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가상성에 대한 불교적 이해
제2절 대승경전
4.『화엄경』
『화엄경』에서도 『대승입능가경』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가상성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승입능가경』에서는 나와 세상의 가상성, 환몽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며 분별을 버리고 집착을 내려놓을 것을 강조했다면 『화엄경』에서는 세상의 환몽성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만 불세계와 부처님의 깨달음, 그리고 깨달음을 위한 구도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환상과 같은 세상의 근본은 마음에 있기에 마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고 부처님이 되어가는 과정에 나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화엄경』에는 60권본, 80권본과 40권본의 세 가지 다른 본이 전해져왔으며 이를 각각 구역본(舊譯本), 신역본(新譯本), 정원본(貞元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 본고에서는 동진(東晉)시대에 불타발타라에 의해 번역된 60권본의 『화엄경』을 참고하여 가상적 현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뽑아 대표적인 것을 모아보았다.
1)『화엄경』의 가상성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화엄경』의 내용은 매우 방대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송을 든다면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는 게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원효스님께서 구도의 길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유명한 일화에서처럼 세상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일체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가상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떤 측면으로는 드러난 세상의 본질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드러난 세상의 가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유심(唯心)과 유식(唯識), 또는 공관(空觀)과 성관(性觀) 또는 중관(中觀) 등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드러난 세상의 환몽성, 가상성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것은 아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내용을 좀 더 상세히 화가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 즉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5온(五蘊)이 마음 따라서 생겨서 무슨 법이나 짓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그렇다. 하지만 화가의 손에 의해 바로 바로 그림이 바뀌듯 세상의 일이 내 마음에 따라 바로 바뀐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에 따라 5온, 법을 짓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당장 눈앞에 내가 원하는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은 되려 허황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따져본다면 내 마음은 바뀌었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대로인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따라 그려지는 세상이지만 그러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칭하는 마음에 대한 논의는 더 필요하겠지만 그림은 사진이나 거울 속 영상처럼 실제 세상을 반영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성을 가지지 않는 가상적 존재일 뿐임을 드러내는 비유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듯 세상도 마음을 따라 그려지고 있지만 그 마음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깨닫고자 한다면 법계의 성품을 살펴서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세한 방법과 단계를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상이다만 꼭두각시와 같은 허상임을 곳곳에서 설하고 있다.
2)현실의 가상성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화엄경』 제5장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꼭두각시(幻)와 같고 허공과 같다고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은 청정하여 걸림이 없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합니다.' 이는 앞서 다룬 『능가경』의 표현들과 비슷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제6장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에서는 '또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업은 비유컨대 꿈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 또한 모두가 적멸한 것입니다. 또 모든 세상의 일은 다만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습니 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드러난 세상이 꿈처럼 허망하다는 이야기는 같지만 뒤에 그 세상은 적멸하고 마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에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거울에 비유하는 문구도 나온다. '예를 들면 밝은 거울에 비치고 있는 영상이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습니다.'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능가경』의 가르침이 가상성을 통해 집착과 분별을 버리게 하는 것으로 간단 명료하게 드러난다면 『화엄경』에서는 그러한 가상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부분에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문구를 더해주고 있다.
물론 가상성 자체에 집중한 문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문구들은『능가경』과 같이 드러난 세상의 가상성에 대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1)또 '혜등(慧燈)'이라고 하는 광명 역시 모든 중생을 눈뜨게 하는데, 모든 사물은 공적(空寂)하여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으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해탈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아지랑이나 물에 비친 달 그림자, 또는 꼭두각시나 꿈, 혹은 거울 속의 영상과 같이 모든 사물은 실재가 없으며 모두가 공적함을 알게 됩니다.
(2)일체의 오욕(五欲)은 모두가 무상하다. 허망하고 물거품과 같으며 꼭두각시나 아지랑이와 같으며 물속에 뜬 달과 같고 뜬 구름과 같다.
(3)경계가 환상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4)모든 것은 꼭두각시와 같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집착하여 항상 생사에 윤회하고 있습니다.
(5)온갖 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견고하지도 못하다. 그것은 마치 환상처럼 중생을 현혹케 한다. 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번개와 같이 무상한 것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능히 생사를 헤아려 열반에 통달할 수가 있다.
(6)'일체의 세계는 환상과 같고 여러 부처님의 설법은 번개와 같고 보살의 행동은 꿈과 같고 듣는 불법은 메아리와 같다.'
(7)이런 과거의 보살 같이 나도 또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체득하여 모든 것은 환상 같고 번개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고 거울 속의 그림자 같아서 실체가 없고 공(空)한 줄을 안다.
(8)왜냐하면 모든 것은 언어로 나타낼 수 없으며, 꿈과 같고, 음향과 같고,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고, 그러면서도 인연과 숙업을 어기지 않는 까닭입니다.
(9)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아서 일체 모든 것을 다 실체가 없는 꼭두각시와 같은 것으로 봅니다.
(10)저 보살마하살은 생사가 없는 법의 지혜인 무생인(無生忍)을 얻어, 모든 세계가 허깨비 같고, 보살행이 다 요술과 같으며, 모든 세간이 그림자 같고, 모든 법이 꿈과 같은 줄을 안다.
3)가상성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도록 함
『화엄경』에서는 현실의 가상성에 대한 표현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의 덕목으로 삼아 닦아나가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제11장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에서는 이러한 가상성을 열 가지 덕목으로 자세히 나누어 설명하며 보살이 익혀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덕목들 익혀야 합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습이 없는 것이며, 본성이 없고, 수행할 수도 없으며, 실체가 아니며, 진실하지도 않고, 자성도 없으며, 흡사 허공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일단 얻은 공덕을 다시는 잃지 않는 경지(不退轉)에서 불생불멸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은 평온함(無生法忍)을 체득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헛된 성품에 대해 보다 자세히 수행하도록 각 인(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아지랑이와 같다는 인(忍)인가? 불자여, 보살은 일체 세간을 마치 더울 때의 아지랑이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압니다.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꿈과 같다는 인(忍)인가? 불자여, 보살은 모든 세간이 꿈과 같음을 압니다. 비유하면 꿈은 세간도 아니요, 세간을 떠난 것도 아니며, 욕심의 세계도 형상의 세계도 무형의 세계도 아니요, 남(生)도 죽음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요, 맑은 것도 흐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은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세간이 다 꿈과 같음을 알아 꿈을 깨뜨리려 하지도 않고 꿈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꿈은 본래 적멸하고 꿈은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법을 받아 지니되 다 꿈과 같음을 알아 허망하게 그것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세간이다 꿈과 같음을 아나니,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얻은 여섯 번째, 꿈과 같다는 인입니다.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아홉 번째, 허깨비와 같다는 인(忍)인가? 보살은 일체 세간이다 허깨비와 같은 줄을 압니다. …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세간에 살면서 보살행을 행할 때, 방편을 받아 지녀 세간을 다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합니다. … 비유하면 허깨비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살마하살 역시 이 허깨비 같다는 인에 머물면서 모든 보리를 갖추어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
마하살이 얻은 아홉 번째, 허깨비와 같다는 인입니다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번째, 허공과 같다는 인(忍)인가? 보살은 모든 세계가 허공과 같음을 아나니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며,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두 법이 없기 때문이며, 행해도 행함이 없기 때문이며,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허공과 같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4장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현실세계가 환상과 같음을 깨달음으로서 얻게 되는 해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선남자여, 우리는 보살의 해탈을 증득했으니 그 이름은 환주(幻住)입니다. 이 해탈을 얻었으므로 모든 세계가 다 환상(幻)입니다. 이 해탈을 얻었으므로 모든 세계가 다 환상(幻)처럼 머무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체 중생이다 환주와 같으니 업과 번뇌로 일어나기 때문이며, 일체 세간이다 환주와 같으니 무명과 존재와 욕망 등이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다 환주와 같으니 '나'라는 소견 등 갖가지 환 같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일체중생의 생멸과 생로병사와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모두 환주와 같으니 허망한 분별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화엄경』에서는 환상과 같음을 증득하는 것을 해탈의 경지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이 환상처럼 머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는 소견 또한 환상과 같은 인연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이를 『능가경』에서는 일체법이 환상과 같다는 사실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환몽과 같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을 버리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러한 사실 자체가 또 하나의 분별이 되는 어리석음을 피하지 못한다면 꿈에서 다른 꿈으로 옮겨갈 뿐인 것처럼 헛된 삶을 반복하게 된다. 가상현실이 제공하 는 새로운 세계도 그와 같을 수 있다. 가상현실을 통해 이 삶이 가진 환상과 같은 측면들을 수용하고 닦아가지만 그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지혜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가상현실을 도구로 분별을 벗어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가상현실의 불교적 이해와 명상 활용 방향성 연구/ 김화영(은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