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작가상이 민음사 키워
박맹호 회장의 전집에 대한 열정은 유명하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현재 300권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도 세계문학전집이라 하면 30권 정도가 고작”이라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며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현재 민음사의 직원은 150명, 처음에는 옥탑방을 사무실 삼아 혼자 시작했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민음사가 크기 시작한 건 ‘오늘의 작가상’을 제정하고부터. 그후 폭발적으로 판매량이 늘었다고 한다.
“1979년에 한수산의 <부초>가 받았고, 다음에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그 다음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었지요. 그게 매년 10만 부씩 나가더라고요. 김수영 문학상은 시인들에게 주는 상이었는데, 참 젊은 시인들이 많이 받길 원했죠.”
봄볕이 내려앉는 정릉계곡을 박 회장과 엄 대장이 걷는다. 산행이라기보다 가벼운 계곡 산책이다. 고령의 박 회장을 엄 대장이 간간이 부축한다. 꽃이 핀 데서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미소를 짓기도 하며 느리지만 바쁜 산책이다. 정릉계곡을 많이 오르긴 힘들다고 생각한 엄 대장은 벤치가 나오면 연신 쉬시라 권하며 얘길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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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임에도 박 회장의 말에는 허허실실한 일갈이 담겨 있다. 깊이 있는 웅덩이의 묵직함처럼 가벼운 듯하면서도 진심과 연륜이 묻어난다. 이번엔 박 회장이 엄 대장에게 어떤 책이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
“제가 2000년 5월에 칸쳉중가를 세 번째 도전할 때였어요. 그전에 두 번을 실패한 산이었어요. 두 번째 실패할 때는 동료를 두 명이나 잃었어요. 어렵게 세 번째 도전에 나섰는데 7,300m에서 셰르파가 낙석에 맞아 죽었어요.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상황에서 원정을 계속할지, 짐을 싸서 내려갈지를 제가 결정해야 했었어요. 그 때 동행한 기자가 저한테 책을 한 권 읽어 보라고 줬어요. 영국 어니스트 섀클턴의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는 책이었어요.”
책은 남극대륙을 537일간 탐험하면서 겪은 일을 쓴 것이었다. 엄 대장은 한자리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다 읽었다. 배가 좌초되어 1년 넘게 대자연에 맞서 싸우며 물개를 잡아먹고, 동상 걸린 발을 잘라내고 해야 했음에도 한명 낙오자 없이 대원 모두 다 살아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자연과 싸우면서 이겨내는 게 너무 처절한 거예요. 대자연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게 우리 원정과 많이 닮아 있었지만 남극의 당시 상황이 훨씬 더 열악했죠. 구구절절 다 가슴에 와 닿았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는 제목처럼 책을 다 읽고 나선, 올라가야 된다고 결정했어요. 밀어붙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칸첸중가를 올랐습니다. 책이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했어요.”
평생 책을 만든 박 회장에게 좋아하는 작가와 책을 묻자, 한국 작가는 “정비석을 좋아했다”고 한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같은 작품을 꼽았다.
박맹호 회장은 베토벤을 좋아한다. 지금은 수술해서 좋아졌지만 원래 귀가 나빴다고 한다. 그는 “굉장히 절망했는데 <베토벤의 생애>를 읽고 희망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누구나 자기 약점이 기반이 되서 성장하는 것 같아요. 대개 무결점의 사람들은 대성하지 못하더라고요.”
“마치 등산처럼 힘든 고비를 극복해서 정상에 서는 것과 같군요.”
“그렇죠. 가령 정주영도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좋은 학교 나왔으면 지금의 현대는 어렵지 않았나 하고 봐요.”
“박 회장님도 출판계에서는 대성하셨잖습니까.”
“대성이랄 건 없고 그냥 꾸준히 해나가는 편이죠. 출판으로 돈을 많이 벌 수는 없고 종수는 늘려갈 수 있어요. 사람도 늘려갈 수는 있고, 그런데 막상 목돈을 내놔라 그러면 없어요. 출판업은 뜻이 없으면 하기 힘들어요. 팔자라고 흔히 얘기하죠. 운명적인 거라고 봐요. 짜증이 나고 화나고 이런 거거든요. 돈이 괴롭히고, 간혹은 작가들이 괴롭히고…. 괴로움만 늘고 실제로 생기는 건 많지 않아요. 진작 다른 일을 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다른 일을 하려고 보면 다른 할 일이 없거든요.”
“그래도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있을 텐데, 뭔가요?”
“이문열의 <삼국지> 아닌가 싶어요. 그게 1,500만 부가 나갔으니까요. 순수문학 작품 중에서 많이 나간 것도 이문열 소설들이에요. 그 사람 소설 초기는 다 괜찮았어요. 외국작가 중에서는 우리 세계문학전집이 다 몇십 쇄씩 찍었어요. 꾸준히 나가요. 그 중에서도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가 많이 나가죠.”
“한국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출판계가 많이 어렵지 않나요?”
“그건 신문기자들이 무책임하게 써서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지. 내가 출판을 시작할 때 베스트셀러가 2,000~3,000권이었어요. 지금은 100만 단위예요. 그게 우리나라 출판이 발전했다는 반증이 아니고 뭐겠어요. 발행종수가 그저 몇백 종에서 7만~8만 종이 됐어요. 그 종수가 늘어난 것도 학술도서라든지 아주 괜찮은 책들이에요. 그래서 나는 출판은 우리나라가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 ▲ 삼국지의 호걸들이 도원결의 하듯 스틱을 들어 만남의 반가움을 표한다.
- “학교는 순 엉터리, 아이들 책을 통해 성장”
민음사는 비룡소의 아동도서와 사이언스북스의 과학서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동도서를 시작한 건 “손주를 얻고 서점을 나가 보니 우리 아동도서가 한심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부 일본 것 가져다가 베끼고 엉망이고, 남들 저작권 보호 하나도 안 돼 있고”, 그래서 비룡소란 자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전 세계 아동도서 저작권을 다 훑어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후에 저작권 심의바람이 국내에 불었고 이후 저작권 없으면 책을 못 내게 되니 “비룡소가 부자가 됐다”고 한다. 전 세계 저작권을 다 확보해 뒀으니, “그때 그 밑천이 있어서 비룡소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는 책의 교육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민음사는 이제 시작이에요. 실제로 출판은 대대적으로 확장돼야 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을 교육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예요. 학교는 순 엉터리거든. 책을 통해서 애들이 성장하는데, 좋은 책을 만나는 거야말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서적을 꾸준히 낸 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비록 돈은 못 벌지만 자연과학도서가 전무한 상태에서 가뭄에 단비 같은 책들을 냈다”고 얘기한다. “사이언스북스는 지금도 어렵지만 사회에 대한 기여도는 높다”는 게 설명이다.
1980년 대 초에는 대우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학술서적총서를 내기 시작했다. 1983년부터 1998년까지 대우재단과 민음사를 통해 책을 만들었고 현재까지 600여 권의 학술서적을 냈다.
“굉장히 좋은 기초도서들이지만 하나도 안 팔리는 책이에요. 대우재단에서 1980년부터 기초학문 서적 출판을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부진한 학문을 도와서 그 학문을 진흥시킨다는 게 목표였어요. 김우중 그 사람이 운이 나빠서 망했는데 여러모로 큰일을 한 사람이에요.”
민음사는 장기간 이어온 전집이나 총서를 많이 냈다. 박 회장은 “그게 내 취향이고 군소 출판사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서” 선호하기도 한단다. 출판사가 빚 때문에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악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힘든 오르막을 치고 올라가는 체력과 정신력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운이 좋았는지, 안 되겠다 싶은 위기 때마다 천사가 나타났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죠. 그게 아니면 망하는 거죠. 여기서 천사는 책이 잘 팔린 작가나 투자자가 되겠군요.”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느냐는 물음에 최근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 한 권을 지목한다.
“가령 이번에 신정아 책 같은 건 베스트셀러의 조건을 딱 갖춘 책이에요. 우선 유명인사가 박살나는 것이 사람들이 봤을 때 통쾌하죠. 다음은 내용이 섹슈얼하잖아요. 화제가 연속돼야 하고요.”
엄 대장이 좋아하는 산을 묻자 박 회장은 불쑥 “에베레스트”라고 답한다. 히말라야에 무척 가고 싶었지만 실은 가보지 못했다. 가려고 할 때마다 몸이 아파서 가질 못했다. 대신 창립 20주년을 맞았을 때 직원들을 두 팀으로 나눠 모두 히말라야에 보냈다. 히말라야 트레킹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인 1980년대에 그리했으니, 그만큼 산을 좋아했다는 증거다.
“여기 북한산도 직원들 데리고 여러 번 왔었죠.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산행을 제대로 못 하지만 예전에는 산에 관한 한 열렬한 팬이었죠.”
그의 이런 산에 대한 열정에 맞게 민음사에서 나온 산서도 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와 <에베레스트의 진실>이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처음 나왔을 때는 독자들의 별 반응이 없었는데 요즘은 인기가 올라서 몇 쇄를 찍었다고 한다. “산악인들에게 권해 주고 싶은 명저”라고 추천한다. 엄 대장도 이 책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예,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1996년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참사를 다룬 내용으로 알고 있는데요. 마침 당시에 히말라야 가까운 곳에서 제가 등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황들도 생생하게 알고 있죠. 그 때 죽었던 뉴질랜드 가이드도 잘 알던 친구였어요.”
“<에베레스트의 진실>은 그 곳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등반가들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냥 지나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어요. 읽어 보니 처절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8,000m 지역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는 거라고 봅니다.”
민음사 45년의 세월 동안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나왔고, 많은 작가들이 민음사를 통해 성장을 했고, 대가가 됐고 그리고 죽었다. 민음사는 거목이다. 풍성한 그늘과 열매를 내주는 뿌리 깊은 큰 나무다. 나무 아래서 자라는 사람은 바뀌지만 늘 같은 자리에서 든든하게 서있다.
“제 모토가 우리 회사와 함께 크는 저자. 함께 늙는 저자. 같이 죽는 저자입니다. 책 낸 작가들 지금은 많이들 죽었죠.”
정릉계곡 산책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 청둥오리 한 쌍이 물가에서 놀고 있다. 엄 대장이 “이야! 북한산에서 보기 힘든 광경인데요. 아주 좋은 징조 같습니다”하고 말하자, 박 회장이 “네, 목에 황금빛이 반들반들한 게 예쁘고, 부부애도 좋아보이네요”하고 받는다.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를 닮은 두 사람이 있어 숲이 한결 풍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