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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총평
몇 년 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본 “신춘시가 한국시를 망치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좀 심한 소리지만, 근거가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의 등단 제도를 동아일보사에서 1925년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통설을 뒤집어엎은 사람은 문학 평론가 이재복 씨다. 케케묵은 신문을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보다가 <매일신보>가 1914년부터 행했음을 알아내고는 이를 학계에 알렸다. 신춘문예가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벽초 홍명희의 주장으로 채택된 제도라는 통설도 낭설이 된 셈인데, 최초의 주창자는 동아일보 출신 기자일 공산이 크다.
어쨌든 신춘문예의 역사가 90년을 넘어서는 동안 배출한 문인의 수는 엄청나다. 수적으로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 발전에 중추의 역할을 해온 사람들이 신춘문예 출신 문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일제 말과 6․25 때 이 제도가 중단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지방지까지도 앞을 다투어 신춘문예를 시행하여 올해만 해도 시 부문에서 스무 명이 넘는 당선자가 나왔다. 한날한시에 100명이 넘는 사람에게 ‘문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 또 있을까?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문학의 죽음에 대한 논의로 바뀐 지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문인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신춘문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근년에는 문인 지망생들 사이에서 신춘문예 부정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화려한 등용문 뒤의 어두운 그늘이 해마다 짙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때문이 아닐까.
첫째,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서 문단의 미아가 되는 이가 너무나 많다. 신문사는 상을 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지원도 하지 않으므로 등단자가 1년 내에 자신의 입지를 모색하지 못하면 금방 잊혀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인지 몇몇 문예지 신인상의 권위가 신춘문예의 권위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신춘문예 출신자가 작품집을 내고자 할 때 대다수가 그렇다, 등단할 때보다 훨씬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둘째, 심사위원들의 나이가 많아 참신한 작품을 뽑을 줄 모른다. 비교적 젊은 예심위원들이 신선도가 높은 작품을 본심에 올리면 이상하게도 그 가운데 제일 구닥다리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히더라는 이야기가 어제오늘에 나온 것이 아니다. 심사위원의 나이를 60~70대에서 40대로 낮춰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중앙지의 경우,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신문사의 편집 데스크는 아직 별로 없는 듯하다.
셋째, 상금 때문인지 명예 때문인지 응모자가 중복 투고를 하거나 표절 시비에 걸려 해마다 정초에 신춘문예 당선자와 당선작이 발표되면 문단은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기 발표작이 당선작으로 뽑혀 문제가 되기도 한다. 2007년 올해 비로소 이런 잡음이 안들리는데, 나의 기억으로는 그냥 넘어갔던 해가 없었다.
넷째, ‘신춘’이라는 타이틀에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새해 첫날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작품이 죽음이나 좌절, 환멸과 부정의 이미지로 덮여 있으면 안 되므로 기왕이면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을 신문사도 심사위원도 선호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용이나 표현이 좋아도 다소간이라도 밝은 이미지가 들어 있지 않으면 불리하니 근본적으로 잘못된 제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다섯째, 열흘 만에 심사가 끝나므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중앙일간지의 경우 시는 수천 편, 소설은 수백 편이 투고된다. 이 많은 작품을 예심위원 서너 명이, 본심위원 두세 명이 무슨 재주로 열흘 만에 다 읽고 심사를 끝낼 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는 작품이 선정되지 객관적으로 우수한 작품이 뽑히기 어려우므로 신춘문예 공모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면서 반대론자들은 목청을 높인다.
여섯째, 동일한 시기에 전국 20여 개 신문사에서 일제히 공모를 하면서 중복 투고를 하지 말라고 하니 이 무슨 논리적 모순인가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2월 10일 전후로 마감하여 20일 전후로 당선 통지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좋은 작품을 뽑기 어렵다는것이다. 심사 기간의 문제가 아니고 동일한 시기에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순 엉터리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앙일보>는 ‘신춘문예’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중앙 신인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여름에 공모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다. 그런데 신춘문예로 나온 웬 중견 소설가가 <중앙일보>가 여름 공모로 바꾸고 나서 소설 당선작의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작품이 분산되지 않고 집중되어도 좋은 작품이 안 뽑힌다니, 이상한 일이다.
이 외에도 대학생들의 기말고사 기간과 겹쳐 대학 재학생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문단도 보수화가 되고 있는지 근년에 들어서는 더더욱 실험정신이나 모험심을 발휘한 작품이 뽑히지 않는다, 매수 제한도 문제다, 심사위원 몇 사람은 20년 이상 혹은 30년 이상 심사를 하고 있다, 지방지는 등단으로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 하면서 신춘문예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신춘문예 옹호론자이다. 나 자신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심사가 이뤄지고 수백 혹은 수천 대 일의 공개경쟁을 통해 문단에 나올 수 있기에 매력적인 등단 제도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올해 신춘문예 당선 총평을 쓰는 이 자리에서 나는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신생아들에게 격려의 덕담을 해주고 싶다. 이들은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몇 년 세월 동안 불철주야 시를 쓰고, 고치고, 버렸을 것이다. 낙선의 고배도 여러 차례 마셔보았으리라. 수천 편 중 단 한 편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이제 막 통과했지만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신문사의 후원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신생아의 몸으로 힘겨운 여행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 하는 말이, 신춘문예 당선자 중 15% 정도만이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나머지는 다 사라진다고 한다. 중앙일간지 당선자만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이야기다. 문단에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있는데, 이들은 이제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 그러므로 나는 가급적이면 좋은 점을 보려고 애쓸 것이다. 이들에게는 더욱 좋은 시를 쓸 수 있게끔 몇 마디의 격려와 아울러, 비판이라도 애정 어린 비판을 해주어야 하겠다. 23년 후배인 2007년 신춘문예 당선자 여러분께 건네는 나의 첫마디의 말은 “축하합니다! 고생 많았습니다.”이다.
작품을 공모하는 중앙일간지는 <경향신문><동아일보><문화일보><서울신문><세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 8개 신문인데 이 가운데 <동아일보>는 2003년에 이어 올해도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세계일보>와 <한국일보> 당선자는 내가 직접 시를 가르쳤던 제자이므로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즉, 나머지 5개 신문사 당선작에 대한 촌평을 써본다.
<경향신문> 당선작 「부레옥잠」은 고풍스런 내간체 문장을 특장점으로 한 시이다. 서정과 서경의 조화, 발산과 자제 사이에서의 균형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연(혹은 삼라만상)을 ‘몸’의 관점에서 보려고만 했다는 것. 에로티시즘이 너무 짙어 내 몸이 다 푸르르 떨린다.
<문화일보> 당선작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참신성’의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올해 당선작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어체로 진행되는 활달한 어조, 기상천외한 비유들, 낯선 상상력의 색깔, 호감이 가는 장난기……. 재미있는 언어유희가 삶의 진정성만 담보해낸다면 이 시대의 눈부신 개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걸, 기대한다.
<서울신문> 당선작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도 올해의 수확 중 상등품이다. 살아 있는 자의 생각이 젤리처럼 유연한 글자를 짚어내고, 글자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책이 되고, 책이 도서관을 이룬다. 산 자는 반드시 죽으매,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산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들려고 했던 중세 사람들처럼 우리는 무모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무모함이 자연과학을 발달시킨 것이 아니랴. 그러니 시인이여, 하나의 문장을 금붙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너무 길어져버린 두 개의 문장과 몇 군데 시제의 불일치가 마음에 걸린다.
<조선일보> 당선작 「트레이싱 페이퍼」는 소재에 대한 집중도가 강하고 언어의 정제(精製)가 일종의 미학을 이루고 있다. 즉, 정공법으로 쓴 시이다. 불안한 상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어디에서 연유한 불안인지 잘 모르겠기에 시인에게 물어보고 싶다.
<중앙일보> 당선작 「침몰하는 저녁」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다 못해 노회하다. 하지만 때 묻는 시어와 낯익은 표현이 너무 많은 것은 「침몰하는 저녁」의 큰 흠이다. 언어를 유연하게 잘 다루지만 시의 내용이 몸으로 체득한 것인지 손끝 기교에서 나온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20대 초반이라고 하는 시인의 나이가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안양예고에 갔다가 플래카드에서 이름을 보았다. 많은 사람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면 말솜씨의 기교가 사고의 깊이와 균형을 이뤄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는 당선작을 내지 않고 심사평만 냈는데 2003년도에 당선작을 내지 못했을 때의 심사위원은 유종호와 김명인이었고 올해 심사위원은 김명인과 김혜순이다. 두 해의 심사평이 주목을 요한다.
무릇 신인이란 녹록치 않은 패기와 자기만의 날카로운 촉수, 뜨거운 열정을 겸비한 열린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한계를 돌파하여 의욕에 가득 찬 신선한 경역(境域)을 펼쳐 보이는 것. 그런 까닭에 새로움을 체험하려는 모험심을 엿볼 수 없는 신인의 작품은 오히려 식상함을 가중시킨다. 신인들이 기존의 모방에만 급급해 한다면 우리 문학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올해의 응모작들은 그런 면에서 기대에 못 미쳐 안타까웠다. (유종호, 김명인)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김명인, 김혜순)
모험심을 발휘해야 할 신인이 기성시인의 시 문법을 모방하는 데 급급하다는 지적은 올해 대다수 당선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일상에 대한 안이한 사유, 비문과 오문, 설명투의 문장을 구사하고 있음을 김명인과 김혜순 시인이 심사를 하면서 느꼈을테니 이들 심사위원은 심사비를 받으면서도 기분이 영 찜찜했을 것이다. 기성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이나 이상하게도 유독 신춘문예 당선작 가운데 ‘참신성’을 느끼기를 갈망하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시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방지의 경우 1월 1일자 신문의 ‘얼굴마담’으로 시를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선작 없음’으로 심사를 마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범작이 많아서 아쉽고 안타깝다. 무순으로 거론한다.
올해는 특이하게도 정재영이란 분이 <부산일보><광주일보> 두 군데 신문사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었다. 두 신문사 시상식 날짜가 다 달라야 될 텐데……. 국세청 전산정보관리실 근무라는 이력이 이색적이다. 55세라는 연세가 만만치 않듯이 시들이 다
만만치 않다. 2편 모두 숙성된 시라는 느낌을 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 세계가 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심상과 시상, 표현과 전개, 소재와 주제가 다 썩 새롭지는 않다. 무난하다. 다행히도 <부산일보> 당선작 「붉고 향기로운 실탄」 같은 작품이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게 한다.
<대전일보> 당선작 「골목길」은 죽음 이미지가 저변에 깔려 있는데 그 이미지를 봄날의 골목길 풍경에다 심은 것이 조금은 색다르다. 하지만 세목을 들여다보면 낱낱이 다 낯익은 것이어서 별 재미가 없다. 모험심을 발휘해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국제신문> 당선작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는 제법 긴 이야기를 활달하게 끌고 간 뚝심을 높이 사고 싶다. 진부한 소재를 비교적 참신한 시 문법으로 형상화한 노력도 높이 사고 싶다. 하지만 “~하고 있었어”, “~했어”, “~하고 있었지”라고만 끝나는 문장의 연속은 긴 시를 더욱 지루하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전북도민일보> 당선작 「기다림은 우주입니다」는 ‘기다림’이란 것의 의미에 대한 끈질긴 추적이다. 은근과 끈기가 이 시의 덕목이기는 한데 핵심이 무엇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가 모호하다. 비문도 종종 보인다. 정확한 문장 구사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동양일보> 당선작 「오월」은 때 묻지 않은 고운 세계에 대한 정갈한 묘사이기는 한데 동시(童詩)에 가깝다. <무등일보> 당선작 「팥죽을 끓이며」는 길이도 그리 길지 않지만 시의 상(想)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박하다.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 「천원역」과 <한라신문> 당선작 「구포역」은 시의 정황과 시인의 내면 정서, 표현과 구성이 너무나 낯익은 것이라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된다. <경인일보> 당선작 「소금쟁이를 맛보다」는 발상도 참신하고 상상력도 독특하다. 그런데 시어가 왜 이리 구투이며 한자는 또 왜 이리 남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그래도, 도무지, 차라리, 죄다, 도리어 같은 부사의 남용도 문제다.
<불교신문> 당선작 「겨울 내소사」, <강원일보> 당선작 「소라 여인숙」, <경남일보> 당선작 「문 밖에는 봄」은 모두 시인의 내공이 느껴진다. 습작을 한 연륜도 느껴지고 가볍지 않은 시정신도 느껴진다. 그런데 문예지에서 흔히 보는 그저 그런 시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개성적인 목소리를 내달라는 선배의 충고로 받아들여 줬으면 고맙겠다.
<전북일보> 당선작 「늙어가는 판화」는 ‘늙어가는 어머니 얼굴 그리기’라는 진부한 소재를 판화 만들기라는 작업으로 환치시켜 다소나마 진부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냉장고 소재의 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봐왔는데 <전남일보> 당선작 「냉장고, 요실금을 앓다」는 중년 여성의 몸을 오래된 냉장고에 빗대어 그려냄으로써 어느 정도 참신성을 확보하였다.
<영남일보> 당선작 「떡갈나무 약국」의 장점은 리듬감이다. 한국 현대시가 독자를 잃어버린 이유 중의 하나를 리듬감의 상실로 보고 있는 나로서는 이 시를 읽는 것이 마냥 즐겁다. 상상력도 싱싱하고 이미지도 발랄하다. 하지만 지난해 모 신문사의 당선작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이 너무 아쉽다.
<매일신문> 당선작 「스트랜딩 증후군」은 지방지 당선작 중에서 가장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시인의 작품이다. 고래가 해안가로 밀려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 스트랜딩(stranding)이 왜 증후군이 된 것인지를 말해주는 이 시는 어머니 간병이라는 낡은 소재에다가 ‘스트랜딩 증후군’이라는 신조어를 입힘으로써 주목을 끌게 하는 데 성공했다. “대부분의 고래 떼는 죽고 말았다”보다는 “대부분의 고래는 죽고 말았다”가,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보다는 “죽은 고래들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신춘문예 규격에 맞춘 작품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평화신문>은 12월 31일 마감에 2월 5일 발표이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함께 거론될 때 늘 소외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불리함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리하고 신문사는 이 날짜를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당선작도, 당선자도 일반 독자는 잘 모른다.
이상 20여 편의 시를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보았다. 앞날이 기대되는 시인의 수는 몇 안 되고, 아직 많이 부족한데 등단을 했으니 큰일이라는 불안감을 엄습케 하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일까. 하지만 이런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줄 사람은 바로 2007년 신춘문예 당선자 당신들이다. 이제 여러분의 작품은 심사위원과 나란히 같은 문예지에 실릴 것이다. 같은 도마 위에 놓여서 여러분의 시만 잘려지고 버려진다면? 이제 여러분의 경쟁자는 시인 지망생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기성시인이다.
여러분이 습작기 때의 치열함으로만 시를 쓴다면 침체일로에 있는 우리 시를 풍성하게 살찌울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총성이 울렸다. 42.195㎞를 달려나간 2007년 신춘문예 당선자 모두 중도에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 시의 앞날은 이제 갓 등단한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
ㅡ『다층』(2007.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