순하고 집약된 말씀으로 초대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의 여정을 꾸준히 걸어온 이들이 말씀의 본질을 꿰뚫고 더 깊이 심오한 신비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이사 7,14)
아하즈는 짐짓 겸손을 가장해 표징 요청을 거부했지만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아니, 주님께서 몸소 표징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 친히 동정녀 몸에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임마누엘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로마 1,1) 받았음을 밝힘으로써, 사도인 자신의 정체성을 복음에서 찾습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 1,2-3)
즉 복음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인데,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약속으로 성경에 기록된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갈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상징하고 준비시키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능통했던 이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 사제들이 왜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참 안타깝습니다만, 이 역시 이사야 예언서에 이미 예견된 미래였습니다(이사 6,9-10 참조). 말씀이신 분은 사람의 자기중심적이고 얕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씀의 완성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셔야 하니까요.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경위를 서술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 결심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염려, 호의에 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꿈에 천사를 보내신 주님의 개입으로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요셉의 새로운 결단은 마리아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씀"에 대한 그의 경외심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경건한 이에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약속입니다. 다윗 자손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요셉에게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요셉은 '동정녀 잉태와 그의 아들 임마누엘' 예언이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자신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았던 것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이 결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또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두 다 예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경외심과 순종, 충직함과 성실함을 울타리 삼아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시리라고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남모르게"(마태 1,19)
요셉의 이 마음은 마리아와의 혼인 전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평생 지속될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 단 한 마디도 목소리를 내비치지 않는 요셉은, 자신의 선의와 희생 모두를 침묵으로 덮고 충직한 순종과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모자를 끝까지 지켜낼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그대로 행함으로써’ 그가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계획을 서슴없이 따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거절한 아하즈와는 달리, 요셉은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긴밀한 협조자가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 모두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한 분들이지요. 말씀을 경외하는 이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감정조차도 믿음과 의지 안에서 흐릅니다. 어쩌면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변화무쌍하고 치외법권적인 감정과 감성의 영역마저 하느님의 뜻에 내어맡기는 중에 꼴을 갖추고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믿어 복된 이들이 되고, 요셉처럼 말씀에 순종해 하느님을 얻은 이들이 되기를 두손 모아 기원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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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비안네 신부는 “예수님께서 저기 계신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도 기쁨에 찬 열정으로 “저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다 같이 그분을 찾이뵙시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님이 사셨던 때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예수님을 직접 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현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 알풍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늘 하듯이 공손하게 말했다. “지상의 군주들을 알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천국의 왕께서는 성체의 베일 뒤에 계시면서 누구든지 맞을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성인물은 분명 더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았으며 그분을 사링하고 또 몸소 함께 있음으로써 그분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특권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참된 사랑이 요구하는 바가 아닌가?
참으로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 조배를 하고 성체 강복에 참례하는 것이 성인들의 비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방문하는 시간은 온전한 사랑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이다.{1코린 13.8 참조.)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감실 앞에서 보낸 시간이 제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입니다.”(104)
-스테파노 M 마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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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임마누엘>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대림초가 보라색에서
연보라 - 분홍 - 흰색까지
4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문앞에 오셨고 곧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핑계대거나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미루거나 거부하지 말고 용기내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맞이합시다.
가장 비천하고 가난하며 누추한 구유가
귀하신 분이 누우심으로 고귀하고 가장
빛나는 공간이 되게 하실 것이니,
별것 아닌 내 안에 보물이 들어 오시어
나를 가장 특별하고 귀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임마누엘 주님!
"저와 함께 머무르심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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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 20)
진실된 감사의
시간입니다.
대림은 성탄을
향해 너무나 빨리
지나갑니다.
사랑하기에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요셉이 있어
마리아가 있고
마리아가 있어
요셉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사랑하는 법을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버릴 수 없는
구구절절한
하나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탄생은 하느님의
뜻이며 맞아들임은
은총을 향한 진실된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탄생은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통과하는 부서짐에서
더욱 눈부십니다.
자아의 뜻을
하느님 뜻 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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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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