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림하실 주님을 보는 사람 (히12:14-17절)
교인들을 보면 신앙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점점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경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결코 신자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육신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요 목적인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미국 선수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선수들의 대부분은 올림픽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메달이나 상금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동일합니다. 선수들은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어느 하나를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올림픽 정신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금메달을 따기 위하여 국가든지 개인이든지 할 수만 있으면 불법을 자행합니다. 약물을 투약한다든지, 경기의 법칙을 무시한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신앙이 변질되어 버린 교인이나 염치가 없는 운동선수나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는 중에 몇 번이나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마는 그런 유혹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을 죽이자는 부하의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짐을 하루속히 벗기 위해서는 사울 왕을 죽이는 편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끝까지 참았습니다. 그 결과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했다는 백성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었으며 그의 왕위가 든든히 설 수 있었습니다. 최악의 고통 속에서 번민하던 욥도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당한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런 믿음과 인내를 통하여 욥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이전보다 더욱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는 주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확실히 기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성도에게는 반드시 추구해야 할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재림하실 주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하였습니다. ‘좇으라’고 하는 헬라어 ‘디오케테’는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평’은 소극적인 선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창출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선이자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중에 최상의 상태인 화평은 타인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서로의 유익을 추구하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관계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화평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평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하고 노력할 때 주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화평을 추구하는 자만이 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실 때 팔복 중에서 화평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성도가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대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의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화평뿐만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화평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불신자까지 포함하는 전 인류에 대한 화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화평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평이 이루어질 때 인류는 행복과 복지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집에 아버지의 팔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자식들은 많은 친지들과 친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시종 침울한 표정을 짓고 마침내 자식들과 손자들이 절을 하는 순간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큰 아들이 사업에 실패했고 형제간에 불화가 일어나 다투고 난 뒤에 집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고 큰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큰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형님의 몫까지 합하여 큰 잔치를 배설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화평이 없는 가정은 복된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의 근본은 무엇보다 화평이 우선입니다. 잠언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화평이 없고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가정에는 ‘가화만사성’이라는 글귀가 많이 붙어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집에 재화가 가득하고 재물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화목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지옥이요 전쟁터일 뿐입니다. 자식들이 화목하지 않으면서 부모에게 드리는 좋은 옷, 좋은 음식은 결코 바른 효도가 아닌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한국 가정 중에 아버지는 대학 교수요 어머니는 의사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부유하고 지성적인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큰 딸이 16살 때 가출한 후에 결국은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자기 분야에서는 성공을 했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자주 다투고 마침내 별거생활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불안한 환경을 조성했고 딸은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비보입니까.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남의 가정의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도 교육적으로 한 가지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른들이 자식을 키울 때 항상 묻는 질문이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라고 묻습니다, 아이들이 영리해서 그때마다 적절한 대답을 잘 합니다만 정말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마하고 살 거야, 아빠하고 살 거야.’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혼이 대세인 이 시대에서 엄마가 없는 아빠하고 사는 삶, 아빠가 없는 엄마하고 사는 삶이 아이들에게 과연 행복하다고 봅니까. 너무나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부모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부가 화평할 때만 인격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생명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서 훌륭한 인격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정신적 기형아가 되고 이상 심리 현상이 나타나고, 결국은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자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살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선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교훈은 언제나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마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주님의 교훈에 순종하면 화목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이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시민이 가져야 할 엄격한 윤리적 조건 4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화평하려면 우리의 심령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저들에게 어린 아이들과 같은 깨끗하고 순진한 성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들이 그렇게 깨끗하고 순진할 수가 없어 대하기가 참으로 편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악한 자가 출세하고 간계를 부리는 자가 성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 인품이 사람이 보기에 촌스럽고 어리석은 것 같은 사람, 탐욕이 거의 없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대로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도 내어주는 바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하자는데 십 리까지 동행해주는 바보, 이유 없는 재판을 걸어 무조건 내 겉옷을 빼앗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는 바보천치는 재물을 모을 수 없고 부자가 될 수 없고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런 깨끗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그렇습니다. 부부가 사사건건 팽팽히 맞서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다투면 그것이 무슨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남편이 장군 같고 대통령 같이 무섭다면 가족은 마음이 조려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다면 그곳이 바로 낙원이요 천국입니다. 가정에 왜 엄한 법이 있고 복잡한 격식이 그렇게 많아야 합니까. 특별히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절대적입니다.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던 남편이 불쑥 하는 말이 ‘이 바보야 그렇게 하지 말랬잖아.’ 평소와는 다른 억센 어감으로 성내어 하는 말이 아내의 심장을 찌르고 가시처럼 마음에 박힙니다. 무안의 한계를 넘어 자존심까지 상합니다. 물론 운전이 서툰 탓에 핀잔을 받는 것이 수긍은 가지만 왠지 무시당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합니다. 당장 차를 세우고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떫은 마음에 역겨움이 올라오고 머리가 빙빙 돌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육박전을 치르는 군인처럼 당장 대들고 싶지만 침을 한 번 삼키고 참습니다. 차를 세우고 멍하니 멈추어 있다가 남편의 얼굴을 살펴보니 남편 역시 미안한 듯 눈길을 피합니다. 폭풍은 지나가고 표면상으로는 평온을 찾은 것 같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나중에 보자.’라는 생각이 맴돕니다. 다음에 한 번만 또 그렇게 말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화를 가슴에 묻어둡니다. 이렇듯이 바보가 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도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평안하려면 모두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화평하려면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중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인격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지금의 나, 육신적으로 정욕적으로 교만하고 거만한 고집쟁이 나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집과 고집으로 뭉쳐진 세속적인 나를 깨뜨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사건건 부딪치고 싸우고 이해타산에 매여 분쟁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중생해야 합니다.
셋째, 화평하려면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니라.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셨느니라.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 ‘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죄와 구별되고 세속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거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침몰되어서도 안 되며, 이 세상의 법에 제한을 받으면서도 하늘의 법에 따라 살고, 그 법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삶의 목적이 달라야 하고, 삶의 기준이 달라야 하고, 의식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달라야 합니다. 그의 중심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넷째, 화평하려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요14: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며 감화하시고 감동하십니다. 이런 사역을 기쁘게 여기고 항상 성령님과 교제하며 교통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역을 거부하면 다시는 회개할 기회나 구원 받을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과 성령에 대하여 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오 리를 가자는데 십 리까지 갔어도 그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주었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속병을 유발할 것입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백인 교회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흑인이 백인들의 교회에 다니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 철없는 아이는 그런 것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그 아이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정말 예쁜 대답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절을 받겠다는 것도 아니요, 누가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안기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여기에 누가 그 아이를 비판하고 불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백인이 따로 없고 흑인이 따로 없습니다. 이 아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실 때 팔복을 강해하셨습니다. 그 팔복 중에 두 가지 축복을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두 말씀을 종합해서 ‘너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절대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화평과 거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평’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로마식 화평입니다. 권력에 의한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승리하여 힘이 지배하는 평화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으나 속에는 억압이 있고 노예가 있고 고통과 죽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헬라식 화평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것으로 현실을 떠난 형이상학적입니다. 추상적이고 정신적이기 때문에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마음으로 즐기는 화평입니다. 현실이 가난하든지, 황폐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을 떠나 철학의 진수만을 찾고 그것을 기뻐하며 즐기는 화평입니다. 셋째는, 히브리식 화평입니다. 살롬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 그리고 물질의 관계에까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번영과 풍족함을 말합니다. 이 화평은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화평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전, 은혜와 축복, 넘치는 기쁨과 만족함을 종합한 화평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화평과 거룩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화평이 없는 거룩은 위선이며 독선이고 바리새적입니다. 화평을 모르는 거룩은 남을 정죄하며 자기만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분열과 교만과 불경건함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이 없는 화평은 마치 묘지의 적막함 같은 것으로 죽음 뒤에 있는 고요함입니다. 미국에는 히피족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기들만이 최고의 평화주의자라고 자처합니다. 그들의 세계에는 전쟁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고 남녀의 구분도 없고 모두가 사랑하고 함께 산다고 합니다. 법도 없고 윤리도 도덕도 규칙도 없습니다. 외모도 구분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그것을 평화라고 하지만 실상은 정결함이나 질서나 도덕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동물처럼 거지처럼 함부로 떠들고 마구잡이로 행하고 난잡하게 살아갑니다. 결국 타락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싸움이 없는 곳은 극장과 무덤뿐이다.’ 극장에 가면 사람들이 모두 조용합니다. 묘지도 역시 말이 없습니다. 그 외에 인간이 사는 곳에는 싸움이 있고 아수라장이 있고 난잡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이 없이는 진정한 화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85:10-12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2. 성도에게는 경계해야 할 심각한 위험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히12:15-16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았으나 주위의 박해나 세상의 유혹을 못 이겨 신앙을 버리고 다시 죄악으로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르지 못하는’이라는 말 ‘휘스테론 아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어떤 혜택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도 얻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떨어져서 은혜를 거절하거나 불신앙, 혹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하여 복음을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을 체험하고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체험하고도 작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경우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이 주는 매력을 더욱 사랑하여 언제나 세상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 없었으며, 세상이 주는 욕망이 유혹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저들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애굽의 고센 땅도, 맛있는 음식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습니다. 출애굽한 것도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굽을 동경하며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축복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호2:8-9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둘째,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쓴 뿌리’라는 말은 신명기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신29: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쓴 뿌리’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이방의 우상을 섬기며 자신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섬기게 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해독을 끼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신의 완고한 기질로 인하여 생겨난 배교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불신앙의 풍조가 생기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는 오늘 날의 교회 안에도 흔히 있는 일로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까지 미혹하여 이단에 빠지거나 믿음을 버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셋째, 음행의 망령된 행실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행’은 거룩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생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여 신앙의 삶을 포기하는 것, 다른 종교나 세속에 빠지는 일, 모두를 총칭합니다. 음행하는 자에 대해 특히 구약의 에서를 언급한 것은 에서가 저지른 죄가 이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써 현세적인 것을 위하여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배교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또한 이스마엘 여인까지 취하여 일부다처를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했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추방되어 이방 족속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에서가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긴 것을 알고 그것을 다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였지만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에서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축복을 구한 것은 그가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의 명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눈앞에 보이는 축복만 볼 줄 알았지 하나님의 선물은 멸시했던 것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로, 이삭의 장자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서 멀어진 것처럼 오늘 날 배교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버린 바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보다 더 중요하고 높은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자는 설령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을지라도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삶의 목표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참으로 혼란스럽고 요란한 시대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온 세계가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전쟁의 소식이 매일 들려오고 환경의 오염에 따른 기후 변화와 이상 기온으로 삶의 위험이 처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아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질병이 창궐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희미해지고 신앙은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위험하게 보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신자가 반드시 해야 할 두 가지 일을 기억하고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신자가 경계하고 금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을 명심하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렸던 바울과 같은 신앙이 되어 주님을 고대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