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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내 식의 영원한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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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 식의 영원한 사랑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오늘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영원한 사랑’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순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영원한 사랑에는 달콤한 것만 있지 않고,
벌로서 좌절을 주실 때도 있으며,
깨우치시고자 큰 고통도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벌도 사랑이요 고통도 사랑이라는 말이고,
사랑하기에 벌을 주시고 사랑하기에 고통을 주시는 거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서 구원을 위해 벌을 주시고 구원을 위해 고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얘기도 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순간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한순간도 무관심한 적이 없고 미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저의 사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속적인 사랑이
아님은 물론이고 무관심하거나 미워한 적도 많은 사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닮을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워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것이고,
미워하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포기했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영원히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이고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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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텍사스대학교 제임스 패너베커 교수 등은 개인 블로그 3만 5천 개와 학생들의 에세이 1만 5천 개를 분석해서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들은 질병, 외로움, 신경증,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단어를 다채롭게 구사하는 이들은 직장생활과 여가 활동 등에서 성실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당연히 몸도 더 건강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1950년에 입회했던 수녀 180명의 입회 청원서를 분석했습니다. 이 청원서에서 긍정적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은 수녀들 가운데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34%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 ‘매우 행복한’, ‘정말로 기쁜’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수녀 중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무려 90%나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을 줄이고 긍정적인 말, 희망의 말을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모두 공짜라는 것입니다. 좋은 단어라고 해서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공짜이기에 기왕이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과 희망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도 커집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따라서 삶에 대한 기쁨도 줄어듭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서는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말하면서, 여자를 쫓으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는 것처럼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여인의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로 낮추면서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야 믿음이 커질까요? 아닙니다.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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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공하기까지는 항상 실패를 거친다(미키 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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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찹찹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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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고 맙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환히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마태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예수님을 안내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튼튼한 만큼 충만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어 간사한 마음을 다스리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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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받아 놓은 날은 꼭 오기 마련입니다.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내일이면 돌아옵니다. 남은 일정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행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던 둘째 아들을 큰 사랑과 자비로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두 팔을 벌려서 환영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희망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어느 성당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성당에 다닙니까?’라고 누군가 물으면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할 겁니다. 지금 성당은 '2111 Camino Lago Irving TX 75039'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2017년에 완공했습니다. 그 전에는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창고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성당 전에는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당은 건물과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당에 주보성인을 정해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당은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다운타운 성당이 팔렸어도, 창고 성당이 팔렸어도, 언젠가 아름다운 지금의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계속된다면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옥중에서 쓴 서한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짝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품과 비슷하지만 가짜입니다. 예전에 ‘비가 올 때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가면 짝퉁, 가방을 가슴에 품고 가면 진품’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진품인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르는 것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짝퉁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진품 신앙은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품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자캐오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식탁에서 흘린 것은 개도 먹는다며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이방인여인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품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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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마침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저는 주님께서 개에게 주는 빵을 비유로 말씀하셨을 때 그 여인은 돌아설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당에 찾아온 누군가에게 어떤 사제가 ‘개에게 주는 빵’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지 않을까요? 혹은 사람을 무시하고 인권을 무시한 사제라고 여기저기 고발하고 다니지 않을까요?
그런 강한 표현을 오늘 주님께서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 들은 여인의 모습은 더 대단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녀의 이 말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도 없나? 다른 곳에 가면 되지! 다른 사람을 찾아가면 되지. 어떻게 스스로 개가 되려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희망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주님은 화답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저희가 주님을 떠나 어딜 가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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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중요합니다.
맛있는 음식 중에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이름을 열거하자면….
냉면, 막국수, 삼계탕, 팥빙수 그리고 콩국수~^^
그런데 저는 얼마 전까지 콩국수를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콩국수를 저는 비릿한 향을 풍기는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어디서 콩국수를 경험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로는 콩국수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숫집을 방문했습니다. 식당 벽에는 덕지덕지 ‘콩국수 개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함께 방문한 친구들은 제게 이곳 콩국수가 참 유명하다고 말했습니다. 먹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도전했습니다. 콩국수가 제 앞에 나왔고 저는 친구를 따라 소금을 넣어 국물 맛을 봤습니다.
이런…. 콩국수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다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처음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음식도 경험도…. 시작이 기쁘고 즐겁다면 우리는 끝까지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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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
“기도가 답이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31,10ㄹ)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사제들은 물론 믿는 어른들은 세상의 소리에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어른의 위로는 고요해 보이는 세상 속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다산>
“세상 모든 것은 평온하지 않았을 때 소리가 난다.”(당송팔대가 한유의 송맹동야서>
어제 수도사제답지 않았던 언행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회개합니다. 솔직히 말해 깊이 들여다 보면 겉은 화려하고 빛나는 천국같아도 안은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입니다. 작열하는 불볕더위에 기후위기를 실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붙잡고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대하면 숙연해 집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류가 맞이하는 온갖 불행과 재앙의 궁극의 원인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잊은 데 있습니다. 새삼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서나 두손들어 기도하라 눈들면 하늘이요 직립인간입니다. 작년 8월 광복절부터 시작한 “만세7창”이 취침전, 기상후 지금도 계속되니 직립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보이는 희망이 인간이요 자연이고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잊으니 인간도 자연도 잊혀져 가고 병도 깊어져 갑니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자연을 버리니 자연은 인간을 버립니다. 소멸되어가는 지방과 시골의 무수한 빈집들을 보면서 점차 조화와 균형을 잃어가는 나라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어제 매달 날마다 특별히 미사를 봉헌 부탁하는 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지옥같은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잡고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분입니다. 온통 심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기도같은 내용의 편지중 몇구절을 인용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정말 인생이 별거 아님을 느낍니다. 신부님께 편지 올리면서 좀 정리가 됩니다. 언제까지 누워서 허우적댈 수만은 없지요. 동네에서 아파계시는 사모님이 그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가는 걸 보니 더 무서웠습니다. 딸은 필요한 것을 사달라고 카톡 넣으면 그래도 꼭 사서 놓고 갑니다. 직업이 있고 그래도 믿을만 하니까 부탁을 하는데 그도 미안합니다. 이젠 제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저를 살려주세요.” 어쨋거나 신부님, 남의 기도하다가 제몸이 망가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그래도 제가 죽기전까지는 좋은 일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말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고해인생중에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의 끈, 믿음의 끈, 하느님의 끈 꼭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축제인생을 살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자매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닮은 분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탄력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기도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를 연상케 합니다. 주님과 기도의 싸움이 전개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니 참 냉정합니다. 제자들이 한마디 거들자 재차 말씀하시는데 정말 너무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나 이제나 세상은 길 잃은 양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길 잃는 자본주의 문명이요 길 잃은 각자도생의 세상입니다. 갈 길의 방향을, 희망을, 빛을 잃고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다음 재차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간청의 기도입니다.
가나안 여자와 주님의 대화내용이 점입가경입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 가나안 여자입니다. 그토록 주님께 대한 신뢰가 깊었던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가 겸손의 절정입니다.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흔쾌한 항복 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가나안 이교 여자의 믿음이 참 놀랍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 감동의 언어가 이런 믿음임을, 정말 부러워할 것은, 주님께 청할 것은 이런 큰 믿음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케 하신 가나안 여자의 순수하고 진실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임을 입증한,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사람, 가나안 여자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간청의 기도에 응답됨으로 드러나지만, 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전능이 드러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에 찬양과 감사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찬양과 감사의 양날개를 달았을 때 하느님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양으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감사로 인생을 끝낸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고단한 광야여정중의 우리에게 참 좋으신 하느님을,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광야의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 하느님께 나아가자. 기쁨으로 환호하고,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오늘 지금 여기서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연옥같기도 하고 지옥같기도 고해인생중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우울과 슬픔, 고통을 말끔히 털어내고 노래하고 춤추며 찬양과 감사의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예레31,1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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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믿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내가
작아질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커집니다
나를
낮출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깊어집니다
나를
비울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채워집니다
내가
여릴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굳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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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5,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으로 물러가시다
여인은 성조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육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친 동정 마리아를 낳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분명 이 여인은 유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출신입니다. 주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을 때, 어떤 가나안 부인이 지역 경계선을 넘어 주님께 와서 마귀 들린 딸을 고쳐 주십사고 끈질기게 졸랐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곳과 가깝지만 그들의 도시가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도시였습니다. 여인은 도움을 얻고 싶은 나머지 큰 소리로 외치며 계속 졸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십니다.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여인이 더욱 절실하게 바라도록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더욱 절실히 소망하도록 만들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예수가 답했던 두 번째 물음은 장소에 관한 물음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어느 한 장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 혹은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엑카르트는 선례를 따른다. 그는 지나치게 발달된 우리의 장소 의식을 새로운 공간 의식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지상의 모든 곳에서 같은 거리에 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지상의 모든 물질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어야만 한다.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가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혹은 우리가 시간은 물론이고 장소마저 버릴 때,하느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혼이 하느님을 아는 데 시간과 공간만큼 방해가 되는 것도 없다. 하느님은 지상의 갖가지 사물 가운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통짜(one)다. 하느님을 차츰 경험하려면. 시간 속에 있는 대상들을 버려야만 한다.
하느님은 장소를 넘어선 곳에 있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가 직접 성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장소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각과 관계가 있다.(216)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이단 신문:
이단들에 대하여 제정된 ”이단자 구제법”과 이단 신문도 이러한 이중적인 견지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카타리파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종교적 기반과 함께 정치적 • 사회적 기반도 공격하였으므로, 국가와 교회는 그들과 싸우는 데 함께 협력하였다. 이미 1197년에 아라곤의 왕 페드로 2세는 카타리파를 국가의 적으로 공식 선언하고, 그들의 화형을 지시하였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영국 왕 헨리 2세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이단자에 대해서는 재산의 몰수와 자유의 박탈로 처벌되고 필요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진압되어야 한다는 엄한 의결을 촉구하였다. 또한 교황 루치오 3세는 1183년에 프리드리히 적발제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단자에 대한 교회의 파문 직후에 제국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국외 추방이 언도되어야 하고, 이단자는 직무상 색출되고 처벌을 위해 세속 재판에 넘겨주어야 하였다. 그때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동기가 얼마만큼 결정적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자기지신을 완전히 종교적 • 정치적인 하나로 이해하고 있던 세계는, 그 통일적 • 그리스도교적인 토대가 공격받고 있는 것을 보면 즉시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가능하였다.
알비파들에 대한 개종의 시도가 좌절되고 1208년에 교황사절이 살해된 후, 인노첸시오 3세는 1209년에 그들에 대한 십자군을 호소하였다. 양측에서 한없이 많은 피를 흘린 이 비그리스도교적인 살인행위는 20년간 지속되었다. 모든 도시의 주민들이 전멸되고 넓은 농촌지역들이 황폐화되었고, 동시에 프로방스 지방의 문화가 전멸하였다. 외적으로 보면 이단이 근절되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이단 신문을 해야 하였다. 프랑스의 군주체제는 이를 통해서 이익을 얻었으며, 그 싸움에서 승리자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종교의 보호하에 정치적 • 왕조적인 이해관계가 대부분 해결되었기 때문이다.(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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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15,28)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큰 성서인 자연의 이치를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이해도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나안 여인에 대한 태도는 예전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딸의 병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라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15,23) 그런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제자들은 그 여인의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15,23)하고 여쭙니다. 그런데도 고작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해받지 못한 설움에 이방인이라는 거부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물러서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서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하고 마지막 시험의 문제를, 질문을 그녀에게 던집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깊은 절망의 시간과 자리를 견디어 낼 때만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참으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참으로 참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그녀는 개 취급받아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그런 무시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 따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더 처절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원망보다는 오직 자녀의 치료를 위해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라고 절규합니다. 언감생심이란 말뜻처럼 감히 겸상兼床은 바라지도 않으며 다만 주님께서 자녀들과 잡수시다가 혹여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족하고 족합니다, 는 그녀의 진솔한 마음을 예수님은 듣게 됩니다. 당연히 밥상에서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자부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낮춤과 신뢰에서 솟아 나온 의탁의 마음 소리를 듣고서야,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서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 28)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면서 그녀를 모질게 대하셨고 상처받을 말씀을 하셨지만, 이 또한 그녀의 마음 깊이 숨겨 내재된 보물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순간은 단지 그녀 딸의 치유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도 구원을 받았으며, 이미 천상의 식탁에 앞서 이 땅에서 말씀의 식탁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관심을 쏟고 은총의 치유와 기적을 보고서도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느꼈을 실망과 안타까움을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인간적인 위로와 희망을 보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려는 예수님의 극단적인 교육 방법이 마침내 그녀를 통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빠 하느님께서 그녀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 이끌려 온 그녀를 통해 하늘나라의 구원 의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15,28)
“주님, 저희 또한 가나안 여인이 당신에게서,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하신 칭찬의 말씀이 저희를 흔들어 깨웁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저희 또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은총이며 사랑의 안배임을 감사하면서 살아감으로써 ‘너희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칭찬받는 오늘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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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보며 /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2024-08-06 ㅣNo.174829
예수님은 티로와 시돈의 이교도 지역에 가셨다. 그런데 어떤 가나안 부인이 그분께 소리를 질러가며 호소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녀의 이 부탁은 이교도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가장 최고의 극찬이나 다름없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그 여인의 자신의 딸에 대한 이 구원의 요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감히 청할 말이 아닐 게다.
여느 때는 예수님은 이런 청은 반드시 들어주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호소에 일체 대꾸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특히 이방인 여인들은 더 차별과 멸시를 받았으리라. 그들은 주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않았기에.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이 냉정한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가나안 여인을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 게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진정 가르치고자 하셨으리라. 그녀는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더 극진히 매달렸지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단호히 거절하셨다. 믿음의 정도를 물으신 거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예수님 대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그 버리는 그것도 감지덕지라며 매달렸다.
당신네 백성에게 먼저 베풀고는, 그래도 남는 것 좀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매달림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감동 받으신 우리 예수님이시다. 그처럼 강한 믿음으로 매달린 그 여인의 딸이 바로 그 시간에 호된 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단다. 가나안 여인의 그 믿음은 예수님을 사로잡았으리라. 사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주실 때가 정녕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만이 자신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메시아’라고 확신하였을 게다. 어디서 이런 믿음은 나왔을까?
그렇다. 딸을 살리려는 산고의 고통을 겪은 어머님만이 가지는 마음에서부터 나왔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을 구해 주실 분이 예수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누가 뭐래도 주님이신 예수님만이 자신의 이 애타는 심정을 치유해 주실 수 유일한 분임을 확신하였기에. 그래서 이교도인 그 여인은 처절하게 그분께만 매달린 것이다. 예수님 사랑은 어떤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다.
가나안 여인의 뛰어난 믿음의 본보기이다. 그녀는 주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감히 주장할 수가 없을게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오직 당신 사랑의 선물이니까. 따라서 믿음으로 충만한 가나안 여인마냥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무한의 은총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청할 수밖에는.
사실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갖가지 나름대로의 고통과 시련이 있을 게다. 저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 구원의 손길만을 믿고 인내하면서 겸손하게 기도로 다가가면 참 좋겠다. 그분의 자비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일 수밖에! 그 여인의 그 믿음을 아마도 제자들도 눈여겨보았으리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도 확실한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다가가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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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모호합니다.
가나안 부인이 뒤에서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지도,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가나안 부인을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전체 안에서 이 단락을 비추어 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장의 족보에서부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또 마태오 복음서에서,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죽이려고 할 때, 먼 동방에서 온 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그분께 경배합니다(2장 참조).
그리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만으로 충분히 낫게 하여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이 청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병행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이 이방인들은 구원의 한몫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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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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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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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딸만 살려주신다면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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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신다.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한다.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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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능력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기적의 은총을 주기를 거부하는 모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희망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가나안 부임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부모는 자신을 낳았으면 분명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믿음이 있고, 또 자신을 낳았으면 키울 능력이 있는 분이란 믿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낳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있다면 키울 능력도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자는 사랑이셔야 하고 능력자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그래서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은 그 능력과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다 사랑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폭력이나 속임수 등을 써서 성공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공한 이들 중에 많은 수는 사랑이 커져서 능력도 커진 경우가 많습니다.
2014년 이전 현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대표 박지형은 중소기업의 기업가로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회사가 20~30억의 매출로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024년 위장암과 판막 전이로 4기 진단받았고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6개월 뒤에 어렵게 가진 딸이 태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딸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돈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보험회사였습니다.
자신은 6개월 뒤에 죽을 것이 확실하니 6개월 치 이자를 제하고 사망보험금을 미리 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 청에 보험회사 직원들이 몰려와서 조사해보고는 정말 보험금을 주었습니다.
보험금이 생기자 아내와 딸이 먹고살 수 있는 더 큰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줌줄을 차고 그는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3년 뒤 복막을 어찌할 수 없지만, 위는 절제할 수 있어서 수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 말기 환자로 백 차례가 넘는 항암을 맞았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10년 만에 부동산만 600억이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이전에 하던 스크린골프회사까지 합치면 약 800억에 가까운 자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 하나씩 가지게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능력도 향상했습니다.
박지형 대표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능력의 향상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하는 마음은 또한 능력의 향상도 가져옵니다.
이것이 혼자 살거나 많은 자녀를 키우며 살거나
결국 나이가 들면 재산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동기가 없으면 일도 하기 싫어집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 합시다.
그러면 더 큰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린 브로커비치도 생각해 봅시다.
영화로도 유명한 이 실화는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던 PG&E에 대한 분노,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모성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6년에 3억 3,300만 달러의 합의금이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직접 소송 합의금이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는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존감을 가지게 하고 그 자존감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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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이방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 진주’는 ‘복음, 성사’ 등을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상 “줄 수 없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개들’은 주로 ‘들개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강아지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자가 마음의 상처를 덜 받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신 것 같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4-15).”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묵시 21,6ㄷ-8).”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러면 우상 숭배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숭배하는 우상을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우선 먼저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로도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자녀가 되면 됩니다.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4) 예수님께서 처음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청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태도로) 예수님께 청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모독죄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제가 강아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의 겸손한 고백과 회개와 변화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이 왔던 여자가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록 딸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회개했고,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청했던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았던 더 큰 은총도 받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은총이고, 가장 중요한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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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보통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은 ‘자아’가 강하지 않은 편입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고, 남에게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그가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압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귀가 얇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런 평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입니다. 반면 남의 말을 잘 안 믿는 사람은 ‘자아’가 강한 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남에게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보다 자기가 말하는 시간이 더 많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잘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고집이 세다’는 핀잔을 듣게 되는데 남들의 그런 평가에 엄청 신경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지요. 참으로 모순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부인은 그 중 전자에 해당합니다. 자아가 강하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치유해 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굳은 믿음이 그녀의 자아를 꺾어 어떤 상황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내적 힘을 키워주고, 그 힘이 커지는 만큼 그녀의 믿음도 더 깊고 단단해집니다. 이른 바 ‘믿음의 선순환’이 그녀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 말을 못들은 체 하며 무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방인인 자신을 배척하고 심지어 ‘개’에 비유할 정도로 무시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청원을 차갑게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도 주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저 딸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모욕을 참고 견디는 수준이었다면 상대방의 말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는 순간 폭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건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자비와 넓은 아량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철저히 의탁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녀처럼 믿지 못합니다. 무겁게 침묵하시는 주님 앞에서, 차갑게 외면하시는 그분 앞에서, 내 기도가 거부당하고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이 상하고 절망하며 포기해버립니다. 간절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께 기도했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괴로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주님을 원망하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는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무시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 가까이 다가갔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어떤 처분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순명의 자세입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입을 수만 있다면 그 ‘양’이나 ‘크기’가 얼마가 되든 중요하지 않다는 마음자세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이시라면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삶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지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절절한 신앙고백에서 겸손하고 성숙한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강한 그녀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지녔기에, 전능하신 주님에 비하면 자신은 ‘강아지’에 불과한 부족하고 약한 존재임을 순순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믿음이 위축되거나 비굴해지는게 아닙니다. 자신의 ‘주인’이신 주님은 그런 부족하고 약한 자신이라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기에 ‘그럼에도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거두지 않고 꼭 붙들지요.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믿는대로 이루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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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심흥보 베드로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우리는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런데 사실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살아있고, 이렇게 주님을 찬미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부인도 처음에는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렸을 뿐입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태 15,22)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바닥까지 밀어붙이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4.26절) 그렇게 그 여인에게서 참 믿음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27절)
그제야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과 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ㄴ절) 그리고 그 여인은 진정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28ㄷ절)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세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선택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그 소망이 이루어져 나와 우리 민족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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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우리가 살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 중에 하나가 거절당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순간 반응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은 ‘분노’라든지 ‘실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호렙산에서 맺은 계약에 따라 변함없는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지만
그들은 번번이 우상숭배라는 거절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노하심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드러나지만 또다시 용서와 기다림으로
연결됩니다.
어렵게스리 믿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는데 정면에서 아니면 둘러서 거절을 당하면
무안해지고 또 잠재해 있던 감정의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이 이웃의 청을 다 받아들이며 살 수는 또한 없지요.
요즈음 SBS Drama ‘닥터스’에서 주인공 홍지홍과 유혜정과의 로맨스, 그 사이에서
정윤도의 역할을 바라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소중함과 우여곡절을
배우게 됩니다.
정윤도 의사가 혜정이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서 멋있게 거절당하는 연기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방통행식의 삶, 내가 청하는 것은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의
우쭐거림 병에 머물려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정을 방문해서 보면 부부가 서로 일방적인 모습이 때로는 안쓰럽기 까지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에서 빚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겠고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바로 겸손이라
하겠습니다.
사랑과 겸손이 함께 있으면 그릇에 어떤 것이 담겨도 다 아름다움으로 창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절당하는 장면을 가나안의 한 여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이방인의 도시 티로와 시돈 지방을 물러 가셨는데 그곳에서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큰 소리로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여자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님께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평소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웬일인지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며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이 도와달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더 강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그러나 그 여인은 더 낮은 자세로 청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강아지로 낮추며 청하는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 못하시고
감동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주님의 거절을 여인은 더 겸손한 자세로 청하는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거절되어도 이렇게 청해야 한다는 뜻으로 평소 주님 답지 않은
표현을 쓰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한번의 청도 거절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절당하는 데에도 멋이 있어야 합니다. 괜히 얼굴을 붉히고 때로
성을 낼 필요가 없음을 오늘을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세상이 어디 늘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특히 주님께서
거절하시는 데에는 더 큰 사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멋 있게 거절하고 아름답게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이 세상에서 행복의
이치를 깨닫고 또 그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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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외치십니다. 기대 이상의 믿음 앞에서 그분은 기쁨을 감추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 가나안 부인은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악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딸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못할 일이란 없지요.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고 게다가 여성이지만 믿음으로 무장한 강인한 어머니였으니까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그녀는 강아지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믿고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어줍잖은 자존심따위는 애시당초 버렸고, 또 믿음이 주는 자존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빵"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내려 주시는 빵을 가리킵니다. 광야의 만나이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요. 이는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이전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탯줄입니다. 이 빵을 통해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이어지지요.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마태 15,27)
강아지가 주는 비하적 어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오늘은 "부스러기"에 머무릅니다. 빵은 곡물의 가루가 물, 기름, 누룩과 섞이는 과정에 물리적 힘과 온도가 가해져 점성이 생기면서 생성된 음식이지요. 빵은 원래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빵을 쪼개는 과정 안에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영양소나 가치로 보면 손색이 없는 원래 빵의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 이방 여인의 답변이 얼마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지요! 그녀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먹이시는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셨던 옛 계약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인류를 구하시기 위한 구원 역사의 시작이라는 걸 그녀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피어나는 이스라엘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환호하고 환성 올리는 이스라엘의 모습 안에는 그들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의 기쁨 또한 서려 있습니다.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예레 31,6)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주님께 버림 받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주님의 산으로 부름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나아가겠지요. 기대과 설렘 가득한 이 환성이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거쳐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번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의 몸인 생명의 빵은 그분을 바라는 모든 이에게 끝없이 쪼개어져 나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식탁에 앉은 자녀여도 좋고 식탁 아래의 강아지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주님을, 주님 사랑을, 주님 말씀을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온전한 빵이어도 좋고, 부스러기여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그 이방 여인처럼 믿음에서 우러난 자존감을 간직한다면 공연히 말 마디와 어감에 발이 묶여 주님 사랑의 본류를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이 말씀 안에 녹아들어가 주님의 기쁨과 여러분의 기쁨이 만나는 관상에 잠겨보면 좋겠습니다. 기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 안에서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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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순종하고 겸비하여 복을 얻는 삶
<2024.8.7>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7:1~48:10절)
❝순종하고 겸비하여 복을 얻는 삶❞
❚ 하나님은 믿는 자가 겸비하여 순종하면 계속해서 복되게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 무엇을 얻기를 기대해야 할까요?
➲ 주님만을 신뢰할 때 영원한 기쁨을 얻습니다(47:1~7절).
애굽의 군대가 가사 성을 치기 전에 블레셋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선포됩니다(1절). 바벨론은 물결치는 시내가 되어 블레셋의 땅과 백성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그 기세가 맹렬하여 블레셋은 완전히 진멸되며 그들의 보금자리는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울부짖음 일 것입니다(2절). 바벨론 군대의 기세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애까지도 중단시킬 정도로 위협적입니다(3절).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환난이 임하게 될 것이고, 블레셋이 망할 때 그들을 돕던 두로와 시돈도 동반 추락할 것입니다(4절). 또한 블레셋의 주요 도시들을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합니다. ‘갑돌’에서는 생존자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가사는 대머리가 될 것입니다. ‘대머리가 된다’라는 것은 파멸과 죽음으로 인한 슬픔의 표현입니다. 아스글론 사람은 잠잠해 질 것이며, 자기 몸을 자해할 정도로 극단적인 슬픔과 애통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5절). 갈대아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칼이 되어 블레셋을 칠 때, 선지자는 안타까워하며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꽂히기를 희망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것이 성취될 때까지 바벨론 군대의 약탈과 살육이 멈추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6~7절).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시지만(시 86:5;103:8), 끝까지 회개치 않고 주를 대적하는 죄인에게는 맹렬한 노를 쏟으시며 크고 두려운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그것을 피할 자가 없음은 물론이며 그 심판의 위엄과 맹렬함 앞에 직접적인 심판의 대상이 아닌 자라 할지라도 그 두려움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회복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어 보존할 것인지, 깨트릴 것인지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혼자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거두시고 진노의 칼을 뽑아들지 않도록 항상 겸비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주님만을 찬송할 때 영원한 안식을 얻습니다(48:1~6절).
모압 족속에 관한 예언이 선포됩니다.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1절).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황폐화시키심으로 그들의 모든 불의함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모압의 찬송 소리가 없어졌도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들로써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친족 민족입니다. 성경에서 롯은 의로운 자라고 말합니다(벧후 2:7). 그러나 롯의 후예들은 상당한 번영을 누렸지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모압의 모든 영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압을 멸절시키는 칼날은 맛멘에서 멈추지 않고 호로나임과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울고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서 파멸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으로 드러낼 것입니다. 칼날을 피해 도망하는 자들의 비통한 부르짖음이 모든 지역에서 울려 퍼지게 되는 처참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3~5절). 급하게 도망하여 구한 목숨이 ‘광야의 노간주나무’같이 될 것입니다(6절). 즉, 마치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말라 비뚤어진 광야의 나무처럼 모압 사람들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사라질 때, 영혼이 메말라 갑니다. 복을 누리며 나눌 수 있는 환경이면서도 하나님을 떠나 감사치 않고, 찬송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영광에 빠져 교만과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찬송 받으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찬송을 내가 가로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현실로 드러나는 날을 기대하며, 영광스러운 복이 눈 앞에 있음을 기억할 때,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쓰러질 때도 있겠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영광을 얻고 존귀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주님만을 의뢰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7~10절).
모압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 ‘...네 사업과 네 재산을 의지...’했기 때문이고, ‘그모스 신’ 즉, 우상숭배에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7절,쉬운성경). 결국 멸망시키는 자가 성마다 쳐들어올 때, 어떤 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고, 골짜기는 폐허가 되고 평야는 황무지가 될 것(8절,쉬운성경)입니다. 또한 모압이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 않는 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데, 망하고 파멸하는 것만이 모압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9절). 하나님은 명백한 심판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바벨론 군대가 그들 자신의 막강한 힘으로 심판을 수행하지 않을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것(10절)임을 선포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에 이끌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들로 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삶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 속에 교만함과 탐욕이 우상이 되어 자리하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풍요와 즐거움이 오히려 우리 자신들을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고 참 생명과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의뢰하고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환난 중에도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참 생명과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47:1~48: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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