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를 마치는 장면인데, 결국엔 그 결론에 이르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 속한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는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회안에 들어온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복음을 훼손시키는 그 유혹과 시험을 답하고 있습니다. 그 다름은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한 비교가 아니고, 전혀 다른것 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으로, 세상에 속한 것은 세속적인 것, 우리 좀 더 신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죄악된 원리와 가치와 통치속에 놓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가 다스리는 나라고,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데, 자기 멋대로 살고 욕심을 따라 사는 그것이 자랑인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롭고 의롭고 선하신 통치에 소속되어 그의 백성이 되고 그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지난 시간에도 확인했습니다만 십자가를 기준으로하여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하거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지, 둘은 겹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어느쪽에 대해서든지 죽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다,
그 분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분명하게 둘이 타협할 수없고 혼합될 수없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가졌던 갈라디아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문제, 할례를 받아야한다, 라고 얘기함으로써 무언가 구원에 자신의 근거를 가지는 것을,
그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의 양쪽에 다 쓰이는, 그리고 세상에서 같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유효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다는 것은
새세상, 예수안에서 허락된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 그리로 부름 받는 것, 그 나라에 소속되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예수 이외에 다른 입구가 없고 문이 없음을, 조건이 없음을 얘기해서 할례나 또 다른 어떤 선행이나 공로라도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데 유효한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없다 라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5절에 있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하는 것이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라고 얘기함으로써 이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오는 것, 그리로 구원함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고,
그 믿음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백성들 이라는 평행표현으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린도후서 5장에 가시면, 14절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만 기초되어 있는가를 이렇게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또는 끄는도다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7절에 있는 바와같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얘기를 15절에 이어서 생각해 보시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죽음이란 원래 존재하고 소속되었던데서부터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것과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것은 살아 있는채로 옮겨갈 수는 없는 것,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죠.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그 조건에 있어서, 근거에 있어서, 내용에 있어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반대의 자리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17절 보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 것을 개조한 것이 아니고 ,이전 세상과 다른 세상이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런 강조가 왜 필요한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거듭 확인한 것,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 능력에 근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들어왔으면 이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이 나라의 통치에 순종해야할 것 아니냐, 왜 돌아가 죽은 세상, 나와 관계없는 세상의 것들로 새로 들어온 세상에서의 통치와 부르심과 책임들을 대신 하는 것으로 되돌아 가거나 죽어서 이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아야 될 것들에 치중하는가, 라고 갈라디아서를 결론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허락되고 있고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신앙의 발전과 내용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들과 세상의 욕심들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한대로 여기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15절 하반절에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라는 말씀에 자신을 묶어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왜 이 문제를 강조해야 하느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에 통치와 그 내용과 질서와 목적을 갖고 있는,
그리고 결실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감격이나 결심이나 하는 것으로 내용을 삼지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나라를 들어갈 때, 또는 그 나라에 들어가서 분발할 때까지는 우리의 감각들입니다! 그런 감각들을 내용과 혼돈하는 일이 없어야되듯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로 자랑과 확인을 예수안에서 내용으로 확보하려는 일에 시험받지 말라, 그런 얘기죠. 조금 어려워지는 표정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가 보십시다.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에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아 허락되고 부르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신분과 조건은, 예수를 근거로 하고 약속을 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졌던 우열의 개념은 거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있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겁니다. 할례를 받았다 안 받았다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유대주의가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했죠. 그런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거나 목적되어 있지않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다 있다는 겁니다. 11절 끝에 보듯이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인도받고 채워지는 것으로 가야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세상의 것으로는 비교하거나, 근거하거나, 확인할 수없는, 전혀 다른, 예수 안에만 있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신자된 확인을 추구해야죠.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식으로 말하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라든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든가, 부정적으로 표현을 쓸 때면, 자신을 부인하라든가, 이렇게 나오죠. 그러나 그렇게는 굉장히 만만치 않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현실의 위협을 대적하고 극복하고 감수해야 한다는 것 쉽지않으니까, 우리 쉬운 것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열심, 진심, 무슨 감동 이런 것들이 내용이 되죠. 그건 내용이 아니고, 무슨 진심, 무슨 결심, 무슨 감동 이렇게 말을 해야죠. 그 무슨에 해당하는 것이 전부 예수안에 허락된 것이어야죠.
그럼 그 결심이나 그 감동이나 그 자랑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내용으로 나한테 나타나야죠. 내용으로! 성령의 열매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듯이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가 실천 돼야죠! 늘 듣는 얘기자만 만만치않은 얘기죠. 그러나 이것이 이 나라가 예수로 부터 시작한 나라요, 예수로 인하여 세상과 분리된 나라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대뜸 어데로 가야되느냐, 너 네가 받은 구원이, 너 네가 부름 받은 자라가 어딘지 도대체 알고 있는거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죠. 그게 할례를 받는냐 마느냐의 문제가 핵심인 나라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린 사실 그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현실도 살아보면,
큰 문제로 싸우기 보다 작은 문제로 더 많이 싸웁니다. 그렇죠? 왜냐하면, 그 작은 문제가 결국은 큰 생각의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것 갖고 싸우지만 결국 싸워보면 본질적인데로 가죠. 물론 이제 현실적으로는 그 본질이 조금 우습습니다마는 맨 끝에 싸우면 우린 꼭 이렇게 묻죠. 넌 뭐야! 뭐하는 사람이야! 싸움의 촛점하고 달라지죠. 다음에 뭐죠? 넌 몇살이야? 아, 이게 중요하죠?
아마 세상이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진정으로 추구할 내용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엔 윽박지르거나 겁을 주는 방법밖에 없어서 세상은 싸움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데로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로 끌고 갔죠? 네가 믿는다고 고백한 신앙고백이 무엇을 근거하고 있는지 아냐? 이리로 온 거죠.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럼 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부르신 그 부름의 내용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냐? 이렇게 묻는 것이죠. 그것을 골로새서 2장 6절에 가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렇게 되는 거죠.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예수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감사가 여기에 나오는 이유는 그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안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이라는 거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니라. 그 얘기죠. 그 가치, 그 목적에 붙잡히지 마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9절)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기서 할례는 할례라는 것은 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끊어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라는 것은 보이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않는 영과 대조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는 육체입니다. 그때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통치에 굴복하는 존재를 얘기하는 것으로 육신을 성경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의 몸을 벗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된 통치와 세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부르심의 복과 은혜와 책임을 지는 것을 얘기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근거일 뿐만 아니라, 예수가 내용이고 목적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됩니다. 예수께서 하신일은 우리를 세상에서 끊어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부르심으로 우리가 신약에 가장 중요한 은혜! 은혜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방종과 무책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보냄으로써 우리를 순종으로 붙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은혜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에서 무슨 자유냐하면, 거짓된 것과 썩어질 것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이지, 그냥 방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작하지않는 땅이 되는 황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보내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그것이 왜 은혜냐, 그것이 왜 자유이냐,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없는 신적 능력과 복에 의하여 인도되는 목적되는 대상이 됐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는 이 부름, 하나님의 통치로의 그 부활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자랑하려고 하는 것,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것들이 예수께 속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됩니다. 그것은 보통 세상에서 믿지않는 이들이 우리를 놀리듯이 뭐가 부족해서 예수를 믿는가 라든가, 뭣땜에 기독교 신아의 붙잡혀서 자유를 속박하는 가 라고 하는 것, 그렇게 오해되는 것에 우리가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기독교 신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신 메시아라는 걸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해둬야할 문제죠. 그래서 싸움은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로만 시작하고, 예수로만 채우고, 예수로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고 이해해야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가면 같은 식의 내용이 조금 더 확대되어서 그 부르심과 책임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또는 참된 생활을 하여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무슨 얘기일까요.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을 당신과 하나로 묶고 우리에게 이루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의 완성은 십자가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로 시작하여 그 시작한 구원의 장성한 분량, 그의 약속의 충만에까지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우리의 인생속에, 역사속에, 모든 경우와 현실속에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묶으신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기위하여 한 시도 쉬지않으시는 하나님으로써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은 이 예수와 묶여 하나님의 통치의 진정한 충만과 완성을 십자가로 인하여 시작하여 진행되고 있고, 인도함 받고 있고, 매순간 매사건마다 하나님의 이 간섭을 받고 있다는 걸 놓고, 이제는 벗어버려야하고 이제는 관계도 없는, 이 나라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세상의 것들에서 가치와 안심과 확인을 확보하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섞은 일이다,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어리섞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섞음으로 배우셔야 됩니다.
우리가 25년을 이렇게 목사와 성도로 만나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제가 굉장히 훌륭해졌다 그런 생각이 가끔 드실겁니다. 저도 그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해지는 건 뭐냐,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오해와 억울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된겁니다. 오해와 억울함을 감당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찬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당연하다는 걸 이해하는데 이만큼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완벽하여 하나님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심지어 우리의 어떤 의지와 우리의 능력위에 하나님 나라가 서있지 않고, 예수위에 서있습니다. 저에게 찾아오시는 분들은 비난할려고야 누가 오겠습니까. 같은편만 찾아오죠. 국회의원 나갈 때 그렇듯이 제 주변에는 온통 저보고 설교 잘한다는 분으로만 충만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그래서 국회의원 나갈 때도 다 된다고 해서 나갔는데 6명 후보중에 7등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혹 어쩌다가 주가 정말 진심을 가지고, '목사님 이번에는 좀 부족했습니다'
라는 말을 듣는게 그 그렇게 견뎌내기가 만만치 않는 일입니다. 애쓰고 열심히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없다는 건 언제나 큰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렇게 세월이 지나서 '당연하다, 당연하다, 당연함은 고통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이 당연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고통이 당연하다는 걸... 예수를 믿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이세상 사람들은 뭘 보여달라고 하느냐하면. 예수의 재림때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그럽니다.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영원한 보상을 받는 걸 보여달라 그럽니다. 너 집에 금 면류관 있어? 그렇게 묻는 것이죠. 네 앞에서 까불면 내가 확 죽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죠. 우리는 막 안타깝죠. 내가 이 사람 하나를 항복시킬 수 없다는 말인가,,,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신을 위해서도 어떤 의미에서, 본성적인 우리의 종교심이 우리의 자존심을 뒤짚어 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예수의 죽음위에 서 있습니다. 세상이 찾는 증거들은 세상적인 증거들입니다. 세상적은 증거들. 우리의 신자된 증거는 그걸 견디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나라, 내가 순종하는 나라는 너희와 다르다, 그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갖고 계시면 표정에 나타납니다. 그렇게는 아직 수가 낮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같이, 예수님이 그러셨다는 건 아무하고도 안싸우셨습니다.이해시킬려고 하지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본문에 돌아오면 끝에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 이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부르신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 흔적이 뭘까요? 죽을 뻔한 흔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이나 12장에서 보는 또 고린도후서 1장에도 증거하는 내가 내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었노라, 하는 고백들이죠. 나 백번도 더넘게 죽을 뻔 했었노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 안다, 너희도 알아야된다 그것 지켜야된다, 거 복된 것이다,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구원과 복음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통치는 참으로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것이니라,,,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이 갈라디아 교회 편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됨으로 갈라디아교회만이 아니라, 오고오는 모든 시대에 모든 형편속에 있는 교회와 믿음의 식구들을 위하여 남긴 신앙의 고백이며, 지적이며, 위로며, 경고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예수로 시작하고 예수로 말미암는 예수안에 모든 것이 있고 예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러분의 신앙이요, 자랑이요, 기도요, 간구요, 책임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서도 아니며, 우리가 소원해서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의로우심과 무한하신 긍휼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였습니다.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 영광된 약속을 우리가 예수 안에서 허락받고 있습니다. 이 귀한 것 세상의 값싼 것으로 빼앗기지 말게 하옵소서. 그 귀한 신앙을 지켜내는 일에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또한 보존하사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성령 하나님 늘 깨우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을 따라 사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결실되는 생애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를 마치는 장면인데, 결국엔 그 결론에 이르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 속한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는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회안에 들어온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복음을 훼손시키는 그 유혹과 시험을 답하고 있습니다. 그 다름은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한 비교가 아니고, 전혀 다른것 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으로, 세상에 속한 것은 세속적인 것, 우리 좀 더 신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죄악된 원리와 가치와 통치속에 놓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가 다스리는 나라고,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데, 자기 멋대로 살고 욕심을 따라 사는 그것이 자랑인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롭고 의롭고 선하신 통치에 소속되어 그의 백성이 되고 그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지난 시간에도 확인했습니다만 십자가를 기준으로하여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하거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지, 둘은 겹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어느쪽에 대해서든지 죽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다,
그 분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분명하게 둘이 타협할 수없고 혼합될 수없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가졌던 갈라디아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문제, 할례를 받아야한다, 라고 얘기함으로써 무언가 구원에 자신의 근거를 가지는 것을,
그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의 양쪽에 다 쓰이는, 그리고 세상에서 같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유효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다는 것은
새세상, 예수안에서 허락된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 그리로 부름 받는 것, 그 나라에 소속되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예수 이외에 다른 입구가 없고 문이 없음을, 조건이 없음을 얘기해서 할례나 또 다른 어떤 선행이나 공로라도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데 유효한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없다 라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5절에 있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하는 것이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라고 얘기함으로써 이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오는 것, 그리로 구원함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고,
그 믿음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백성들 이라는 평행표현으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린도후서 5장에 가시면, 14절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만 기초되어 있는가를 이렇게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또는 끄는도다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7절에 있는 바와같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얘기를 15절에 이어서 생각해 보시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죽음이란 원래 존재하고 소속되었던데서부터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것과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것은 살아 있는채로 옮겨갈 수는 없는 것,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죠.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그 조건에 있어서, 근거에 있어서, 내용에 있어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반대의 자리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17절 보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 것을 개조한 것이 아니고 ,이전 세상과 다른 세상이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런 강조가 왜 필요한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거듭 확인한 것,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 능력에 근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들어왔으면 이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이 나라의 통치에 순종해야할 것 아니냐, 왜 돌아가 죽은 세상, 나와 관계없는 세상의 것들로 새로 들어온 세상에서의 통치와 부르심과 책임들을 대신 하는 것으로 되돌아 가거나 죽어서 이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아야 될 것들에 치중하는가, 라고 갈라디아서를 결론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허락되고 있고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신앙의 발전과 내용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들과 세상의 욕심들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한대로 여기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15절 하반절에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라는 말씀에 자신을 묶어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왜 이 문제를 강조해야 하느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에 통치와 그 내용과 질서와 목적을 갖고 있는,
그리고 결실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감격이나 결심이나 하는 것으로 내용을 삼지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나라를 들어갈 때, 또는 그 나라에 들어가서 분발할 때까지는 우리의 감각들입니다! 그런 감각들을 내용과 혼돈하는 일이 없어야되듯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로 자랑과 확인을 예수안에서 내용으로 확보하려는 일에 시험받지 말라, 그런 얘기죠. 조금 어려워지는 표정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가 보십시다.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에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아 허락되고 부르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신분과 조건은, 예수를 근거로 하고 약속을 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졌던 우열의 개념은 거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있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겁니다. 할례를 받았다 안 받았다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유대주의가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했죠. 그런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거나 목적되어 있지않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다 있다는 겁니다. 11절 끝에 보듯이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인도받고 채워지는 것으로 가야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세상의 것으로는 비교하거나, 근거하거나, 확인할 수없는, 전혀 다른, 예수 안에만 있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신자된 확인을 추구해야죠.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식으로 말하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라든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든가, 부정적으로 표현을 쓸 때면, 자신을 부인하라든가, 이렇게 나오죠. 그러나 그렇게는 굉장히 만만치 않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현실의 위협을 대적하고 극복하고 감수해야 한다는 것 쉽지않으니까, 우리 쉬운 것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열심, 진심, 무슨 감동 이런 것들이 내용이 되죠. 그건 내용이 아니고, 무슨 진심, 무슨 결심, 무슨 감동 이렇게 말을 해야죠. 그 무슨에 해당하는 것이 전부 예수안에 허락된 것이어야죠.
그럼 그 결심이나 그 감동이나 그 자랑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내용으로 나한테 나타나야죠. 내용으로! 성령의 열매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듯이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가 실천 돼야죠! 늘 듣는 얘기자만 만만치않은 얘기죠. 그러나 이것이 이 나라가 예수로 부터 시작한 나라요, 예수로 인하여 세상과 분리된 나라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대뜸 어데로 가야되느냐, 너 네가 받은 구원이, 너 네가 부름 받은 자라가 어딘지 도대체 알고 있는거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죠. 그게 할례를 받는냐 마느냐의 문제가 핵심인 나라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린 사실 그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현실도 살아보면,
큰 문제로 싸우기 보다 작은 문제로 더 많이 싸웁니다. 그렇죠? 왜냐하면, 그 작은 문제가 결국은 큰 생각의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것 갖고 싸우지만 결국 싸워보면 본질적인데로 가죠. 물론 이제 현실적으로는 그 본질이 조금 우습습니다마는 맨 끝에 싸우면 우린 꼭 이렇게 묻죠. 넌 뭐야! 뭐하는 사람이야! 싸움의 촛점하고 달라지죠. 다음에 뭐죠? 넌 몇살이야? 아, 이게 중요하죠?
아마 세상이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진정으로 추구할 내용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엔 윽박지르거나 겁을 주는 방법밖에 없어서 세상은 싸움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데로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로 끌고 갔죠? 네가 믿는다고 고백한 신앙고백이 무엇을 근거하고 있는지 아냐? 이리로 온 거죠.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럼 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부르신 그 부름의 내용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냐? 이렇게 묻는 것이죠. 그것을 골로새서 2장 6절에 가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렇게 되는 거죠.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예수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감사가 여기에 나오는 이유는 그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안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이라는 거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니라. 그 얘기죠. 그 가치, 그 목적에 붙잡히지 마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9절)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기서 할례는 할례라는 것은 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끊어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라는 것은 보이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않는 영과 대조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는 육체입니다. 그때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통치에 굴복하는 존재를 얘기하는 것으로 육신을 성경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의 몸을 벗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된 통치와 세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부르심의 복과 은혜와 책임을 지는 것을 얘기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근거일 뿐만 아니라, 예수가 내용이고 목적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됩니다. 예수께서 하신일은 우리를 세상에서 끊어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부르심으로 우리가 신약에 가장 중요한 은혜! 은혜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방종과 무책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보냄으로써 우리를 순종으로 붙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은혜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에서 무슨 자유냐하면, 거짓된 것과 썩어질 것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이지, 그냥 방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작하지않는 땅이 되는 황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로 보내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그것이 왜 은혜냐, 그것이 왜 자유이냐,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없는 신적 능력과 복에 의하여 인도되는 목적되는 대상이 됐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는 이 부름, 하나님의 통치로의 그 부활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자랑하려고 하는 것,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것들이 예수께 속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됩니다. 그것은 보통 세상에서 믿지않는 이들이 우리를 놀리듯이 뭐가 부족해서 예수를 믿는가 라든가, 뭣땜에 기독교 신아의 붙잡혀서 자유를 속박하는 가 라고 하는 것, 그렇게 오해되는 것에 우리가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기독교 신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신 메시아라는 걸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해둬야할 문제죠. 그래서 싸움은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로만 시작하고, 예수로만 채우고, 예수로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고 이해해야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가면 같은 식의 내용이 조금 더 확대되어서 그 부르심과 책임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또는 참된 생활을 하여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무슨 얘기일까요.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을 당신과 하나로 묶고 우리에게 이루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의 완성은 십자가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로 시작하여 그 시작한 구원의 장성한 분량, 그의 약속의 충만에까지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우리의 인생속에, 역사속에, 모든 경우와 현실속에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묶으신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기위하여 한 시도 쉬지않으시는 하나님으로써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은 이 예수와 묶여 하나님의 통치의 진정한 충만과 완성을 십자가로 인하여 시작하여 진행되고 있고, 인도함 받고 있고, 매순간 매사건마다 하나님의 이 간섭을 받고 있다는 걸 놓고, 이제는 벗어버려야하고 이제는 관계도 없는, 이 나라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세상의 것들에서 가치와 안심과 확인을 확보하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섞은 일이다,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어리섞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섞음으로 배우셔야 됩니다.
우리가 25년을 이렇게 목사와 성도로 만나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제가 굉장히 훌륭해졌다 그런 생각이 가끔 드실겁니다. 저도 그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해지는 건 뭐냐,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오해와 억울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된겁니다. 오해와 억울함을 감당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찬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당연하다는 걸 이해하는데 이만큼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완벽하여 하나님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심지어 우리의 어떤 의지와 우리의 능력위에 하나님 나라가 서있지 않고, 예수위에 서있습니다. 저에게 찾아오시는 분들은 비난할려고야 누가 오겠습니까. 같은편만 찾아오죠. 국회의원 나갈 때 그렇듯이 제 주변에는 온통 저보고 설교 잘한다는 분으로만 충만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그래서 국회의원 나갈 때도 다 된다고 해서 나갔는데 6명 후보중에 7등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혹 어쩌다가 주가 정말 진심을 가지고, '목사님 이번에는 좀 부족했습니다'
라는 말을 듣는게 그 그렇게 견뎌내기가 만만치 않는 일입니다. 애쓰고 열심히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없다는 건 언제나 큰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렇게 세월이 지나서 '당연하다, 당연하다, 당연함은 고통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이 당연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고통이 당연하다는 걸... 예수를 믿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이세상 사람들은 뭘 보여달라고 하느냐하면. 예수의 재림때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그럽니다.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영원한 보상을 받는 걸 보여달라 그럽니다. 너 집에 금 면류관 있어? 그렇게 묻는 것이죠. 네 앞에서 까불면 내가 확 죽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죠. 우리는 막 안타깝죠. 내가 이 사람 하나를 항복시킬 수 없다는 말인가,,,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신을 위해서도 어떤 의미에서, 본성적인 우리의 종교심이 우리의 자존심을 뒤짚어 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예수의 죽음위에 서 있습니다. 세상이 찾는 증거들은 세상적인 증거들입니다. 세상적은 증거들. 우리의 신자된 증거는 그걸 견디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나라, 내가 순종하는 나라는 너희와 다르다, 그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갖고 계시면 표정에 나타납니다. 그렇게는 아직 수가 낮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같이, 예수님이 그러셨다는 건 아무하고도 안싸우셨습니다.이해시킬려고 하지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본문에 돌아오면 끝에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 이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부르신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 흔적이 뭘까요? 죽을 뻔한 흔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이나 12장에서 보는 또 고린도후서 1장에도 증거하는 내가 내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었노라, 하는 고백들이죠. 나 백번도 더넘게 죽을 뻔 했었노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 안다, 너희도 알아야된다 그것 지켜야된다, 거 복된 것이다,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구원과 복음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통치는 참으로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것이니라,,,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이 갈라디아 교회 편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됨으로 갈라디아교회만이 아니라, 오고오는 모든 시대에 모든 형편속에 있는 교회와 믿음의 식구들을 위하여 남긴 신앙의 고백이며, 지적이며, 위로며, 경고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예수로 시작하고 예수로 말미암는 예수안에 모든 것이 있고 예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러분의 신앙이요, 자랑이요, 기도요, 간구요, 책임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서도 아니며, 우리가 소원해서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의로우심과 무한하신 긍휼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였습니다.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 영광된 약속을 우리가 예수 안에서 허락받고 있습니다. 이 귀한 것 세상의 값싼 것으로 빼앗기지 말게 하옵소서. 그 귀한 신앙을 지켜내는 일에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또한 보존하사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성령 하나님 늘 깨우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을 따라 사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결실되는 생애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