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정권 운동이 일어난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세 남녀의 기이한 삼각관계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의 초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당대에는 보스턴이 품었던 진지한 열의를 희화했다고 비판을 받았으나, 이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사실적으로 관조했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 소설로 남았다. 아울러 ‘보스턴 결혼’(돌봄과 연대감, 로맨스가 가미된 두 여성 간의 관계)의 유래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많은 진보적 논의가 쇠퇴하는 오늘날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오는 문제작을 이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세 남녀의 기이한 삼각관계로 그려낸
격변하는 시대의 초상
소설은 세 명의 남녀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로 남북전쟁 참전자이자 보수주의자인 베이질 랜섬이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에 온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 연설을 하는 버리나를 만나고 한눈에 반한다. 반한 것은 랜섬만이 아니었다. 올리브 역시 그녀가 이 운동의 첨병에 설 수 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버리나의 열띤 청혼자들, 그녀를 트로피처럼 내세운 부모를 피해 올리브는 버리나를 데리고 유럽으로 향할 결심을 하고 랜섬은 뉴욕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올리브가 이제 대의를 위한 전진만이 남아 있다고 믿던 어느 날, 랜섬이 보스턴에 돌아온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원형을 제시한 헨리 제임스의
실험적 시도가 담긴 중기 대표작
19세기 사실주의를 이끌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정치적 혼란과 가치관의 충돌을 세밀한 심리묘사와 위트로 남아냈다. 여러 희곡을 쓰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거듭하던 중기에 쓰인 작품으로, 그의 소설 중 드물게 정치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페미니즘과 사회 개혁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전작이자 대표작인 《여인의 초상》(1881)에 비해 확연히 개인의 의식에 집중하는 글쓰기로, 헨리 제임스의 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보스턴의 인도적 열망을 희화한 소설”
VS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
《보스턴 사람들》은 당대에는 혹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을 연상케 하는 작중인물과 보스턴이 품었던 인도적 열망을 희화했다고 비판받은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19세기 말에 일었던 페미니즘과 사회 개혁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관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 소설로 남았다. 1991년 옥스퍼드판의 해설을 쓴 케임브리지 클레어칼리지 연구원 R. D. 구더는 이 책을 “도금 시대 미국 이상주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분석”이라고 설명했고, 문예평론가 F. R. 리비스(1895~1978) 역시 이 책을 오직 헨리 제임스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극찬하며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입체적 캐릭터들로 완성한 19세기의 디오라마,
후퇴하는 시대에 전진을 열망하는 시대를 읽는다는 것
작품 속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올리브는 남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고, 계급 투쟁으로서 여성 운동에 몸담지만, 한편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면모를 보인다. 랜섬은 남북전쟁 패전의 상흔을 간직한 남부 출신의 보수주의자로서, ‘시대가 너무 여성화되어가고 있다’고 성토하지만 논지의 맥락이 잡히지 않는다. 버리나는 올리브를 선망하며 그녀와 함께 일을 도모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 안주하는 올리브의 언니를 동경한다. 이 밖에도 진보와 사이비 종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버리나의 부모, 연금 없는 삶에 묶인 노년의 사회운동가 등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 변화에 뒤따르는 혼돈과 모순을 풍부하게 담아냈다.
“진보의 흔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점을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고야 저도 알 수 있네요. 내가 젊었을 때는, 사회는 아직 절반도 눈을 뜨지 않았었다는 것을요.”_38장 중에서
또한 《보스턴 사람들》은 한 시대에 관한 깊은 통찰을 넘어 현재와 공명한다. 많은 진보적 논의가 후퇴하고 있는 지금,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혐오와 반목의 깊이가 150년도 더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인 미스 버즈아이가 ‘되돌아보니 이만큼 진보해왔다’라는 소회를 밝히듯,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하는 오늘날도 진보의 결과물임을 깨닫고, 그렇기에 더 나아갈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연대하는 여성의 삶이 ‘보스턴 결혼’이라는 불멸의 이름을 얻은 것 또한 의미가 깊다.
올리브는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잘 알고 있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인 쪽을 택하셨으니까. 올리브는 만사를 두려워했지만, 두려워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녀의 지극한 바람은 자비를 베푸는 것인데,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어떻게 자비로울 수 있겠는가? 그녀는 위험을 발견하면 반드시 맞선다는 것을 일종의 행동 원리로 세웠지만, 결국 자신은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창피를 느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베이질 랜섬에게 편지를 쓴 뒤에도 그녀는 지극히 안전했다. 사실 그가 그녀에게 뭔가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보기 어려웠던 게, 그저 그는 그녀의 편지에 사의를 표하며(그 말투가 유난
히 거창하긴 했다) 보스턴에 (이제 막 시작한) 비즈니스차 가게 되는 대로 찾아뵙겠다고 장담했을 뿐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가득 품은 이 맹세를 이행해 이제 그가 정말로 왔지만, 미스 챈설러는 위험을 자초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_2장 중에서
둘 사이에 잠재된 그 모든 불협화음에도 식사는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막바지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에게 식사를 마치고 나가봐야 한다며 혹시 동행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친구 집에서 열리는 소소한 모임에 가는 것으로, 친구가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진’ 몇몇 사람을 퍼린더 여사에게 소개하는 자리라고 했다.
“어쩌면 당신도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토론을 듣게 되실지도 몰라요, 그런 걸 좋아하신다면. 아마 찬성하지 않으시겠지만.” 이렇게 덧붙이며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렇겠죠. 전 만사 반대하는 사람이니까요.” 미소와 함께 자기 정강이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당신은 인류의 진보를 바라지 않나요?” 미스 챈설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쎄요. 진보적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에게 좀 보여주실 건가요?”
_3장 중에서
마침 그때 도착한 손님은 닥터 태런트 부부와 그 딸인 버리나였다. 닥터 태런트는 최면술 치료사였고, 그 부인은 왕년의 노예제 폐지론자 집안 출신이었다. 미스 버즈아이는 예의 그 희미하고 메마른 미소를 처음 보는 그들의 딸을 향해 짓고 있자니, 이 아이는 필시 부모의 핏줄을 물려받아 놀랄 만한 재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스 버즈아이에게는 온갖 곳에 천재가 숨어 있는 듯 보였다. 셀라 태런트는 놀라운 치료 성과들을 거둔 적이 있는 인물로, 미스 버즈아이는 자신의 많은 지인이 이 남자에게 치료를 받아보면 좋겠다 싶었다. 그의 아내는 에이브러햄 그린스트리트의 딸로, 일찍이 도망 노예를 자기 집에 30일 동안이나 숨겨준 적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전이었으니, 이 소녀도 당시에는 아직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이 아이의 요람에 일종의 무지개를 드리워 어떤 재능을 타고나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소녀는 빨간 머리였지만 아주 예뻤다. _4장 중에서
베이질 랜섬은 모친이 말하는 동안 자기 바로 옆에 서 있는 딸에게 뭔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미시시피식 인사뿐으로, 잘난 체한다거나 너무 엄숙하고 지루한 인상을 줄 것이었다. 게다가 그로서는 그녀의 연설 내용 자체에는 동의를 표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차이를 분명히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 그녀에게 미소 지었고, 그녀도 그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에게만 보여준 미소처럼 여겨졌다. _9장 중에서
올리브는 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소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 대화는 사람들
이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는 그런 대화, 모든 말을 주고받았으며, 장차 당연해질 어떤 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런 대화였다. 소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될수록 올리브는 점점 더 그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졌고 점점 더 자신을 잊게 됐다. _11장 중에서
랜섬은 미스 챈설러가 악수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아챌 수밖에 없게 되자 역시 마음이 좀 상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문손잡이를 잡고 거기에 선 채로 말했다. “그런데 미스 올리브, 당신이 편지를 써서 나를 여기에 초대한 목적이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_13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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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흔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점을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