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2
3월30일[성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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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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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토요일에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 저승에 가심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단식을 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노자 성체만 모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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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분께서 내 눈앞에 나타나시니 다른 모든 것들이 다 흐릿해졌습니다!>
피정객들과 성 금요일을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으로 영화 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을 함께 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장면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녀 역시 베드로나 요한 사도처럼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해 가족을 뒤로 했습니다. 그녀가 집을 떠나는 날, 오빠가 달려 나와 소리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게 하느님의 뜻이냐? 이렇게 부모 형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동이 하느님의 뜻이냐?”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의연하고 당당했습니다. 그 무엇도 그녀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이미 맛본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직진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분이 내 눈앞에 나타나시니 다른 모든 것들이 다 흐릿해졌습니다. 그분만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임을 희망했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 치유되고 되살아나는 하느님 나라가 바로 이 자리에서 임하길 바랐습니다. 자신들을 가난과 질병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세상을 예수님께서 당장 바꿔주시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미래요 보증수표였던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한없이 무력해지시고, 더이상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적대자들의 손에 체포되시고, 수난당하시고, 운명하시니, 제자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도 떠나고, 공동체 재정 담당 유다는 배신의 길을 걸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 사도나 애제자 요한 사도에게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발현하셨습니다. 그녀는 부활 예수님의 최초 목격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알렸을 때, 시건방 떨지 말고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는 사도들의 핀잔과 압박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상,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힘을 다해 기쁜 소식, 즉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적을 통해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특징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그녀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무덤가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는데, 물론 놀라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않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자명합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그녀였습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다들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끔찍하고 기괴한 자신의 모습에 사람들은 멀찌기 피해갔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셨습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눈길로 안타까워하시고, 강력하지만 따뜻한 손길을 펼치셔서 평생 괴롭혀왔던 일곱 마귀를 몰아 내어주셨습니다. 그녀를 새로운 삶, 영원한 삶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갚은 일은, 만사 제쳐놓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일, 그분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드리는 일, 그분의 제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늘 붙어다니던 창녀, 죄 많은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과감하게 떼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 이상 영예로울 수 없는 호칭을 붙여주셨습니다. ‘사도들을 위한 사도!’
영화 속 마리아 막달레나가 남긴 대사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천국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전쟁과 파괴, 힘과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분노와 고뇌를 버리고 사랑과 용서와 배려를 통해 우리 속에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당신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그 말을 믿는 것, 그날에 천국이 오리라는 믿음을 지니는 것,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그의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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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빈 무덤 앞에서>
언젠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밤 9시 경 공동묘지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어 안 되겠다 돌아가자, 이 시간에 무슨 성묘냐? 남들이 하는 대로 평범하게 살아야 된다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분을 모시고 글쎄 그 시간에 공동묘지에 도착했습니다.
하필 묘소는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가 능선 부근에 주차를 한 후 또 한참을 걸어 내려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때 맞춰 밤안개마저 여기저기서 무럭무럭 피어올랐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밤에 보는 공동묘지는 낮과는 새삼스럽게 달랐습니다.
늘 쉽게 찾던 묘지였는데, 그날따라 찾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밤이슬을 맞으며 안개 사이를 헤치며 이 묘역 저 묘역 찾아 헤매는데 때맞춰 산짐승 울음소리까지 크게 들려왔습니다.
당시 부모님과 함께 밤 성묘를 갔었는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동으로 곤두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세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도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입니다.
아마도 세 여인은 예수님을 여윈 슬픔에 그 밤을 뜬 눈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여명이 밝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내달렸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냅니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던 예수님,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목숨까지 걸고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저리도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생각 한 가지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어젯밤 서둘러 치룬 매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들에게 참 사랑을 일깨워주신 분, 새 삶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위해 남아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골몰했습니다.
여인들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서둘러 최고급 수의와 향유를 들고 갔을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경황없었던 어제였기에 다시금 차분하고 꼼꼼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신 새벽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무덤에 다다르기 전 세 여인에게는 고민꺼리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통상적인 유다인들의 무덤은 동굴 형에다가 개폐 형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흙을 파서 관을 묻고 다시 흙을 덮는 봉분형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무덤이었는데, 이 무덤은 한 마디로 동굴 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동굴방 안 바닥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입구를 막은 돌을 옆으로 굴려야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여인들로서는 힘에 벅찬 일이었기에 그리도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가에 도착했을 때 그 걱정꺼리는 덜었습니다.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다른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세 여인이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혼비백산했습니다.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무덤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였겠지요. 그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극진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은 머지않아 주님 부활 체험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수님 빈 무덤 사건,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앙 안에서 큰 획은 긋는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냥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시신으로 그냥 무덤 안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무덤에 대한 의미 부여가 대단합니다. 작은 조각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회당이나 법당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창시자 예수님의 무덤이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빌리셨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빈 무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의 세력조차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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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파스카 성야)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땅, 갈릴래아!>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졌을 때 그 부끄러운 곳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그렇게 낮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상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창연 신부님 강의 중 어떤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였는데 경찰에 불응하며 저항했고 결국에는 경찰서장 불러오라고 화를 내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경찰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낮아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이스라엘 땅을 지리적으로 보자면 높은 곳이 유다지방이고 낮은 곳이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물이 풍부하여 아름다운 자연은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산지로 올라갈수록 광야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만 보아도 이 지리적 상징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낮아져야만 생명이 넘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오라고 여인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일러주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갈릴래아’는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당신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 밤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곧이곧대로 믿어 진짜 갈릴래아로 갔다가는 절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호수 주변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있고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나시고 거기서 자라셨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와 반대되는 개념은 사해를 포함한 유다지방입니다. 갈릴래아의 풍요로움에 비해 유다는 높고 척박하고 메마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 성야미사 때 읽는 7개의 독서는 어떻게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려줍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에덴동산이 갈릴래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모든 인간이 은총이 사라지고 메마른 유다 광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합니다.
제3독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는 유다 광야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파라오는 뱀의 상징이고 교만의 상징이며 사탄의 상징이고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그 영원한 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길은 오로지 주님께서 파견하신 모세를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였듯이, 새 모세 그리스도는 당신 피로써 우리를 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카인이 아벨의 피 때문에 그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지배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4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우리 자신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롭게 구원해 주실 새 모세,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마치 죄로 간음한 우리 부정한 신부들을 찾아 나서시는 신랑처럼 당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분입니다.
제5독서에서는 이를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술과 젖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메마른 땅의 ‘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성전 오른 편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성령의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갈릴래아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6독서 바룩서에서는 구원의 신랑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언하며 빨리 죽음의 땅인 교만에서 지혜의 샘을 찾아 떠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처럼 우리의 길을 결코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해 ‘빛’을 마련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마지막으로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는 ‘성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주님이 주인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결국 교만으로 끊긴 은총의 샘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시 뿌려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께 무언가를 요구하던 처지에서 종으로라도 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로마서에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죽여 그분의 종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아 당신 자신의 뜻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어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야 하는 길은 한없이 겸손하여져서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풍요로운 갈릴래아 지방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께서 아담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와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뜻에 순명해야만 살 수 있는 죽은 땅의 처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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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생 때입니다. 음악 선생님은 ‘가곡’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오 솔레미오(O Sole Mio)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오 솔레미오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올 때/ 하늘의 밝은 해는 비치인다./ 나의 몸에는 사랑스러운 나의 해님뿐/ 비치인다 오 나의 나의 해님/ 찬란하게 비치인다”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소리에 눈물 흘렸네. 오 솔로미오에는 ‘폭풍우 지난 후에 너 더욱 찬란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에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주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열어보지 않은 선물>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옵니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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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부활 성야)
복음: 마르 16,1-7: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로 바뀌게 된다. 옛 시대의 안식일은 해가 떠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밤을 밝힌 촛불 같은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여 무덤에 간다.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매우 이른 아침”은(2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품위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른 아침을 경사롭게 만드시고, 당신 부활의 빛으로 빛나게 하셨다. 여인들은 안식일을 지내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열심한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고(1절) 무덤을 향해 출발하여 새벽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누가 그 돌을 굴려 내 줄까요?”(3절) 여자들은 돌아가신 분을 만나기 위해 돌을 굴려내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닫힌 돌을 굴려내면 무덤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향유를 부으면 부족한 믿음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광을 믿음의 빛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4절) 이것은 주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닫힌 무덤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웬 젊은이가 하얀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천사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왼쪽은 현세의 삶을 상징하고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며, 오른쪽은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생명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셨으니 부활을 전하러 온 천사는 오른쪽에 앉아 있어야 한다. 천사가 하얀 옷을 입은 것은 부활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다. 천사가 앉아 있는 자세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제직과 왕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앉는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당신 어좌로 오르시는 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왕좌에 앉는 것은 임금의 행위이고, 희생 제사의 자리에 서는 것은 대사제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씻어주시는 사제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시는 임금이시다. 그래서 천사들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 그 왕좌에 앉으시려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마르 16,5 참조) 나타나기도 했고,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루카 24,4 참조) 천사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6절) 우리는 십자가를 공경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도 죽음이 죽을 것이다.
빈 무덤에서 위대한 사명이 여인들에게 공동체와의 연관에서 항상 유효한 사명이 세 마디로 내려진다. “가라, 제자들에게 알려라, 말씀들을 기억하게 하여라.” 항상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7절) 여기서 이 갈릴래아는 평야 지대가 아닌 갈릴래아 산, 예루살렘이다. 거기서 하늘에 오르실 것이다. “거기서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성령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 결정적 모상을 뵙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 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고,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급된 사건이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신비이다. 이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인은 매 미사 중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응답하지 않는가?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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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희망>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1-7)
1) 예수님 수난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은 끔찍하고 생생한 현실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비현실적인 일,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예수님 혼자서 고독하게겪으신 일이지만, 사도들과 신자들도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죽음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은, 수난의 고통을 직접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은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고인보다 유가족의 고통과 슬픔이 더 클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당사자가 어떤 고통과 슬픔을 겪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떻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너무나도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금방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그들을 짓누르던 ‘큰 슬픔’에서 벗어나서 ‘큰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크게 슬퍼했던 그만큼 크게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과 박해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두려운(무서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인자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 자체를 부정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순시기를 제대로 지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특별히 간절하게 주님께 의지하거나 간청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2) 어떤 중병에 걸려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하는 환자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수술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수술이라면, 또 수술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어느 정도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마취에 빠져 있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과 별로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하여간에 환자가 죽을 각오를 하고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희망,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희망은 없고 절망 상태라면 수술 받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에,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병의 치료도 잘 될 것이고,곧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곧 부활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받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한 번 더 제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부활 체험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3)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힘은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에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도 힘도 없게 됩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경우는,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부활 신앙’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고, 우리는 그 희망이 주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순서를 바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희망하니까, 즉 부활을 믿고 싶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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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16,6)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고 떠난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먼저 찾아올까요? 그분은 아마도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오시리라 봅니다. 사랑은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분을 잊지 못하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사랑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기억은 생생한 사랑의 체험에서 기인합니다. 사랑에서 기인하지 않은 기억은 언제나 사라질 수밖에 없고, 열정 또한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디는 이런 비유를 들어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선생이 제자에게 강에서 돌맹이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돌을 깨뜨려 조각을 가져오게 한 다음, 깨진 돌의 안쪽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며 외치기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안쪽은 말라 있구나!”』이 외침은 우리 신앙의 메마름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외적으론 지켜야 할 도리를, 신심 활동을 하면서도, 내면으로 사랑의 기억이나 영혼이 메말라 버린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은 참된 신앙인의 모델로써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 곧 슬픔과 상실에 대한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미 새날의 밝음이 그들을 인도하고 있을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들이 무덤으로 나아감은 일상의 익숙한 행위가 아닌 새로운 행위입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 온전히 부활의 새로움을 깨닫지 못했기에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줄까요?”(16,3)하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 마음은 떠나간 주님에 대한 그리움과 돌아가신 분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이 처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아쉬움이 부활, 새로운 생명의 첫 번째 수혜자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그리움과 열망은 결코 어떤 것도 그들에게 장애와 걸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죽음까지도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이 사라졌듯이 어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 영적 장애도 그들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무덤은 이미 비워졌습니다. 돌은 이미 움직여 입구는 열려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갔더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16,5)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젊은이가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에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16, 6) 하고 전해 줍니다. 이것은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거기,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빈 무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무덤이 비워 있었다, 하여도 그것이 부활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빈 무덤이 부활은 아닙니다. 빈 무덤은 단지 빈 것, 텅 빈 것입니다. 이는 지금껏 우리가 생각하고 궁리하고 체험한 모든 것이 텅 빈 것임을 의미할지 모릅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고 약속하신 바의 시작일 뿐입니다. 즉 빈 무덤은 이제 예수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어디서든지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선포의 시작일 뿐입니다. 빈 무덤은 현재의 ‘여기 아니 계심’보다 오히려 아직 끝나지 않은 약속의 성취, 내일 ‘없음 가운데 늘 함께 계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찬 낡은 모든 것을 빈 무덤에 벗어 던지고 나와야 합니다. 허물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의 옷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신앙은 약속의 성취를 보고 자기 안에 간직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가 아니라 약속의 성취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단지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에 계시지 않으니, 어디에서 만나게 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고 핵심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장소나 시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부활의 신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 20, 29)하고 하셨는데 이제 참 사람이셨던 그분이 부활하신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길은 그분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낡은 틀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한 시작입니다. 갈릴래아는 어제의 기억이며 오늘의 기억을 되살리는 곳입니다. 빈 무덤은 이제 갈릴래아로 열려있습니다. 거기에서 부활은 생생한 기억으로 제자들의 삶에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빈 무덤은 생생한 사랑의 기억으로 충만할 때 굳이 이곳이다. 저곳이다, 고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은 늘 함께 계신 그분을 일상의 삶에서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고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을 체험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 목요일 밤미사 제2독서 코린토1서 11장 24과 2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또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며 내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었습니다. 성체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이야말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길이고, 각자 그분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길은 장소나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바로 성체를 통한 우리 영혼에 내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이고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빈 무덤의 근원적인 신앙고백이고 또 예수님을 체험하는 참 부활의 길이라고 봅니다. 오늘 부활 성야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고백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었으면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부활 신앙의 첫 번째 증거자들이 여성이었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그리움이 상대적으로 남성이었던 사도들과 대비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여성은 부활의 수혜자가 바로 다름 아닌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며, 부활의 신부인 교회의 진실성과 파급성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역설적으로 목격 증인으로서 가치조차 인정받을 수 없는 여성의 가난함이 예수님 부활의 진실성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의 파급성, 입소문은 여성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효과처럼 그렇게 세상 끝까지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2 천년전 예수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빈 무덤은 시간을 뛰어넘는 부활 신앙이 태동하는 시간이며, 우리 삶 전체를 바르게 바라보게 하는 깨달음의 장소입니다. 주님이 아니 계신 곳, 빈 무덤에 우리의 낡고 타락한 옛 인간성을 벗어 던져 버리고 새로운 창조, 새로운 비전, 새로운 질서를 향해 달려 나갑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 계시겠다.”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길, 자유를 향한 진리의 삶,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이젠 어둠이 아닌 빛으로,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앙갚음이 아닌 용서로 달려갑시다. 지금 여기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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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무슨 인터넷이냐고 또 그냥 전화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은행 업무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컴퓨터보다 스마트폰을 더 많이 봅니다. 그런데 어느 강사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하루에 1시간 보는 대신 다른 걸 했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하루 1시간, 일 년이면 거의 360시간, 10년이면 3,600시간입니다. 이 정도 시간으로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150일 동안 집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1시간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길게 바라보면 너무나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때 우리의 자유를 도둑맞게 되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생각을 조정하고 가치관을 주입 당하며, 자기가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집중해야 할 것, 그러나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거룩한 성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모든 고통을 당신 몸으로 받아 안으셨음을 알고 있지만, 온전하게 주님과 함께하고는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주님께 집중하려는 노력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에 우리의 나약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주님을 닮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나약함까지도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 특히 주님께서 당신 몸으로 직접 보여 주셨던 사랑에도 각종 조건을 붙여서 퇴색시키는 우리였음을 반성하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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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세상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승리요,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감수한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옳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을 지탱하는 기둥이며, 모든 희망을 받치고 있는 머릿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슬픔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동안에 보여주었던 여러 표징들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을 몸소 생명의 빵으로 소개하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 간절함이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의탁한 기도가 열매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파멸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새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의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6)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하였는데도 여인들은 상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켜봤던 사람, 그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슬픔과 미련을 품고 있던 사람, 계산 없이 아낌없이 값비싼 향료를 마련하여 동트기만을 기다렸던 사람,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에게 부활의 첫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진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천상 행복의 미래를 보고 오늘을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 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한 ‘나쁜 습관 빼기, 은총을 쌓기’의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될 것입니다.”(마르16,7) 하신 말씀입니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적활동을 시작하신 곳이고, 제자들을 부르고 양성하신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가운데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 삶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손희송)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오롯한 마음으로 섬기면서 세상에 전하고, 그분처럼 사랑으로 이웃을 아끼고 돌보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삶의 자리입니다. 삶의 터를 더 큰 사랑으로 빛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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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어제 수난예식시 감격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예수님 부활로 우리의 고백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제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과 수난예식에는 영광스럽게도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함세웅 신부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꽃이, 기쁨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다시 한번 외쳐보는 만세육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동시에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축제를 한껏 경축하고 있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둔 길조(吉兆)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무덤문 박차고, 죽음의 쇠사슬 끊어버리고 장엄하게 부활시키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우리를 죄살이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아, 이제 예수님 부활하셨으니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빛의 예식시 “그리스도 우리의 빛!” 외침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참빛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활찬송 엑술뗏(Exsultet)은 또 얼마나 웅장한지요! 앞부분 일부만 인용합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의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러 세상 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찬미와 기쁨의 빛으로 충만한 이 거룩한 밤입니다. 이 밤은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밤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땅에서 불러내신 밤이고, 광야에서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비추던 밤이고, 이삭이 살아난 밤이고,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밤이며, 세례를 통해 많은 이가 거룩하게 되는 밤이며, 이밤의 말씀전례중에 읽혀지는 구약의 일곱 말씀의 빛이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밤입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의 밤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감사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는 참된 구원이 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부활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말씀전례 중 일곱 개 독서 때마다 이를 요약하는 후렴은 또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말씀의 빛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 보내시는 얼에 누리의 모습이 새롭게 되나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
“주께 내 노래 하리니, 주는 영광스러이 승리하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내 주님을 높이 기리려 하나이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주님,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나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환호송입니다.“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주님의 말씀의 우리 발의 등불, 우리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말씀의 빛이 온누리의 어둠을, 우리 무지의 내면을 환히 밝힙니다.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탄생된 우리는 계속되는 파스카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 된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떠오르는 태양과 동시에 우리 영혼의 태양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의 열린 무덤이 상징하는 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과 더불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천사의 전갈입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너희는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리석게도 무덤에서 찾는지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갈릴래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곳은 어디나 빛으로 충만한 하늘나라이지만, 부활하신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은 어디나 무덤같은 어둔 세상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부활성야미사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 저희가 파스카 성사로 힘을 얻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우리 모두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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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상칠언(架上七言)>
오늘은 '성토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미사가 거행되지 않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무덤 옆에서 주님의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침묵 가운데에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미사 거행이 없는 오늘 - 물론 밤에는 성대한 파스카 성야 미사가 거행되지만 - 죽음의 시간 안에 머물면서 십자나무에 못 박히신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나무 위에서 일곱 번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2.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4.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5. "목마르다."(요한 19,28)
6.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루카 23,46)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그 자체로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우리도 순종이 되어봅시다!
너를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봅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죽는 사랑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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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6iYaax1J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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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 6)
얼었던 개울물이
풀리고 봄꽃들이
꽃망울을 마구
터뜨립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생명의
일들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빚어내는
무덤의 현장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은
놀랍도록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무덤을
막았던
큰 바윗돌은
굴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억누름의
억압이 아닌
풀어줌으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생명의
참된 자유이며
죄의 해방입니다.
스스로를
묶어
속박했던
우리들이
살아있는
관계속으로
이제는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심으로
죽음의 한계를
벗어버립니다.
생명의 숨결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과 세상의
단절이 아닌
파괴되고 손상된
관계성의 힘찬
회복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가 부활의
본질입니다.
무한히
열려져 있는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부활을 통하여
뜨겁게
체험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바윗돌만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됨의 일치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이제는
맛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생명의
힘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뜻을
버리고
비울 수 있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하니
예전의
갈릴래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되는
부활의 현장
살아있는 관계의
갈릴래아입니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삶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부활의 새날입니다.
참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모두를 향한
부활의 기쁜소식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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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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