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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조선왕조사
경로대학 역사교실 박 완 종
33. 화의는 깨지고 일본의 도요토미가 죽어 전쟁은 끝났지만
의병활동
관군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수많은 백성이 죄 없이 쓰러지자 스스로 동족을 구하고 향토를 지키기 위하여 도처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원이었고 무관출신보다는 의외로 문관출신이 많았다.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의식이었고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이는 유교의 뿌리 깊은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의 발로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의병은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의병장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다. 현풍(玄風)의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항상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 삼가, 합천, 창녕, 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고,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솥바위나루로 불리는 정암진(鼎巖津)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기도 했다.
망우당 곽재우장군 경남 창녕의 곽재우장군 전적기념비
조헌(趙憲은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임진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그 자리에 칠백의총(七百義塚)과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중봉 조헌선생 충남 금산의 7백의총(七百義塚)
고경명(高敬命)은 용인전투에서 관군 5만 명이 겨우 천여 명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서 모아 진용을 갖추었다. 임진년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하여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으라며 군사를 나누어 주고, 자기는 충청도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막기 위해 다음 달인 7월에 금산(錦山)에서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고, 큰아들 고종후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봉 고경명선생과 전남 광주의 고경명 3부자 사당 포충사(褒忠祠)
김천일(金千鎰)은 나주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북으로 출병하였다. 북상할 때 자진하여 의병에 참가하는 무리와 호서방면에서 모집한 인원이 크게 늘어 군세를 떨쳤다. 유격전을 펼치며 북상하여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 참가하고 철수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2차진주성전투에 참전했다. 계사년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과 의병 3,000여 명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지만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6만 군관민이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건재 김천일선생 김천일선생 친필 서간문
김덕령(金德齡)은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고, 1594년에는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았으며,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1594년 10월에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다음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김덕령장군과 은륜비(恩綸碑) 관주 충장사의 익호문(翼虎門)
그 외에도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권응수(權應銖), 제말(諸沫), 홍계남(洪季男), 조종도(趙宗道), 정세아(鄭世雅), 임계영(任啓英), 박춘무(朴春茂)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치 훌륭한 분들이 있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이 더욱 많았다.
화의진행
왜장 고니시는 처음부터 전쟁의 발발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광폭한 도요토미의 명령에 마지못해 출전한 장수였다.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강화(講和)를 시도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차 명군의 원병이 들어오자 조선과 성사시키지 못한 화의를 명과 함께 이루려 했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임진년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조건을 논의하고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왜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 끝에 재 파병을 결정하고 이여송(李如松)을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45,000)을 보내기에 이른다.
조명연합군에 의하여 평양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명군은 신중하자는 조선군의 조언을 무시하고 퇴각하는 왜군을 급히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왜군의 역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그 후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왜군 진영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왜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나라의 원군, 보급두절, 역질(疫疾)의 창궐로 전의를 상실하자 화의에 응했다. 전군을 동남해안으로 철수시키고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서 창원의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진행을 기다렸다.
한편 심유경이 왜군과 같이 일본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성사되지 못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②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했고, 붙들어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황제의 허가를 받아냈다. 1596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침입을 꾀하였고,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됨으로서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정유재란
1597년 화의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명령을 내렸다. 먼저 고니시, 가토 등을 앞세워 1만 50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해가 정유년이라 하여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한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간계를 꾸몄다.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언제 바다를 건너 어디로 침입할 것’이라는 왜의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가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이순신에게 가토를 잡으라고 명하였고 이순신은 왜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명령불복종죄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우의정 정탁(鄭琢)의 간언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여 권율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이순신을 살린 약포 정탁선생영정과 선생의 필적
이순신이 파직되자 원균으로 수군통제사를 삼아 출전케했으나 7월 16일 거제도의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장수들이 전사하고 원균은 육지로 탈출하였다가 적의 추격을 받아 자진하였으며, 경상우수사 배설(裵楔) 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 고니시(小西行長), 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를 침범하여 저들의 숙원이었던 호남곡창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에 패보를 접하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 1597년 9월 16일)
임지에 도착한 이순신은 앞이 캄캄하였다. 배설이 도망치면서 끌고 나온 배 12척과 병사 120명이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조정은 또다시 장군에게 아예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의 싸움이나 도와주라고 명령한다. 이때 장군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참으로 비장한 장계를 선조에게 올린다. 나는 그 장계 중에서도 이 한 대목을 잊지 못한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함 열두 척이 있습니다. 해 볼만 합니다. 소신 죽지 않았습니다. 적이 감히 나를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臣尙有戰船十二 猶可爲也 微臣不死 賊不敢侮我矣)
그러고서 그 배 12척에 한 척이 더해진 13척을 가지고 울돌목의 거센 물살과 급변하는 조류를 이용하여 적의 대 함대(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적게는 133척에서 많게는 330척이다)를 무찌른다.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이것이 일본의 기록에서도 인정하는, 세계해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저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이다. 정유년 9월 16일이었다. 제일 큰 승리를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치지만 나는 명량해전에 임했던 장군의 기개와 용기와 초인적인 지략에 더욱 머리를 숙인다. 위대한 인물이 이에서 더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웅(聖雄)이라는 존칭을 붙였는지 모른다.
이순신장군 영정 진도 입구의 명량대첩탑
이 무렵 육지에서는 호남을 장악하고 전주에서 합류한 왜군 가운데 모리, 가토군은 공주를 거쳐 전의, 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천안 북쪽의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신하 가운데는 또다시 왕의 피란을 거론하는 상황이 되었다. 평양에 있던 명의 경리 양호(經理 楊鎬)가 급히 서울로 내려와 왜군의 북침저지를 지휘하였다.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접전하여 크게 이김으로서 왜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진로를 봉쇄당한 왜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9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수성과 약탈로 1년을 보냈고 다음해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을 정비하여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하는 최종전투에 임한다.
노량해전(露梁海戰 1598년 9월 16일)
순천에서 출발한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리면서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하여 결전의지를 다졌지만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은 퇴로를 열어주자고 종용했다.
이순신은 진린을 간곡히 설득했고 진린도 이순신의 애국충정에 감복하여 적극 호응했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 추격전에서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1597년 11월 19일, 54세) 한창 접전 중에 선두에 서서 북채를 쥐고 지휘하던 장군은 투구와 갑옷을 벗었다. 그 때 바로 눈앞에서 쏘는 적의 조총탄(鳥銃彈)이 장군의 가슴을 뚫었다.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 한 말씀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나라의 큰 별, 그가 없었으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왜 그렇게 최후를 맞았을까? 왜 갑옷을 벗었을까? 전쟁이 종결되어가는 마당에 왜 승리의 영광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 장군의 전사에는 의문도 많고 억측도 많다. 참말로 적의 눈앞에서, 조총의 유효사거리 앞에서 갑옷을 벗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의도적인 자살이었다고 단정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도 증거도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를 천거하고 아끼고 후원했던, 임진왜란을 극복해낸 두 영웅 중의 한 분인 류성룡대감은 왜 장군이 전사하던 바로 그 날 영의정자리에서 삭탈관직 당했을까?
서애 류성룡선생 징비록
다만 갖가지 추측이 있을 뿐이다. 상승장군으로서의 눈부신 전공과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함은 조정의 반대파 뿐 아니라 선조임금까지도 그러했다고 한다. 임금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이순신의 명성은 하늘을 질렀으니 마음만 먹으면 이순신의 혁명은 손바닥 뒤집기였을 것이라는 억측도 나온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택할 길은 오로지 전사였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기도 하다. 임금이 이순신을 경계하였을까? 전후엔 그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 사실일까? 그랬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문건이 최근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신종(神宗)의 문록(文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중국의 해군제독 진린(陳璘)이 자기 황제에게 올린 글 중에 이러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한다.
“조선에 이순신이라는 비범한 장수가 있는데 조선임금이 인재를 몰라보고 해하려고까지 했으니 전쟁이 끝나거든 폐하께서 그를 불러 쓰시옵소서. 그에게 군사를 주어 만주에서 일어나는 오랑캐(후일 명나라를 멸하고 청나라를 세운 세력)를 치게 하시면 그는 성은에 감읍하여 충성을 다할 것이며 그의 능력은 능히 적을 토멸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상황이 종전 후에 이순신의 안위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혼미하였음을 중국의 장수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이순신이 왜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는지 모른다면서 그가 혁명을 했으면 성공했을 것이고 성공했으면 조선은 새롭게 태어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측이요 가정이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사심을 버리고 오직 충성된 마음으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어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으니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만고의 명장이요 충신이며 영웅이요 성웅(聖雄)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와 함께, 민족과 함께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아산 아라산의 이순신장군 묘
전후상황
조선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인구는 3분의 1이 사라졌고, 전답의 면적도 3분의 1이(전라, 충청, 경상도 기준) 줄었다. 살아남은 사람도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저항력이 떨어지니 전염병이 돌았다.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은 이성을 잃었다. 임금과 관료들은 명나라가 구원해 주었다하여 존화의식(尊華意識; 천하에 중화만이 최고라는 생각)만 높아져서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명나라만 따르다가 40년도 못가서 또다시 병자호란을 맞았다.
명나라도 혼란한 정국 속에 내전을 겪으면서 어렵게 출병하여 왜와 싸우다가 국력이 쇠잔함으로서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종말을 고했으며, 일본도 자만에 빠진 과대망상증 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횡포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정권이 몰락하여 정적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막부를 내어주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삼국의 크나큰 재앙을 가져온 국제전쟁이었고, 그로 인하여 두 나라 정권이 붕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터가 되어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었던 우리는 정권만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그 와중에서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할 것이다.
**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9월 초순까지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