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방에는 밤의 어둠이 깃들어도 전체를 밝히는 백열등이 켜지는 법이 없다. 책들로 사방이 둘러싸인 비좁은 공간 한편에 겨우 자리 잡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놓인 낡은 스탠드가 이 방의 유일한 불빛이다. 무드를 위해 스탠드를 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쟁이인 내게 '적절한 불빛'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나는 가끔 이 사물이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지상의 유일한 불빛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적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를 전용하자면,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몫'이란 명석하면서도 애매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정의이지 않은가. 이 사물은 자기 방식으로 그 말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다. 이 사물의 불빛은 '꼭 필요한 자리에 꼭 필요한 만큼'만 비춘다. 그것은 방 전체에 평균치로 분산되는 빛도 아니며, 필요 이상으로 내리쏟는 과잉의 빛도 아니다. 스탠드는 꼭 필요한 만큼의 범위에서 글자들의 낱낱과 문장의 율동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만큼만 비추는 '최소한의 불빛'이다.
이 최소한의 불빛이 지니는 진정한 놀라움은 이 불빛이 어둠을 '제거'하는 빛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정을 말하자면 거꾸로다. 스탠드의 불빛은 어둠에게 어둠의 본래 형상을 돌려주는 불빛이다. 스탠드를 켜는 순간 사위는 갑자기 더욱더 어두워진다. 하지만 이것은 '암흑'이 아니다. 평균치로 방안에 퍼져 있던 어둠, 그래서 '보이지 않던' 어둠이 스탠드 주위로 모여 또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둠이 우리와 함께 늘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어둠의 존재감은 부드럽고 은밀하며 깊게 체험된다. 어둠은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휩싸면서 우리의 몸을 만진다. 이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어둠이 일소해야 할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며, 다만 '존재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적절한 빛'은 이런 식으로 빛과 어둠, 만상에 대한 인간들의 선입견과 이분법을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