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삼도2동 관덕로7과 관덕로8 사이에 있는 도로상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시설(성곽)
제주목은 제주시의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행정구역 이름이다. 충렬왕21년(1295) 제주의 행정단위는 제주목으로 개편되었다. 목(牧)은 경(京)과 도호부의 격을 지닌 행정단위와 더불어 계수관(界首官) 지역으로 일컬어졌다. 계수관 지역은 최상의 독자적·개별적 행정단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도(道)가 명실상부하게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간기구로 정착해 극히 짧은 기간에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 지역도 제주목으로 개편된 이후부터는 오늘날의 도(道)와 같은 위상을 지닌 고려의 최상급 지방 행정단위가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관품이 높으며, 많은 수의 외관을 맞게 되었다. 그 후 충렬왕26년(1300)에 이르러서는 제주목에 속했던 촌 가운데서 14개 촌이 동·서 방향으로 나뉘어, 각각의 군·현으로 개편되어 현존하는 마을의 틀과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인 태종16년(1416)에 제주도는 고려 시대의 행정조직이었던 동·서도현(東·西道縣) 제도를 폐지하고, 3읍 행정조직을 도입,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오식(吳湜)의 건의에 의해서 정비된 행정구역을 보면 한라산 동서로 뻗은 분수령을 경계로 북반면을 제주목으로 하고, 남반면은 이를 다시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을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으로 하였다.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을 설치하게 된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태종16년(1416) 5월 6일 제주 도안무사(都按撫使) 오식과 전 판관 장합 등이 이 지방의 사의(事宜)를 올렸다. 아뢰기를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한라산의 사면에 모두 17현이 있었습니다. 북면의 대촌현(大村縣)에 성을 쌓아서 본읍으로 삼고 동서도(東潟)에 정해진(靜海鎭)을 두어 군마를 모아 연변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서도의 도사수(都司守)는 각각 부근의 군마를 고찰하고 겸하여 목장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땅이 크고 백성은 조밀하여 소송이 번다합니다. 동서도의 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목사가 있는 본읍을 왕래하는 데 단지 걷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사 때는 갔다왔다 하기에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또 정해진의 군마와 목장을 겸임한 많은 직원이 무지배(無知輩)들을 거느리고 군마를 고찰한다 핑계하고 백성을 침해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 혹은 아무 때나 사냥하면서 약한 백성들을 어수선하게 만들지만 목사와 판관이 또한 그 연고를 알지 못하니 어찌 고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해를 거듭하여 커다란 폐단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동서도에 각각 판관을 두되 문무의 재주를 겸하고 공렴정직한 자를 보내어 목장을 겸임하게 하십시오. 이로 하여금 동서 정해진의 군마를 고찰하고 고수(固守)하게 하며, 또 맡은 목장에서 마필 번식의 많고적음과 직원과 목자들이 목양(牧養)을 잘 하였는지 못하였는지를 살피게 하십시오.
판관을 안무사도(安撫使道)의 수령관(首領官)으로 겸차(兼差)하여 안무사는 수령관을 대동하고 타도의 감사(監司) 예에 따라 순행하여 수령들의 근면과 태만을 고찰하고 포폄(褒貶)을 시행하여 이조(吏曹)로 보고한다면 이것이 장치구안(長治久安)의 정책입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본읍에는 東道(동도)의 신촌현, 함덕현, 김녕현과 서도의 귀일현, 고내현, 애월현, 곽지현, 귀덕현, 명월현을 소속시키십시오. 동도의 현감은 정의현으로 본읍을 삼고 토산현, 狐兒(호아)현, 烘爐(홍로)현 3현을 소속시키며, 서도현감은 대정현으로 본읍을 삼아 예래현, 차귀현 2현을 소속시키십시오. 그리고 두 곳의 현감이 만약 감히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공사가 있으면 안무사로서의 의견(議見)을 보내어 결정한 후에 사연(辭緣)을 보고하게 하여 출척(黜陟)의 빙거(憑據)로 삼으십시오. 만약 진상할 마필을 쇄출(刷出)하는 일과 연례의 마적(馬籍) 등의 일은 현감이 소관하는 마필의 이빨·털색깔을 보고하면 안무사가 순행하여 몸소 감독·고찰·시행하게 하십시오. 소관 군관(軍官)과 군인 가운데 천호·백호는 차정(差定)한 연월의 오래고 오래지 않음으로 차등을 두어 현감이 분간하여 보고하고 안무사가 상고(相考)하여 그 전대로 차하(差下)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음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이에 육조와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이조에서 의정부 및 여러 조(曹)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제주에 동서도 현감을 신설하고 목장을 겸임하는 일, 신설되는 현에 각 현을 합속시키는 일, 마필을 번식시키고 순행·고찰하는 일, 천호·백호를 차정하는 일 등은 계본(啓本)에 의하여 시행하십시오. 그 신설한 현감이 정적전최(政積殿最, 다스린 일에 대한 평가)는 도안무사가 다른 영내, 관례(官例)에 따라 그때그때 고찰하여 도관찰사에게 전보하면 도관찰사는 목사 판관의 정적을 아울러 고찰하여 포폄을 시행하십시오. 모든 형옥(刑獄)과 결송(決訟)과 전량(錢糧, 부세(賦稅)와 재정)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제 때에 보고할 수 없으니 시행 후에 사연을 대략 들어 1년에 두 번 감사에게 보고하되 국둔 마필의 번식과 고실(故失) 수도 아울러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여 출척의 근거로 삼으십시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47∼48쪽)
이 3읍 행정조직은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졌고, 이에 따른 하부조직의 개편은 광해군1년(1609)에 이르러 3읍8면이었다. 이 하부조직은 조선시대 후기에 제주목 우면이 신우면과 구우면으로 분면되는 등 부분적 개정이 있었으나, 고종 때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이 후 고종1년(1864) 8월 30일 조정에서는 제주목의 정의현과 대정현 2개 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제주목사의 관할에서 분리시켜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아래 두게 하였다. 하지만 두 현이 제주목사의 지휘권에서 벗어난 결과 점차 체통이 문란해지고, 과폐(科弊)가 일어나는 등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고종17년(1880) 1월 27일 다시 예전대로 정의현·대정현으로 환원시켜 제주목사의 관할 아래 귀속시켰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 제151권 27장에는 제주목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목은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제주에 대한 옛 기록에 따르면 ‘태초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신인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도 주산 북쪽 기슭에 모흥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그 곳이다. …15대 손에 이르러 고후·고청의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신라가 번성할 때였다.…읍의 이름을 탐라라고 하니 대개 신라 때에 처음으로 탐진에 이른 까닭이었다.… 백제 문주왕2년(476)에 탐라국 사자에게 은솔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20년(498)에 탐라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친히 무진주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하였다. …고려 숙종10년(1105)에 탁라를 고쳐서 탐라군으로 하였고, 의종 때 현령관으로 하였다. 원종11년(1270)에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서 고려 조정을 괴롭혔는데, 4년이 지난 계유년에 시중 김방경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충렬왕3년(1277) 정축에 원나라 조정에서 목마장으로 삼았는데 충렬왕21년(1295)에 임금이 원나라에 들어가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나라 승상 완택 등이 상주하여 그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는 성지를 받았고, 이듬해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제주목 성곽은 1565년까지는 산지천의 서쪽까지였는데 1555년 을묘왜변을 겪은 후 10년이 지나서 아래 그림과 같이 산지천 동쪽을 포함하는 성곽으로 확장하였다. 동·서·남 3개의 문이 있었다.
조선 선조32년(1599) 목사 성윤문이 대대적인 제주성 개·보수에 나서는데 성굽을 5척이나 확장하고 성 높이도 11척에서 13척으로 높여 쌓았다. 이 때 두 개였던 남문을 하나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었다. 즉, 제주성의 동문인 제중루(濟衆樓; 뒤에 延祥樓로 개칭), 서문인 백호루(白虎樓; 뒤에 鎭西樓로 개칭), 남문인 정원루(定遠樓)가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서문루는 없어지고 주변엔 주택들이 들어섰다.
서문은 삼도2동 관덕로7과 관덕로8 사이에 있는 도로상에 있었다. 근처 YMCA 서쪽 길가에서 옛 성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돌할으방이 설치되었던 곳도 이 근방 서쪽이다. 관덕로2-2의 동쪽 좁은 길에는 서문루인 진서루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도 하나 남아 있다.
삼도2동 1074-1번지(무근성7길9)에 서문(진서루) 터 표석이 있으나 이는 표석의 위치를 서문이 있던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작성 130508, 보완 2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