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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
막 5:1-5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막 5:1-5 / [귀신과 돼지 떼 ; 마 8:28-34, 눅 8:26-39] 예수와 그 일행이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2) 방금 무덤 사이에서 내려온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3) 이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는데, 누구도 그를 매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도 보았으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끊어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5) 그는 밤이나 낮이나 무덤과 산기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뾰족한 돌로 자기 몸을 짓찧어 상처를 내곤 하였다.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예수님의 비유적 교훈에 이어 예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광인과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를 찾아가다(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막 4:35)고 하여 건너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지만 그 풍랑을 잠잠하게 했습니다(막 4:39). 예수님은 가시는 길에 장애물이 있었을지라도 본래 목적하신 곳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곳이 거라사였습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8장 28절에는 그곳을 가다라 지방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거라사는 가다라 지방의 여러 마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표기하였고, 마가는 예수님이 방문한 지명으로 표기하였기에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를 향하여 가실 때 풍랑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목적한 곳으로 가셔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다(2-5)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에 내렸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무덤은 우리나라의 봉분으로 된 무덤과는 다르게 자연동굴이나 인공동굴을 만들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그 무덤은 부정하다고 여겼기에 일반 사람들은 접근을 피했지만 더러운 귀신 들린 자는 오히려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그저 귀신만 들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도 그를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놓았어도 여러 번 그것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또한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포악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고후 11:3), 멸망으로 인도합니다(마 25:41). 또한 마귀는 자기에게 포로된 자들에게 언제나 잔인한 주인 노릇을 하고 폭군으로 군림하여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요 10:10). 그런데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는 그 지역 주민들도 어찌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던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적용: 거센 풍랑에도 불구하고 거라사 동네의 무덤 사이에 거주하며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당신이 찾아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신병인가, 귀신들림인가?” 누구나 어려워하는 난제이지만, 성경은 이를 명확하게 통찰합니다. 하나님은 정신병이든 귀신이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귀신이든 정신병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첫 번째 단추입니다. 하나님께서 묶으시면 풀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의학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병원이냐 축사냐와 같은 저차원적 이분법이 아닙니다. 그분 손이 열릴 때 병원이든 목사든 동원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매듭을 풀어야 할 곳은 오직 하나님의 손입니다.
< 설 교 >
거라사 광인과 인간의 속성
막 5:1-20 / 박인걸 목사
본문은 배경이 거라사입니다. 이곳에 한 광인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았습니다.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을 끊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 곁에 가지도 못합니다. 밤과 낮으로 산과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특히 돌로 자신의 몸을 자해합니다. 그런 자가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시자 달려와서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7)며 떠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정체를 묻자 그는 “큰 군대”(9)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내쫓지 말고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쫓자 돼지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의 5성과 영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악성입니다.(막5:2)
악성은 악령에서 옵니다. 악령이 들어오면 악성이 형성 됩니다. 악성이 형성되면 악해집니다. 본문에 악성이 형성된 자는 첫째,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2)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입니다. 영적 생명이 죽어 있습니다. 사람이 집에 살아야 하는데 집을 나와서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검찰총장 채 모씨가 혼외 아들 문제로 옷을 벗었습니다.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항변했지만 아무런 증거를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비정상적인 생활을 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 가족을 불행하게 하고, 결국 우리 사회를 아주 시끄럽게 하였습니다. 악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힘이 아주 셉니다.(4) 고랑과 쇠사슬을 끊을 정도입니다. 악령이 들어와서 악성이 형성되면 그 사람은 보통 이상의 힘을 냅니다.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비정상적인 힘을 동원하여 사람을 해칩니다. 가정을 해치고, 남의 회사를 무너트리고, 부부사이를 허물고, 교회를 무너트리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합니다. 셋째, 소리를 질렀습니다.(5) 시끄럽습니다. 악성이 형성 된 사람은 가정을 시끄럽게 하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사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남을 욕하고 악담을 퍼붓고, 정죄하고, 대적합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아도 모른 채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악성이 형성 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넷째, 자신의 몸을 자해하였습니다.(5) 악성이 형성 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합니다. 과도한 술, 담배, 색, 마약과 같은 것들을 좋아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것들을 탐독하거나 중독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러운 것들에 취하여 살다가 망합니다. 우리나라에 캐캐 묵은 이념 논쟁으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소위 종북 주의자들입니다. 1980년에 이미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이념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북한을 추종하는 이념 노예들이 우리나라에 많습니다. 20만 명이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악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성이 형성 되면 사람이 악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며, 그를 믿는 우리는 선해야 합니다. 사탄은 악한 영이며, 악한영이 형성 된 사람은 생각이 악합니다. 언어가 악합니다. 표정이 악합니다. 행동이 악합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악성이 형성 되는 일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는 가정, 가족, 사회, 모두로부터 격리되었고, 두려운 자로 사람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자를 우리 주님이 치유하여 주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런 자도 고침을 받습니다. 악한 영이 그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악한 영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더러운 돼지 떼에 들어갔습니다. 악령은 더러운 곳을 차아 다닙니다. 아미 이 귀신들렸던 사람은 그 마음이 더러웠기 때문에 귀신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 더럽고 악한 영에 의하여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오늘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2) 본성입니다.(막5:2)
“귀신들린 한 사람을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2) 여기 사람(안드로포스)입니다. 이 사람은 “귀신들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들리기 전에는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성은 죄인을 칭합니다. 원인간은 죄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원 인간들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이시기의 인간은 생령의 상태였습니다.“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영생할 수 있는 조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생령의 상태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인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0-15)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 죄가 있습니다. 죄의 유전자가 우리 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롬3:23)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원죄는 마치 DNA와 같아서 교체나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의학이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교양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원죄의 DNA에서 거짓, 살인, 저주, 음행, 악독, 이단, 시기, 질투, 악한 생각, 더러운 욕설, 대적, 미움, 전쟁, 폭력, 우상숭배, 주술과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수원에서 샘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본성이 착하다는 말은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착한 사람도 있고, 거친 사람도 있고, 사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거기입니다. 손해보이고, 누가 자신을 욕하고, 피해 입히고, 죽이려 하면 본성이 나타납니다. 자신을 방어하려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 합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무리 착해도 짐승은 짐승이더라고요. 호랑이나 사자를 어릴 때부터 사육사가 키워서 어미처럼 따르지만 그의 본성은 짐승입니다. 사납고 잔인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 성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접붙임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참 감람나무인 예수께 접붙임을 할 때 바꿀 수 있습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11:13-24) 그래서 구원은 돈으로도, 벼슬로도, 힘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3) 인성(품성)입니다.(막5:19)
이 사람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으로서 품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성의 다른 말은 그 사람의 품성을 말합니다. 사람은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품성 즉 인성에서 나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인성테스트를 합니다. 성격(character)의 특질, 기질(temperament) 등의 측정(assessment)을 위해 여러 가지 연구방법이 시도되고 있으나 질문지법, 작업법, 투영법이 그 주된 것입니다. 인성검사는 인격(personality)의 구조나 유형에 주안을 둔 독일 성격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나 최근에는 역동적인 퍼스낼리티를 전체로 파악하려는 입장에서 인격검사로 불리는 일입니다. 삼성은 SSAT(싸트)를 봅니다. 2013년에 이 시험에 응시자가 200.000명이라고 합니다. 싸트 학원이 성업 중이며, 삼성에 입사하게 위하여 6개월에 1년 넘게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수없이 많으며 싸트와 관련 된 문제지만도 20가지 이상의 책으로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기업들은 사람의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지능, 기술, 학벌, 지혜, 모두 중요하지만 조직 생활에서는 인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업마다 인서테스트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타고나는 품성이 있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품성이 있습니다. 대체로 부모가 품성이 착하면 자녀들도 품성이 착합니다. 오이 밭에서 오이나, 수박 밭에서 수박이 납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착하고 순진하던 사람도 나쁜 친구가 곁에 있으면 망가집니다.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품성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합니다.
일반 사회적으로 5품성을 말합니다. 칭찬, 질서, 공경, 봉사, 애국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품성은 주님의 성품을 기준합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과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겨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7-29) 예수님의 품성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도 온유하고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일컬어“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품성이 선천적으로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변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품성이 불같고 사나웠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에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는 아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는 사람들입니다. 사납던 사람이 온유해져야 합니다. 악하던 성품이 선한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교활하던 품성이 진실함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난다고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져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은 가르치는 대로 됩니다. 그렇다고 기능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은 아닙니다.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 것이 참된 교육입니다. “아들만 둘 있으면 부모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아들 하나만 있으면 부모는 골방에서, 죽고 딸 하나만 있으면 설거지를 하다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참다운 자녀 교육의 부재현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마귀가 가르치기 전에 네가 먼저 자녀를 가르치라.”는 캐서린 부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품성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인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4) 사회성입니다.(3,15)
귀신들린 사람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했고, 그를 주님이 고치자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거라사 광인의 사건은 그 개인의 문제요. 그 가정의 문제이면서 그 사회적인 문제였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마을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밤에 그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 떨었고, 혹시 자신들이 집에 쳐들어올지 몰라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사람에게 잡히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거라사 지역에 밤이면 통금령이 내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사람으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큰 어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우린 인간은 사회성이 좋아야 합니다. 사회성이 발달한 사람이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유치원부터 사회성을 발달시켜 줍니다. 그곳에 가서 글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지만, 친구들과 사이좋게 노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사회성입니다.
텔레비전 프로에서“우리 아니가 달라졌어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서 자기밖에 모르고, 떼 쓰고, 던지고, 부수고, 혼자 장남감인나 물건을 갖겠다고 하고, 부모를 때리고, 침을 뱉고, 울고, 머리를 벽에 쳐 박고, ...그런 아이를 응대하며 애 먹는 엄마들을 보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 가서도 그러더군요. 학습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밥도 혼자 먹고, 던지도, 때리고, 욕심 부리고, 별별 짖을 다 합니다. 그런데 전문가 오은영 박사가 개입하면 다 고칩니다. 난 오은영 박사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케이스라도 그분이 개입하면 고칩니다. 그분은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된 심리를 꿰뚫기 때문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어른이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하여 그 사람이 개입하는 사회는 무도 망가지거나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이 교회에서 달라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잘 삐지는 어른, 토라지는 어른, 성질부리는 어른, 속이는 어른, 거짓말 하는 어른, 교화한 어른, 간사한 어른, 별별 어른들이 다 있습니다. 어린 애들은 원색으로 행동하지만 어른들은 지능적으로 말썽을 부립니다. 드러나지 않게, 탄로 나지 않게, 은밀하게, 뒤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주 비신사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설 때는 스스로 불게 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수수 중앙교회 교인들은 비겁한 사회인들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가장 신사적인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이 비사회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반 사회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지역에 미친 부정적 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악령이 들어가면 그런 사람이 됩니다. 반사회적인 사람이 됩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있는 종북 세력 20만 명은 반사회적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 악한 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악한영이 들어오면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해롭게 합니다. 마귀는 사회성을 허물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들어오면 자신의 가정을 이롭게 하지 않고 망가트립니다.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부모를 배척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빠져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터졌다 하면 대게는 내연녀와의 관계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병든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악한 세력을 물리칠 때 이 우리 안에 바른 사회성이 형성 될 수 있습니다.
(5) 영성입니다.(막5:18)
“함께 있기를 간구하매” 7절에서 예수님을 향하여“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하였고, 15절에 보면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졌다.”고 하였습니다. 18절에 보면 이제는 주님 앞에 와서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주님이 그 안에 있는 악한 영을 쫓아내자 그 안에는 영성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악성, 본성, 인성, 사회성 모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들어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 그가 주님께서 귀신을 내 쫓아 준 후 제 정신이 되었고, 영성이 형성되어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영성이 형성되자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을 거부하던 자가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멀리 하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하여 진 그의 모습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집에서 나와 미쳐 생활하던 사람이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 신앙생활, 가정생활, 인간관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영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며 믿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믿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과 교제가 불가능한데 이제는 주님과 교제가 가능해 졌습니다. ③ 동역자가 될 수 없는데 이제는 주님의 동역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영이 같아야 동행이 되고 동행이 되어야 동역이 이뤄집니다. 즉 영적 코드가 같아야 됩니다. ④ 열성은 있는데 영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처리하면 문제가 해결 되고, 내가 해결하면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죽입니다. ⑤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영성이 회복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일을 가로막습니다. 시몬은 돈을 드려 성령의 능력을 사려 했습니다.(행8:18)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자였습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의 흉내를 내다 귀신들린 자에 쫓겨 도망을 쳤습니다.(행19:14)
영성의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잘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성이 온전하게 형성 된 사람입니다. 둘째 영적 채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8절에 보면“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히 채워졌습니다. 사도행전9장17절에 보면“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채워질 때 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능하게 하십니다. 셋재,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 19장 5-6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아 영적 사람이 되면, 능한 자가 되고,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통로가 되고, 주님의 능력과 권위가 나타납니다.
인간에게는 5성이 작용합니다. 악성이 형성되면 불행해 집니다. 악성은 사단이 지배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사단이 그를 장악하여 악성이 형성 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을 나가고,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자신을 스스로 해치며,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악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본성과 품성과 사회성 모두 중요합니다. 이것 역시 죄와 사탄에 의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한 세력을 내쫓아야 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고통스럽게 하던 귀신을 쫓아내므로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고, 영성이 제대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입니다. 영성은 성령에 의하여 형성 되며, 영성이 제대로 형성 될 때 악성은 사라지고 본성, 인성, 사회성 모두다 해결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 영성이 회복 되었던 광인과 같이 주님을 만나 은혜가 회복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악령
김태복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세상은 때때로 우리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집안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계속해서 그런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집터가 나빠서 그렇다.” 혹은 “묘지를 잘 못써서 그렇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자살하여 죽은 집은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분은 뜻밖에 횡사한 사람의 장례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중에 직사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가슴이 퍼렇게 멍들어 살을 맞았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으로 우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에는 마귀란 악한 영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기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했습니다. 여기 ‘공중’이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문자 상으로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더 깊이 연구해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조직의 사상 형태나 세상의 환경을 의미합니다.
즉, 공중의 권세자라는 말은 세상 조직의 생각을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 풍속과 향락 등 모든 것을, 사실상 마귀와 그 졸개 귀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악한 영들이 끝없이 인간들을 위협하고 고통 가운데 몰아넣어서 자기를 섬기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의 사슬로 결국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동시에 성경은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믿고 의지할 때에 악한 영을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악한 영인 마귀는 무엇이고 성령님을 어떠한 분이십니까?
1. 먼저 마귀의 본체는 무엇이고 무슨 악한 일을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은 귀신들린 사람과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주께로 돌아와 주님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의 사람됨이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악령의 특성을 네 가지로 살펴봅시다.
(1)악령은 인간들로 하여금 더러운 삶을 살게 만듭니다.
2절과 8절에 ‘더러운 귀신’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더럽다’는 단어는 단순히 위생이나 청결상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수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이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하는 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기사는, 이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혔을 때 ‘옷을 벗고 다녔다’고 언급합니다.
악령은 인간이 가장 부끄러운 모습까지 노출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보십시오. 너무나 더럽습니다. 어느 때는 벌거벗고 다니면서 온갖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동시에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그들의 삶은 온갖 더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거짓말과 사기, 음란과 살인을 저지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2)악령은 사람을 끊임없이 방황하게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집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악령의 사역을 연구해 보면, 악령은 언제나 자리를 이탈하게 하는 영(靈)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래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거절하고 사4:14에 보면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고 했을 때 마귀로 변했습니다.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들입니다. 마귀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언제나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 악령들은 언제나 복수로 표현됩니다. 한국의 어떤 목사님은 믿지 않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한국의 기복 사상이나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은 귀 신론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주장입니다. 성경에서는 불신자와 귀신의 정체를 일치시킨 사례가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천사들과 귀신들의 존재를 함께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를 이탈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악령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악령의 포로가 된 거라사인은 그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책임의 자리를 버리고 정처 없이 방황했습니다. 인간들은 때로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정처 없이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납니다. 가출도 하고 노숙자도 됩니다. 어느 때는 어느 교회 소속 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고 싶고, 더 나가서는 하나님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여, 그러한 마음을 주는 것은, 그 배후에는 언제나 악령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심각할 정도로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신자들도 악령의 공격 대상이 됨으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고 상당한 괴롭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깨어서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악령은 사람을 파괴합니다.
본문 5절은 보십시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악령이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악령은 자신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파괴합니다. 악령은 처음부터 누군가를 파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처럼 악령은 뛰어난 거짓말쟁이임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악령은 깡패와 같습니다. 자기를 섬기기만 하면 특별히 보호해주겠다고 거짓말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바치면 당분간은 보호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말을 안 들으면 말할 수 없이 괴롭힙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뺏어갈 때까지 그런 파괴적인 일을 계속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침내 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령은 거짓말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 거짓말하게 하고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부정직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악령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령은 거짓말이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 못지않은 큰 영광을 약속합니다. 심지어는 금식하고 계셨던 예수님에게도 와서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고 장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에게 와서 “만약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할 때 하와는 그 거짓말에 속아서 그 말에 순종함으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악령의 포로가 되면 악령이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악령의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삼상 16:14에 보면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 왕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위 다윗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고, 다윗을 잡으려고 전국 각지로 혈안이 되어 찾았습니다. 결국 자기를 파괴하고 학대하다가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배후에도 악령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악령은 깃들 곳을 찾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시자 군대 귀은 벌벌 떨면서 “우리를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주변에 있던 돼지 이 천 마리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도 깃들 곳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항상 정신을 차리어야 합니다. 공연히 한참 무당이 굿을 하는 곳에 멍하니 넋을 잃고 보다가 잘못하면 무당에게 쫓긴 귀신들이 여러분 심령 속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또한 재미삼아 점집에 가서 사주나 관상을 보지 마십시오. 귀신들이 그런 틈을 이용해서 여러분 속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정초 때 시골집에 다니러 갔다가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장난삼아 점을 처 보았는데 “당신은 50세부터 길이 열린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 기도도 안 되고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 되고 자꾸 불안하고 초조해지기만 하더랍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입니다. 인간을 부끄럽게 하는 영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방황하게 하는 영이고 인간을 파괴하는 영입니다. 예수께서 악령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악령은 “군대”라고 했습니다. 원문에서는 ‘레기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본래 삼천 명, 내지 육천 명으로 편성되어 있는 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악령은 숫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별별 귀신이 다 있습니다.
육천 명 쯤 되는 악령이 한 사람 속으로 들어가 역사했으니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태가 되어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에게 귀신의 수가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가에 따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금도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고 수많은 귀신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줄 아시고 깨어 기도하고 근신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러면 성령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귀신들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거라사인이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거라사인에게서 악령이 나가고 성령이 거하게 되었을 때에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변화된 이 사람의 모습에서 성령의 특성 네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성령은 사람을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혼미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떠나자마자 이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졌습니다. 악령이 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더럽혔으나 주께서 역사하시어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2)성령은 사람을 안정시킵니다.
성령은 방황을 중단시키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모습을 보십시오. 전에는 무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그를 변화시켜 비로소 자기의 삶의 자리를 찾게 했습니다. 은혜를 바로 받은 사람은 자기 책임을 다하려고 힘씁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여기저기 떠다니는 사람은 온전한 크리스챤이 못됩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가정도, 직장도 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3)성령은 사람을 세워 갑니다.
자기를 파괴하던 사람이 이제 자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만났을 때 진정한 의미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온전한 인격 회복은 주님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4)성령은 사람을 참된 삶을 살게 합니다.
1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온전하게 된 이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그는 단순히 어떤 종교 지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을 열망합니다.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방황하는 발걸음을 중단시키고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성실히 살도록 힘을 공급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회복시키고 진정한 삶을 건설하게 합니다. 거라사인은 주님과 함께 있는 삶을 열망합니다. 악령에 사로잡혔을 때와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더 이상 악령이 그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 받습니까?
오순절날 제자들이 성령 충만 받은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행1:4-5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120문도는 그 약속을 붙잡고 성령 충만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 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았던 것입니다.
(2)철저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자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의 날들을 돌아보면서 저들은 말할 수 없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온갖 귀한 말씀을 들었고 가지가지 기적을 체험하면서 은혜를 받았으면서 예수님이 같이 기도하자, 같이 고난에 동참하자고 하실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다 의심자요, 비겁자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면서 너나없이 회개할 때에 성령 충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강하게 회개한 사람이 베드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음에도 결국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부끄러워 가슴을 치면서 회개할 때에 가장 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행2:38에서 설교하면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여,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3)다른 보혜사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실 때 성령 충만 받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눈에 보이는 예수님만 의지했습니다. 즉 겉으로만 예수님을 모시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저들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보혜사로 보내시는 성령을 갈급하게 사모하면서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그들 마음에 충만히 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히 거하도록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서적을 저술한 홀 린드세이는 수년 동안 열심히 믿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했으나 아무 뜨거움이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너무나 안타까워서 기도하는 중에 그의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내게 모두를 맡기겠느냐? 너의 생명도, 너의 계획도 다 맡기겠느냐?” 그 순간 “오, 주여, 이 몸을 주의 것으로 쓰소서. 이 생명도 바치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그 때에 얼마나 뜨거워지는지요. 그는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이 마지막 때에 마귀와 악한 귀신들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갖은 술책을 다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 받지 않고는 이 악령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받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마귀와 그 졸개 귀신들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기 전에는 제자들은 어떠한 귀신들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후에는 가는 곳마다 악령들이 도망쳤습니다.
행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이 성령 충만하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눅10:19-20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밝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악령들에게 눌려 지낸다면 얼마나 한심한 그리스도인들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여, 성령 충만 받으십시오. 그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향해 강하게 떠날 것을 명하십시오. 그러면 혼비백산 도망칩니다. 더 나가서는 성령 충만 받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도 온전해 질 뿐 아니라 승리와 성공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유명한 능력의 종인 해긴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잘 아는 사업가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그 사업가는 텍사스주 달라스시에서 자랐는데 그의 어린 시절에 집안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14세가 될 때까지 신발을 신어보지 못했고 학교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에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학교 공부는 많이 못했어도 하나님 말씀은 열심히 공부했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성령의 인도로 사업이 잘 되어서 1930년에는 백만장자가 되고 1940년에 이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백만장자라면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서 한 번도 손해 본 적이 없었고 새로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여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되었습니까?”고 그 방법을 묻자 그는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방 옆에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중대한 투자를 할 때마다 그 기도실에 들어가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내적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예감이나 직감이나 확신이나 평안과 소원을 통해 말씀해 주시면 나는 그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내게 새로운 투자를 시도하라고 건의하면 나는 그 안건을 가지고 기도실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것, 인간의 경험을 젖혀 놓고 ‘하나님이여 인도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여 직감이나 예감이 좋지 않거나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확신이 없으면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투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반면, 인간의 생각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일이지만 기도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결과 잘 될 것 같은 예감이나 직감이 오고 마음에 확신이 오며 평안하고 소원이 뜨겁게 일어나면 주위의 사람이 극구반대해도 투자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기도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 우리가 영육 간에 승리적인 삶을 사는 방법은 성령 충만 받는 것이니,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마한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되 철저한 회개와 불타는 갈망으로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 해결됩니다
막 5:1-20 / 이일기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 비틀거리는 시대, 광란의 시대, 질주의 시대라고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무질서가 부각되는 시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말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엿 볼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 걸맞은 사람이 오늘의 말씀 가운데 등장을 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거라사의 광인으로서 다른 말로는 군대 귀신 들린 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광인(狂人)에 관한 이야기가 광인 자신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좀 더 넓게 적용하여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기를 대단히 꺼려하는 갈릴리 바다의 동쪽 이방인 지역 거라사 지방에 가서 행하신 일을 중심으로 오늘의 말씀을 전개하려 합니다.
1. 거라사 지방이 어떠한 곳입니까?
이 곳 거라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세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므낫세 반(半) 지파가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었던 곳입니다.
그때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 거라사 지방에 그 후손들이 계속 살고 있었는지, 혹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만 다만 이 곳이 이스라엘의 변방(邊方) 지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곳 거라사 지방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사해의 중간에 있는 도시로서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이며 그리고 물이 잘 흐르는 계곡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업도 아주 발달하였는데 특히 옥수수 재배는 인근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곳으로서 시리아, 알렉산더 왕,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넘보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품페이(Pompey. 106~48 B. C. 로마의 장군)는 데카폴리스(Decapolis) 라는 십 대 도시를 선정했는데 이 거라사 지방이 그 중에 하나로 들어갈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 데카폴리스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시리아인들로 징집된 로마 군대와 그 퇴역 군인들을 위해 로마가 건설한 열 개의 신도시로서 로마의 점령군 주둔지요 보급기지에 해당합니다. 주후 1세기 경 로마가 도시계획 속에서 재건축을 할 때 거라사 지방 도시 가운데로 포장 된 도로를 내고 대장간과 제우스 신전을 두었으며, 대 극장이 두 개, 그리고 도시 외곽에는 성으로 둘러쌓았습니다.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아주 비옥한 이 땅은 인구나 문화시설 산업 발달 면에서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기에 거대한 도시로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주로 갈릴리와 예루살렘 두 지역을 다니시면서 전도하셨는데 즉 요단강 서편 중심으로 사역을 하신 셈이지요. 그리고 동편은 거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방 땅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방 땅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01절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 지방을 피하고 평소에 가지 않으셨든 거라사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0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갈릴리 바다 건너 동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 이 곳은 어떤 곳입니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상종 할 필요도 없는 이방인들의 지역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거라사는 소위 데카폴리스 도시였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고 신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그래서 갈릴리 바다 동쪽을 건너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동편 갈릴리 바다의 인접 지역 이 곳은 더욱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지방이었는데 그 이유는 거라사로 표기 된 이 지역은 거라사 성읍에 속한 “가다라(마 08:28)” 라는 지방으로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는 돼지를 집단으로 사육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0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마 0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여기서 귀신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부정한 영”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악령의 지배 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더러운 귀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위생이나 청결 상태만을 의미하기보다 수치를 드러낸다는 의미로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하는 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더러운’이란 말은 더러운 인격의 소유자라는 말이며 또 귀신들린 경우 거의가 더럽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마 10:01, 12:31; 막 01:26, 03:11; 눅 04:33,36).
한편 눅 08:27절과 본문에서는 악령 들린 사람이 한 사람 단수로 나오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 복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마 08:28).
아마도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기록을 상세하게 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 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입니다(Calvin).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초인적인 힘으로 인해 계속 요란하게 소동을 피우자 그 지역 사람들은 그의 손과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온 몸을 쇠사슬로 결박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기운이 지나치게 세어 쇠사슬을 풀고 계속 난폭한 행동을 하자 그 미친 사람을 이번에는 아예 동네 밖 공동묘지에 격리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이 광인은 더욱 설쳐되어 이제는 아무도 그 사람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더욱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난동을 부리는데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3. 거라사의 광인의 처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사람이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파괴된 삶을 사는 무질서한 사람입니다.
그의 거처(居處)가 무덤이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모습입니까? 정상인이야 무덤 사이를 도무지 주거지로 삼아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0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0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 할 힘이 없는지라.
마 08:28절에 의하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고 했는데 그만큼 무서운 힘을 가졌습니다. 사슬로도 그를 묶어둘 수가 없고 사람의 힘으로는 그를 더욱 제어할 수가 없었으니 귀신들린 사람이 가진 그 초인적인 힘은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이미 정상적인 언어를 상실했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니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의 모습과 조화의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상만 하여도 삭막하고 고독하며 피곤한 인생 아닙니까? 귀신들린 인생이니 체념과 좌절의 인생이요 의욕이나 결단도 없고 도전심도 꿈도 야망도 없는 정말 버려진 인생입니다.
무기력, 무책임, 무관심, 무감동 등 4무의 인생에다 질서도 없이 행동하고 있으니 그 누구 한 사람도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고 기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0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이상한 소리를 늘 지른다고 했으니 정상적인 언어와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자학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프고 괴롭겠지만 귀신이 시키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죠. 그저 연민의 정만 느껴질 따름일 뿐 이미 자율적인 인생의 가치와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진지도 오래입니다. 제 마음대로 질서도 없이 뛰어 다니고 또 이상한 소리를 막 지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고 있으니 이것이 비극이요 불행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② 알고 보니 이 사람은 군대 귀신이 들린 자입니다.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먼저 귀신들린 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자리잡은 악령을 나오라고 명하시자 그 악령은 나가기를 완강하게 거절하므로 이에 예수님은 악령에게 물으셨습니다.
0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 이니이다 하고.
군대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Legion 이라는 단어로서 본래 3천~6천명으로 편성되어 있는 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천 쯤이나 되는 악령이 두 사람을 포로로 하여 다스리고 있으니 이 사람이 이런 심각하고 극단에 다다른 상태에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또 파괴하는 것입니다.
눅 08: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거기에다 오래 전부터 옷조차 벗고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에 민망합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을 보면 거라사의 광인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마약, 본드 흡입, 환각제, 술, 담배 등으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이들이 많고 이상한 소리들을 지르면서 흥에 겨워 옷들을 벗어 던지는 일들이 눈에 많이 뜁니다.
오렌지족, 신세대, X세대, N세대 등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광란과 절규의 소리, 탄식의 소리, 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출되고 있음은 거라사의 광인이 우리 곁에 출현하여 설친다는 신호가 아닙니까?
마 0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요즘은 아파트 주민들조차 편히 지낼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세상이고 행인들도 마음놓고 길거리에 나 다니기가 무섭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라사의 광인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또 가족끼리 야외에 나가서 휴식을 취하기도 더욱 부담이 되고 보면 거라사의 광인을 조심해야 합니다.
4. 거라사의 광인이 고침 받는 길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살펴보아야 할 일들은 비극적인 상황을 살고 있는 이 거라사 광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거라사의 광인에게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이 전인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돌아 올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거라사의 광인과도 같은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보려고 수없이 노력을 하고 감옥을 짓고 물리적인 힘으로 대응을 하여도 별반 효과가 없고 오히려 군대 귀신처럼 증가만 되어 갈 뿐입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지도와 청소년 윤리, 교육 등으로는 광인의 요소를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만 합니까? 불행한 자가 행복을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불행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해 주실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그때는 행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덤과 같은 곳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 힘들고 고독한 인생입니까? 무덤은 절망과 좌절과 죽음의 장소이며 희망도 가치관도 성공도 없고 삶의 의미도 목적도 상실한 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상상만 해도 이 얼마나 피곤한 인생이며, 삭막한 인생이며, 고독한 인생이란 말입니까?
렘 17:05절을 보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을 비유하기를 사막의 떨기나무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혹 사막의 떨기나무와도 같지 않습니까?
만일 내 심령이 메말라 공허할 때 근심 걱정을 들어주시고 은혜로 채우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가정이나 사업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할 때 먼저 나의 사정을 밝히 아시는 주님을 찾아서 의논하십시오.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어떤 일이든 문제가 풀리며 능히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성 우물가의 여인이 물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변화가 일어났으며(요 4:01~24),
사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바울 되어지는 변화가(행 09:01~22)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제는 벗었던 자가 입게 되고, 사나운 자가 정신을 찾으며, 마귀에게 얽매었던 자가 해방되어질 수 있습니다.
군대 귀신 들렸던 이 사람도 한 때는 소망 없는 길에서 방황하며 폐인의 길로 행했었지만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진정한 행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복음성가
❶ 많은 사람들 참 된 진리를 모른 체 주님 곁을 떠나가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참 사랑이었고 진리였고 소망이었소. <후렴>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❷ 무거운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 길만이 생명의 길 참 복된 길이라 항상 내게 들려 주셨소.
❸ 그대가 만일 참 된 행복을 찾거든 예수님을 만나 보세요. 그 분으로 인하여 참 평안을 얻으면 나와 같이 고백할 거요.
0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0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광인의 속에 들어 있는 사단이 하는 말인데 예수님은 이 사단에 대해 더 이상 여러 말을 하지 않고 08....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미혹에 빠져 사단의 종이 되어버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5. 거라사의 광인이 예수님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합니까?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처럼 오해하지만 실상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허락했을 뿐이지요. 마가가 명령했다는 단어를 쓰지 않고 허락했다는 단어를 쓴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즉 허락했다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한 가지 이유는 돼지 몰살의 책임이 주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②다음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귀신들은 주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돼지들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권세를 가진 분인가를 강조하기 위함으로서 마가는 귀신들에 대한 왕 되신 예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마가는 예수님이 귀신들뿐만 아니라 돼지들을 치는 사람들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돼지가 몰살하는 그런 일로 인해 예수님께로 나아왔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런 일이 아니면 예수님께로 나오지도 않았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돈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지만 돼지 치는 사람들은 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서 이 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이 돌아와서 예수님 앞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을 그 지역을 떠나도록 요청합니다. 왜 떠나도록 요청했습니까? 자기들에게 더 큰 재산상의 손실이 발생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한 사람이 귀신이 들려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다가 제 정신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이 그저 자신들에게 발생 된 물질의 손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를 모르니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제대로 나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오직 돈과 물질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니 예수님께서는 재산상의 손실을 발생케 해서라도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했고 나아가 귀신들린 사람이 회복 된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귀신이 사람들과 짐승들을 얼마나 해롭게 하는 존재인지를 알리시면서 결국에는 사람들을 황폐하게 하고 가축들을 몰살시키는 더러운 귀신들을 제압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것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돼지가 몰살되었다고 해서 귀신까지 다 몰살되지는 않았겠지만 돼지가 몰살하는 장면을 통해 귀신이 파멸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한 영혼의 가치를 어찌 돼지 2천 마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한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한 영혼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장면을 통하여 천하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임을 다시금 알게 하시며(마 16:26; 눅 09:25) 그리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버려야 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네에서 버림받은 한 미친 사람 그것도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의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서 2천여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악령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은 군대 귀신이 들어가려면 대략 2천여 마리의 돼지 떼가 희생될 것이라는 점을 아셨지만 허락을 하셨습니다.
거라사에 살던 한 광인의 영혼이 돼지 떼의 물질적 가치보다 더 귀하고 한 생명을 구원하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지기 위해서는 그 많은 돼지(물질)라도 희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돼지 한 마리(약 110Kg) 당 얼마씩 보면 되겠습니까? 요즘 가격을 보면 산지값이 30만 원씩 계산해서 2천 마리이니 6억 원이라는 거액이 산출되는데 그럼에도 예수님은 한 영혼의 가치가 그보다 훨씬 더 존엄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한 생명의 가치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 귀중한 생명을 물질로 희생해 가면서 바꿀 용기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물질의 희생도 각오하여야 하며 그러한 결과는 마침내 한 생명을 새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동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주목해서 보겠습니다.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우리들 같으면 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분을 면장(面長)으로 모시고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고자 추대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마을에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위대하신 권능으로 인해 귀신이 쫓겨났을 때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2천여 마리가 바다에서 몰사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마을에 계속 있다가는 돼지가 남아나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돼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람을 새롭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주님을 거절했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아주 사소한 유익 때문에 주님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를 차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누릴 기회를 물질 때문에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오늘날 우리도 자행하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 고쳐 봅시다. 우리의 삶은 이제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내 집, 내 마을, 내 땅, 내 조국에 살면서 돼지의 마을을 인간의 마을로 군대 귀신에게 억눌린 마을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나가는 삶을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절망적인 삶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구원의 축복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다 망가진 이 광인과 같은 처참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희생해 주셨음을 만나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6. 거라사의 광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까?
거라사의 광인은 이제 자율적인 인생의 모습을 되찾고 인생의 방향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전에는 거치는 자요 있어서는 안될 무익한 자 이었으나 다시금 새로운 인생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①먼저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5.... 정신이 온전하여....전에는 무덤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내던 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이제는 삶의 제 자리를 찾아 자기를 건설하며 인격 회복을 하고 있습니다.
②다음에 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5.... 옷을 입고....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그 수치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③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된 사람을 향한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주목하십시오.
18-19 /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 대.
이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은 주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면서 내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이웃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이고 이것이 간증(干證) 아니겠습니까?
19....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이 말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부흥회나, 철야 기도회, 기도원, 각종 집회 등에서 신비의 체험을 했다거나 은혜 받았다고 정상적인 삶의 틀을 무시하고 가정을 이탈하는 잘못 된 생각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광적 신자가 되지 말고 가정으로 먼저 돌아가서 정상적 생활을 하라는 거지요.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광인이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주님을 따라다니며 봉사하는 것만이 은혜를 보답하는 일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우쳐 주시면서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광인이었던 이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대로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거라사와 데카폴리스 전 지역까지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약에 오늘의 말씀이 돼지 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 마을에서 내어쫓는 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귀신들렸다가 치유 받은 사람이 고요와 평안의 자리를 찾고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복 된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을 소개하는 아름다운 입술이 되고 아름다운 손과 발이 되어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되고, 예수님을 만나야 풀리고, 예수님을 만나야 기적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만나야 성공이 보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