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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서문 | 서울 그리고 바빌론 상상력 “도시 안에서 길 하나를 못 찾는 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도시 안에서, 정글 속에 버려진 것처럼, 갈 곳 없이 헤메이는 건 특별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 W. 벤야민, ‘19세기 베를린의 유년 시절’ 내 청춘은 70년대 서울에 있었다. 그때 나의 화두는 방황이었고 취미는 배회였다. 서울은, 그때 이미 대도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배회하기 좋은 곳이었다.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면 마음이 편했다. 빌딩들 사이사이의 좁은 길을 걸으면 즐거워졌고 이국풍의 이름이 부르는대로 들어간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앉으면 안심이 되었다. 서울의 곳곳은 까닭 모를 소외감에 쫓기던 나에게 안전지대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서울과 내 배회하는 청춘의 그 내밀한 친화력이 정작 무엇 때문인지 아직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80년대 어느 해 가을 뮨헨에서 에드워드 호퍼 (E. Hopper)의 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밤을 지키는 사람들 (Nighthawks)’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건 비평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바 그 유명한 그림 한 장이 보여주는 메트로폴리스 뉴욕의 쓸쓸함에 마음 저려서가 아니었다. 바의 테크에 점점이 떨어져 앉은 40년대 뉴요커들의 모습은 쓸쓸했지만 그들이 외로운 부엉이들처럼 조우하는 그 깊은 밤의 바 안에는 특별한 대기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혼자였어도 그곳은 혼자인 그들이 찾아들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할까). 그림 속의 그 대기는 내가 떠나 온 서울의 곳곳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왜 서울이 70년대의 나에게 안전지대가 되어 주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나의 서울에 ‘장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도시 안에서 ‘장소’란 어디일까? 그곳은 아직 편입되지 않은 곳이다. 아직 편입되지 않았으므로 나름의 내력이 있고, 내력이 있어 매력이 있고, 매력이 있어 머무를 수 있고, 머무를 수 있어 교감할 수 있으며, 교감할 수 있어 나의 편입 시키고 싶지 않은 내부와 아직 편입되지 않은 외부가 호흡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의 자장권 - 그곳이 장소다. 장소 안에서 나는 공간에 안길 수 있고 공간은 나를 받아들여 준다. 나는 자발적으로 그곳에 소속 되고 그 소속감 때문에 안도감을 느끼고 편해진다. 대도시 안의 장소, 그것은 소외 없이 서로 편입될 수 있는 편입되지 않은 공간의 이름이다. 70년대 서울에는, 그러니까 초기 메트로폴리스 서울 안에는, 적어도 나의 경우, 아직 그런 장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후 서울은 무엇이 되었고 그 장소들은 또 어떻게 되었나? 안 중규의 사진들은 밀레니움 시대의 서울을 보여준다. 그의 서울은 흔들리고 일그러지고 무너진다. 마천루들은 가라앉고 길들은 휘어지고 자동차들은 찌그러진다. 버스 안의 풍경도, 경마장에 군집한 군중들도,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읽는 사람들도 윤곽이 지워지고 흩어지고 허물어진다. 이 흔들림과 무너짐은 무엇의 이미지일까? 내게는 그것이 장소가 없어진 대도시 서울의 초상으로 보인다. 모든 것들이 구획 되고, 규격화 되고, 획일화 되고, 속도화 되고, 경제화 된 서울 안에서 편입되지 않은 장소는 더 이상 없다. 구조물들은 저마다의 모양과 차이를 주장하긴 해도 사실은 거대 공간 시스템의 품 안에서 모두가 똑같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을 때 대상과 방향은 실종되고 사막처럼 정글처럼 이질적인 그로테스크 공간만이 남는다. 흔들리고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안 중규의 서울 초상, 그것은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어 정처를 잃어버린 소외의 시선이 포착하는 메트로폴리스 바벨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 중규의 사진들은 묘하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우선 빛 때문이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둘러싸고 밝히는 사진의 빛들 속에서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서울의 얼굴은 이상하게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컬한 아름다움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건 다름아닌 카메라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곡선이다. 그 곡선은 분명 허물어지고 무너지는 속도의 선이지만 그 선 자체는 부드러워서 역설적으로 선율의 이미지와 겹친다. 사진은 삼척동자도 알듯이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할 줄 아는 것만이 침묵할 줄 안다'면 (Heidegger) 사진의 침묵 또한 소리의 징표는 아닐까? 나는 안 중규의 사진들 안에서 이미지의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분명 일그러짐과 무너짐을 지시하지만 빛들과 부드러운 곡선 이미지들 때문에 반드시 허물어지는 소리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그 소리는 또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은 혹시 발굴된 폐허 위로 고대 유적도시의 살아있는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듯, 무너지는 소리를 통해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어떤 또 하나의 서울의 초상은 아닐까? 얼마 전 밤거리에서 길을 잃었다. 잠깐 졸다가 버스를 내렸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은 빛들로 범람하는데 대낮의 사막에 버려진 것처럼 종잡을 수 없어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었다. 도와 줄 수 있는 건 택시뿐이었지만 나는 택시 잡는 걸 잠시 보류하고 빛나는 바벨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각오를 하고 서울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서울은 차츰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그때 벤야민이 말했던바 ‘특별한 훈련’이 무엇인지 얼핏 깨달은 것도 같았다. ● 김진영 (예술비평) | 전시작품의 일부 |
| 작가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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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 할수 있는 좋은 전시회라고 생각합니다.시간나시는 분들은 한번씩 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