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세월...그러나 여전한 '레드 콤플렉스'의 상처
쉰다섯 초로(初老)의 사내가 흐느껴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눈물을 두루마리 화장지로 닦아준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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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이문구, 이문열, 김성동. 이들은 모두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둔 작가. ⓒ홍성식 |
11월15일 오후 그 눈물이 있기 전 사람들은 즐거웠고, 내처 건네주고 받는 술잔 속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순이삼촌>의
현기영과 <무너진 극장>의 박태순 등 원로작가부터, 중견시인
강형철과 박철, 평론가 방민호와 소설가 전성태, 조헌용 등 신진문인까지 둘러앉은 마포구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 딱히 낮술에 취해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사회주의자' 김봉한의 아들 '소설가' 김성동이 목이 메어 울었다.
<만다라>가 22년만에 개작되었다는 사실은 도하 각 일간지를
통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KBS 라디오와 불교방송(BBS)에서 그를 초청했다. 이에 응한
김성동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강원도 진부의 흙집에서 네온사인 현란한 여의도를 찾은 것은 14일 저녁.
불려나간 저녁식사 자리는 웃음과 축하로 넘쳐났다. 동석한 20여 명은 한 목소리로 새 옷을 갈아입은 <만다라>의 탄생에 박수를 보냈고, 평론가와 시인 하나가 책의 일부분을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했으며,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문학담당 기자는 '쓰다만 <풍적>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고싶다', '미완성작 <국수>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가 많다'는 말로 김성동의 창작욕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 20여 명 중 '키'와 '목소리'가 가장 크다는 이유로 내가 일일
'호위총국장'에 임명됐다. 김성동이야 북한의 혁명 1세대 이을설 차수를 운운하며 그 직위의 중대막중함을 재차 강조했지만,
"오늘 하루 나를 지켜다오"라는 뜻임을 나라고 왜 모를까. 하긴
새파란 30대 국회의원에게도 4~5명의 비서진이 있는 판에 존경하는 노작가(老作家)의 '호위총국장'이면 어떻고, '보디가드'면 어떻고, '시다바리'면 또 어떠랴.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결국 김성동을 '호위'해 여관방까지 모시는
영광을 얻었다. 그때가 아침 7시였다. 그리고 3시간 남짓의 짧은 잠. 그러나 그 '깜박잠'은 평화로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성동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처럼 구슬픈 울음을 쏟아낼 줄은 몰랐다.
그는 왜 울었을까? 무엇이 머리칼 희끗희끗한 선량하고, 정직한
중년의 작가를 서너 살 아이처럼 울게 만들었을까?
'사회주의자의 아들'... 평생의 멍에
충청북도 단양에서 장편 집필에 여념이 없는 소설가 박태순이
작가회의 사무실을 찾은 이유는 그가 작가회의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년 '유신 반대'와 '민족문학의 정통성 회복'을 기치로 내세우며 탄생한 문인단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 문예운동사> 관련 녹음자료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우연하게도 그날이 김성동이 작가회의를 찾아간 날과 같았던 것. 11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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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태순
ⓒ홍성식 |
박태순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의 일부를 언급했다. 이문구가 <관촌수필>을 상재(上梓)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이문구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알다시피 이문구의 부친은 남로당 충남도당 조직책이었고, 그로 인해
예비검속 때 자신은 물론 아들 둘까지 처형당한 해방공간의 좌익인사.
"그런 행적으로 인해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탓에 이문구의 소설에는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바로 이 대목에서 김성동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 시절
좌익활동을 이유로 대덕 산내 처형장에서 총살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민위원회 청년위원장을 했던 숙부와 여성동맹위원장이었던
어머니 역시 맞아죽거나 모진 고문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50년 세월로도 치유할 수 없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초로의 사내를 술잔을 든 채 울게 했다.
그 눈물을 보며 나는 또 다른 2명의 소설가를 떠올렸다. 김원일과 이문열. 두 작가의 아버지 역시 남로당 경남도당 부위원장과
서울대 농대 교수를 지내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북한 좌익 지식인.
올 여름 양재동에서 잠시 본 김원일은 아버지에 대해 물으려는
나에게 "그만해요. 지금이야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여튼 그만해요"라며 나를 제지했다. 이념을 좇아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시장 바닥에 떨어진 과일 껍질을 주워먹던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환갑 노인의 눈시울이 붉었다.
이문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사회주의의 'ㅅ'자, 북한의
'ㅂ'자, 진보의 'ㅈ'자만 나와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반공'이란 서슬 푸른 국시(國是)가 전국민을 옥죄고, 연좌제가
엄존하던 유신독재와 군사정부 시절. 그들이 겪었던 유무형의
고통과 절망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을 나갈 수 없고, 공무원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때만 되면 형사와 기관원들이 찾아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공포와 두려움의 시대를 그들은 거쳤다.
그러나, 그들이 그 두려움과 공포에 일평생 떨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겐 '문학'이란 무기가 있었다. 이문구는 그만의
유장한 문장과 능란한 구어체로 한국 농민문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김성동은 그의 상처와 고행을 양분 삼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쓰여지기 힘든' 구도소설 <만다라>를 축조해냈다. 김원일 역시 <어둠의 혼>과 <불의 제전>을 써내며 좌익 아버지의
'그림자'를 분단문학의 '빛'으로 승화해냈다.
최근 그를 둘러싼 논란을 제쳐둔다면, 이문열의 초기작 <사람의
아들>이 보여주는 '인간이란 존재, 그 근원의 탐구'라는 주제의식도 한국문학사 안에서 쉬이 보아 넘길 수 없는 귀한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거성(巨城)을 쌓아올린 그들에게도 눈물은 남아 있었다.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아버지', 그 아버지가 천형처럼 남겨두고 간 '사회주의자의 아들'이란 지울 수 없는 생채기. 다시 생각해도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란 얼마나 무섭고도 또 무서운 것인가.
'사회주의자의 아들'과 함께 한 1박2일은 그렇게 눈물로 끝을
맺었다. 파장 무렵. 더 이상 아무도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 속의 인간'을 노래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떠오른 건 무슨 까닭이었는지.
'밀실'에서 '밀실'만을 지향하는 문학... 도대체 언제까지
90년대 초반 한국. 80년대의 이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허무'와 '후일담'만이 떠돌았다. '판매 부수'로 작가의 역량을
재단하는 천박한 상황이 도래했고, 문학의 패권은 30대 젊은 작가들에게 이양됐다. 진지한 것은 조롱의 대상이었고, 지난 시절
뜨거웠던 변혁의 구호는 맥주 거품 묻은 입에서 안주거리로 씹혔다.
문학판도 다를 바 없었다. 나이 든 작가들은 '60년대 작가' '70년대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도매금으로 넘어가 '강제전역'당했다. 세상에는 '80년대를 추억하니 눈물겨워요'라는 뒷이야기와 '세상 때문에 나도 아파요'하는 엄살과 '어떡하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라 비음으로 묻는 구상유취(口尙乳臭)만이
문학이란 이름 아래 남았다.
잘못 들어선 길을 벗어나긴 쉽지 않았다. 세기가 바뀐 2000년대도 마찬가지다. 젊은 작가들은 여전히 '베르사체' 정장과 '페레'
청바지를 입고, 존 콜트레인의 쿨 재즈가 흐르는 바(Bar)에서의
일탈된 사랑을 나누는 유부녀와 미혼 남성의 이야기 혹은,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으로 만나 '밀실'인 영화관에서 '은밀'한 영화를 보고 '밀폐'된 모텔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이 등장하는
소설만을 지겹도록 끊임없이 써대고 있다. 세태에 발맞추려는
것일까? 독자들도 이제는 진지한 '책'이 아닌 가벼운 '읽을거리'만을 찾고 있다.
한국문학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문학은 현실을 견디는 마취제일 뿐인가?" "잘 팔리는 책을 쓰려는 고민을 출판사가
아닌 작가가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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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 내린 마포대교
ⓒ홍성식 |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두움 깔린 마포대교를 본다. "제대로 된 시
이전에 제대로 된 역사와 철학공부가 있어야 한다"는 80년대 시인 김남주의 말과 "대강대강 쓰면 되잖아"라는 잡지사 편집장의
채근에 그날로 사표를 던져버렸다는 70년대 어떤 소설가의 이야기가 떠올라 2001년을 사는 내 마음도 어둡다.
젊은 작가들은 왜 '역사'와 '역사 속의 인간'에 무관심한 것일까? 몰라서 그렇다면 배워야 하고, 만약에 알면서도 애써 도외시해온 것이라면 "역사란 과거를 반성케 하고, 현재를 인식하게
하며, 미래를 확신시키는 가장 명백한 근거"라는, "인간에게 등을 돌린 문학은 환상좇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난 시대의 목소리에 이제 답해야 할 때다.
어둠에 어둠을 덧대는 '밀실의 문장'이 아닌, 폭죽이나 조명탄처럼 밝게 터져 막막한 어둠을 밀어낼 '광장의 언어'를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마음. 비단 나 하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운 당신들이 아니면 누가 그
역할을 해낼 것인가? 한 세대 전 눈물로 그 '참혹한 역할'을 맡아왔던 노인들에게 또 미룰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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