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캡틴박과 철없는 콜럼버스
이 홍사
*
-충성!
어린 콜럼버스 녀석이 어디서 듣고 배웠는지 이번에는 고사리 손으로 거수경례를 척, 붙이고 조타실로 들어섰다.
-좋았어. 충성!
조타실에서 키를 잡은 박선장도 기분 좋게 꼬마 녀석에게 거수경례로 답했다. 박선장은 편안한 반바지 차림에 마도로스 모자를 쓰고 권련을 물고 있었다. 아이가 들어오는 걸 보고 권련은 껐지만 담배연기가 조타실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젠 박선장이 관리해야할 선원이 하나가 늘었다. 도선사를 비롯해서 통신담당. 선적과 하역 담당들, 조리사까지 포함해서 열한 명이 관리대상인데 이젠 콜럼버스 녀석까지 관리를 해야 되니 열두 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열두 명 중에서도 콜럼버스 녀석은 특별관리 대상이다.
-선장님, 아니 마도로스팍! 배에 왜 매점이 없어요?
녀석은 인사가 끝나자 매점이 없다고 선장인 마도로스팍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거수경례를 붙이는 법은 아마도 장난기가 짙은 도선사가 가르쳐준 것이지 싶다. 도선사는 무료할 항해에 희한한 장난감이 하나생겼다고 희색이 만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녀석은 배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보고 올라오는 모양새다. 보나마나 도선사가 선장인 매점이 없다고 마도로스팍에게 가서 따지라고 또 장난을 한 모양이다.
-야! 콜럼버스! 이런 배는 원래 매점이 없는 배야. 뭐가 먹고 싶은 거야?
-에이! 제주도 가는 배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외국 가는 밴데 왜 매점이 없어요?
철없는 콜럼버스의 말에 박선장은 또 기가 막혔다.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에서 배 안의 매점을 본 모양이다. 당돌하게 묻는 녀석에게 무어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박선장이 또 말문이 막혔다.
-손님을 태우지 않는 배니까, 매점이 없는 거지. 뭐가 먹고 싶은데?
-아녜요. 매점이 없으면 됐어요.
철없는 콜럼버스가 금세 힘이 빠진 목소리로 포기하고 그 곳이 제 자리인 양 박선장의 옆에 앉았다.
-저기 냉장고 열어보고 마음에 드는 거 찾아 먹어라.
-아니, 됐어요, 그런데 선장님, 왜 이름이 마도로스팍이에요?
-응 그거? 외국인들이 아저씨를 부르는 이름이야. 누가 그러던데?
-도선사 아저씨가 그랬어요. 저도 그렇게 불러도 되요?
-네가? 마음대로 하려무나.
어린 콜럼버스는 박선장 옆에 앉아 쌍안경을 보며 전방을 살핀다. 눈에 쌍안경을 들이대고 있지만 마닐라가 오십 마일 넘게 남았으니 아직은 육지가 보이지 않을 거다.
*
어린 콜럼버스는 엊그제 배에서 발견된 녀석이다.
출항한 지 만하루가 지나서, 배에서 아이가 발견된 것이다. 기관사가 발견하여 조타실로 데려왔는데 조타실의 철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창으로 보고 박선장이 깜짝 놀랐다.
웬 아이가 타고 있었어? 이게 무슨 사고야?
박선장은 간이 철렁했다. 마산 제4부두에서 출항한 지 만하루가 지나서 타이완해협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시속 삼십오 노트로 달리는 고속화물선 중간에서 아이가 탈 리는 만무다.
삼십오 노트!
항속에 대해서 이해를 돕자면 승용차의 속도 계기판으로 거의 시속 65킬로에 해당하는 속도인데 배로서는 엄청 고속인 셈이다. 건조한 지 삼 년밖에 안 되는 최신형에 엔진을 고출력으로 향상시켜 이 항속이 나오는 거지. 옛날 배들은 최대 속력이 이십 노트가 고작이다.
아무튼, 기관사의 손을 잡고 급경사의 철제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보고 박선장이 필시 무슨 사고임을 직감하고 키를 버려두고 화들짝 일어나 조타실 문을 급하게 열고 나갔다.
-기관사! 무슨 일이야?
-인마가 무임승선 했다 아입니꺼? 그래서 답삭 잡아 왔지예.
기관사의 말로는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선장이 키를 잡고 있는 아시아스타라는 이 배는 삼만 톤급의 핸디사이즈로 국제 정기화물선인 상선이다. 여객선도 아니고 이런 화물선에서 아이가 발견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뭔가 잘못된 거다.
쫒아가서 아이에게 다그치며 물어보려니 금세 울어버릴 기세였다.
-얘야 괜찮아. 아저씨들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울먹거리는 아이를 박선장은 조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타실 한쪽에는 야간 항해를 마친 이등항해사인 부선장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가 이 배에 타게 된 경위에 대해서 캐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울상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박선장이 심심풀이로 먹다 남은 비스킷을 아이에게 봉지 채 내밀었다. 처음엔 아이를 달랠 생각으로 대수롭잖게 건넸는데 아이는 그걸 받아서 허겁지겁 먹는 것이었다. 비스킷을 먹는 모양새를 보니 아이가 배를 타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지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거, 아이를 굶겨서 죽일 뻔했군!
박선장이 조타실 미니냉장고에 들어있던 콜라와 초코파이를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슬쩍 물었다. 키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며 최대한 무심한 척하고.
-너? 배를 타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지?
아니라고 했다. 배를 타기 전에 단팥빵 세 개와 요구르트 세 개를 준비했단다. 그 말을 하고는 메고 있던 책가방에서 빵을 쌌던 비닐봉지와 빈 요구르트 플라스틱 병을 보여 주었다. 가방을 열었을 때 박선장은 슬쩍 보았지만 그 쓰레기를 제외하고는 빈 가방이었다.
그렇게 말문을 연 아이에게 무심한 척 물었다. 관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물으면 금세 울어버릴 것 같아서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몇 학년이야? 어느 학교에 다녀?
초등학교 삼학년이라고 했으며 마산의 무학산자락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남자야, 여자야? 여선생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예뻐? 예쁘다고 했다. 최대한 먼 곳부터 물어서 본론의 들어가야 한다는 걸 박선장은 알고 있었다.
너 참 잘생겼다! 삼학년이면 애인 있겠네? 예 있어요. 누군데? 우리 반 은영이요. 예쁘나? 엄청 이뿌죠? 은영이도 너를 좋아하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동생은 있냐? 엄마가 미용실 하느라 바빠서 동생을 안 만들어 줬어요,
그렇게 말문을 연 아이에게 유도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슬쩍슬쩍 물어보니 작정을 하고 배에 숨어든 것이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게 단팥빵 세 개와 요구르트 세 병 그리고 현금 삼천오백 원!
기가 막혔다.
-아저씨 이거 뱃고동 어떻게 울려요?
유도질문에 대답하던 아이가 느닷없이 물었다. 쓸개가 좀 퍼졌다는 얘기였다.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선장님이라고 불러야지. 너 뱃고동 한번 울려볼래?
-네 울려보고 싶어요.
박선장이 고동을 울리는 빨간 버튼을 가르쳐주었다. 녀석은 다가와 고사리 손으로 뱃고동을 울려보고는 신기해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한 번 더 해봐!
쓸개가 퍼진 녀석은 다가와 장난스럽게 길게 뱃고동을 울렸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왜 배를 탈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나중에 커서 선장이 되고 싶어 미리 알아두려고 배에 숨어든 것이라 했다.
-왜 선장이 되고 싶은데?
-선장이 되어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려고요.
박선장은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아! 그런 꿈을 지닐 나이구나. 박선장은 스스로가, 자신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진즉에 왜 못했지. 꿈은 원대하게 가져야 되는데. 이상이든 현실이든 견고한 성을 쌓는 자는 멸망한다고 했다. 이 천진난만한 콜럼버스처럼 사고의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법인데 박선장은 그러질 못한 것 같다. 이 점은 필시 어린 콜럼버스라는 아이에게 배워야할 사안이다.
-음, 신대륙 발견? 그거 좋지! 그러면 공부 열심히 해야 되는데?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나만 구십 점이고 나머지는 올백 받았거든요. 그래서 상도 받았는데?
-음! 공부 잘하네. 나중에 선장이 되는데 아저씨가 추천해 줄 터이니. 아저씨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야 돼!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에 호기심이 어리고 있었다. 이미 표정에 두려움이나 적의는 없어보였다.
그리고는 박선장은 레이더 내비게이션 옆에 놓아둔 다이어리를 집어 펼쳤었다. 집과 주소, 엄마랑 아빠 이름, 전화번호까지 적었다. 아이 이름은 최헌수라고 했으며 아빠는 회사에 다니고 엄마는 미용실을 한다고 했다.
박선장이 아이가 불러주는 대로 차근차근 적으면서 생각하니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한국 국적의 이 아시아스타를 탔으니 다행이지 외국 국적의 무역선을 탔으면 사태가 훨씬 심각했으리라. 아이, 아니 어린 콜럼버스가 불러주는 대로 차근차근 다 적고나서 박선장은 인터폰으로 통신실로 연락을 해 통신사를 급하게 불러올렸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올라와서 아이와 선장을 놀랍다는 눈으로 번갈아 보는 통신사에게 다이어리를 북 찢어서 건네며 본사로 연락하여 해경에 신고를 하도록 일렀었다. 아이의 부모가 무척이나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다음 일은 해경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통신사 녀석은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다음 달인데 외모에 엄청 신경을 쓰느라 일을 등한시하는 놈이다. 일등항해사 이십 년 경력이니 박선장의 눈에는 그런 게 훤히 보이는 것이다. 아이가 배에 타게 된 경위를 듣고는 통신사는 알았다며 어린 콜럼버스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고 나갔다.
아이, 아니 어린 콜럼버스는 미얀마 양곤으로 가는 화물인 중고 미니버스에 숨어들었던 모양이었다. 배에 선적하는 차에 먼저 올라가 뒷좌석 의자 뒤에 쪼그리고 숨어서 선적된 것이다. 중고차들은 일층 화물칸에 실려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미니버스에 숨어 있다가 화장실을 찾으러 나온 녀석을 기관사가 발견을 한 것이다. 냉동실에 숨어들어 동태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박선장이 키를 잡고 있는 이 아시아스타는 마닐라를 거쳐 싱가포르에 잠시 들렀다가 미얀마 양곤으로 가는 배다. 이층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내려줄 컨테이너가 마흔두 개가 실려 있고, 싱가포르에서 내려줄 컨테이너가 스물일곱 개. 그 다음엔 미얀마 양곤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나머지 컨테이너와 일층 화물칸의 중고자동차는 전부가 양곤으로 가는 물건이다.
애초에는 홍콩으로 가는 짐이 있었으나 너무 적어서 회사에서 이해타산을 따져보고 다른 외국 무역선으로 넘겨준 모양이다. 컨테이너 대여섯 개 가지고 홍콩을 경유하려면 연료비도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이번 항해는 홍콩을 들리지 않으니 좀 수월할 것이다. 홍콩은 부두가 복잡하여 하역하는데 대기시간이 엄청 걸리는데 회사에서 그건 잘 한 일이다. 마닐라에서 바로 싱가포르 해협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일층 화물칸에는 중고차가 거의 아흔 대가 실려 있는데 반이 미니버스다. 마을버스로 사용하던 저 차가 미얀마에서 인기가 있는지 요즘 들어 저런 차가 엄청 들어간다. 지금 배에 실린 것만도 승용차 빼고 미니버스만 쉰 대는 넘지 싶다. 다 같은 회사에서 출고된 국산중고차인데 똑 같은 모델이다. 학원이나 스쿨버스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양곤에 내려서 보면 도로에 심심찮게 보이는 차종이다.
미얀마 양곤항은 양곤강 하구에 있어서 수심이 얕아 핸디사이즈가 되는 이 아시아스타는 항구에 접안을 하지 못한다. 핸디사이즈란 무엇인고? 하니,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을 말한다. 핸디사이즈가 넘어서 핸디막스가 되면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대륙을 돌아서 항해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양곤에 도착하여, 항구 입구에 정박하면 세관의 벌크가 나와 화물을 옮겨 싣고 들어가고 또 통관을 마치고 한국으로 갈 짐은 작은 벌크들이 싣고 나와 옮겨 실으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보통 사흘이 걸리는데 그 시간이면 하역 담당을 제외한 박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은 양곤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가 나온다. 육지가 그립기 때문인데 박선장은 양곤 세관 부근에 자주 가는 술집이 있다. 그 옛날 뱅골만 해적들이 먹던 술인데 럼주를 파는 곳이다. 럼주를 마시면 금방 팍 취한다. 그리고 술이 깨면 숙취나 속에 부담이 없는 술이라 가끔 몇 병을 사다가 지인들에게 선물하디도 한다. 그 자주 가는 바의 마담이 영어도 잘하고 분위기가 이국적인 풍으로 상당히 세련된 바다, 그곳에서 마담에게 박선장은 코리아 마도로스팍이라 불리는데 그게 배에서 박선장의 별명이 된 것이다. 승선을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의 문을 열어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문을 열어두었으니 아이가 버스 뒷좌석에 숨어든 것이었다. 아무튼, 녀석이 하루 만에 발견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까딱하다간 굶겨서 죽일 뻔했다.
*
그게 엊그제의 일이고 이젠 녀석이 혼자서 배 안을 활보하고 다닌다. 여기 가서 기웃거리다가 저기 가서 참견하고, 조리실에 가서 이것저것 맛을 보고, 삭막하기만 한 배 안에서 청량제 구실을 톡톡히 하는 녀석이 되었다. 콜럼버스 녀석은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바쁘다. 잠시도 한 군데 붙어 있는 법이 없다.
마닐라까지는 오십 마일이 남았다.
마닐라에 도착하면 아이들 부모에게 무슨 연락이 있을 거다. 마닐라지사에서 이미 연락을 받아 놓았을 것이고 그곳에 가면 휴대폰도 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아저씨! 아니 선장님, 아니, 마도로스팍! 마도로스가 무슨 뜻이에요?
옆에 앉은 콜럼버스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올려다보며 묻는다.
-선장님 같이 외항선을 타는 사람을 보고 마도로스라고 부르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마도로스팍이라고 부르잖아?
-그게 아니고 무슨 뜻이냐고요?
본래 뜻은 마도로스Madoros인데, 주로 국제항로를 다니는 배의 선원을 가리키는 말로 뱃사람을 뜻하는 네덜란드어의 마트루스Matroos에서 따온 말이다. 국내선을 운항하는 사람을 보고는 마도로스라 하지 않고 외항선을 타는 사람만 마도로스라고 부른다. 박선장이 그걸 쉬운 말로 설명했는데 알아들었는지 콜럼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나중에 마도로스가 될 거예요.
-그래서 신대륙 발견하려고?
-네. 당연하죠.
녀석은 대답을 낭창하게 했다. 정말 콜럼버스가 될 녀석이다.
-야 콜럼버스! 마도로스는 뱃사람을 전부를 부르는 말이고 선장이라고 하면 캡틴Captain 이라고 해야지 맞는 말이야. 배의 선장도 캡틴이고 비행기의 기장도 캡틴이야.
-그럼 선장님은 마도로스가 아니라 캡틴이에요? 캡틴박이 맞아요?
-그럼 당연하지.
-그럼 저 캡틴이 될래요. 저는 꼭 캡틴과 콜럼버스가 될 거예요. 이제는 마도로스팍이 아니라 캡틴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 당연하지.
캡틴박도 녀석이 뱉은 말과 똑 같은 말을 따라했더니 콜럼버스가 고사리 손을 쳐들었다. 캡틴박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이 파이버를 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약속이다.
-그런데 너? 콜럼버스가 어디 사람인지 알고 있냐.
-본래 이탈리아 사람인데 에스파냐의 여왕의 왕명을 받고 황금의 땅을 찾아가다가 신대륙을 발견했죠. 저는 황금의 땅도 찾고 신대륙도 발견할 거예요.
녀석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너 영화를 본 거야, 책을 읽은 거야?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고 또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보았어요. 캡틴박 아저씨! 이탈리아 가봤어요?
-이탈리아? 그럼 가보았지. 캡틴이 되면 세계를 다 돌아다닌단다. 비행기 캡틴은 될 생각이 없냐?
-저는 바다가 좋아요. 바다의 사나이는 의리의 사나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 의리의 사나이지!
이번에는 캡틴박이 손을 쳐들었다. 철없는 바다의 사나이, 콜럼버스는 냉큼 하이 파이버를 했다.
-너? 의리의 사나이끼리 바다에서 약속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해야 돼!
-알겠어요.
-야! 콜럼버스! 지금 태풍이 올라오고 있단다.
-태풍? 그럼 우리 못 가나요?
콜럼버스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실의에 찬 표정으로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캡틴박이 이쪽 태풍이 아니라고 아이를 안심을 시켰다.
9호 태풍 마리아인데 일본 오키나와 서쪽 사백 해리에서 발생하여 올라오고 있는데 중급이란다.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하는 시간이면 이 아시아스타는 이미 싱가포르 해협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주니 태풍이 왜 발생하느냐고 콜럼버스가 물었다. 이야기를 해준다고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지만 캡틴박이 무료한 시간이라 태풍의 발생에 대해서 어린 콜럼버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상에서 회오리바람의 소용돌이로 발생하는 태풍은 바다 위를 이동하며 수증기의 공급을 받아 더욱 규모가 커지는데 육지로 상륙하면 수증기 공급을 받지 못하고 지면과의 마찰로 운동에너지가 급격히 약화된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태풍은 한반도를 통과하면서 급격히 힘이 약해진 후 동해로 빠져나가며 온대저기압으로 변하거나 소멸되는 게 보통이라는 이야기를 쉬운 말로 풀이해서 들려주었다.
-캡틴박 아저씨! 해적 만나봤어요?
-해적?
-애꾸눈의 해적 말이에요.
느닷없는 질문에 캡틴박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없지는 않다. 최근에 화물선인 씨케이블루벨호가 싱가포르를 빠져나와 남중국해에 접어들면서 무장괴한의 피습을 받은 일이 있다. 그 배는 이 아시아스타보다 큰 배이지만 속력은 느리다. 벌크화물선으로 옥수수를 육만 톤이나 싣고 항해 중이었는데 쾌속선을 탄 해적들이 올라와 현금만 갈취해서 달아났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던 사건이다. 그 배는 부정기 화물선으로 항로를 벗어나서 사고를 당했다. 이 콜럼버스 녀석이 묻는데 해적이 있다고 해야 되나 없다고 해야 되나? 눈치를 보니 녀석은 아무래도 있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애꾸눈은 아니지만 가끔 있지. 하지만 아저씨는 당한 적이 없어.
콜럼버스 녀석은 걱정하지 말란다. 만약 해적을 만나면 제가 레이저 총으로 휙 갈기면 된단다. 정말이지 배 안에서 청량제 구실을 톡톡히 하는 녀석이다.
-켑틴박 아저씨! 저 갑판에 좀 갔다가 올게요. 망원경 가져가도 되죠?
콜럼버스 녀석은 쌍안경을 들고 물었다.
-그래라.
박선장은 쉽게 대답을 했다. 가지 말라고 한다고 가지 않을 녀석이 아니다. 갑판에는 하역 담당인 크레인 기사들이 있는 게 눈에 보였던 모양이다. 거기에 가서 또 뭔가 참견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마닐라에서는 콜럼버스 녀석을 데리고 내려야겠다. 어디 가서 옷이라도 한 벌 사서 입혀야 할 일이다. 녀석은 거의 닷새가 넘게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이젠 꼬질꼬질하고 땀에 찌들어 아이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이 더운 날씨에 갑판으로 기관실로 쏘다니며 땀을 엄청 흘렸을 것인데. 신발부터 팬티까지 다 사서 입히고 여벌의 옷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와 달리 마닐라나 양곤에서는 여권 없이 선원증만 제시하면 세관 밖으로 나가 시내를 여행할 수가 있다. 마닐라에서 스물네 시간을 쉬어 간다. 그 안에 하역을 다 마쳐야 하니 하역담당들은 바쁘지만 박선장은 세관 부근에 있는 지사에만 들러 눈인사만 하면 되니 하루가 고스란히 남는 시간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선원을 엄격히 입국을 제한한다. 나가려면 여권을 제시하고 정식 입국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곳에서는 콜럼버스 녀석을 데리고 나갈 수가 없다. 또 마닐라에 가서 콜럼버스 녀석의 부모들과 통화를 해보고 원한다면 영사관으로 아이를 넘겨야 하는 일이다.
영사관에서 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를 태워 돌려보내는 방법이 있지만 절차가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여권을 만드는 거야 간단하겠지만 입국사실이 없는 아이를 출국시키자면 미얀마 외교성에 연락을 하여 사실 확인을 하고 승인을 받아야 되는 그게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녀석은 방학이라니 시간이 그리 바쁜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양곤까지 데리고 갔다가 돌아가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아무튼, 콜럼버스 녀석은 이번 방학을 아주 멋지게 보내는 셈이다. 정말 신대륙을 발견할 놈이 분명하다. 이런 놈이 많아야 나라의 장래가 있는 건데.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박선장을 그런 생각을 하며 쓴 입맛을 다신다.
멀리 섬들이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한다.
필리핀해역에 들어오면 박선장의 심기가 불편하고 현지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법 쓰레기 수출문제가 발생되고부터다.
그게 얼마 전의 일이다.
한국의 폐기물 중간처리업체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합성 플라스틱이라 속이고 혼합쓰레기를 압축하고 포장해서 컨테이너에 담아 필리핀으로 수출을 한 것이다. 그 양이 무려 칠천 톤이 되는데 그중에서 단 일 킬로만 샘플로 제출을 해서 통관 검역을 받은 것이다.
그 절차에도 문제가 있지만 양심을 팔아먹은 중간처리업체도 문제다. 그 사실이 알려지고 양국 간의 환경 외교문제로 확대되자 한국 정부에서 일부는 다시 회수를 하고 나머지 오천 톤이 민다나오섬에 그대로 방치가 되어 쓰레기 산을 이루고 있단다.
항상 무역선의 캡틴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박선장이지만 그 일이 생기고부터 이곳 필리핀해역에만 들어오면 이름 모를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 쓰레기가 들어있는 컨테이너를 일부는 박선장이 키를 잡은 이 아시아스타로 옮겨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장으로서는 컨테이너 내용물을 파악하지 않으니 전혀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 일은 중국이 폐합성수지의 수입 구제를 시작하고 나타난 일이다. 중국이 그런 조치를 단행하고 나니 폐기물의 처리가 어려워지자 그런 신종 국제사기가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마닐라 항구에는 한산해서 대기하는 시간이 없이 바로 정박이다. 배를 정박시키는 일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지라 이등항해사인인 부선장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박선장이 직접 키를 잡아야하는 것이다. 배의 속도와 접안하는 각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부두에 들어서서 닻을 내리기까지 약 삼십 분 정도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타실에 감돌게 마련이다.
배를 정박시키는데 신경을 쓰느라 박선장은 콜럼버스가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배를 완전히 정박시키고 엔진 출력을 낮추고 옷을 갈아입는데 콜럼버스 녀석이 조타실로 들어왔다.
-캡틴박 아저씨! 멋있는데요? 캡틴복장이에요? 근데. 여기는 보물섬이 아니죠?
-보물섬? 여기는 보물섬이 아니고 필리핀 마닐라야. 저기 보이는 컨테이너 있지? 저거 다 내리면 우리는 또 출발이야.
시간이 현지시간으로 오전 열 시경이었다. 적당한 시간에 정박을 했으니 하역작업은 아마도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끝이 날 것이다.
-우리도 나가자! 드디어 필리핀이다.
박선장은 콜럼버스의 손을 잡고 철제계단을 내려왔다. 마닐라의 날씨는 맑았다. 열대몬순기후의 우기인데 오면서 몇 번 소나기를 만났지만 부두의 날씨는 희한하게 맑은 것이다. 부두로 내려오니 좀체 그런 일이 없었던 마닐라지사장이 세관마당으로 놓인 철제계단 앞에 나와서 서 있었다.
-인마가 그놈아입니꺼.
지사장은 이미 연락을 받은 모양이다. 아이의 부모들이 마닐라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단다.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지사장은 전화번호를 휘갈겨 쓴 A4용지를 내밀었다. 박선장은 출항하면서 꺼두었던 휴대폰을 꺼내서 켰다. 이 곳에 도착하여 다시 켜면 자동로밍이 되는 시스템이다. 전화를 켜면서 옆에 있는 어린 콜럼버스를 보고 물었다.
-야! 콜럼버스! 엄마와 통화를 하고 싶지?
-아니요.
얼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도 일단 전화는 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들을 안심시켜주는 게 최우선이다. 전화를 했는데 신호가 겨우 세 번 가니 상대방이 받았다. 전화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낌새가 역력하다. 콜럼버스의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박선장은 아이가 숨어든 배의 선장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하면서 아이는 괜찮으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박선장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부터 좀 바꾸어 달라고 했다. 물론 목소리를 들어서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야! 콜럼버스! 아빠야! 전화 받아.
아이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콜럼버스는 싫은 내색이 역력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았다. 헌데, 이 녀석은 전화를 받자말자 제 아빠의 말을 듣지도 않고 딱 두 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빠! 끊어!
박선장이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으나 이미 끊어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박선장이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통화중이라는 음성 메시가 나왔다. 난데없는 경우를 당한 콜럼버스의 아빠가 박선장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박선장이 휴대폰을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 금세 전화가 왔다.
-허! 거참, 아이가 안 받으려고 하네요. 콜럼버스가 되려는 바다의 사나이가 배에서 너무 재미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서두로 콜럼버스의 아빠와 전화로 상의를 했다. 상의가 아니라 박선장이 설명을 한 거였다. 우리 배는 내일 마닐라를 떠나 싱가포르로 간다. 싱가포르에서 짐을 내리고 그 다음에는 양곤에 가서 사흘을 쉬고 돌아오면서 싱가포르의 짐을 싣고 다시 마닐라로 와서 하루를 쉬면서 다시 짐을 싣는다. 홍콩은 들를지 통관 되는 짐을 보고 결정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대략 보름 정도가 소요된다. 그것도 태풍이 오는 철이니 기상을 봐서 결정이 된다. 급하다면 아이를 여기서 영사관으로 보내 여권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낼 수는 있으나 외교상 절차가 복잡하고 아이가 혼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다는 내용의 설명을 했다.
콜럼버스 아빠는 양곤이 어디냐고 물었다. 박선장은 미얀마의 항구도시라고 설명을 해주며 개학이 언제냐고 물었다.
콜럼버스의 아빠는 학교문제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만약 아이가 운항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영사관에 맡기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바로 마닐라로 날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번거로움이 왠지 박선장이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배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학교문제만 상관없으면 괜찮다고 했다.
돈을 내서라도 수학여행을 보내는 판인데 방학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도록 두는 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했다. 왠지 박선장도 아이를 영사관에 맡기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선장님께 폐가 되지 않을까요? 그 배에 몇 명이이서 근무하시나요?
전화 말미에 콜럼버스 아빠가 못 미더운지 염려를 했다.
배에는 자신을 포함해서 열한 명이 근무하고 전부가 한국인이라고 했고 박선장은 폐가 되는 일은 없고 최대한 아이의 안전에 신경을 쓰겠다면서 아이가 마음이 바뀌면 내일이라도 다시 통화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운항 중에는 통화가 안 되니까 싱가포르에 도착을 하면 통화를 하고, 또 양곤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돌아오실 적에는 마산으로 귀항하시나요?
콜럼버스 아빠가 물었다. 박선장의 자신은 집도 마산이라고 하며 실리는 짐을 봐서 평택항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쪽으로 가더라도 정박을 하면 일주일을 쉬니 박선장이 마산으로 데려가겠다고 안심을 시켰다. 콜럼버스 아빠는 평택항으로 가시게 되면 연락을 주시면 차로 모시러 평택으로 올라가겠노라고 했다. 박선장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일단 영사관에 아이를 맡기는 일은 없는 걸로 하고 아이가 마음이 바뀌면 저녁이나 내일이라도 통화를 하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야! 콜럼버스! 아빠한테 허락을 받았어.
그 말을 하며 박선장이 손바닥을 쳐들었다. 철없는 콜럼버스는 무슨 뜻인지 알고 냉큼 하이 파이버를 했다.
-캡틴박! 짱이야!
하이 파이버를 마친 녀석이 엄지를 세워 앞으로 쭉 내밀며 한 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통화내용을 다 들은 마닐라지사장이 어린 콜럼버스의 이마에 꿀밤을 한 대를 선사했다. 꿀밤을 맞은 녀석도 지사장도 싱글거리고 있었다.
마닐라 세관은 박선장의 얼굴만 보고 통과였다.
박선장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이미 선장의 하얀 제복을 입고 금테가 셋이나 둘린 선장임을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있었던 터라 굳이 선원증을 내밀 필요가 없었다. 세관 직원들과 눈인사로만 콜럼버스의 손을 잡고 통과했다.
필리핀은 영어권 국가라서 말이 막힐 리가 없었고 자국 화폐인 페소보다 달러를 좋아하는 터라 굳이 환전을 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박선장은 아이를 데리고 시내 백화점으로 가려다가 제복을 입고 택시타기가 번거롭거니와 시내를 활보하가기 어울리지 않을 듯 해서 세관을 나와서 도로를 건너면,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키아포 재래시장으로 콜럼버스를 데리고 갔다.
물가가 엄청 싼 나라의 가장 큰 재래시장이니 사람이 보통 붐비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 옷가게는 시장 초입에 있었다. 가만히 있어서 사람에 떠밀려갈 정도로 시장은 복잡했다. 티셔츠와 반바지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콜럼버스 가장 비싸고 좋은 것을 골라.
콜럼버스를 보고 고르라고 하고는 콜럼버스가 디자인과 색상이 마음에 든다는 옷을 두 벌 사고 마음에 든다는 팬티도 두 장이나 사는데 계산을 하면서 셈하니 한국의 담배 두 갑 값이 조금 넘을 뿐이다.
-야 콜럼버스! 너무 싸다. 다음에는 운동화도 사야지.
그 말을 하니 콜럼버스 녀석은 그제서 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꼬질꼬질한 게 거지발싸개와 다름 아니다.
신발가게를 찾아 식료품과 채소가게를 지나고 미로 같은 시장 깊숙이 들어가 신발가게를 찾아냈다.
-야! 콜럼버스 여기서 사면되겠다.
헌데, 대답이 없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다. 돌아보니 콜럼버스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뒤를 따라서 오는 줄 알았는데 사라진 것이었다. 사람은 엄청 붐비는 곳이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박선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낭패가?
박선장은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왔던 길을 더듬어 나오는데 박선장조차도 왔던 길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분명히 왔던 길이지 싶어 되짚어 나오니 큰길이었다. 박선장조차도 전혀 엉뚱한 길로 나온 것이다.
-이거, 이거 조졌군.
박선장은 마음을 가다듬고 세관 앞에서 어느 횡단보도를 건너왔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갔던 길을 찾아내고 시장으로 들어가니 콜럼버스 녀석은 제 옷을 샀던 옷가게 앞에 서 있었다. 박선장은 안도의 한숨 저절로 나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왈칵 날 지경이었다.
-야! 콜럼버스! 너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따라왔어야지?
-캡틴박! 아저씨 바보예요? 어디서 길을 잃어버리면 울면서 찾아다니지 말고 왔던 길 제자리에 서 있으라고 했어요. 분명히 다시 찾아온다고.
-그래? 그래! 잘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더냐?
엄마랑 제주도에 가면서 배웠고, 학교에서도 견학을 가면서 그렇게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 지극히 평범한 이치, 초등학생도 숙지하고 있는 사항을 박선장만 모르고 가슴을 졸렸던 것이다.
-이젠 손잡고 다니자.
캡틴박은 콜럼버스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다시 들어갔으나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신발가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미로 같은 길에서 그 신발가게를 찾기란 실로 어려웠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서 나가다가 큰길 모퉁이에 붙은 전혀 엉뚱한 신발가게에서 콜럼버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베트남에서 만든 짝퉁 나이키운동화를 샀다.
물가가 워낙 싼 나라 재래시장이라 돈은 얼마 들지 않았지만 콜럼버스와 돌아다니며 장을 본 게 한 보따리였다. 콜럼버스의 옷과 신발 그리고 아이에게 필요한 용품, 배에서 군것질거리까지 콜럼버스가 마음에 든다는 걸 골라서 사고 보니 콜럼버스와 캡틴박의 손에는 비닐봉가 두 개씩 들려있었다.
점심을 거르고 시장을 돌아다녔으니 캡틴박은 시장했다. 콜럼버스 녀석도 그랬는지 비닐봉지에 든 비스킷을 꺼내서 먹고 있었다.
-야 콜럼버스. 마닐라에 왔으니 레촌을 먹자.
-캡틴박! 그게 뭐예요?
-친구! 일단 먹어보면 알아.
비닐봉지를 나누어 들고 재래시장 부근의 레촌 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재래시장과는 달리 음식점은 조용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담고 있었다. 레촌이란 필리핀의 전통음식으로 새끼돼지를 통으로 구운 스페인요리다. 스페인치하에 있을 때 발달한 음식인데 숯불에 구워 맛과 향이 그만이고 육질이 연하여 칠리소스에 찍어 향채에 쌈을 싸서 먹으면 최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음식이란다.
콜럼버스 녀석은 레촌이 큰 접시에 한가득 나오자 미심적은 듯, 깨작거리며 맛을 보고는, 이거다 싶었는지 캡틴박보다 잘 먹고 있었다.
-어때? 피자보다 맛있지?
콜럼버스 녀석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미어터져라 한 입 가득, 레촌을 물고 있던 터라 엄지를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먹어! 어때? 기분 좋은데 엄마 목소리 한번 들어볼까?
콜럼버스 녀석은 그 말에도 엄지를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박선장은 이때다, 싶어 휴대폰을 꺼내 콜럼버스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벨이 서너 번 울리자 받았다. 한국과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음으로 아마도 퇴근을 해서 집인 모양이었다. 얼른 콜럼버스에게 바꾸어 주었다. 생각이 바뀌기 전에 냉큼 바꾸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캡틴박은 콜럼버스가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그래. 그래. 걱정 마. 캡틴박이 나이키운동화와 옷도 사주었어. 캡틴박? 누구긴 누구야. 선장님이지. 지금 먹고 있는 중이야. 내가 말했잖아? 콜럼버스가 되어 신대륙을 발견한다고. 엄마? 응. 여기? 보물섬이야. 응. 나 이제 마음이 바뀌었거든, 캡틴이 되기로. 알았어. 칫솔? 이미 샀어. 알았다니까 자꾸 그러네. 알았어.
통화는 한참 걸렸다. 알았다는 말을 끝으로 콜럼버스가 휴대폰을 캡틴박에게 내밀었다.
콜럼버스의 엄마였다. 폐를 끼쳐 미안하다면서 마산에 오시면 저녁 한 그릇 대접해 올리겠다는 인사였다.
-저녁? 당연히, 그래야 하죠.
그 말을 끝으로 캡틴박은 전화를 끊었다. 캡틴박은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야! 콜럼버스 친구! 우리 콜라 하나 시킬까? 바다의 사나이끼리 화끈하게 건배 한잔 어때?
콜럼버스가 그 말에 손바닥을 쳐들었다. 캡틴박을 냉큼 하이 파이버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