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 독립선언문 ( 한문, 한글 )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기하여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글.
독립운동이 계획된 당초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일본정부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강력한 독립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내외에 선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해 2월 초, 최린·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은 협의를 하고, 선언서의 초안 작성을 자청한 최남선에게 이를 위임했다.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선언서 작성의 대원칙은 ① 평화적이고 온건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②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③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정신을 바탕으로 정의(正權)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한다는 등이다.
최남선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광문회(光文會) 임규(林圭)의 일본인 부인의 안방에서 약 3주일 만에 이를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하였고,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월 27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끝마쳤는데, 선언서 뒷부분에 첨가된 공약 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韓龍雲)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전한다. 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에 의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겨져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10시까지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겨지고 28일 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선포되었다. 한편,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아침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열람하게 하였으며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탑동(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 ·시민 약 5,000명이 모여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기미 독립선언문 한문 1.
기미 독립선언문 한문 2.
기미 독립선언문 한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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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독립선언문 한글 3.
[출처] 기미 독립선언문 ( 한문, 한글 )|작성자 eBee |
첫댓글 좋은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