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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卷之三 / 詩 / 東都樂府
會蘓曲
儒理王九年。定六部號。中分爲二。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分朋。自七月望。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乙夜而罷。至八月望。考其功之多少。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戲皆作。謂之嘉徘。是時。負家一女子起舞。嘆曰。會蘓會蘓。其音哀雅。後人因其聲作歌。名會蘓曲。
會蘓曲會蘓曲。西風吹廣庭。明月滿華屋。王姬壓坐理繅車。六部女兒多如簇。爾筥旣盈我筐空。釃酒揶揄笑相謔。一婦嘆千室勸。坐令四方勤杼柚。嘉徘縱失閨中儀。猶勝跋河爭嗃嗃。
憂息曲
實聖王元年。以柰勿王子未 斯欣質於倭。十一年。又以未 斯欣兄卜好。質於高句麗。及訥祗王卽位。思見二弟。欲得辨士往迎之。象擧歃良郡太守朴堤上。堤上受命。入高句麗。旣以卜好還。又浮海到倭國。紿倭王。潛使未 斯欣還。王驚喜。命六部遠迎之。及見。握手相泣。會兄弟置酒極歡。王自作歌。以宣其志。俗謂之憂息曲。
常棣華隨風落扶桑。扶桑萬里鯨鯢浪。縱有音書誰得將。常棣華隨風返雞林。雞林春色擁雙闕。友于歡情如許深。
鵄述嶺
朴堤上自高句麗還。不見妻子。而徑向倭國。其妻追至栗浦。見其夫已在船上。呼之大哭。堤上但搖手而去。堤上死後。其妻不勝其慕。率三娘子。上鵄述嶺。望倭國慟哭而死。因爲鵄述嶺神母焉。
鵄述嶺頭望日本。粘天鯨海無涯岸。良人去時但搖手。生歟死歟音耗斷。音耗斷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呼天便化武昌石。烈氣千載干空碧。
怛忉歌
照知王十年。王遊天泉亭。有老翁自池中出獻書。外面題云。開見二人死。不開一人死。王曰。與其二人死。莫若不開。但一人死耳。日官云。二人者。庶民也。一人者。王也。王惧。拆而見之。書中云射琴匣。王入宮。見琴匣。倚壁射之而倒。乃內殿焚修僧也。王妃引與通。因謀弑王也。於是。王妃伏誅。自後國俗。每正月上辰,上亥,上子,上午。忌百事。不敢動作。目之爲怛忉日。必以四日者。其時適有烏鼠豕之怪。令騎士追之。因遇龍也。又以十六日。爲烏忌之日。以粘飯祭之。
怛怛復忉忉。大家幾不保。流蘓帳裏玄鶴倒。揚且之晢難偕老。忉怛忉怛。神物不告知奈何。神物告兮基圖大。
天官寺云云
陽山歌
金歆運。柰勿王八世孫。小遊花郞文努之門。永徽六年。太宗武烈王。以歆運爲郞幢大監。伐百濟。營陽山下。百濟人覺之。乘夜疾駈。黎明。緣壘而入。我軍驚亂。飛矢雨集。歆運橫馬待敵。從者握轡勸還。歆運拔釰擊之。遂與大監穢破,少監狀得。赴賊鬪。格殺數人而死。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嘆曰。彼骨貴勢榮。猶守節以死。况寶用那。生無益。死無損乎。遂赴敵而死。時人作陽山歌以傷之。
敵國爲封豕。荐食我邊彊。赳赳花郞徒。報國心靡遑。荷戈訣妻子。嗽泉啖糗粻。賊人夜劘壘。毅魂飛釰鋩。回首陽山雲。矗矗虹蜺光。哀哉四丈夫。終是北方强。千秋爲鬼䧺。相與歆椒漿。
碓樂
百結先生。失其姓名。居狼山下。家極貧。衣百結若懸鶉。故以名之。嘗慕榮啓期之爲人。以琴自隨。凡喜怒悲歡不平之事。皆以琴宣之。歲將暮。隣里舂粟。其妻聞杵聲曰。人皆有粟。我獨無。何以卒歲。先生仰天嘆曰。夫死生有命。富貴在天。其來也不可拒。其往也不可追。汝何傷乎。吾爲汝。作杵聲以慰之。乃鼓琴作杵聲。世傳爲碓樂。
東家砧舂黍稻。西家杵搗寒襖。東家西家砧杵聲。卒歲之資贏復贏。儂家窖乏甔石。儂家箱無尺帛。懸鶉衣兮藜羹椀。榮期之樂足飽煖。糟妻糟妻莫謾憂。富貴在天那可求。曲肱而寢有至味。梁鴻孟光眞好逑。
黃昌郞
黃昌郞。不知何代人。諺相傳。八歲童子。爲新羅王。謀釋憾於百濟。往百濟市。以釰舞。市人觀者如堵墻。百濟王聞之。召入宮令舞。昌郞於座。揕王殺之。後世。作假面以像之。與處容舞並陳。考之史傳。絶無左驗。雙梅堂云。非淸郞。乃官昌之訛也。作辨以辨之。然亦臆說。不可信。今觀其舞。周旋顧眄。變轉倐忽。至今凜凜猶有生氣。且有其節。而無其詞。故幷賦云。
若有人兮纔離齠。身未三尺何䧺驍。平生汪錡我所師。爲國雪恥心無憀。釰鐔擬頸股不戰。釰鍔指心目不搖。功成脫然罷舞去。挾山北海猶可超。
점필재집 시집 제3권 / [시(詩)] / 동도 악부(東都樂府)
○ 회소곡(會蘇曲)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9년에 육부(六部)의 호칭을 정하고 중간을 나누어 둘로 만든 다음, 왕녀(王女) 2인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편을 나누어 7월 보름날로부터 매일 이른 아침부터 대부(大部)의 마당에 모아놓고 길쌈을 하여 이경(二更)쯤에 일을 끝내곤 해서 8월 보름날까지 일을 계속하고 나서는 그 공(功)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여, 진[負] 쪽에서는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이긴 쪽에 사례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잔치에 가무(歌舞)와 백희(百戲)를 모두 베풀었으므로,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진 집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會蘇)’라 하였는바, 그 음조가 슬프고도 우아하였으므로, 후인들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이름하였다.
회소곡 회소곡 / 會蘇曲會蘇曲
서풍은 넓은 마당에 불어오고 / 西風吹廣庭
밝은 달은 화려한 집에 가득한데 / 明月滿華屋
왕의 딸이 윗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니 / 王姬壓坐理繅車
육부의 여아들이 대 떨기처럼 많이 모였네 / 六部女兒多如簇
네 광우린 이미 찼는데 내 광우린 비었구나 / 爾筥旣盈我筐空
술 걸러놓고 야유하고 웃고 서로 농담하네 / 釃酒揶揄笑相謔
한 여자가 탄식하매 일천 집이 권면하니 / 一婦嘆千室勸
앉아서 사방에 길쌈 부지런히 하게 하였네 / 坐令四方勤杼柚
가배 놀이가 비록 규중의 예의는 아니지만 / 嘉俳縱失閨中儀
오히려 다퉈 소리 지르는 발하보다 낫구려 / 猶勝拔河爭嗃嗃
○ 우식곡(憂息曲)
실성왕(實聖王) 원년에 내물왕(柰勿王)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왜국(倭國)에 볼모로 보냈고, 11년에는 또 미사흔의 형인 복호(卜好)를 고구려(高句麗)에 볼모로 보냈었다. 그러다가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서는 두 아우가 보고 싶어서 변사(辯士)를 얻어서 고구려와 왜국에 가서 두 아우를 맞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뭇 신하들이 삽량군 태수(歃良郡太守) 박제상(朴堤上)을 천거하였다. 그래서 박제상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가 이미 복호를 맞이하여 돌아온 다음, 또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러서는 왜왕(倭王)을 속이어 몰래 미사흔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육부(六部)에 명하여 멀리 나가 맞이하게 하고, 두 아우를 만남에 미쳐서는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그리고는 형제들이 다 모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극도로 즐기었다. 이 때에 왕이 스스로 노래를 지어 자신의 뜻을 폈는데, 세속에서 이것을 우식곡이라 하였다.
상체화가 바람을 따라 부상에 떨어지니 / 常棣華隨風落扶桑
부상 만리엔 고래 물결 사납기도 하여라 / 扶桑萬里鯨鯢浪
비록 서신이 있은들 누가 가져올 수 있으랴 / 縱有音書誰得將
상체화가 바람을 따라 계림에 돌아오니 / 常棣華隨風返鷄林
계림의 봄 빛이 쌍궐에 성대히 둘리었네 / 鷄林春色擁雙闕
우애의 즐거운 정이 이렇게도 깊으구나 / 友于歡情如許深
○ 치술령(鵄述嶺)
박제상이 고구려로부터 돌아와서는 처자(妻子)도 만나보지 않고 바로 왜국을 향해 가므로, 그의 아내가 뒤따라 율포(栗浦)에 이르러 보니, 자기 남편이 이미 배 위에 있으므로 남편을 부르며 대성 통곡을 하였으나, 박제상은 손만 흔들어 보이고 가버렸다. 마침내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은 뒤에 그의 아내는 남편 사모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세 낭자(娘子)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
치술령 꼭대기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니 / 鵄述嶺頭望日本
하늘에 닿은 큰 물결 끝도 가도 없어라 / 粘天鯨海無涯岸
낭군은 떠날 때에 손만 흔들었는데 / 良人去時但搖手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네그려 / 生歟死歟音耗斷
소식이 끊어지고 길이 이별하여라 / 音耗斷長別離
죽은들 산들 어찌 서로 만날 때가 있으랴 / 死生寧有相見時
하늘에 부르짖다 무창의 돌로 화했으니 / 呼天便化武昌石
열녀의 기운이 천추에 하늘을 찌르는구려 / 烈氣千載干空碧
○ 달도가(怛忉歌)
소지왕(炤知王) 10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노니는데, 어떤 노옹(老翁)이 지중(池中)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런데 그 외면(外面)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되어 있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게 하는 것보다는 뜯지 말아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인(庶人)이고 한 사람은 왕(王)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뜯어서 보니, 그 글에 “금갑을 쏘아라[射琴匣]”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왕이 궁(宮)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는 벽을 기대고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보니, 바로 내전(內殿)의 분수승(焚修僧)이었다. 왕비가 그를 데려다 간통을 하고 인하여 왕을 시해하려고 꾀했었으므로, 이에 왕비도 복주(伏誅)되었다.
그 후로는 나라의 풍속이 매년 정월의 상진일(上辰日)ㆍ상해일(上亥日)ㆍ상자일(上子日)ㆍ상오일(上午日)에는 온갖 일을 금기하여 감히 동작을 하지 않고 이를 지목하여 달도일(怛忉日)이라 하였다. 그런데 굳이 4일을 지목한 것은 그때에 마침 오(烏)ㆍ서(鼠)ㆍ시(豕)의 요괴가 있어 기사(騎士)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 결과 인하여 용(龍)을 만났던 때문이다. 또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祭)를 지내었다.
놀랍고 놀랍고 또 슬프고 슬퍼라 / 怛怛復忉忉
임금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네 / 大家幾不保
오색 술 장막 속의 현학금이 거꾸러지니 / 流蘇帳裏玄鶴倒
어여쁜 왕비가 해로하기 어렵게 되었구려 / 揚且之晢難偕老
슬프고 놀랍고 슬프고 놀라와라 / 忉怛忉怛
귀신이 안 알렸으면 어찌되었을거나 / 神物不告知柰何
귀신이 알려줌이여 나라 운수 길어졌네 / 神物告兮基圖大
천관사 운운[天官寺云云]
○ 양산가(陽山歌)
김흠운(金歆運)은 내물왕(柰勿王)의 8세손인데 젊어서 화랑(花郞) 문로(文努)의 문에 종유하였다. 영휘(永徽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650~655) 6년에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아 백제(百濟)를 치게 하여, 그가 양산(陽山) 아래에 진영을 두었는데, 백제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밤중에 급히 몰아와서 새벽에 진루(陣壘)를 타고 쳐들어왔다. 그러자 아군은 놀라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고 날으는 화살은 빗살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흠운은 말을 타고서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종자(從者)가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유하자, 흠운이 칼을 뽑아 그를 쳐버리고, 마침내 대감(大監) 예파(穢破), 소감(少監) 상득(狀得)과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싸워서 수인(數人)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그런데 이 때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골(骨)이 귀하고 권세가 높은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키고 죽었는데, 더구나 이 보용나는 살아도 도움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이 없음에랴.” 하고는 마침내 적에게로 달려가 싸우다 죽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그를 슬퍼하였다.
적국이 멧돼지처럼 포악하여 / 敵國爲封豕
우리 변경을 차츰 먹어 들어오니 / 荐食我邊疆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들이 / 赳赳花郞徒
보국하느라 마음에 겨를이 없어 / 報國心靡遑
창을 메고 처자를 하직하고서 / 荷戈訣妻子
샘물로 입 닦고 말린 쌀을 먹다가 / 嗽泉啖糗粻
적들이 밤에 성루를 무찌르자 / 賊人夜劘壘
씩씩한 넋이 칼 끝에 흩어져버렸네 / 毅魂飛劍鋩
머리 돌려 양산의 구름 바라보니 / 回首陽山雲
무지개 빛 높이도 뻗치었도다 / 矗矗虹蜺光
슬프다, 네 사람의 대장부는 / 哀哉四丈夫
마침내 북방의 강이 되었으니 / 終是北方强
천추 만세에 웅걸한 귀신 되어 / 千秋爲鬼雄
서로 더불어 향사를 흠향하리 / 相與歆椒漿
○ 대악(碓樂)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그의 성명을 알 수 없는데, 그는 낭산(狼山) 아래에 살면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여기저기 수없이 기워서[百結] 마치 현순(懸鶉)과 같은 옷을 입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항상 거문고를 지니고 있으면서 무릇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불평스러운 일이 있을 적에는 모두 이 거문고를 타서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한번은 세밑이 되어 이웃에서 곡식을 방아찧는 소리가 나자 그의 아내가 방아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마다 곡식이 있는데 나만 유독 없으니 어떻게 해를 마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대체로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서, 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고 가는 것은 따라잡을 수도 없는 것인데, 너는 무얼 그리 상심하느냐. 내 너를 위하여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어 너를 위로해주마.” 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여 이를 대악이라 하였다.
동쪽 집에서는 기장과 벼를 방아 찧고 / 東家砧舂黍稻
서쪽 집에서는 겨울 옷을 다듬이질하누나 / 西家杵搗寒襖
동쪽 집 서쪽 집 방아 소리 다듬이 소리는 / 東家西家砧杵聲
해를 넘길 거리가 넉넉하고 또 넉넉하건만 / 卒歲之資嬴復嬴
우리 집 광 안에는 쌓아둔 곡식이 없고 / 儂家窖乏甔石
우리 집 상자에는 한 자의 명주도 없으니 / 儂家箱無尺帛
해어져 너털거리는 옷과 명아주국 한 사발에 / 懸鶉衣兮藜羹椀
영계기의 낙은 충분히 배 부르고 따뜻하다오 / 榮期之樂足飽煖
조강지처여 조강지처여 부질없이 걱정 말라 / 糟妻糟妻莫謾憂
부귀는 하늘에 달렸는데 구한다고 되겠는가 / 富貴在天那可求
팔을 베고 잠을 자도 지극한 맛이 있나니 / 曲肱而寢有至味
양홍과 맹광은 참으로 좋은 배필이었네 / 梁鴻孟光眞好逑
○ 황창랑(黃昌郞)
황창랑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8세의 동자(童子)가 신라왕을 위하여 백제에 원수를 갚으려고 백제의 시장에 가서 칼춤을 추자, 그것을 구경하는 시장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쌌는데, 백제왕이 그 말을 들고는 그를 궁궐로 불러들여 춤을 추게 한 결과, 창랑이 그 자리에서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그리하여 후세에 가면(假面)을 만들어 그를 상징해서 처용무(處容舞)와 함께 베푸는데, 사전(史傳)에 상고해보면 전혀 증거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호)은 말하기를 “이는 창랑(昌郞)이 아니라 곧 관창(官昌)이 와전된 것이다.” 하며, 변(辨)을 지어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억설(臆說)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지금 그 춤을 보면, 주선하며 이리저리 돌아보고 언뜻언뜻 변전(變轉)하는 것이 지금도 늠름하여 마치 생기가 있는 듯하고, 또 그 절주[節]는 있으나 그 사(詞)가 없으므로 아울러 부(賦)하는 바이다.
이 어떤 사람이뇨, 겨우 칠팔 세가 되어 / 若有人兮纔離齠
석 자 키도 안 되는 애가 어이그리 웅용했는고 / 身未三尺何雄驍
평생에 왕기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아서 / 平生汪錡我所師
나라 위해 설욕했으니 마음에 여한 없겠네 / 爲國雪恥心無憀
칼날이 목을 겨누어도 다리도 떨지 않았고 / 劍鐔擬頸股不戰
칼날이 심장을 가리켜도 눈도 안 흔들렸지 / 劍鍔指心目不搖
공을 이루고는 춤 그만두고 유유히 떠나니 / 功成脫然罷舞去
겨드랑에 태산을 끼고 북해도 뛰어넘겠네 / 挾山北海猶可超
[주-D001] 발하 : 유희(遊戲)의 일종인 줄다리기를 말함. 당 중종(唐中宗) 때에 궁녀(宮女)들이 하였던 놀이로서, 즉 삼[麻]으로 꼰 큰 동아줄의 양쪽 끝에다 각각 10여 줄의 작은 새끼줄을 매고 줄 하나마다 서너 명씩이 잡아당기되, 힘이 약해 끌려간 쪽이 진다고 한다. 《唐書 中宗紀》[주-D002] 상체화가……떨어지니 : 상체화는 형제간을 비유한 말이고, 부상(扶桑)은 해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전하여 동쪽에 위치한 왜국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小雅 常棣》[주-D003] 무창의 돌 : 호북성(湖北省) 무창의 북산(北山) 위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을 이름. 옛날에 어느 열녀(烈女)가 국난(國難)에 징병되어간 남편을 이 산 위에서 바라보며 전송하고는 그대로 화(化)하여 돌이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4] 북방의 강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袵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 第十章》[주-D005] 현순(懸鶉) : 메추리는 꼬리 부분에 유독 털이 없어 마치 옷이 짧거나 갈갈이 찢어진 것과 같으므로, 무릇 해진 옷을 현순이라 한다.[주-D006] 영계기(榮啓期) : 춘추 시대 사람인데, 공자가 일찍이 태산에서 노닐고 오는 길에 영계기를 만났던바, 그는 녹비(鹿皮) 갖옷에 새끼줄을 띠고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묻기를 “선생이 즐겁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천지 사이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첫째의 즐거움이요, 사람 중에도 남자로 태어난 것이 둘째의 즐거움이며, 게다가 90세의 수(壽)를 누린 것이 셋째의 즐거움이오.”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列子 天瑞》[주-D007] 양홍과 맹광은……배필이었네 : 양홍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이고, 맹광(孟光)은 바로 그의 아내 이름이다. 양홍은 본디 가난한 선비였는데, 맹광이 부유한 가정에서 시집을 와서 처음에 비단옷을 입고 화장을 하곤 하므로, 양홍이 말하기를 “나는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깊은 산 속에 은거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그대는 비단옷을 입고 분단장을 하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자, 맹광이 대번에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서 양홍의 앞에 나타나니, 양홍이 말하기를 “진정한 양홍의 아내이다.” 하고는, 함께 패릉산중(霸陵山中)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三》[주-D008] 왕기 : 춘추 시대 노 애공(魯哀公)의 폐동(嬖童)이었는데, 제(齊) 나라와 싸울 적에 애공의 수레에 배승(陪乘)하고 가서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左傳 哀公十一年》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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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 제4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 동도악부 칠수(東都樂府七首)
김종직(金宗直)
회소곡(會蘇曲)
유리왕(儒理王) 9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정하고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패를 나누어 7월 보름날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삼나이[續麻]를 하여 깊은 밤에 파하게 하고 8월 보름날에 이르러 그 일한 것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게 사례하기로 하니, 그 때에 노래와 춤과 놀이를 다 하는데, 그것을 ‘가비(嘉俳)’라 이른다. 그 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되 “회소, 회소(會蘇)”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럽고 아담했다. 뒷사람이 그 소리를 본떠 노래를 지으니, 그 이름이 ‘회소곡’이다.
회소곡, 회소곡 / 會蘇曲會蘇曲
서풍이 넓은 뜰에 불어오고 / 西風吹廣庭
밝은 달은 화옥에 가득한데 / 明月滿華屋
왕녀가 윗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니 / 王姬壓坐理繅車
육부의 여자들 죽준처럼 모여들었네 / 六部六兒多如簇
네 바구닌 다 차고 내 광우린 비었구나 / 爾筥旣盈我筐空
술잔 들고 야유하며 웃고 서로 놀리네 / 釃酒揶揄笑相謔
한 여자가 탄식하매 천 집에서 권하여 / 一婦嘆千室勸
앉아서 사방이 베짜기를 근면토록 / 坐令四方勤杼柚
가비가 비록 규중의 의범은 잃었지만 / 嘉俳縱失閨中儀
발하 놀이로 왁자지껄 싸움보단 나았네 / 猶勝跋河爭嗃嗃
우식곡(憂息曲)
실성왕(實聖王) 원년에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말사흔(末斯欣)을 왜국에 볼모를 보내고, 11년에 또 믿희의 형 복해(卜海)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었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자 두 아우가 보고 싶어 변사(辯士)를 구하여 가서 모셔 오게 하려 하니, 사람들이 삽량군(歃良郡)태수(太守) 박제상(朴堤上)을 천거하였다. 터마루가 명(命)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가 복 해를 데려오고 나서 또 바다에 떠서 외국에 이르러 외왕을 속여 몰래 말사흔을 돌아오게 하니, 왕이 놀라고 기뻐 육부(六部)를 명하여 멀리 영접하게 하고 상면하자 손을 쥐고 마주 울며 형제들을 모아 주연을 차려 놓고 환오(歡娛)를 극했다. 왕이 스스로 노래를 지어 그 뜻을 표시했는데, 그것을 속칭 ‘우식곡(憂息曲)이라 한다.
상체 꽃이 바람에 불려 부상에 떨어지니 / 常棣華隨風落扶桑
부상 만리 만경창파에 / 扶桑萬里鯨鯢浪
편지를 보내련들 뉘 가져가리 / 縱有音書誰得將
상체 꽃이 바람 따라 계림으로 돌아왔네 / 常棣花隨風返雞林
계림의 봄빛이 쌍궐을 옹위하였으니 / 雞林春色擁雙闕
형제의 기쁜 정이 이렇듯이 깊었구나 / 友于歡情如許深
치술령(鵄述嶺)
박제상(朴堤上)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 처자를 보지 않고 그 길로 왜국으로 향하니, 그 처가 뒤쫓아 밤개[栗浦]에 이르러 보니 남편이 이미 배위에 있는지라. 부르며 크게 울었으되 박제상이 다만 손만을 흔들고 갔다. 박제상이 왜국서 죽은 뒤에 그 처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거느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 인하여 치술령 신모가 되었다.
치술령 위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 鵄述嶺頭望日本
하늘에 맞닿은 바다가 망망도 해라 / 粘天鯨海無涯岸
남편이 갈 때에 흔들던 손 / 良人去時但搖手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 끊기고 / 生歟死歟音耗斷
영 이별 죽든 살든 언제 다시 만나보리 / 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
하늘을 부르며 무창돌로 변하였으니 / 呼天便化武昌石
열기가 천년 뒤에도 푸른 공중에 치솟았네 / 烈氣千載干空碧
달도가(怛忉歌)
조지왕(照知王) 10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놀러 갔더니, 한 늙은이가 연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치는데, 겉 면(面)에 썼으되, “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펴보면 한 사람이 죽는다.” 했다. 왕이 말하되, 두 사람이 죽느니 차라리 안 펴봄만 못하겠다. 한 사람만이 죽을 뿐이니.” 하니, 일관(日官)이 이르되, “두 사람은 서민(庶民)이요, 한 사람은 왕이옵나이다.” 하매, 왕이 두려워 뜯어 보니 편지 가운데 일렀으되, “거문고 갑(匣)을 쏘라.” 했다. 왕이 궁에 들어가 보니 거문고 갑이 벽에 기대어져 있는지라. 쏘아 거꾸러치니, 그 속에 내전(內殿)분수승(焚修僧)이 있었다. 왕비(王妃)가 끌어들여 정을 통하여 서로 짜고 왕을 죽이려 함이었다. 이에 왕비가 복주(伏誅)되었다. 그 뒤로부터 국속(國俗)에 매년 정월 상전(上展)ㆍ상해(上亥)ㆍ상자(上子)ㆍ상오(上午) 날에는 백사를 거리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를 ‘설날[怛忉日]이라 불렀다. 반드시 이 네 날로 함은 그 때에 마침 까마귀ㆍ쥐ㆍ돼지의 이상한 일이 있었으므로 기사(騎士)를 시켜 쫓아가게 하였다가 인하여 용(龍)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 16일은 까마귀 기일(忌日)이라 찰밥을 지어 제사한다.
섧고 또 설운지고 / 怛怛復忉忉
임금께서 하마터면 보전치 못할 뻔했네 / 大家幾不保
유소장 안에 거문고가 거꾸러지니 / 流蘇帳裏玄鶴倒
어여쁜 왕비가 해로하기 어려웠네 / 揚且之晳難偕老
설워라, 설워라 / 忉怛忉怛
신이 고하지 않았더면 어찌할 뻔했는가 / 神物不告知奈何
신이 고해주어서 국기가 든든했구나 / 神物告兮基圖大
양산가(陽山歌)
김흠운(金歆運)은 내물왕(奈勿王)의 여덟 대 손자인데 젊어서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門下)에 놀았다. 영휘(永徽) 6년에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이 흠운으로 낭당대각(郞幢大覺)을 삼아 백제를 치게 되어 양산 밑에 진을 쳤다. 백제 편에서 그것을 알고 밤을 타 빨리 몰아 어둠 새벽에 성루(城壘)를 탁 들어도니 아군(我軍)이 경란(警亂)하고 화살이 비오듯했다. 음운이 말을 타고 적군을 기다리니, 종자(從者)가 고삐를 쥐고 후퇴하기를 권하여 흠운이 칼을 빼어 만류하는 자를 치고 드디어 대감 예파(穢破), 소감(少監)적득(狄得)과 함께 적에게 달려가 싸워 몇 사람을 쳐 죽이고 전사했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되, “처분은 골품(骨品 신분)이 귀하고 계급이 높은 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거든, 하물며 보용나 같은 것은, 살아도 무익하고 죽어도 손해가 있는 자이랴.” 하고, 드디어 적에게 대들어가 죽었다. 그 때 사람들이 ‘양산가’ 를 지어서 슬퍼하였다.
적국이 큰 멧돼지처럼 / 敵國爲封豕
우리 변강을 먹어오는데 / 荐食我邊彊
씩씩할 손 화랑도 / 赳赳花娘徒
나라 위해 몸을 바쳐 딴 생각 없었네 / 報國心靡遑
창을 메고 처자와 영결하고 / 荷戈訣妻子
샘물 마시며 주먹밥을 먹다가 / 嗽泉啖糗糧
적군이 밤에 성루를 무찌르다 / 賦人夜劘壘
의연한 혼이 칼끝에 날았구나 / 毅魂飛劎鋩
양산의 구름을 바라보니 / 回首陽山雲
우뚝우뚝, 무지개가 뻗쳤네 / 矗矗虹蜺光
슬프다, 네 장부여 / 哀哉四丈夫
그대들은 끝내 씩씩한 사나이 / 終是北方强
천추의 구웅이 되어서 / 千秋爲鬼雄
함께 제삿술을 마시는구나 / 相與歆椒漿
대악(碓樂)
백결(百結)선생은 역사에 그 성명을 잃었다. 낭산(狼山) 밑에 사는데, 집이 아주 가난하여 옷이 백 군데나 기워 메추리가 주렁주렁 달린 것 같으므로 그런 별명을 가졌었다. 일찍 영계기(榮啓期)의 인품을 사모하였으며, 거문고를 노 신변에 가지고, 무릇 기쁜 일, 성난 일, 슬픔, 즐거움, 불평한 일들을 모두 거문고로서 폈다. 어느 해 해[歲]가 저물려할 때, 이웃 집에서 곡식 방아를 찧으니, 그의 처가 공이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다 곡식이 있는데 우리만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길꼬.” 하니,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저 죽고 삶이 명(命)이 있고 부(富)하고 귀함이 하늘에 있어 그 옴을 막을 수 없고, 그 감을 뒤쫓을 수 없나니, 너는 왜 설워하는가. 내가 너를 위하여 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하리라.” 하고, 이에 거문고를 쳐 공이 소리를 내니, 세상에서 긴하여 대악(방아타령)이 되었다.
동편 집 방아는 기장과 벼를 찧고 / 東家砧舂黍稻
서편 집 방치는 겨울 옷을 다듬어 / 西家杵搗寒襖
동편 집ㆍ서편 집, 방아ㆍ방치 소리는 / 東家西家砧杵聲
해를 보낼 물자가 넉넉하고 또 넉넉하건만 / 卒歲之資贏復贏
우리 집 움에는 쌀 한 톨이 없고 / 儂家窖乏甔石
우리 집 농에는 명주 한 자도 없네 / 儂家箱無尺帛
노닥노닥 기운 옷, 시래기국 사발 / 懸鶉衣兮藜羹椀
이래도 영계기의 즐거움은 만족하니 / 榮期之樂足飽煖
아내여, 아내여, 걱정을 마소 / 糟妻糟妻莫謾憂
부귀는 하늘에 있거니 억지로 구하리 / 富貴在天那可求
거치른 밤에 물마시고 팔 베고 누웠어도 지극한 맛 있거니 / 曲肱而寢有至味
얼씨구, 나는 양홍, 그대는 맹광, 천생 배필이로세 / 梁鴻孟光眞好逑
황창랑(黃昌郞)
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후세에 탈을 만들어 그의 모습을 본뜨고 처용무(處容舞)와 함께 놀이에 아울러 행해지나, 사전(史傳)에 상고하면 도무지 그런 기록이 없다 쌍매당(双梅堂 이첨(李詹))은 말하기를, “청랑(淸郞)이 아니요, 기실은 관창(官昌) 와전(訛傳)이라.” 하여, 변(辨)을 지었지마는, 그것도 억칙(臆測)의 설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이제 그 춤을 보건대, 빙빙 돌면서 돌아보며 흘겨보며 휙휙 번쩍번쩍, 지금에도 늠름히 아직 생기가 있는데, 그 춤은 절주(節奏)만이 있고 가사(歌詞)가 없기로 아울러 시를 짓는다.
저기 저 사람 아직 어린애 / 若有人兮纔離齠
석 장도 못 되는 키 씩씩도 하네 / 身未三尺何雄驍
평생에 왕기가 내 스승이라 / 平生汪錡我所師
나라 위에 설치하면 여한이 없네 / 爲國雪恥心無憀
목에 칼을 대어도 다리 안 떨리고 / 劒鐔擬頸股不戰
칼이 심장 가리켜도 눈 아니 깜짝 / 劒鍔指心目不搖
공 이루자 휙 춤 마치고 가는 기상 / 功成脫然罷舞去
태산 끼고 북해라도 뛰어 넘을 듯 / 挾山北海猶可超
[주-D001] 발하(跋河) : 당나라 중종(中宗)이 시신(侍臣)들에게 줄다리기를 시켰는데 이것이 발하(跋河)라 하는 것이다.[주-D002] 상체(常棣) : 《시경》에 상체화(常棣花)를 형제에게 비유하였다. 그것은 그 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까닭이다.[주-D003] 무창(武昌)돌 : 중국 무창에 망부석(望夫石)이 있는데 그것은 아내가 멀리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산 위에서 매일 매일 바라다가 나중에는 그만 돌이 되었다.[주-D004] 영계기(榮啓期) : 옛날 영계기(榮啓期)란 노인이 가난하여 갈(葛)옷을 입고 새끼로 띠를 하고 즐거워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물은즉 그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즐겁고, 남자 되었으니 즐겁고, 일찍 죽지 않았으니 즐겁다.” 하였다.[주-D005] 나는 …… 맹광(孟光) : 후한(後漢) 때에 처사 양홍이 아내 맹광이 남편의 뜻을 알아 가난함을 참고 숨어 살았다.[주-D006] 왕기(汪錡) : 춘추 때에 왕기(汪錡)란 동자(童子)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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㵢谿集卷之二 / 七言小詩 / 偶閱三國史。兼採雜記。作東都雜詠。
楊山佳氣望中看。六部民呼萬歲歡。草昧神人首群物。一方警蹕定辰韓。
沙梁井裏誕鍾賢。窈窕天敎上配乾。五十六年稱二聖。關雎風化至今傳。
査査丹鵲白鷄祥。徐伐輸來異姓王。莫道一千瓜瓞逮。可怜匏運早凄涼。
神姑化作牝鷄來。手握乾樞簸斗魁。自是人綱歸掃地。休論鍊石補天才。
鼾睡彈丸黑誌中。區區鼎峙勢終窮。熊津浿水三千里。一統雄國屬太宗。
毛郞宅裏墨胡師。喚得癡人說夢時。自是官家忽神器。不將仁義重扶持。
八關歌舞大平痕。鍾鼎千門化日暄。花萼輝光眞骨宅。沙堤冠蓋角干轓。
寂寞殊方海嶠中。間生弧矢幾英雄。連年航海觀周禮。天下車書自此東。
孤臣一死答君恩。萬里扶桑漢節尊。郅述峯頭三丈石。雲愁猶帶望夫魂。
將軍白骨化蒼苔。甲襻弓絃百戰來。一曲陽山都護裏。劍光閑却髑髏臺。
上元糯飯競千坊。書出池邊事已荒。士女怛忉無箇事。唯將蹴踘答春光。
八月金城月正圓。纖纖麻枲鬪嬋娟。會蘇凄斷嘉徘夕。兩部風光尙宛然。
昭代僊郞韻自芳。湖山千里動輝光。蛣蜣蘇合終區別。翹楚年年貢帝王。
縹緲蓬萊步輦回。君王如帝八窓開。侍臣應製裁黃竹。當宁初酣萬壽杯。
南院樓臺艶綺羅。春風長是市婆娑。月明萬戶砧聲冷。擣盡先生百結歌。
康衢白叟祝神堯。萬里桑麻雨露饒。須信土含山下土。天敎紅腐化長腰。
一點飛來碧海頭。月中雙裊冷颼颼。裁爲天上紫鸞曲。吹徹瑤池十二樓。
繁華舞榭與歌臺。腰鼓逢場百面雷。四節光陰猶昨日。風流千載想全回。
瑞鸞靈鳳鬪分曹。天上笙璈拂赭袍。萬壽蓬山塵幾隔。雲輧金母捧蟠桃。
雲開海上處容郞。萬舞回風殷八琅。紫袖鳶肩歌數闋。東京明月更茫茫。
軒天撼地踣三光。河嶽英靈聳萬方。浮世石羊興武墓。西風黃葉上書莊。
天步艱難禹鼎輕。靑絲白馬入臺城。至今鮑石亭前樹。猶帶當時風雨驚。
運去降王扣漢扄。山河無復舊輿情。雪霜楓岳來雲在。可忍飄飄七廟靈。
明活城中麋鹿過。瞻星臺畔夕陽斜。佳人巧捻昭華琯。嗚咽吹殘玉樹花。
荊棘銅駝九陌非。軟紅今化劫灰飛。乾坤百變無餘物。留得鼇山碧四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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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3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치술령곡(鵄述嶺曲)
신라 눌지왕 때 사신 박제상(朴堤上)이 / 時際訥祗朴使臣
국서 갖고 일본 가서 갇힌 몸 되었네 / 奉書日本楚囚身
높은 산에 우뚝 서 있는 망부석은 / 望夫石立山崔兀
옛 사당 가을바람 속 치술령 신모로다 / 古廟秋風鵄述神
눌지왕 때 박제상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 이내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
[주-D001] 치술령곡(鵄述嶺曲) : 신라 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작 동기만이 《증보문헌비고》 권106 악고 17에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2000
鴟述嶺。在府南三十六里。〔新增〕 新羅時,朴堤上死于倭國,其妻上此嶺,望哭而死。
신증동국여지승람 > 卷二十一 > 慶尙道 / 慶州府
山川
狼山。在府東九里。鎭山。
吐含山。在府東三十里。新羅稱東嶽,爲中祀。
金剛山。在府北七里。新羅號北嶽。
非月洞山。在府西六十七里。
明活山。在府東十一里。
仙桃山。在府西七里。新羅號西嶽,或稱西述,或稱西兄,或稱西鳶。
含月山。在府東四十五里。新羅號南嶽。
金鼇山。一名南山。在府南六里。○唐顧雲贈崔致遠詩:“我聞海上三金鼇,金鼇頭戴山高高。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傍邊一點鷄林碧,鼇山孕秀生奇特。”
兄山。在安康縣東二十一里。新羅稱北兄山,爲中祀。
蔚介山。在府西二十三里。
伏安山。在府南二十里。
墨匠山。在府南三十里。
只火谷山。在府西四十里。
斷石山。一云月生山。在府西二十三里。諺傳新羅金庾信欲伐麗、濟,得神劍,隱入月生山石窟鍊劍。試斷大石,疊積如山,其石尙存。創寺其下,名曰斷石。
紫玉山。在安康縣西十三里。
達城山。在安康縣南十三里。
飛鶴山。在神光縣西五里。
咽薄山。在府南三十五里。諺傳金庾信携寶劍,入深壑,燒香告天,祈禱兵法處。
朴加利山。在慈仁縣東二十里。
簟山。在慈仁縣北十六里。
舍羅峴。在府北三十里。
件代嶺。在府東三十六里。
女根谷。在府西四十一里。世傳百濟將軍于召伏兵于此,新羅善德王命角干閼川掩殺之,無孑遺。此王知幾三事之一也。
成峴。在府北五十八里。
八助嶺。在府東五十三里。
馬北山。在神光縣北二十六里。
柹嶺。在府東五十四里。長鬐縣界。
楸嶺。在府東二十五里。
筬嶺。在府東三十里。
鴟述嶺。在府南三十六里。〔新增〕 新羅時,朴堤上死于倭國,其妻上此嶺,望哭而死。
祠廟
社稷壇。在府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府東七里。
赫居世廟。在府南月南里。我世宗十一年立廟。每仲秋,降香祝幣以祭。
昔脫解祠。在東嶽頂。脫解王夢於武烈王而言曰:“拔我骨於疏川丘,塑像安於吐含山。” 王從其言。髑髏周圍三尺二寸,骨長九尺七寸,齒凝如一,骨節皆連鎖。遂立祠於東嶽。
聖母祠。在西嶽仙桃山。聖母本中國帝室之女,名娑蘇。早得神仙之術,來止海東,久而不還,遂爲神。世傳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故中國人讚,有“仙桃聖母娠賢肇邦”之語。
敬順王影堂。在府東北四里。每節日,州首吏率三班以祭。
神母祠。在鴟述嶺上。神母卽朴堤上妻也。堤上死於倭國,其妻不勝其慕,登鴟述嶺望日本,痛哭而終,遂爲鴟述嶺神母。其村人至今祀之。
厲壇。在府北。
題詠
〔新增〕 七詠 金宗直詩。會蘇曲。“會蘇曲會蘇曲。西風吹廣庭,明月滿華屋。王姬壓坐理繅車,六部女兒多如簇。爾筥旣盈我筐空,釃酒揶揄笑相謔。一婦嘆千室勸,坐令四方勤杼柚。嘉俳縱失閨中儀,猶勝跋河爭嗃嗃。”
憂息曲。“常棣華隨風落扶桑。扶桑萬里鯨鯢浪,縱有音書誰得將?常棣花隨風返鷄林。鷄林春色擁雙闕,友于歡情如許深。”
鴟述嶺。“鴟述嶺頭望日本,粘天鯨海無涯岸。良人去時但搖手,生歟死歟音耗斷。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呼天便化武昌石,烈氣千載干空碧。”
怛忉歌。“怛怛復忉忉,大家幾不保。流蘇帳裏玄鶴倒,揚且之晳難偕老。忉怛忉怛,神物不告知奈何?神物告兮基圖大。”
陽山歌。“敵國爲封豕,荐食我邊彊。赳赳花郞徒,報國心靡遑。荷戈訣妻子,嗽泉啖糗糧。賊人夜劘壘,毅魂飛劍鋩。回首陽山雲,矗矗虹蜺光。哀哉四丈夫,終是北方强。千秋爲鬼雄,相與歆椒漿。”
碓樂。“東家砧舂黍稻,西家杵擣寒襖。東家西家砧杵聲,卒歲之資贏復贏。儂家窖乏甔石,儂家箱無尺帛。懸鶉衣兮藜羹盌,榮期之樂足飽煖。糟妻糟妻莫謾憂,富貴在天那可求?曲肱而寢有至味,梁鴻孟光眞好逑。”
黃昌郞。“若有人兮纔離齠,身未三尺何雄驍?平生汪錡我所師,爲國雪恥心無憀。劍鐔擬頸股不戰,劍鍔指心目不搖。功成脫然罷舞去,挾山北海猶可超。”
雜詠 兪好仁詩:“孤臣一死答君恩,萬里扶桑漢節尊。鴟述峯頭三丈石,愁雲猶帶望夫魂。” ○“八月金城月正圓,纖纖麻枲鬪嬋娟。會蘇凄斷嘉俳夕,兩部風光尙宛然。” ○“南阮樓臺艶綺羅,春風長是步婆娑。月明萬戶砧聲冷,擣盡先生百結歌。” ○“軒天撼地踣三光,河嶽英靈聳萬方。浮世石羊興武墓,西風黃葉上書莊。” ○“荊棘銅駝九陌非,軟紅今化劫灰飛。乾坤百變無餘物,留得鼇山碧四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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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中祀. 五岳, 東吐含山 大城郡, 南地理山 菁州, 西雞龍山 熊川州, 北太伯山 奈已郡, 中父岳 一云公山, 押督郡..
중사로 지내는 오악
중사(中祀).註 059 .오악註 060은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대성군(大城郡)註 061,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청주(菁州)註 062, 서쪽의 계룡산(雞龍山) 웅천주(熊川州)註 063, 북쪽의 태백산(太伯山) 나이군(奈已郡)註 064, 중앙의 부악(父岳) 공산(公山)이라고도 하는데, 압독군(押督郡)이다.註 065이다.
註 060
신라에서 中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던 다섯 山, 즉 東岳=吐含山, 南岳=地理山, 西岳=龍山, 北岳=太伯山, 中岳=父岳(公山). 《삼국유사》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진평왕(眞平王)대의 일로서 五岳神君의 이름이 나오나, 《삼국사기》 祭祀志의 五岳과의 관계를 추측하기 어렵다. 五嶽은 원래 중국에서 나라의 鎭으로서 숭상하던 다섯 방위의 名山으로서, 천자가 그를 제사지내고 이 곳에 순행하였으며 당(唐)에서도 中祀로서 제사되었는데, 신라에서 통일 직후에 이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제사지에 나오는 신라의 五岳이 성립되었다고 보인다. 삼국 시기에도 신라의 본거지인 경주 평야 주변에 吐含山, 南山, 仙桃山, 金剛嶺, 中岳(?)의 오악이라는 관념이 성립되어 있었던 듯하나,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됨에 미쳐 문무왕(文武王) 말년이나 신문왕(神文王)대에 그 확장된 국토의 대표적 산악을 오악으로 다시 지정하여 이를 국가적 제사의 中祀에 편입시킨 것이며, 이 五岳에는 각기 山神이 있었고, 그 산신들을 彫像하여 모시는 祠堂이 있었다. 또한 중앙의 수도 부근에 있어야 할 中岳이 대구지방에 있는데다가, 사방의 토함산, 태백산, 계룡산, 지리산이 각각 왜·고구려·백제·가야 방면의 정치적 세력을 진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國防上의 要地이기도 하였으므로, 오악은 신라 전제왕권의 상징적 존재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18쪽).
註 061
신라 五岳 중의 東岳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중심부와 陽北面에 걸쳐 있는 吐含山. 세주의 大城郡은 권34 지리지 良州 소속의 郡이며 明活山城 일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으로서 현재의 慶州市 동쪽 지역. 토함산은 昔氏部族의 상징적 산악으로서 神聖視되고, 신라의 동쪽 경계에 위치하여 倭兵의 침략을 막는 것과 연결되는 國境의 산악으로서 중시되었다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198쪽).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脫解王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文武王)대 調露 2년(680)에 脫解의 뼈를 疏川丘에서 파내어 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으며 이에 대해 고려 말기 당시까지 國祀를 이어 이를 ‘東岳神’이라 하였다 하고, 同書 王曆篇 脫解尼叱今에는 이를 ‘東岳大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말년에 昔脫解를 東岳인 吐含山의 主神으로 삼아 국가적으로 제사지낸 것이라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쪽).
註 062
신라 五岳 중의 南岳으로서 현재의 慶南 山淸郡, 河東郡과 全北 南原市 및 全南 求禮郡에 걸쳐 있는 지리산. 智異山이라고도 한다. 細注의 菁州는 권34 지리지 康州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진주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에는 府東 45里에 있는 含月山을 신라가 南嶽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나, 이는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제사지에서 지리산을 菁州(현 진주) 소속으로 한 것은, 신라에서 지리산을 전라도 방면의 百濟편보다는 慶南 방면의 加耶와 연결시켜 생각한 결과라는 설이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203쪽). 한편 智異山聖母를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 王建의 母인 龍女라고 한 것이나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釋迦의 母인 摩耶夫人이라고 한 것은 모두 牽强附會이고, 실은 山神을 말하는 것이다(김영수, 「지리산 성모사에 취하여」, 《진단학보》 11, 1939, 141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9 南原都護府 祠廟에 의하면, 조선시대 당시에 智異山神祠가 南原府의 남쪽 64리 되는 小兒里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求禮郡 龍方面 북쪽 일대이나, 그것이 신라 당시의 위치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22쪽).
註 063
신라 五岳 중의 西岳으로서 현재의 忠南 公州市 鷄龍面과 論山市 豆磨面에 걸쳐 있는 鷄龍山. 웅천주는 권36 지리지 熊州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공주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에는 府西7里에 있는 仙桃山을 신라가 西嶽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한다. 鷄龍山은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서 인식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五岳에 편입된 것은 백제가 신라의 直轄領土로 된 사실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19 公州牧 祠廟에는 조선조의 小祀인 鷄龍山祠가 산의 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
註 064
신라 五岳 중의 北岳으로서 현재의 江原道 太白市와 慶北 奉化郡 石浦面에 걸쳐 있는 太白山. 나이군은 권35 지리지 朔州 奈靈郡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榮州市. 太伯山의 현재 위치와 달리 제사지가 細注에서 그 위치를 산에서 서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나이군이라고 한 것은 신라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에는 府北 7里에 있는 金剛山을 신라가 北嶽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한다. 太伯山은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500) 9월에 보이는 捺已郡 즉 榮州地方 勢力의 상징적 존재인데다가 이 지역이 한때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하여 신라의 北岳으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44 三陟都護府 祠廟條에는 太白山祠가 산 마루에 있어서 天王堂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당시에 강원도 및 경상도의 주변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
註 065
신라 五岳 중의 中岳으로서 公山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 신녕면 및 경산시 와촌면에 걸쳐 있는 팔공산. 압독군은 권34 지리지 良州 獐山郡의 옛 지명으로서 현재의 경산시. 권41 열전 金庾信傳 上에 나오는 진평왕(眞平王) 33년(611)의 ‘中岳石窟’은 기록 연대상의 잘못이 없다면 新羅首都 慶州 近郊의 별개의 五嶽體系를 반영한 것이며, 당시의 中岳을 慶州市 斷石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김상기,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 《이홍식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69, 8~11쪽) 확실치 않다. 父岳은 押督國 같은 소국을 대표하는 산이며, 신라가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達句伐로 遷都하려던 계획과 관련하여 중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8~200쪽)가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