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기록해야 할 항일전선의 위대한 영혼! 몽골의 슈바이처 항일독립지사 이태준
1.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마자알!
영화 『밀정』은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 계획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일명 '황옥 경부 사건'으로 불리는데 여기엔 폭탄제조기술자 헝가리인 마자알이 등장한다. 연계순(현계옥, 한지민 분)과 부부로 위장한 채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장면.. 역사적 실체는 마자알이 폭탄을 운반하는 데에는 참여하지만 국내에 잠입하진 않았다. 그리고 운반 도중 사전에 비밀 누설로 거사 직전 의열단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연계순은 상해에서 폭탄제조기술자 마자알과 부부로 위장한 채 양옥집에 거주하지만 직접 총을 휴대한 채 폭탄을 들고 경성에 잠입하진 않았다. 실제 인물은 현계옥으로 대구 출신 열혈혁명지사였다. 나중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폭탄제조기술자 마자알을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소개시켜 준 인물이 오늘 이야기할 항일독립운동가 대암(大岩) 이태준.. 이태준은 김원봉을 만날 당시 몽골 고륜(오늘날 울란바토르)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병원을 차린 의사였다. 이태준이 김원봉을 만나는 장면은 매우 우연한 일이었다. 레닌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으로 건넨 자금 일부를 상해로 전달한 뒤 북경을 거쳐 장가구-고륜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귀행 도중 이태준은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조우했던 것이다. 1920년 당시 이태준과 김원봉의 만남은 서로에게 항일독립을 향한 불타는 의지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조우했다.
김원봉은 1919년 11월 의열단을 창단하고 1920년 제1차 대암살 파괴 계획을 실행하지만 실패한다. 거사 직전 내부 밀고로 국내에 잠입한 의열단원 대부분이 피검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자신들이 확보한 폭탄이 결정적인 순간에 불발되면서 너무 큰 희생을 치렀다. 1200만 관객이 넘게 본 영화 『암살』의 후반부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은 촛불을 켜놓고 앞서간 영령들을 위로하면서 너무 많은 동지들이 죽었다고 회한에 찬 대사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의열단원들의 희생이 컸다.
결국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들의 희생을 줄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탄제조에 뛰어난 기술자를 수소문 끝에 3명을 소개받는다.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독일인이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 독일인이 만든 폭탄이 비교적 우수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뛰어난 폭탄제조기술자를 잘 알고 있던 이태준이 김원봉을 만난 것이다. 이태준은 북경 시내 어느 요정에서 김원봉을 만났고 강령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의열단에 가입했다.
마자알을 김원봉에게 소개하기로 약속하고 몽골로 돌아갔다. 마자알은 헝가리 출신 애국청년으로 고륜과 장가구를 오가던 독립지사들을 자동차로 태워주었던 인물이다.
2. 의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이태준
경남 함안군에서 1883년 태어났다. 23세 되던 해인 1906년 부인 사망후 상경해서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앞에 위치한 '김 형제상회'에서 일했다. 김 형제상회는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인 김필순이 경영하던 곳으로 안창호 등 항일독립지사들의 비밀아지트였다. 안창호는 서울 올 때마다 제중원(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일하던 신민회 동지 김필순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테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조작, 날조하며 독립 운동가 탄압의 고삐를 죄어오자 김필순은 황급히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흥무관학교로, 이태준은 중국 난징으로 망명길을 떠난다. 이태준은 중국에서 신해혁명에 참가한 중국 인사들,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항일의식을 키웠다.
김필순의 매제가 우사 김규식이고, 조카가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김필순의 자식들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던 아비의 뜻과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을 받아 드높은 항일저항의 역사를 이어갔다. 김필순의 3남 김염은 1930년대 중국에서 영화배우로 중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1930년대 상해 영화계를 풍미하며 영화 황제로 우뚝 섰지만, 일제 선전 홍보영화 출연을 거부하며 견결한 항일의식을 잃지 않았던 반파시스트 항일 전사였다.
김염의 여동생 김위 역시 한때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자신의 뛰어난 가창력을 조선의용대 여성대원으로 대일본 선무공작활동에 활용했다. 김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맞은 조선의용대 김학철(본명 홍성걸).. 김학철의 절친 김학무(조선의용대 정치위원), 윤봉길은 각각 태항산 반소탕전 전사(1944), 상해 의거 처형(1932).. 항일여전사 김위는 1940년대 태항산 시절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장인 김창만과 부부 사이가 된다.
3.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의 항일운동
매제 김규식의 권유로 1914년 몽골 고륜으로 이동해 병원을 개업,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의 병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지었다. 해외독립군 무관학교 건설이 자금난으로 수포로 돌아간 사이, 이태준은 몽골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6년간(1914-1921)은 몽골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전염병을 치료하고 민중 80%가 감염된 성병을 치료했다. 매독균 성대 침범으로 목소리를 잃어버린 몽골인들의 목소리를 다시 되찾게 만들어주었다. 에를리히(P. Erlich)가 발명한 매독치료제 살바르산 덕.. 이태준은 몽골 국민들로부터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로 추앙받았고 '신인(神人)'으로 존경받았다. 몽골 마지막 국왕 보그드 칸 8세의 주치의가 되어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태준은 한시도 조국의 독립과 항일의지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의사로서 현실에 안주하며 사회적 존경 속에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몽골로 넘어가는 길목인 장가구와 고륜을 넘나드는 항일독립지사들의 안식처로 자신의 병원을 내주었다. 매일 40~50명의 항일독립지사들이 이태준의 병원을 찾았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모스크바로부터 건네받은 독립운동자금을 북경을 거쳐 상해로 비밀리에 운반했던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이었다.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최초이자 한국 최초 공산주의 정당으로 이동휘, 김립, 김알렉산드라, 박애, 박진순, 이한영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했다.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에 가입한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볼세비키 정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받았고 식민지 해방운동 자금 또한 획득했다. 약속 받은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가운데 1차 40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운반하는 데 이태준이 관여했다. 김립이 40만 루블 금괴 중 12만 루블을 몽골을 통해 상해로 운반하기로 했고, 나머지는 한형권과 박진순이 운송..
이태준은 김립의 12만 루블 중 1차분 8만 루블을 상해로 무사히 운반한 후, 2차분 금괴 4만 루블을 가지러 고륜으로 돌아가던 길에 북경을 들렀을 때 김원봉을 만났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폭탄제조기술자 헝가리인 마자알을 북경으로 데려 오겠다고 약속한 후 헤어졌다. 그러나 몽골이 러시아 반혁명파 백위대에 점령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태준은 마자알과 함께 금괴 4만 루블을 갖고 상해를 향해가던 중 백위대 참모 일본장교 요시다(吉田)에 의해 체포돼 고륜으로 압송되었다. 동의의국 병원이 항일애국지사들의 중간 기착지였음이 드러나고, 이태준은 총살된다. 38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4. 교과서에 기록해야 할 항일독립지사 이태준
의사로서 이태준의 숭고한 봉사와 헌신, 그리고 항일독립지사로서 열정적인 활동과 죽음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로 전락한 암울한 현실에서 이태준은 좌절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사 교과서엔 이태준에 대해 단 한 줄도 기술돼 있질 않다. 일반 민중 역시 이태준을 잘 모른다. 몽골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이태준은 그동안 망각의 인물이었다. 한국 최초 공산주의 정당(한인사회당)은 당을 만든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워졌고, 비밀연락원 이태준 역시 함께 지워졌다. 반쪽짜리 역사교육의 한심한 현실!!
몽골 정부는 2007년에 울란바토르 2000평 땅에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입구에는 한국어 안내 표지판이 있는데 거기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생은 1914년 울란바토르로 이동하여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또한 인술을 베풀어 당시 몽골에 만연해 있던 질병을 퇴치하여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덴 오치르' 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1921년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국과 몽골 정부는 독립 운동가이며 위대한 의사인 이태준 선생의 고귀한 삶을 기리기 위해 2007년 7월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의 발자취가 시대를 초월하여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헌신과 삶의 치열함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집단적 망각 속에 교과서에 한 줄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몽골 여행을 가서야 '이태준' 이름 석 자를 알게 되고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닐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회정의가 가물거리는 것은 역사정의가 좌절된 때문이다. 하루 빨리 한국사 교과서에 성의(聖醫) 이태준 선생의 삶과 죽음의 치열한 자취를 기록하여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이태준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공산주의, 통일에 대한 단상 - 김대중(1982년 청주교도소 옥중사색)
해방후 일제하에서 싸운 공산주의자들을 매도하고, 그들이 바친 민족독립운동 공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이는 주로 부왜파가 해방후 이 나라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통일 문제나 민주주의 문제의 잘못된 출발의 근본에는 부왜파가 있다. 부왜파 숙청의 실패가 모든 일을 망쳐놓았다. 민족과 이념을 구별해야 한다. 이념은 다르고 공산당은 반대하더라도 민족에 대한 애정과 공동운명의식은 견지해야 한다. 이 시대의 한국인이면 어떻게 북한과 공존 협력하며 민족 운명을 같이 개척해 나갈지 고민하며, 민족 최대의 아픔인 조국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민족을 위해 사소한 차이를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 역사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역사를 통해서 승리했다.
통일은 당위만이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이며 절대필요의 문제!! 사람이건 나라건 배부르면 웃고 배고프면 화낸다. 경제교류로 북한을 배부르게 만드는 게 한반도 평화와 핵문제 해결의 근본대책이 된다. 남북은 단결하고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통일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막대한 군사비를 절약해서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남북간 경협으로 다 같이 큰 덕을 볼 수 있으며, 북방진출로 세계 선진국 대열과 아태 주역이 된다. 통일은 우리의 권리!! 우리는 전범국가가 아니기에, 독일같이 외부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인간은 완전히 훌륭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훌륭하게 살다보면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인간이 하는 일에 완전은 없으나, 결국 긴 눈으로 보면 인류는 완전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유교와 불교의 넓고 깊은 인과 자비의 정신이 민주주의 발전의 정신적 원천이 될 수 있다. 나쁜 씨를 뿌리고 좋은 수확을 기대하는 건 무리이듯, 민주주의는 민중 수준만큼 할 수 있다. 좋은 정치에 왕도는 없다. 결국 민중이 똑똑하고 성숙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