迅瀑落危層 [신폭락위층]
冷聲聞還壑 [랭성문환학]
纖纖一點塵 [섬섬일점진]
無處可栖泊 [무처가서박]
내닫는 폭포수 위태로운 층 떨어지고
차가운 물소리만 골짜기에 메아리치네.
작고 작은 한 점 티끌도
머물러 깃들만한 곳이 없구나.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고려 중기의 고승. 성은 최씨.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나주 화순현 출신.
완(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배(裵)씨이다.
어머니가 하늘의 문 이 열리는 꿈을 꾼 다음 그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기를 청 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쓰라 하였다.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워 힘을 얻었다.
무당집과 사당을 허물기를 좋아 하고,
가끔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면 효험이 있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척형인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시병(侍病)할 때 관불삼매(觀佛三昧) 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그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만들어
사람을 크게 교화시키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재(齋)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곧 머리를 깎고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하였다. 오산(蜈山)에 있을 때에는 어떤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만 되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매우 우렁차 10리 밖까지 들렸으며,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아
듣는 사람들이 그로써 아침이 된 줄을 알았다고 한다.
1205년(희종 1) 가을, 지눌이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선객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가다가 그 산 밑에서 쉬었다.
1, 000여 걸음 밖에 있는 암자에서
지눌(知訥)이 그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 石徑風“
"호아향낙송라무자명향전 석경풍“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오네."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지눌(知訥)을 만나 이 게송을 보였더니 지눌(知訥)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중의 부채를 주었다. 혜심은 또 게송을 지었다.
"昔在師翁手裏 今在弟子掌中
"석재사옹수리 금재제자장중
若遇熱忙狂走 不妨打起淸風."
약우열망광주 부방타기청풍."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안에 있네.
만일 더위에 허덕이며 다닐 때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그 어떠하리
지눌(知訥)은 그 재능을 더욱 중히 여겼다. 1210년 지눌이 입적 하자
문도들이 나라에 건의하여 혜심은 수선사를 계승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가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니, 많은 수행자들이 모였고 강당은 비좁았다.
1212년 강종이 이 말을 듣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여러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수선사를 넓힌 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만수가사와 마납(磨衲 : 법복의 하나) 각 한벌과
향·차·보병(寶 甁) 등을 내렸으며, 또 법요(法要)를 구하였으므로
혜심은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다. 그뒤 그의 도(道)를 사모하여
문하로 모이는 수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그는 지눌(知訥)의 충실한
조술자(祖述者)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려 선가(禪家)의 위치를 철저히 굳힌 인물이다.
한편으로 권력의 주위에 맴돌며 세속적 명예에 눈이 어두워 서로 헐뜯고
다투는 수라장 속에 뛰어든 많은 승려들의 잘못에 경종을 울렸으며, 한편으로는
주술적 타력의존(呪術的他力依 存)의 폐습에 잠겨 불도(佛道)의 타락을
스스로 불러오던 고려왕실 주변의 그릇된 신앙풍조를 타파하는
중대한 교화의 구실을 하였다. 1234년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겼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衆若不到處別有一乾坤
"중약부도처별유일건곤
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 “
차문시하처대적열반문 “
어떠한 고통도 이르지 못하는 곳에 따로이 한 건곤이 있다.
묻노니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크게 고요한 열반의 문이니라.
하며 얼마 뒤 열반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1234년 6월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가지 일을 부탁한 뒤 마곡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은 매우 바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이 늙은이가 매우 바쁘니라."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가부좌한 채 미소를 띠고는 곧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었다.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크게 슬퍼하고는 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내리고
탑액은 원조지탑(圓照之塔)이라 하사하였으니
그 때 스님의 세수 57세이고, 법랍 32하(夏)였다.
고종이 사액한 그의 부도 원조지탑은 광원암북쪽에, 이규보가 찬한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출사에 각각 세워졌다. 진각국사비는 지금 그 잔비만이 전해 오고
비명은「동국이상국집」,「동문선」,「조선금석동람」에 전한다.
그의 문인에는 청진국사 몽여, 진훈, 각운, 마곡 등이 있었다.
저서에는 [선문염송집(禪門염頌集)]30권, [심요]1권,
[조계진 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 論)]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2권, [금강경찬(金剛經贊)]1권,
[선문강요(禪門綱要)]1권이 있다.
- 음악 / 연꽃 위에 내리는 비 - 한태주 흙피리ocarina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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