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흥선대원군이 실권자였던 시기인 고종 3년(1866년),
조선이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해
항의함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병인양요라는 명칭은 병인년에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최초이자 마지막 군사 접전이다.
6.25 전쟁 당시 제1세계 진영인 대한민국을 도와 북한에 맞서기 위해 한국에 군을 파병한 역사가 있지만
그것은 UN군의 일원으로서다.
한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병인양요가 유일하다.
병인박해의 생존자 리델 신부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화를 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정부 인사 일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에 항의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청나라 공친왕은 조선과 프랑스가 전쟁할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자 일단은 중재에 나서 조선을 변호하기로 하고, 프랑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묻는 한편 조선에도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물론 조선은 여기에 대해서 무시했다.
이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의 조선과 프랑스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만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의 공동 책임이라고 청나라까지 비난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 왕래가 활발한 점, 조선이 이미 선교사 처형 계획을 청나라에 통보한 상태였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한 원병을 만리장성에 대기시켰다는 점을 들며 청나라를 비난했다.
이렇듯 조선과 프랑스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관계가 계속되자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들과 회의를 하는 한편 중재를 거듭 시도해 봤지만
프랑스는 이 모든 행위가 사기 행위이자 뻔뻔한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벨로네 공사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 함대를 출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천주교 만주교구장인 베롤 주교도 조선에 가서 항의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어쨌거나 로즈 제독은 벨로네 공사가 본국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음을 두고
기밀누설이자 이적행위라고 비난하고,
조선은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병사인 자신의 소관이라고 주도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벨로네가 본국의 인가를 받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조치했음을 크게 질책했고,
그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했으며, 그에게 '앞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그를 조선 출정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리고 9월 7일 프랑스 해군성이 나폴레옹 3세의 공식 명령서를 전달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성은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이 국가적인 모험이니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프랑스 해군성은 "절대로 내륙을 치는 것은 위험하니 치지 말고,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해서 그 주변을 시위함으로 조선에게 프랑스의 입장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만약 상륙 이후 극동함대만으로 조선 토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내륙으로 진공해도 좋다." 했다.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가 측량을 위해 산둥 반도의 즈푸 항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9월 21일 부평으로 이양선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에 온 정부는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호군 기정진이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매우 단호한 척사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로즈 제독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사제 3명이 조선에서 순교한 것을 항의하기 위해
출병했던 함대가 좌초당했던 전력을 참고하여,
조선으로 진입하는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 코르벳 프리모게 함, 포함 타르디프 함, 통보함 데루레드 함 등 3척이
양력 9월 18일에 즈푸 항구를 출발하여 한강 수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데루레드 함이 21일에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발견했고
프랑스 해군 함대는 영종 첨사의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한강을 거슬러 한성으로 진공했다.
이에 조선 조정이 그 첩보를 듣고 황급히 작전 회의를 했다.
김포군수 정기화가 서둘러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하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조선을 구경하러 왔다." 하고 대답하며
식량 구입 의사를 전했고 이에 정기화는 소와 돼지, 닭을 전달했다.
이 와중에 프리모게 함이 또 좌초되면서 청나라로 회항했고 남은 두 배 타르디프 함과 데루레드 함은 여유롭게 북상했다. 이들은 행주를 지나 양천에 이르렀고 양천 현령 윤수연도 이들 함대의 목적을 질의했다. 프랑스 함대는 김포에서처럼
똑같이 대답한 뒤 소, 닭, 달걀, 청태, 백채를 구입했으며 부평에서도 조선이 전달한 생필품들을 전달받았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기만 하면
전국의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허풍을 떤 탓에 프랑스 함대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강 양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만 나타나서 함대를 구경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어 프랑스인들은 당황했다.
한편 회항한 프리모게 함은 영종 첨사 심영규가 파견한 병방 이우식에게 프랑스 무기들을 구경시켜 주었지만,
이우식이 질의한 프랑스 함대의 목적과 남은 함정들의 행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조선 측이 제공한 신선한 식료품과 질 좋은 생사, 호의적인 구경꾼들로 인해서 조선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고 장담했지만, 조선의 호의적인 태도에 놀랐다.
이는 신미양요 개전 직전에 흥선대원군이 미군 측에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쇄국 정책이 “서양 세력과 통상하지는 않지만,
온 이들이 있다면 집주인의 정으로 구호품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낸다”라는 인도주의적인 경향을 띠었기에 가능했다.
도성까지 10여 리를 앞둔 지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디프함이 좌초되면서 프랑스 함대의 전진은 중지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27일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조선은 이용희 지휘 하의 병력 1천 명을 급파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면서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 호가 행패를 부리다 불타버렸다는 소식과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군함 1척을 남겨 조선의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로즈 제독은 이를 거부했다.
9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인 작약도를 떠났고 10월 3일에 즈푸항에 돌아왔다.
한편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진입을 수수방관한 지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하다가
프랑스 함대가 한양의 코앞까지 왔단 소식에 다시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혼비백산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즉시 포도청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강화했고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수한 것이 확인된 이후 고종은 내탕금 3만 냥을 하사하며 전국의 수군 전력을 강화하라고 명령했고,
이 자금으로 노후화된 전선들을 수리했다.
영종진 공격
로즈 제독은 강화도를 가는 길에 영종도와 월미도, 제물포가 조선군의 주둔지임을 확인하고
강화도를 향한 출입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강화도 방어진 중 영종진을 무력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차례 탐색 및 영종진 성곽과 관아를 포격한 뒤 무력화시켰다.
또한 영종도와 성곽을 점령하기 위해 무장한 선원을 영종도에 상륙시켰다.
전투로 인하여 영종도 일대가 무력화되었고 이 전투로 프랑스군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써 강화도로 가는 길이 뚫리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강화해협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ée River)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먼저 조선으로 떠나기 전인
양력 10월 10일에는 주청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이 직접 참관하여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岛) 일대에서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그다음 날인 10월 11일 프랑스 해군은 차푸항에서 군함 7척(전함 게리에르(Guerriere), 순양함 프리모게(primauguet)와 라플라스(Laplace), 포함 타르디프(Tardif), 르 브레통(Le brethon), 통보함 캉샹(Ken-Chan), 데룰레드(Deroulede)), 해군 육전대 800여 명,
장교 약간과 부사관 및 수병 725명을 포 함하여 총 1,525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 밖에 중국에서 영업하던 민간 증기선들을 보급선으로 고용했다.
10월 14일 프랑스 군함들이 팔미도에 나타났단 보고가 느닷없이 떨어졌고
이후 9월 7일 영종진이 프랑스군의 1시간에 걸친 포격으로 4시간 만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후 9월 8일 강화산성이 프랑스 해군의 함포 사격에 유린당했다.
강화 유수 이인기와 선봉중군 이용희는 맥없이 강화도를 내주고 달아났고 이에 조정은 그 둘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보내 독려하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고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보내 응전하게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9월 11일에 이경하와 로즈 제독은 매우 살벌한 내용으로 편지를 교환했다.
이에 이경하는 다음과 같은 서신으로 답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렸다.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함정 2척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병사 150명과 함께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이 빠르게 사격하여 전사자 3명에 부상자 2명을 내었다.
이어 프랑스 함대는 문수산성을 향해 대량으로 포격하였으며,
문수산성이 해안을 접하고 있던 서문과 서측 성벽 상당수가 통째로 파괴되었다.
이러한 포격에 조선 군대는 후퇴하고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 관아와 성 내부를 불태웠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0~ 60명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으나,
조선군 스스로도 자신들이 총을 쏘자 프랑스 군인들이 그냥 엄폐했는지, 부상당했는지 아니면 사망했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는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분노하여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배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 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를 비롯한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방화로 무력화시켰다.
또한 용진진, 갑곳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철곳보, 월곳진을 비롯한 성곽과 요새, 돈대, 관청, 창고, 장대.
심지어 국왕이 머무는 강화행궁에도 불사르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의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장병 60명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 점거하라고 병력을 보냈는데,
당시 정족산성은 좌선봉장 양헌수가 휘하군사 120명을 이끌고 덕진진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으로 수비 중이었다.
이때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확인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 500여 명을 입대시킨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성(동문 쪽)에 가까이 접근하면 집중사격하는 전술을 택했는데,
프랑스 해군 대령 올리비에가 사실 적지 한복판에 와있는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급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양헌수가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해 수병을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을 전사시키고 30명 부상입혔다고 기록했다.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프랑스군 전사자를 40명 남짓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로즈 제독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도망쳤다.
이로부터, 2일 뒤인 10월 5일, 프랑스 군대는 올리비에 대령의 지휘아래 160여 명의 분견대(군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공격해왔다.
하지만, 조선군은 산성에 의존하여 동문과 남문 쪽에서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에게 사격을 가했고,
곧 격퇴시켜버린다. 이로 인하여 80여 명 가량의 프랑스군이 죽거나 다쳤는데, 병력의 절반이 타격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강점한 강화도에 머물고 있었던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의 패전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으며,
더불어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하고는
앞서 약탈하였던 은괴, 서적, 외규장각 의궤를 배에 싣고 갑곶진을 떠나 덕진진 앞바다를 거쳐 퇴각하였다.
프랑스군의 전함대가 조선에서 철수해 중국 청나라 즈프기지로 돌아가면서 전쟁은 예상을 벗어나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 원정함대의 목표를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전략적 승리다.
그렇기에 교과서에서도 조선이 프랑스를 물리쳤다는 점을 명백히 서술하고 있다.
조선은 이 승리로 당분간은 주변 이웃처럼 덩치만 큰 호구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입장에선 부당한 서구의 요구나 불리한 조건의 통상을 차단함으로써 국익을 지킬 수 있었고,
한동안 외세의 큰 간섭 없이 독립과 자주를 누릴 수 있었다.
멀리서 드리우던 그림자와 별개로 서구에 대한 공포와 압박에 흔들리던 당시 조선 입장에선
여러모로 대내외적인 안정에 도움을 준 승리였다.
한편 프랑스는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아시아 국가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전투 자체는 승리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보인 조선군의 한계는 명확했는데,
결국 조선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변화를 꾀할 마지막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우선 프랑스군이 동원한 군대는 600여 명에 불과한 원정함대였다.
프랑스가 소규모의 분견대만을 보낸 것은 넓게 퍼진 식민지 대비 부족한 원정함대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로즈 제독이 극동함대만으론 조선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위 실추를 감수하고도 뱃머리를 과감히 돌린 것은 추가 증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도 양헌수의 기습전으로 반격에 성공하기 전까진 패전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라고 하긴 어렵다.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에게 처음으로 근대화된 서양 국가의 무력을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소총은 전장식 강선총인 미니에 라이플이었는데,
연사력은 조선의 화승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조선군의 납탄보다 발전한
미니에 탄을 사용해 사거리는 4배에 달했고 명중률 및 살상력도 훨씬 높았으며,
장전 방식도 매치락보다 발전된 퍼커션 캡 방식이었기에 훨씬 안정적이었다.
또한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위력도 강한 서양식 대포는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프랑스군의 화력에 강화 수비군은 물론 중앙에서 파견한 순무영 병력까지 일거에 무너지자
조정은 청나라를 패배시킨 서양 열강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하게 되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더욱 열을 올렸다.
간혹 사극에서는 프랑스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진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론 그런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과 수백 명의 프랑스군에게 문수산성이 함락되고 성 내 누각과 관아의 건물들 그리고 강화행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재산피해가 심했다.
다만 병력 수백 명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조선군도 그다지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전사자도 5명 정도를 넘지 않았다고 보고됐다.
즉, 양측 다 인명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확실한 사상자는 14명 정도에 부상자도 상당했을 듯하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도 정확하진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병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한다며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문수산성에선 전사자 3명, 정족산성에선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는 30여 명이라고 보고했다.
결론적으로 동남아는 물론 인구와 국력도 압도적이던 중국조차 아편전쟁 등에서 추풍낙엽으로 털려나가고
중국 못지않은 강국이던 일본마저 시모노세키 전쟁, 사쓰에이 전쟁에서 백기투항하고 문을 열어제치며
당시 서양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극동정세에서, 서구 열강에서 잘 나가기로
손에 꼽던 프랑스를 전근대적 무기와 체제로 저지하여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음은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이후 조선은 서양과의 군사적 격차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흥선대원군의 국방개혁을 추진하여 일부 성과를 보였으나
근본적인 체제 전환과 교육 개혁에는 이르지 못해 급격히 벌어지는 서양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병인양요를 조선의 승리라고 서술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대편에서 전투를 치른 프랑스군 또한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여기고 전훈에 활용했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병인양요를 명백히 패배로 규정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 도주라고 불렀고,
원정함대의 장병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승전이 가졌던 의의나 가치의 정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겠으나,
조선이 승전했다는 것 자체는 양국이 인정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영국 잡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1870년 9월 24일 기사에서
"프랑스가 조선에서 겪은 패배는 서구 열강들의 약화의 증거이다."라고 서술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보병 500명과 포대 1개가 필요한데,
원정함대에서 이들을 더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H.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인의 종군일기에 나오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가 프랑스인들이 고려인들에게 패배하여 도망갔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무적이 아니다!라는 소문으로 청나라 전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청국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이를 통쾌해하며 조선에게 당한 프랑스의 패배를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분위기에 큰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 1870년 폭동의 시발점이라 해석한다.
프랑스가 비록 군사적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조선침략을 곧바로 포기한 것은 군사적 능력의 부족보단 이를 동원할 정치적 의지의 부족이 더 큰 원인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3개국 중 하나였으며
프랑스는 이 당시 바다와 접한 땅을 영국과 다 갈라 먹을 정도로 전성기였다.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속국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 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을 빨리 포기한 이유는 군사적 좌절과 더불어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속국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서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조선에 다시 전장을 벌이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도 개입하고 멕시코 제2제국을 세우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아 조선에 개입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이 시기 프랑스의 주적이었던 프로이센이 불과 4달 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을 통일한 시점으로 국경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이러한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4년 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빌헬름1세의 포로가 되고 에투알 개선문을 프로이센군이 통과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는 1880년대가 되어서야 인도차이나를 속국화하여 마무리 지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저항세력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자기 영역으로 삼은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 복구와 서부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 영국조차도
18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의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서남아시아에 신경 쓰는 형편이라서 조선에 개입하기가 힘들었다.
즉, 당시 서구열강은 조선에 전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천주교 박해라는 빌미가 잡히자 원정함대를 보내 간을 본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항이 완강하고 쉽지 않음을 느끼자 곧바로 포기했는데,
조선을 식민화시키자고 대대적인 군사력을 투사하기엔 이득이 불명확하고 다른 손 볼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열강의 공백 상황을 노려 조선을 포함외교로 강제 개항한 세력은
조선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면서 근대화를 막 시작하여 서구식 약탈경제에 눈을 뜬 일본이었다.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 - 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 : 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서양 함대에 비하면 좀 한직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쁜 자리까진 아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은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를 누르고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 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 대여 방식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과 한국의 다른 문화재를 맞교환하자는 요구를 했고,
당연히 한국 측에선 들어 줄 수 없는 요구인지라 김대중 정부 당시 비준 거부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았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하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 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이 크게 확산되었다.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아편전쟁 때처럼 프랑스 군대가 도성에까지 쳐들어올까 봐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포와 불안이 크게 번진 사회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상을 뒤엎으려는 엉뚱한 야심가도 나타났으니,
바로 이필제(李弼濟 1825~1871)였다.
이필제는 병인양요가 터지고 조선 사회에 서양에 대한 공포심이 퍼지자,
이를 악용하여 "앞으로 조선이 서양에 망하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뒤엎고 새로운 조정을 만든 다음, 청나라와 일본을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그다음 서양 나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필제의 난(1869~1871)'을 일으켰다.
이필제의 난은 1869년부터 1871년까지 2년 동안 5번이나 계속 발생할 만큼,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조선군의 경우 신미양요와 달리 전멸은 피하고 의의로 프랑스군에게 3명의 전사자와 여러 명의 부상자를 안겨주었는데
조선군은 주력인 화승총의 사거리가 프랑스가 보유한 라이플에 비하면 짧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벽에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군 병력이 화승총의 사정거리안에 들어오면 일제사격을 가하는 근접사격술을 선보였다.
정작 신미양요에서는 이러한 조선군의 근접사격전술이 퇴화하면서
미군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는데 실제로 대모산에서 조선군 사수 200명이 광성보로 향하는 미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했지만
미군이 사거리 범위밖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광성보와 손돌목돈대를 공격하면서 조선군 350명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