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가을,겨울

[제함(학장)]

사계절 소묘

I. 봄이다. 쥐똥나무의 연둣빛 잎사귀가 움을 피우고, 산수유의 노란 꽃이 봄소식을 전해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나 보다. 잎으로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버드나무다. 연녹색의 잎이 움을 틔우면서 봄기운을 물들인다. 신천의 수양버들이 활짝 꽃을 드리우고, 수성못 가에는 연둣빛 기운이 물에 비쳐 녹색으로 물들인다. 화사한 햇살이 온 천지에 살포시 내려앉는 봄이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켜는 봄, 대자연은 어느 하나 미운 것이 없으며 신비롭고 아름답다.

‘춘초는 연 연록이요, 왕수는 귀불 귀라’는 왕유의 시가 떠오른다. 봄풀은 해마다 다시 돋아나지만, 한번 간 인걸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떠나간 날들은 언제나 무지갯빛으로 채색되는 것 같다. 길가에 노란 개나리가 온 몸을 홀랑 벗고 자태를 뽐낸다. 솔숲 사이로 수줍은 진달래도 볼그스름하게 얼굴을 내민다. 우리 인간의 눈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봄빛은 너무도 곱다. 여린 잎사귀들이 온통 연둣빛으로 채색해 놓은 것 같다.

봄빛은 왜 연둣빛일까. 아마 그것은 연한 잎에서 유래된 것일게 다. 여름빛은 신록으로 진하게 채색되고, 가을빛은 황금색으로 물들며, 겨울 빛은 회색이나 무채색이 된다. 봄은 온갖 산야의 녹색물결이 햇빛을 받아 진 록의 빛으로 변한다.

꽃들의 폭동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개나리가 봄소식을 알려주는가 싶더니 산수유가‘나도’하며 일어선다. 때맞추어 깔끔한 차림새로 서있던 목련이 흰 종소리를 울린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숨어있던 진달래가 발간 가슴팍을 헤집고 양지바른 비탈에선 배꽃 무리가 흰 이불을 펼친다. 복숭아 과수원에서 복사꽃이 추파를 날리고, 조팝나무가 시골 밭둑에 하얀 천 자락을 늘어뜨린다. 그런가 하면 외진 산길에서는 찔레꽃이 숨은 눈물을 흘리고, 밤꽃이 요란을 떤다.

봄꽃 중엔 뭐니 뭐니 해도 벚꽃이 으뜸이다. 만개한 벚꽃 길을 지나칠 때는 마음이 부자만 싶다. 활짝 웃는 꽃잎의 화려함이 호숫가에 비치면 온통 물빛 또한 연보랏빛으로 어리 운다. 연분홍의 벚꽃이 질 때쯤이면 철쭉이 살며시 망울을 터뜨린다. 합천호 백리길 벚꽃이 떨어질 즈음이면, 영취산 철쭉꽃이 피기시작하며, 붉으래. 물든 합천호의 수중매, 물그림자가 환상의 파노라마를 연출케 한다. 봄꽃이 극치를 이루는 사월이다. 우리네 인간들은 매화가 맺혀도 마이동풍이고 벚꽃이 피어도 서로에게 냉랭하다. 배나무 줄기마다 하얀 꽃이 얹히건만 아직 등 돌리고 복사꽃이 피를 토하듯 외쳐도 서로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꽃꽃꽃, 그 하나하나가 설법보다 귀한 말씀이다.

봄만큼 꽃들이 무리지어 피는 계절이 또 있을까. 사월의 화신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봄이 오는 소리가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스멀스멀 다가오면 여린 잎에서 꽃으로 전염 된다. 봄꽃은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의 모습일까.

봄빛이 숨을 내 쉴 때 하루하루는 소리 없이 지나간다. 봄의 추억이다. 추억거리가 없는 삶은 잔고 없는 통장과 같다고 어느 수필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추억이 자꾸만 새록새록 돋아난다.

봄은 유·소년의 계절! 만물이 생동감을 찾는 계절이다. 봄은 보여준다고 봄이라 명명하지 않았을까?

II. 여름이다. 온 산천이 신록으로 녹색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다. 플라나타스 잎 그늘에 매미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더위에 지친 강아지는 혀를 빼물고 할딱거린다.

신록이 불타는 여름 산을 오른다. 산등성이를 돌아 유유히 골짝을 비켜가는 바람마저 초록이 짙다. 숲속을 비집어든 꼬장꼬장한 햇살이 울그락불그락 홍조 띤 얼굴로 마구 빛줄기를 뿌려댄다. 땡볕을 푸짐하게 짊어진 숲에서 풀 향기가 훅 끼쳐온다. 여름 초록들이 시끌버끌 낭자하게 흥청댄다. 맥이 끊긴 듯 잦아들다가도 돌연 어긋버긋 흐벅지게 농익은 꽃사태가 구성진 풍물마당굿을 보는 듯 신명을 돋운다.

울창한 수목들이 늘어선 숲길을 걷는다. 숲의 청량한 정기를 받아 어둡고 탁한 기운을 뱉아내고 허파자루에 짙푸른 산기운을 욕심껏 채워 넣는다. 산정을 휘돌아 골짝으로 내달리는 바람을 따라가니 계곡물 소리가 마중한다. 콸콸콸 시원스레 흘러내린 둥근 물소리가 세속에 찌든 시커먼 영혼을 비질하여 선의 경지에 들게 한다. 초록의 묵향에 내 몸은 이미 숲이 된다. 수목이 우거진 계곡엔 냇물이 졸졸졸 흐른다. 빼 꼼이 열린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새들도 날아다닌다. 싱그러운 녹음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

느티나무 가로수엔 철을 만난 매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쨍그랍게 울어 데고, 뻐꾸기 또한 이에 질세라 구슬프게 맞장구친다.

산 주름이 깊어가는 골짝 사이로 여름이 이지러진다. 하늘은 잠시간 붉은 빛으로 요동치더니 푸른 어둠속으로 둥지를 튼다. 해가 준령 뒤편으로 스러지자, 어둠의 장막이 온 숲을 뒤덮는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등성이 위로 총총한 별무리가 초롱불을 밝힌다. 여름밤 시골 평상에 누워 밤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천국에 와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여름은 청년의 계절! 열매를 열리게 한다고 여름이라 이름 짓지 않았을까?

III. 가을이다. 여름내 신록을 뽐내던 화살나무 잎사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소맷자락으로부터 먼저 오는 가을, 그새 달라진 바람살로 감지한다. 갈바람은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온몸을 전율케 하고, 영혼을 일깨운다. 가을은 소리 없이 왔다가 스멀스멀 사라진다.

금년은 유난히도 더웠다. 연일 폭염주의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에어컨 앞에서 설쳐야만 했다. 그렇게 더웠던 기억은 금세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을의 시간 앞에 서면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햇살이 따갑다.

달이 밝은 가을 밤 창가에 서면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쎄, 이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소슬바람에 사르르 잎 떨어지는 가을나무 가지들을 바라보면서, 한차례 마음의 병 앓지 아니하고 그냥 무덤덤히 넘어갈 목석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부신 가을 풍경을 눈앞에 그려 본다.

길가에 연약한 몸을 애처로이 휩쓸리며 가녀린 손짓을 하는 코스모스의 행렬, 군데군데 무리지어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가을꽃의 대명사 들국화의 애잔한 미소,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나 실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이름 모를 들꽃들의 백치처럼 순수한 아름다움, 붉게 타는 저녁노을보다 더 곱게 물들어 가는 빨간 단풍잎, 동장군을 대동하여 입성하게 될 찬 북풍에 금비를 뿌릴 태세를 갖추며 황금빛을 더해가는 노란 은행잎, 청명한 하늘에 점점이 떠서 저공비행을 하다가 지친 몸을 꽃잎에 살포시 내려 앉아 달콤한 휴식을 취하곤 하는 빨간 고추잠자리,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정겨운 합창이며,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들의 노래잔치!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예부터 사람들은 가을의 긴 밤을 통해서 인생을 생각하는 깊이를 더했고 학문을 연마했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우리의 삶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아마도 빛깔은 같을 것이다.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면 구르몽의 시가 생각나고, 옛 추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에서는 신록의 계절이 회상되며, 인생의 여정과 동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봄부터 흐르던 빛은 이제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가을빛이 되었다. 세상 어느 한곳 버려진 곳 없이 행복이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 이 대자연의 모습 앞에 마음이 경건해질 뿐이다.

가을은 중·장년의 계절! 붉게 지는 노을이 아름답다. 황금빛 인생의 여정에서 참맛을 알아가는 때가 아닐까? 가을은 인생의 늙음이 아니라 시나브로 익어가는 계절이다.

IV. 겨울이다. 눈보라 치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칼바람이 불어 닥친다. 삼라만상이 고요히 잠든다. 겨울나무가 눈보라를 맞아가며 의연히 서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제 옷을 벗는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나무의 몸체를 움직이지 않는다. 선채로 제 일을 한다. 나무는 사계의 변화를 알려준다고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우리의 영혼을 재는 일이다. 어쩌다 허리가 휘고, 눈 무게로 설화목이 될 때도 있으나 언제나 제자리를 지켜낸다. 나무가 곧은 이유가 이것이겠다. 우리 인간들도 저 겨울나무의 겸손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금 춥다고 해서 야단법석을 떨고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매서운 찬바람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찾아오기 마련인 법, 의연한 자태로 서있는 겨울나무의 성정을 닮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서리꽃이 핀 겨울 산을 오른다. 겨울 산은 맵디매운 세월을 인고로 다스린 허리 굽은 노옹 같다. 바람이 휘이익 추임새를 넣으며 가파른 산정을 넘는다. 자잘한 나무들은 자지러지는 장구소리로 세월을 갉아내고, 늙은 낙엽송은 밑동까지 흔드는 깊은 징소리로 세월을 보듬는다.

설산을 걷는다. 개울을 건너고 산모롱이를 돌아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으니, 산등성이에서 엇박자의 폭설이 와르르 쏟아진다. 생의 매 단락마다 비바람 몰아치고 진눈개비 흩날리던 세월도 데굴데굴 굴러간다. 마지막 마디에서 툭 끊겨버린 생의 휘몰이가락을 불러놓고서야 겨울 산을 내려온다. 게걸스럽게 탐하지도, 요란하게 겉멋을 내지 않고서도 있는 그대로를 품는 해안을 가진 한 그루 나목이 되어 높은 산을 내려온다.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단순함에 있다. 단맛보다는 쓴맛이, 쓴맛보다는 담담한 맛이 더 높은 차원에 있듯이, 요란한 치장으로 분답한 소리를 단출하게 벗겨낸 무덤덤한 비움은 가히 도의 경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동양화가 북적대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신비로운 여운이 느껴지는 것은 미완성의 공간 때문이리라!

잎을 다 떨구어 낸 겨울나무의 텅 빈 단순함을 깨닫는 날까지 내 영혼은 깊은 자숙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려 한다. 문명에 미화된 자아를 자신의 참모습인 양 여겼던 허상의 거품을 걷어내고, 잡다한 세상살이에서 오는 들끓던 마음도 퇴마의식 하듯 쫓아낸다.

겨울은 노년의 계절! 이 세상을 아름답고 슬기롭게 마무리 하는 시간이 아닐까? 사람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법, 좀 더 멋있게 겨울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노년을 곱고 아름답게 마무리하자!

V. 봄은 유·소년의 계절, 여름은 청년의 계절, 가을은 중·장년의 계절, 겨울은 노년의 계절, 아! 아름다운 금수강산 대한민국에서 100세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