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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伽藍과 뫼] ⑲ 조계산 송광사 선암사…암자들
[불교신문3678호/2021년8월10일자]
글 : 박부영 논설위원
佛日普照國師 정혜결사 근본도량, 16국사 배출 승보종찰…산 너머에는 대각국사가
1969년 구산대종사 방장 모시고
조계총림 개설, 정혜결사 계승
6·25전쟁 당시 소실 아픔 딛고
7, 8차 중창 불사로 가람 일신
1978년 ‘짧은 출가 긴 깨달음’
템플스테이 효시 여름수련회 시작
16국사 주석했던 암자마다 사연
불일 광원 감로 이어지는 무소유길
300여년 간 조성한 송광사 부도
승보종찰 면모 보는 듯 장엄
꽃 연못 석조 많은 선암사
사찰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
아도화상 창건설 비로암 비롯
운수암 대각암 등 산내 암자
송광사는 불교의 세 가지 보배, 부처님(佛), 부처님가르침(法),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 중 승보(僧寶)로 불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를 세우고 간화선을 선양한 이래 16국사를 배출하는 등 수많은 고승이 나왔다 해서 승보사찰이다.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法寶)사찰 해인사,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사찰 통도사와 함께 삼보사찰이다.
7월30일 송광사는 여름휴가를 맞아 템플스테이를 찾은 시민 불자들로 활기를 띠었다. 템플스테이 효시격인 재가자 수련대회를 최초로 연 곳이 송광사다. 1978년 송광사 침계루(枕溪樓)를 보수하여 사자루(獅子樓)라 별칭 했는데 이 곳에서 부처님 정법과 선사상을 고취하고 국민정신을 계몽하는 “짧은 출가, 긴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매년 여름·겨울 수련대회를 개최했다. 참선 절 발우공양 등 스님의 수행과 일상을 단기 체험하는 수련회는 불교가 대중 곁으로 다가가는 일대 전환이었다.
송광사는 1842년 화재로 건물이 소실돼 용운대사가 제5중창을 하고, 1927년 율암대사가 제6중창을 해 60여동의 가람이 빼곡하게 들어찬 대가람이었으나 1951년 5월10일 공비 소탕을 이유로 국군이 방화해 주요 건물 20동이 소실되는 참화를 입었다. 전후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주지 금당스님과 화주 취봉선사를 중심으로 대중이 힘을 모아 제7중창, 1967년 해인사에서 송광사로 돌아와 1969년 조계총림을 개설하고 초대 방장으로 보조국사의 선맥을 이은 구산대종사가 제8차 중창 불사를 계획했다. 구산스님 원력을 이어 제2대 방장 일각스님, 주지 현호스님을 중심으로 법정스님 보성스님 현고스님 등 전 대중이 힘을 합쳐 다시 가람을 일신했다.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격식과 불교 사상을 갖춘 최고의 불사라는 극찬을 받았다.
상중하대로 나뉜 송광사는 다른 가람과 다르게 가장 위쪽 상대에 스님들 수행처를 배치했다. 승보사찰다운 면모다. 진영각 국사전 수선사 삼일암 등이 스님들 공간이다. 상대를 수선(修禪)구역이라 하는데 정혜결사처 송광사의 정신이 이 곳에 있다. 보조국사 사리탑이 그 뒤에서 바라본다.
<송광사지>(1924)에 의하면 소속 암자가 17곳이었다고 한다. 송광사 주변 암자는 국사가 주석하며 부도와 비를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담당국사 사리탑이 있는 천자암, 청진국사의 청진암, 자정국사 자정암, 진각국사의 광원암, 원감국사 감로암, 그리고 송광사 안에 있는 방장 스님 주석처 삼일암 등이 대표적이다. 담당국사가 영천수를 마시고 사흘 만에 깨쳤다고 해서 삼일암이다. 구산스님이 이 곳에 주석하다 열반했고 현재 방장 현봉스님도 은사 스님을 이어 이 곳을 지킨다.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 뱀이 드나들 정도로 낡아 보수 중이다.
송광사는 본 절에서 불일암 광원암 감로암 부도암 등으로 연결되는 길을 법정스님 정신을 기려 ‘무소유 길’로 명명했다. 이 길을 따라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명상을 하며 걷는다.
불일암(佛日庵)은 법정스님에 의해 유명해졌다. 대나무 숲을 따라 올라가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금도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스님이 일어날 것 만 같다. 정화가 한창이던 1955년 선학원에 머물던 효봉스님은 청년 박재철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쳥년은 ‘법의 정수리’라는 큰 뜻을 지닌 법정(法頂)으로 다시 태어났다. 출가 때부터 비구의 품위가 물씬 풍겼던 법정스님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비구 그 자체였다. 타고난 품성에 스승의 가르침, 원칙을 중시하고 비구로서 위의를 소중히 여기는 송광사 가풍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리라.
1975년 음력 9월2일 효봉스님 기일에 제7세 자정국사가 창건한 자정암(慈靜庵)터에 암자를 짓고 불일암(佛日庵)을 낙성했다. 자정암도 송광사처럼 여순사건과 6.25 전쟁 당시 전화를 입어 폐허가 됐었다. 자정암 터는 현재 위치 보다 500m 위쪽에 있었다. 법정스님은 자정암 터에 법당과 공양간을 겸한 작은 요사채만 되살렸다. 법당 뒤편에 ‘자정국사묘광지탑’이 있다.
법당에는 법정스님이 세간에 들려준 가르침을 담은 글과 스님의 사진이 있다. 스님은 생전에 좋아했던 나무 아래 나무와 풀과 바람과 함께 쉬고 있다.
불일암에서 다시 탑전으로 내려오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광원암(廣遠庵)이 나온다. 서암이라 불렀던 광원암은 제2세 진각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법당 뒤편에 ‘진각국사원조지탑’이 모셔져 있다.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보조암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암이다. 초창(初創)은 백제 무령왕 14년(514) 갑오 6월 가규(可規)대사가 창건했다. 광원암 역시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너져 방치된 것을 현 송광사 방장 현봉스님이 1992년 원력을 세워 복원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법당과 가규당, 요사채 적취루, 화랑으로 꾸밀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뒷간’, 연못 등이 있다.
불일암에서 곧장 산길로 걸어가면 감로암(甘露庵)이 나온다. 송광사 본 절 바로 뒤에 위치한 감로암은 제6세 원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국사의 비가 절 앞에 있다. 제8세 자각국사 도영, 제16세 고봉국사 법장스님도 이 곳에 머물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에 20년이 지난 뒤 부산에서 온 진일심화(陳一心華) 보살이 수행처로 삼아 정진했다.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이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1987년 일심화보살이 떠난 뒤 송광사 스님들이 다시 목조건물로 개축했다. 보조국사 지눌의 전통을 따라 참선 수행 정진하던 송광사의 기도처로 삼았으며 지금은 조계총림의 염불원이다.
감로암 바로 밑에는 부도암(浮屠庵)이 나온다. 송광사가 배출한 선승의 부도를 모신 부도전과 함께 있는 암자로 현재 송광사 율원이 있다. 1616년(광해군 8년) 부휴대사(浮休善修) 탑을 세운 것이 부도전 시초다. 이후 송계영각(松溪靈覺)선사 벽암원조(碧巖圓照)대사 탑이 들어서고 1678년(숙종 4년) 부휴 탑 위에 좌우로 송광사 사적비와 보조국사 비를 세웠다. 첫 탑이 들어선지 29년이 지난 1689년 그 옆에 커다란 암자를 짓고 ‘부도암’이라 했다. 이후에도 300년간 (1616~1916) 탑비가 차례로 들어서 숲을 이루었다. 이에 1917년 설월선사가 담장을 둘러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1980년대에도 취봉, 금당, 광훈, 인암, 계룡스님 등 현대 송광사를 중건하고 지켰던 고승들 비와 탑을 모셨다. 제일 위쪽 중앙에 보조국사비가 있고 그 오른쪽에 사적비가 있다.
송광사에서 천자암 삼거리로 오르는 길에 새로 지은 인월암이 나온다. 1985년 금호고속 박인천 회장이 시주해 옛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을 새로 짓게 되자 호주출신 비구니 스님이 해체한 명부전 목재로 옛 판와암 터에 인월암을 지었다고 한다.
송광사를 나와 조계산으로 가면 천자암(天子庵)이 있다. 제9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한 천자암은 천연기념물 제88호 쌍향수로 유명하다. 중국 금나라 황후를 도력으로 낫게 하여 셋째 아들을 제자로 딸려 보내니 그가 바로 담당국사이며 짚고 있던 지팡이가 자라 쌍향수가 되었다. 천자의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천자암이라 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천자암이 자리한 곳은 큰 절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하며 선암사로 향하는 길목과도 빗겨나 있다. 평생 참선 수행하며 견성했던 활안스님이 주석한 암자로 유명하다.
굴목재를 넘어 선암사를 가면 절 곳곳에서 대각국사 의천을 만난다. 화엄교학에 바탕을 두면서 천태 교관을 융합하며 새로운 종풍을 세우려 했던 의천은 선암사를 남방 천태종 가람으로 중창했다. 대각암의 보물 제1117호가 의천대사 부도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선암사는 최고의 정원이다. 선암사는 꽃, 연못, 석조가 많기로 유명하다. 600년 수령의 선암사 홍매를 비롯 동백 목련 영산홍 등 봄이면 온통 꽃밭을 이룰 정도로 아름답다. 계곡물을 끌어들여 만든 많은 연못 중에서도 선암사 입구 삼인당이 유명하다. 잦은 화마로 인해 소화수를 확보하기 위해 절 곳곳에 못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암사 입구 매표소에 들르면 ‘신도증 소지자 입장료 무료’라는 안내문구를 접한다. 조계종 태고종이 함께 운영하는 협약에 따라 관람료를 공동 징수한다.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난 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그 유명한 승선교와 강선루를 만난다. 다리와 누각만으로도 둘을 만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호사를 누리는데 경내를 들어서면 아름다움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고 어디부터 볼지, 눈이 정신을 못 차린다.
선암사는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세우고 이후 청량산 해천사가 되었다가 헌강왕(875)에 도선 국사가 현재의 선암사로 창건(중창)했다. 정유재란(1597) 때 병화를 입고 크게 중건 한 것을 6·25전쟁 기간 중 큰 화재로 인해 많은 건물과 유물들이 소실되었다. 전성기에는 36~37곳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비로암, 대각암, 대승암, 운수암 4곳이 전해온다. 선암사 후문 중수비를 지나면 운수암(雲水庵)이 나온다. 운수납자들이 수도하는 곳이라 하여 운수암이라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운수암에서 다시 선암사 본절로 들어와 그 유명한 선암사 뒷간을 지나 장군봉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각암이 나온다. 대각암은 서암이라고 부르며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중건할 당시 이 곳에 주석했다 하여 대각암이라 한다. 법당과 대선루(待仙樓)등이 있으며 법당 뒤편에 대각국사 부도로 보이는 부도가 있다.
대각암을 지나 장군봉 방향으로 1km 가량 오르면 돌무더기가 나오고 샘물이 솟는 쉼터를 만난다. 그 위가 비로암이다. 구전에 의하면 백제 성왕 6년 52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버려져 있던 암자를 1977년 선암사 고승 지허스님이 토담 움막을 지어 토굴로 삼았다. 그 뒤 여러 스님들이 거쳐 가며 선암사의 대표적 토굴로 자리매김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에 발걸음을 멈췄다가 사진이나마 남기기 위해 조용히 올라갔다. 공양 차 절을 비웠는지 인적은 없는데 횃대에 승복이 걸려 있었다.
비로암을 지나면 송광사로 가는 작은굴목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1km 가면 조계산 최고봉 장군봉이다. 장군봉에서 송광사와 선암사를 오가는 길목 큰굴목재 까지는 조계산 제2봉 연산봉을 제외하고 모두 평탄한 흙길이다.
그러나 능선에 서면 수많은 산이 끝없이 이어진다. 어느 산은 남해 바다로 향하고, 또 다른 산은 내륙으로 끝없이 달린다. 바다에서 육지로, 동에서 서로, 점과 점이 닿아 선이 되고 면이 되는 지점에 조계산이 서 있는 셈이다. 보조국사가 꺼져가던 불일(佛日)을 밝히고, 대각국사가 천태교관의 남도 본산을 조계산에 세운 이유가 아닐까?
순천=박부영 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 현장스님이 전하는 옛 송광사 모습
“취봉, 성공스님 구산스님 모시고 호남불교 중흥 원력 실천”
보성 대원사 회주 현장스님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의 송광사와 주변 암자에 대해 페이스북에 전한 바 있다. 6·25전쟁 당시와 1960년대 정화, 1980년대 초까지 송광사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글이다. 그 일부다.
“송광사에서는 취봉스님·성공스님 등 몇 안 되는 비구 스님들과 효봉스님 제자인 구산스님을 모셔와 호남불교 중흥의 원력을 실천하도록 했다. 불교정화 과정에서 송광사는 아무런 분쟁 없이 서로 공존하고 존중하면서 불사를 진행해온 것이다.
내가 송광사 출가할 때만 해도 임경당에 취봉 노스님과 학산 노스님이 계셨다. 법성료에는 혜월 노스님과 대우 노스님이 계셨고, 도성당에는 인암 노스님과 계룡 노스님이 계셨다. 감로암은 진일심화보살이 중창한 비구니 선원이었고, 부도암에는 성공스님, 문곡스님, 만곡스님이 계시면서 시간 따라 북강쇠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6·25전쟁 당시 공비들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천년고찰 송광사는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은 3일이나 계속됐다. 국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세 명의 스님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어디서 빨치산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불길에 갇힌 송광사를 구하려고 스님들은 달려왔다.
거대한 불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부분의 전각을 삼키고 있었고, 16국사 진영을 모신 국사전 귀퉁이에 불이 옮겨 붙었다. 취봉스님은 함께 온 성공스님, 인암스님과 같이 승복을 벗어 개울물에 적신 후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벌거벗은 채 물에 적신 승복으로 겨우 불을 잡았고, 사투 끝에 국사전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조계산 사이에 두고
굴목재 오가던 1500년 고찰
제21교구 송광사, 제20교구 선암사
1950~60년대 불교정화 당시 송광사는 평화적으로 이양한 모범사례로 꼽힌다. 효봉스님 법력 덕분이다.
1937년 출가한지 12년 밖에 되지 않는, 송광사와 아무런 인연도 없던 금강산에서 온 비구승을 수행과 법력 인품만 보고 대처승 주지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으로 모셨다. 덕 높은 비구승 문하에서 정진하려는 수좌와 친견을 청하는 신도들이 줄을 이었다.
조실 스님과 주지 스님은 1962년 통합종단에서 초대 방장과 총무원장으로 다시 인연을 맺으니 바로 효봉스님과 임석진스님이다. 비구 대처 화합으로 출범한 화합종단답게 종정은 비구, 총무원장은 대처에서 맡았는데 그 인연이 송광사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모두가 풍수에서 풍치나대형(風吹羅帶形), ‘비단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형’이라 불리는 조계산 덕분일까?
같은 조계산인데 선암사는 그 기세가 송광사와는 전혀 다르다. 선암사 방면 조계산은 돌이 많고 가파르다. 선암사에서 대각암을 지나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도 그렇고 비로암 부근도 온통 돌투성이다. 봉우리 이름부터 무사(武士)를 연상케 한다. 선암사 뒤 조계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 이름이 장군봉(將軍峰)이고 그 주변으로 깃대봉 용마봉 병정봉이 줄 지어 섰다. 주변 산이 장군과 병정이 둘러싸고 있어서 선암사에는 절 수호신을 따로 두지 않았다. 선암사에 수호신을 모시는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다. 송광사는 큰 돌을 앉히지 않는 전통이 내려와 석조물이 없다.
도선국사가 창안한 ‘비보사찰론’은 산 계곡 숲 봉우리 바위 등 자연도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부족한 곳은 보충하고 과한 곳은 덜어내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화합한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조계산을 객이 아닌 주인으로 받아들여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산세 때문일까?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일까? 전해오는 두 절 스님 이야기는 산세만큼 기질도 달랐다. 송광사에서 승주로 갈려면 굴목재를 넘어 선암사를 지나야 했다. 선암사 스님들은 조계산을 넘어온 송광사 스님이 ‘통행세’를 내지 않으면 연못에 빠트렸다고 한다. 정화 바람이 불었을 때 무사를 닮았던 선암사 스님들은 송광사 스님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죽창을 들고 선암사로 향하는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송광사 스님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화 이전부터 화합하며 어우러졌던 송광사가 굳이 재 너머 선암사로 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기질 때문일까? 대처승이 차지했던 다른 교구본사는 전부 통합종단에 넘겼지만 선암사 만 끝내 거부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났지만 선암사 스님들은 절을 내주지 않았다. 소유권은 조계종이, 점유는 대처승이 차지하는 분규사찰로 40여 년 간 지냈다. 주인인 조계종도, 점유자인 태고종도 손이 묶인 사이 40여 년 간 순천시가 주인노릇을 했다. 이후 양측이 협상을 해 조계종과 선암사가 공동 운영 중이지만, 대법원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또 다시 법원 판결에 운명을 맡긴 처지가 됐다.
교구본사 선암사가 대처 측에 남으면서 산하 말사는 송광사 산하로 들어가야 했지만 송광사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방장 현봉스님은 “다른 교구 말사를 갖지 않겠다는 승보사찰 송광사의 자존심이었다”고 했다. 같은 조계산을 접하고 살던 이웃에 대한 예의였는지 모른다.
지금은 조계종과 태고종, 비구와 대처로 나뉘어 왕래가 없지만 두 사찰은 사이좋게 오갔다. 송광사와 선암사의 직선거리는 7km 가량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오가는 길도 평탄하다. 그 가운데 마을도 있었다. 지금도 마을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니 그 유명한 조계산의 보리밥집이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왕래하는 지름길이 굴목재다. 기록에 따르면 1600년 이후 양사의 고승들이 이 길을 따라 교류했다. 현 보리밥집 일대가 두절 경계 ‘지경터’였다. 그 아래 장안마을에서 송광사에 많은 고승이 배출됐는데 풍암대사가 대표적이다.
◼ 보조국사 지눌과 조계종
새롭고 독창적인 혁신불교 송광사에서 일어나
고려 거쳐 조선에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조계산은 한국불교 개혁 결사의 산실이다. 순천 송광사는 불일보조국사 목우자 지눌(1158~1210)이 정혜결사 선풍을 일으킨 한국불교 중흥 본산이다. 스님은 1190년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문을 선포하고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을 수행하여 2차 깨달음을 얻고 1200년대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한다.
이 곳에서 16명의 국사가 배출됐다. 선(禪)과 교(敎)로 나뉘어 경쟁하던 불교는 선교일치를 이루고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고 실천을 중시하는 한국불교 간화선 전통이 수립된다. 새롭고 독창적인 혁신불교가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땅에서 일어난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로 시작하는 ‘정혜결사문’은 출가자가 출가본분을 망각하고 부처님 제자로서 소임을 다하지 않던 고려 승려들을 향한 경책이며 불교의 존재 이유를 일깨운 출사표였다. 마지막 장 ‘부처님 법으로 살고자 올리는 축원’, 문수보살의 게송에 결사문의 핵심이 들어있다.
“한 생각에 맑은 마음 수행터로서
탑을 만든 공덕보다 더 뛰어나니
칠보탑은 언젠가는 티끌 되지만
한 생각이 청정한 곳 바른 깨달음”
수선사에서는 제1세 보조국사를 이어 2세 진각, 3세 청진, 4세 진명, 5세 원오, 6세 원감, 10세 혜감, 13세 각진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나옹, 환암, 태고보우, 문인인 상총(尙聰), 석굉(釋宏) 등이 고려 말 수선사의 후신 송광사 사주를 역임하였으니 송광사를 승보(僧寶)로 추앙하는 이유다.
순천 선암사는 장군봉을 중심으로 청량산으로 부르고 수선사는 연산봉을 중심으로 송광산으로 각기 불렀는데 이후 조계산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된다. 조계산과 송광사가 혜능의 선을 이은 본산으로 화한 것이다.
조계(曺溪)라는 이름이 나온 연유는 이렇다. 일자무식이며 남방 오랑캐 족 출신의 행자, 지금으로 치면 다문화 가정의 가난하고 학식 낮은 청년,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던 혜능이 귀족 가문 출신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수를 제치고 5조 홍인의 법을 이었다. ‘당연히 6조는 신수’라고 여기며 줄을 섰던 대중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들은 혜능을 죽이려 자객까지 보냈다. 법으로 감화시켜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후 16년 간 숨어 살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극적으로 대중 앞에 등장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법을 펼치니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 <육조단경>이다.
스님들을 비롯하여 지방의 고위 관직, 유학자들까지 혜능의 법을 듣기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제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법을 펼칠 안정된 터가 필요했다. 영남 지방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조씨 집성촌이었다. 마을 촌장 조서량과 마을사람들이 평소 대사를 흠모하여 쌍봉산 골짜기에 수나라 말 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된 보림의 옛 절터(계림)에 절을 세우고 스님을 모셨다. 아홉 달 가량 머물다 떠나면서 산 이름을 조서량의 조와 쌍계의 계를 따서 ‘조계’라 지었다. 조계종 조계산, 최초의 구산선문을 연 쌍봉사, 육조혜능 머리를 모신 하동 쌍계사가 모두 여기서 연유한다.
보조지눌이 <육조단경>을 읽고 처음 깨치고, 두 번째 <화엄경>을 보고 깨쳤으며 세 번째 간화선 주창자 대혜의 어록을 보고 깨쳤으니 한국불교가 화엄에서 나와 혜능의 선으로 지침을 삼고 간화선으로 기둥을 세운 셈이다.
그 가르침은 무엇일까? 혜능이 열반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유훈을 남겼다. “그대들은 들으라, 만약 뒷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지니, 그러면 바로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본래로 중생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니라.”
송광사 암자
송광사 산내 암자는 현재 8곳으로 광원암, 불일암[자정암지], 감로암, 부도암, 천자암, 인월암[판와암지], 탑전, 오도암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암자로는 보조암지, 청진암지, 묘적암지, 은적암지, 상암지, 하암지, 북암지, 상선암지, 상염불암지, 하염불암지, 실상암지, 조계암지, 목우암지, 인월정사, 신평리의 암자 터 등이 있다.
보조암은 제1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창건한 곳이고, 광원암은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머물렀던 곳, 청진암은 제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1252]가 창건한 곳, 묘적암은 제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2]와 인연이 깊은 곳, 감로암은 제6세 원감국사 충지, 제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 제16세 고봉국사(高峰國師) 법장(法藏)[1350~1428]이 머물렀던 곳, 자정암은 제7세 자정국사(慈靜國師) 일인(一印)이 창건한 곳, 은적암은 제13세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1270~1355]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건립 경위와 변천]
1) 광원암
광원암은 백제의 가규대사(可規大師)가 514년(무령왕 14)에 창건했다는 설과 제2세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578년(선조 11)과 1893년(고종 30)에 중수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쇠퇴하다가 1958년에 폐사되었다. 1993년 송광사 주지였던 승려 현봉(玄鋒)이 중창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으며, 법당 뒤편에 진각국사 혜심의 승탑이 있다.
2) 불임암[자정암지]
불일암[자정암지]은 13세기 말 제7세 자정국사 일인이 창건하였다. 1765년(영조 41) 공루(空樓)를 지었고, 1866년(고종 3) 칠성각을 지었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1년 서익실(西翼室)을 중건했고, 1929년 공루를 헐어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방 이후에도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했으나 여수 순천10.19사건,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1975년 이후 승려 법정(法頂)이 중창하여 ‘불일암(佛日庵)’으로 개칭하고 머물렀다. 법당 동쪽에 자정국사 일인의 부도가 놓여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3) 감로암
감로암은 13세기 말 제6세 원감국사 충지가 창건했으며, ‘감람’ 혹은 ‘자인암(慈忍庵)’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 공루를 지었고, 1879년과 1893년에 중수하였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0년 동별당을 지었다가 1935년 파옥(破屋)해서 현 송광사 법성료 별당으로 이건하였다. 1936년 공루를 훼철하여 현 송광사 문수전을 증축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으나 1971년과 1976년 2차에 걸쳐 진일(陳一) 심화(心華) 보살이 재건하였다. 2014년 승려 일화가 목조 건축으로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순천 송광사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자 앞쪽에는 제6세 원감국사 충지의 탑비가 있으며, 뒤쪽에는 제8세 자각국사 도영의 승탑이 있다. 현재 감로암에는 송광사의 염불원(念佛院)이 있다.
4) 부도암
부도암은 조선시대 송광사 고승의 부도[승탑]가 모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616년(광해군 8) 부휴(浮休) 선수(善修)의 승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시초이다. 그 이후 1650년(효종 원년) 송계(松溪) 영각(靈覺), 1660년(현종 원년) 벽암(碧巖) 원조(圓照), 1669년(현종 10) 취미(翠微) 수초(守初)의 승탑이 세워졌다. 1678년(숙종 4) 부휴 선수의 승탑 위쪽 좌우에 송광사 사적비와 보조국사비를 세웠으며, 1766년 백암대사비, 1895년 용윤대사비, 1897년 묵암대사비를 세웠다. 그리고 1689년(숙종 15) 설명(雪明)이 그 옆에 암자를 짓고 ‘부도암’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부도암은 법당과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69년 송광사가 조계총림이 되면서 부도암에 율원(律院)을 설치하였다.
5) 부도전
부도암 옆에 있는 부도전에는 17세기 뇌정, 1700년(숙종 26) 유영과 백암, 1719년(숙종 45) 혜공과 휴암과 무용, 1754년(영조 30) 우계와 벽오와 영해, 1766년 완화, 1767년(영조 43) 풍암, 1790년(정조 14) 일주와 묵암, 1799년 벽담, 1806년(순조 6) 회계, 1820년(순조 20) 환해, 1895년 자암, 1897년 묵암, 1902년 제운과 화운, 1916년 두월의 승탑이 차례로 들어섰다. 1917년 설월이 부도전의 담장을 둘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0년대에 취봉(翠峰), 금당(金堂), 광훈(廣薰), 인암(忍庵), 계룡(溪龍), 성공(性空) 등의 부도가 세워지면서 부도전은 모두 5기의 탑비와 30기의 승탑으로 구성되었다. 부도전의 모양과 담장의 규모는 가로 18m, 세로 39m인 직사각형이며, 흙돌담의 높이는 1.5m 정도이다. 내부는 4단으로 나누어 제일 위쪽 중앙에 송광사보조국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송광사사적비가 있다. 승탑의 주인공은 모두 부휴계의 고승이므로 처음부터 부휴계의 부도전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천자암
천자암은 14세기 초 제9세 담당국사가 창건하였다. 순천 송광사에서 순천 선암사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3.4km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응선(應禪)과 청운(靑雲)이 제2창, 1633년(인조 11) 영묵(靈黙)과 태운(太雲)이 제3창, 1730년(영조 6) 자원(自願)이 제4창,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과 두월(斗月)이 제5창하였다. 현대에는 1995년 승려 활안이 중창하였다. 천자암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손꼽히기도 했던 곱향나무인 쌍향수[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가 유명하다. 수령이 800년으로 추정되며 용트림하듯 감아 올라가는 모양으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7) 인월암[판와암지]
인월암[판와암지]은 순천 송광사 건너편 조계봉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 아래에 있다. ‘판자암(板子庵)’이라고도 부르는데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4년에 “판와암은 송광사 17암자 중의 하나이지만 그 명칭과 터만 남아 있다.”고 한 기록이 전부이다. 옛 스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순천 송광사의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던 암자였다고 한다. 1920년 경 불사에 필요한 기와를 외부에서 구입해 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까지는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송광사 [구]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을 새로 짓게 되자 그 해체한 명부전 목재로 판와암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인월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8) 탑전
탑전은 적광전(寂光殿)을 의미하는데, 1991년 송광사 초대 방장이었던 구산(九山) 수련(秀蓮)[1909~1983]을 다비했던 곳에 구산 수련의 제자인 승려 현호(玄虎)가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를 마치면서 건립하였다. 암자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각에 중앙을 ‘U’자 형으로 파낸 통나무를 세워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로는 적광전과 요사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있으며, 요사채 맞은편에 구산 수련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쪽 언덕은 ‘서부도’라고 하며, 19세기에 세운 계월·동월·오주·이주·보월·화담의 승탑과 현대에 추가한 향봉·화봉·계봉·구암 등의 승탑이 있다.
9) 오도암
오도암은 순천 송광사 북쪽 산 넘어 있는 자그만 암자이다. 현대에 건립된 암자로서 1980년대에는 외국 비구니가 거처하며 수행하기도 했다.
[현황]
송광사 산내 암자는 대부분 16국사와 관련이 있다. 16국사의 승탑으로서 조계산에 현존하는 것은 7기인데, 모두 순천 송광사 혹은 암자[터]에 있다. 제1세 보조국사 감로탑(甘露塔)은 순천 송광사 관음전 뒤편 언덕, 제2세 진각국사 원조지탑(圓照之塔)은 광원암에, 제3세 청진적조탑(淸眞寂照塔)은 청진암지에, 제6세 원감보명탑(圓鑑寶明塔)은 묘적암지 주변에, 제7세 자정묘광탑(慈靜妙光塔)은 자정암지[현재 불일암]에, 제8세 자각징영탑(慈覺澄靈塔)은 감로암 뒤편 능선에, 제16세 고봉지탑(高峰之塔)은 감로암 뒤편 왼쪽 능선에 있다.
선암사 암자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순천 선암사에 부속되어 있는 산내 암자.
[개설]
선암사 산내 암자는 현재 4곳으로, 대각암, 비로암, 운수암, 대승암이다. 조선 후기에는 13곳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707년(숙종 33) 채팽윤(蔡彭胤)이 찬술하고 이진휴(李震休)가 글씨를 쓴 「조계산선암사중수비」에 의하면, 당시 선암사에 상주하는 승려가 250인, 법당(法堂) 8위, 전사(殿舍) 12위, 요사채 16위이며, 산내 암자로 13처가 있고, 부속 암자로 용안산(龍眼山) 선적암(善積庵)과 운동산(雲動山) 도선암(道詵庵)이 있다고 하였다. 즉 18세기 초에는 13곳의 산내 암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에서 선조암(善助庵), 향로암(香爐庵), 청련암(靑蓮庵), 무성암(無性庵), 수도암(修道庵),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명이 확인된다. 특히 선암사성보박물관에는 선조암의 불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1691년(숙종 17) 향로암에서는 만각(晩覺)이 ‘사분율칠취대목초(四分律七聚大目抄)’와 ‘불설우바새오계상경(佛說優婆塞五戒相經)’을 1책으로 묶어 『사분률약목(四分律略目)』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건립경위 및 변천]
1) 대각암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머물렀고 또 대각국사 의천의 승탑[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보물 제1117호]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644년(인조 22)에 탄원(坦元)이 중창(重創)하고, 1735년(영조 11)에 벽천(碧川)이 3창, 1939년 춘광과 성암 등이 4창하였다. 법당이 있는 건물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 이은 ‘ㄱ’자 형태이며 승방이 함께 있다. 그 맞은편 아래쪽에 대선루(待仙樓)가 있는데, 1719년(숙종 45)에 처음 짓고 1860년(철종 11)에 중수했다.
2) 비로암
비로암은 대각암에서 북서쪽으로 약 1㎞가량 급한 경사를 올라가서 팔부능선에 있다. 비로암은 선암사의 모태로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해천사(海川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는데, 1652년(효종 3) 탄원(坦元)이 중수하였고 침굉(枕肱) 현변(懸辯)[1616~1684]이 주석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대강백이었던 경운(擎雲) 원기(元奇)[1852~1936]가 비로암에서 『화엄경』을 사경하여 6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이때 한 글자를 사경할 때마다 일배(一拜)했다고 전한다.
3) 운수암
운수암은 ‘북암’이라 불리는데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하여 ‘운수암’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해붕,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 강백들이 거처하며 대승암[남암]에 겨룰 만한 강원을 운영했으나 일제강점기와 조계종과의 분규를 거치며 거주하는 승려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만성화상이 최일 월광 보살과 최일 심화 보살의 도움을 받아 1979년 초겨울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겨울까지 1년에 걸쳐 암자를 복구했으며, 1997년에 그 중창비를 세웠다.
4) 대승암
대승암은 ‘남암’이라 불리는데 순천 선암사를 대표하는 강원이 있던 곳이다. 대승암 강원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상월(霜月) 새봉(璽封)[1687~1767]이 1754년(영조 30) 화엄대회를 개최한 이후로 보인다. 특히 침명(枕溟) 한성(翰醒)[1801~1876]이 1829년(순조 29)부터 선암사 대승암 강원(講院)에서 약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번창하였다. 침명 한성의 전강(傳講)제자는 함명(函溟) 태선(太先)이었고, 함명 태선은 1866년(고종 3) 가을에 경붕(景鵬) 익운(益運)에게 강학을 전하였다. 또 경붕 익운은 경운(擎雲) 원기(元奇)에게 강학을 전하고, 경운 원기는 금봉(錦峰) 병연(秉演)에게 전하여 대승암의 강맥이 근세까지 이어짐으로써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4대 강맥으로 평가받았다.
5) 백련암 터
이 외에 대승암 가는 길에 한옥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옛날에 백련암이 있던 터이다. 한옥은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암자 탐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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