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제국 - 가야

잊혀진 제국 가야는 협의체적 결속력을 구심점한 연맹국가다. 부족 국가에서 제국으로 진화한 초기 운영제도를 유지한 후 일반적인 국가의 발달 과정을 밟지 안고 협의체로 존속하길 원했다. 그것은 애둘러 지역간의 세력을 통합하기위해 서로를 죽이는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것 보다 좋든 싫튼 나고 자란 고향에서 자리를 지키며 화해 했기 때문으로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 보단 집단이 집단보다 더큰 세력을 꿈꾸는 이들은 끝없이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 나가게 되는 것이 본질이다. 이 세력 확장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약탈"이다. 그 약탈의 해택은 당사자들의 편리하고 부유함으로 보상 되기에 "로마"와 같은 제국이 건설 될 수 있었다.
1500년 전 우리 한반도에도 그 세력 속에 사라진 제국이 있다. "가야"다. 우리는 '가야'를 철과 해양루트를 개발했던 초기 한반도의 국가로 알고있다. 초기 가야는 곡창지와 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김해평야에 "금관가야"가 주도 했다. 가야산의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 '가이아'와 화합하여 두개의 알을 낳아 가야천을 타고 속계로 내려 왔는데 한개는 김해에서 알을 깨고 나왔다. '수로왕'이다. 또 하나는 고령에서 나라를 새웠는대 후기 가야를 이끌었던 "대가야"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광계토대왕의 신라 요청에 의한 기병을 남하시켜 신라에 복속되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의 마지막 혈통이다. 그로 인해 삼국이 통일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후기 가야의 제국은 지금의 경북 고령(高靈)을 도읍지로 한 '대가야'다. 562년까지 존속하며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 지만 역사의 평가는 인색해 역사서에 기록이 거의 없어 신비의 왕국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순장묘왕릉인 지산동 44호와 45호 고분이 발굴되면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대가야의 문화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44, 45호(사적 제79호)를 비롯해 크고 작은 고분 704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고분들은 대가야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주산 정상에는 지름이 20m가 넘는 대형고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규모가 작아지는 게 특징이다. 지산동 44호 고분에서는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 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대거 출토됐다. 가야의 철기는 당시 하이테크 산업의 정점에 있었다. 이곳의 풍부한 철과 제련 기술을 획득하는 나라가 삼국을 통일 할 확실한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정작 "가야인"만이 국가로 발전하기 보다 연맹체로 남아 있길 바랬을 뿐이다. 평화는 권고한 국사력과 자위권이 있을 때 존속 된다는 것을 깨닭게하는 대목 이다.
왕릉 아래 대가야 박물관은 대가야의 여명, 대가야의 성립,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 대가야 이후의 고령을 4개 테마로 관람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관람객들은 돌칼, 돌화살촉, 그릇받침, 금귀고리, 금동관, 투구와 갑옷 걸이 등 대가야의 다채로운 유물을 구경할 수 있다. 기획전시실은 연간 1~2회 특정 주제를 설정해 기획전을 열어, 찬란한 대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대가야시대 살던 집과 창고, 철 생산을 알 수 있는 제철로유적, 그리고 불상, 석등, 석탑 등 불교관련 문화재와 장대석, 맷돌, 절구 등 여러 가지 석조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가야는 가야금의 나라다. 악성 우륵(于勒)은 우리나라 3대 악성(우륵,박연, 왕산악)으로 꼽히는 인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중국의 쟁을 본 따 12현금인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 연주까지 했다. 그러나 우륵이 남긴 가야금 악곡은 전해지지 않고 가야 12지방의 이름을 딴 12곡명이 남아 있다. 우륵은 대가야가 멸망하기에 앞서 신라에 망명, 신라 음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마을은 꽃이 피고 골이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짜기 곡(谷)’자를 붙여 가곡이라 하고, 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이라고도 했는데, 음이 변해 개애실이 되고 현재 개실이 되었다고 한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조선전기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의 후손(善山,일선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350여 년 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화개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점필재 종택은 1800년경 건립해 1878년 중수했다. 이 고택엔 지금도 선산 김씨 문중공파 종가의 종손이 살고 있다. 고택은 ‘ㅁ’자 형으로 정갈
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양반의 종가여서일까. 기와 하나, 기둥 하나에도 꼿꼿한 양반의 정신이 흐르는 듯하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불천위 제사’(신위를 영구히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제사)를 지내는 종가 마을이라고 하니 시간이 350년 전에서 그대로 멈춘 듯하다.
신라 애장왕(802년) 때 건립했다고 전하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중건하고 고려 말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했다는 반룡사에는 다층석탑(유형 문화재 제117호)과 동종(유형문화재제288호)이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도난과 훼손의 우려로 인해 '대가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반룡사에서는 다식체험(매월 2.3주 토요일 오전)과 사찰음식 체험(매월 1.4주 토요일 오전)을 해볼 수 있고, 템플스테이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유서 깊은 곳 보다는 요즘 고령의 특산물 '무농약 딸기'가 더 유명 해졌다. 가야산의 맑은 물과 벌을 이용해 재배한다.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뛰어나며 비타민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해외수출도 하는 등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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