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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롬1:21-23)
21 They know God, but they do not give him the honor that belongs to him, nor do they thank him. Instead, their thoughts have become complete nonsense, and their empty minds are filled with darkness. 22 They say they are wise, but they are fools; 23 instead of worshiping the immortal God, they worship images made to look like mortals or birds or animals or reptiles.
*창조의 뜻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빈틈이 없습니다.
16. 주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17. 주께서 친히 그 짐승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고, 손수 줄을 그어서 그렇게 나누어 주실 것이니, 그 짐승들이 영원히 그 땅을 차지할 것이며, 세세토록 거기에서 살 것이다.(사34:16,17)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가는 길을 빈틈없이 우리에게 안내하십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말씀 중에 우리는 로마서를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로마서가 왜 하나님의 진노라는 이 부정적 주제부터 다루나 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빈틈없는 성경의 고려입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영적 현실에 놓여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손만 잡으면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진노부터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처지가 중풍 병자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침대에 눕혀져서 주님의 손에 끌려 나와야 할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향해 제 발로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중환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구원의 행위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편에서 그런 죄인이라도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일방적인 날벼락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판사도 법적 근거를 가지고 사람을 판정합니다.
금연 구역을 먼저 고지했어야 흡연자에게 벌금 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의 진노도 그런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롬1:19)
사람이 다 알고 그 짓을 했으니 맞을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발할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금연이라는 팻말을 어디에 붙여 두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이라고 언제 가르쳐주신 적이 있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1:20)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의 때부터 혀로 맛볼 수 있는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귀로 듣더니 눈물 흘릴 수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신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창조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계시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피조물들을 통해서 여기는 담배 피우는 곳이 아니야 하고 충분히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주도를 가면 바다가
설악산을 가면 단풍이 멋지다. 내년에도 또 와야지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악산과 제주도를 다녀온 사람은 하나님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문장은 빈틈이 없습니다.
[18절: 너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진노의 대상이다.
19절: 너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왜 진노하시는지 충분히 그 이유를 알고 있다.
20절: 모든 피조물이 충분히 그 계시를 하고 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21 They know God, but they do not give him the honor that belongs to him, nor do they thank him. Instead, their thoughts have become complete nonsense, and their empty minds are filled with darkness.
*하나님을 알되
금연 구역을 알면서 거기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창6:7)
노아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백여 년 후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또 그 홍수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홍수가 아니었습니다.
높은 산이 덮일 정도의 홍수였습니다.
설마 그런 홍수가 있을까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가도 아닌 산 위에 배를 지었습니다.
그 배는 노아 8식구가 탈 배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동물도 함께 실을 배입니다.
식량도 실어야 하고.......
노아는 그 일을 100년이나 했습니다.
2,3년 하다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일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꼭 노아처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죽을 거니까.......
*영화롭게
노아에게 하나님은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노아의 선택 사항이나 권장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배를 만들므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린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을 예배 잘 드리는 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헌금 많이 하는 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1.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사1:11)
우리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바친 제물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무슨 일일까?
17.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사1:17)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종교적인 과제를 주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간에 사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백성이 되도록 법을 주신 것입니다.
억압받는 사람, 고아, 과부를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 주님의 오른편에 앉았던 사람은 종교인 목사 밥 사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옥에 갇힌 사람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에게 잘 대해 주었던 사람입니다.(마25:31ff)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잘 안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라는 세상 윤리와 무슨 차이냐고 되물으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1.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사58:1)
그런데 이렇게 나팔 소리처럼 높은 소리로 고발당할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이 노름판에 있었을까요?
그들이 있었던 곳은 의외의 장소였습니다.
2.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사58:2)
그들은 모조리 예배드리겠다고 교회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배드리고 나와서는 인디언 죽이러 가고
시장에 흑인 노예 팔러 가도
제 동족 죽이러 가고
잔인한 살상 무기 만들러 가고
내 밭에 또 밭을 더하러 가고
내 아파트에 또 아파트 더하러 가고.......(사5:8)
하나님의 금식은 배 굶는 일이 아닙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은 율법적인 성취 행위가 아닙니다.
주일에는 주여 주여 하고 집에 와서는 오로지 돈 버는 일만 하면서.......
주님에 대한 고백과 그의 삶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 바로 이사야에게 고발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희생이 율법적인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모가 그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길러 보니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똥은 전혀 더럽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기들이 성장할 때까지 내 손에 얼마나 똥을 많이 묻혔는지 모릅니다.
아기 엉덩이에 묻은 똥을 물로 싹싹 닦아냈습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그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영화로움은 결국 그런 사람 생명에 대한 사랑의 결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해놓고는 돈벌이에만 전념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았던 노아는 산 위에 배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했던 것입니다.
*감사
여러분들도 이런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서 아이 낳고 보니 부모님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제 자식을 길러 보고서야 부모의 손길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는 손등으로 눈에 흐르는 제 눈물을 닦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아주 특별한 관계 아니겠습니까!
학년말 시험을 앞두고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20, 30년 전 부모의 희생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런 희생을 자원하시는 사람은 부모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식은 실은 본래 어머니의 뼈와 살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에 대한 감사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 어머니 아닌가!
하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애닳아 보고, 그렇게 부모를 알아보고서 부모에게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미덕도 아닙니다.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단단히 고장이 났습니다.
*생각과 마음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또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잘도 외우면서 그들 마음에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생각이 도무지 어둡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그들의 속 마음과 생각이었습니다.
그 껍데기는 주여주여 하면서.......
얼마 전 마음과 생각이 잘못된 사람들로 인해 내란의 위험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총 든 군인들을 국회로 헬기 태워서 보냈던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잡아다 고문하고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피바다가 될 뻔했는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마음과 생각이 바른 사람들이 끼어있을 줄이야!
마음과 생각이 잘못된 사람들은 시한폭탄입니다.
또 마음과 생각이 바른 사람은 생명이며 빛입니다.
한글 성경은 그 생각이 허망해졌다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좌절했다(ἐματαιώθησαν)는 뜻입니다.
또 그들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들 생각 중에 있는 좌절감과 또 마음에 있는 부정적이 어두움!
히브리 백성들은 애급에서 흙벽돌을 만드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어제는 그들이 애급 군인들의 군홧발에 걷어차이고 왔습니다.
오늘은 등짝에 회초리질을 당했습니다.
400년 동안 하루 하루 그 마음에 좌절감을 쌓아갔습니다.
또 그 마음에 어두움을!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애급인의 손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0번 반복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좌절과 어두움 대신 하나님의 희망과 빛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홍해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땅에 쳐들어가기 전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그 땅에 보냈습니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정탐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입니다.
좌절과 어두움의 병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코앞에서 피 흘리며 자기들끼리 싸움판을 벌이고 혹은 성범죄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화투판을 벌였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급땅에서 반복해서 보이신 10번의 희망과 빛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죽을 죄가 아닙니다.
그들은 앞이 깜깜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죽을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로 모든 사람이 사막에서 죽고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좌절의 생각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생각으로 바뀌는 일입니다.
어두운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으로 대체(exchange)되는 사건입니다.
이제 세상 나가서는 그 10번의 하나님의 경험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22 They say they are wise, but they are fools;
*오해
이런 좌절과 어두움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콧물이 나고 심하게 몸살이 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크게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아닌 자신에 대해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저만 잘난 줄 안다는 것입니다.
막상 어리석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모지리를 상대하기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만 잘났으니까!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어리석은 일의 엔진이 되는 것입니다.
부릉
부릉
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3 instead of worshiping the immortal God, they worship images made to look like mortals or birds or animals or reptiles.
*보상 행위
그들이 그 10번 역사하시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보니 그 좌절감과 어두움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잊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도 잊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좌절감과 어두운 마음이 엔진을 5단으로 돌려대는 기름이 되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모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신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들은 좌절했고 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입니다.
28.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왕상18:28)
그 과격한 예배는 그들이 했던 종교적인 보상 행위였습니다.
그들의 신이 곧바로 그들에게 응답했더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신에 대한 좌절과 어두움이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도무지 방향도 없는 열성으로!
그래서 이단들이 별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상식을 역행하는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32. 이 돌을 가지고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따라서 제단을 쌓고, 제단 둘레에는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랑을 팠다.
33. 그 다음에, 나뭇단을 쌓아 놓고, 소를 각을 떠서, 그 나뭇단 위에 올려 놓고,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34. 엘리야가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니, 그는 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세 번을 그렇게 하니,
35.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 흘러서, 그 옆 도랑에 가득 찼다.(왕상18:32-35)
엘리야는 물을 부어서 자신 앞의 현실을 더 깜깜하게 해두고 그 자리에서 불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냅다 큰소리친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가 커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11.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12.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19:11,12)
오직 하나님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일 뿐입니다.
드럼치고
소리 지르고 그래야 하나님이 겨우 들으시나?
그것은 엘리야 때의 과거 문제만이 아닙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앞으로 넘어지고
예언한다고 환상과 꿈 이야기를 나열하고
쏼라 쏼라하고......
그 바알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갈 일만 골라서 했던 것입니다.
*대체(exchange)
그 죄인들은 교묘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대상을 대체(exchange)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것으로 대체(exchange)해 버렸던 것입니다.
기복주의입니다.
소망의 장소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땅의 썩을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3 instead of worshiping the immortal God, they worship images made to look like mortals or birds or animals or reptil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