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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
오피니언뉴스 기사 승인일 : 2021.05.27.
글 :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지리산 뱀사골 동쪽 산록 품에서 만나는 일곱 암자
영원사 삼불사 실상사 등 3개의 절과 4개 암자 있는 것
대자연의 숭고함 속 한없이 작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곳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뱀사골의 동쪽 산록인 삼정산(1225m) 품에 있는 도솔암(兜率庵), 영원사(靈源寺),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文殊庵), 삼불사((三佛寺), 약수암(藥水庵), 실상사(實相寺) 등 세 군데의 절과 네 군데의 암자를 걷는 길이다.
이 길은 함양군 마천면 양정마을에서 시작하여 산내면의 실상사에서 마무리한다.
어제 내린 비는 미세먼지 가득한 대지를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오늘은 비 갠 뒤의 맑고 신선함으로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구름 없는 하늘, 햇볕은 내 머리 위로 내려 앉았다. 내내 나를 가두며 구름처럼 일던 번뇌는 실타래가 풀리듯 사라졌다.
#1. 지리산 뱀사골 동쪽 삼정산 자락에 있는 도솔암(兜率庵, 해발 1165m)
양정마을에서 출발하여 임도를 타고 2킬로 남짓 오르다 영원사를 앞에 두고 도솔암으로 향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천천히 걷는다. 길을 가다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어린 전나무를 본다. 도대체 살아날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살아내는 모습에 외경을 느낀다.
산을 타고 내리는 계곡물 소리에 마음이 고요해진다. 편안하던 길이 가파르다. 도솔암이 높은 곳에 자리 잡았으니 만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한다.
돌계단을 지나 도솔암 산문에 들어섰다. 병풍을 두르듯 산이 도솔암을 품에 안은 모양의 명당이다. 마당에 서서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니 천왕봉이 눈앞에 다가섰다.
#2. 영원사(靈源寺, 해발 895m)
도솔암을 내려와 임도로 300여 미터를 오르니 영원사다. 합천 해인사의 말사로 함양군 마천면 삼정산 동남쪽 중턱에 자리잡은 영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영원대사가 조선시대 스님인 점으로 미루어 조선 시대에 창건 되었음으로 짐작된다.
한 때는 지리산 안쪽에선 제일 큰 100칸이 넘는 큰 사찰로 큰 스님들이 많이 머물렀던 곳이었으나 6.25때 소실되어 지금은 세월의 야속함만 남아있다.
바람이 불자 봄빛을 가득 품은 연록의 나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마다 무성한 잎은 무리를 지어 웅성웅성 바람에 더 유난했다. 영원사 표지석을 지나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구도의 길을 따라 산문에 들어섰다. 정오를 넘긴 햇볕은 눈이 부시게 내렸지만 덥지도 않고 시원하다. 길게 가로로 이어진 영원사 오르는 길이 마치 인생길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문에 들어섰다. 법당의 편액을 바라보니 두류선림(頭流禪林)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 두류산으로, 영원사가 지리산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으니 당연하게 보인다.
법당 앞에 서서 아래를 바라본다. 탐스럽게 피어난 불두화 너머로 내가 걸어온 아스라한 길이 겹쳐 보인다. 내가 살아온 날이 길에 이입되어 한동안 장승처럼 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3. 상무주암(上無住庵, 해발 1162m)
영원사를 떠나 가파르게 산길을 올라야 한다. 크고 작은 돌이 있는 너덜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산죽이 지천이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한 생을 다하고 대나무가 진다고 그러는데 온통 산죽에 꽃이 피었다. 대꽃은 귀해서 수십 년이나 수백 년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는데 가득한 산죽꽃을 만났다.
지리산이 순례에 나선 내게 주는 귀한 선물인 듯싶다. 빗기재를 넘어 삼정산(1225m) 정상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돌아 칠암자 중 도솔암 다음으로 높은 상무주암에 도착했다.
상무주는 사람이 쉽게 걸음 하기 어려운 곳에 있기에 편액의 뜻과 일치한다. 상무주(上無住)는 일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니 이곳이 참선하기에는 최고의 길지가 아닌가.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이년 간 머물며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암자 내부의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수행하는 공간이라 잡인의 출입에 신경이 많이 쓰이나 보다. 아름다운 암자의 바깥 전경만 사진에 담았다. 암자 밖으로 돌담이 높고, 길도 잘 만들어 놓아 길 따라 지나가라는 뜻인가 보다. 그래서 상무주암을 지나면 사람 쉴 곳이 있고 ‘아니온 듯 다녀가시란’ 글귀를 두었나 보다.
#4. 문수암(文殊庵, 해발 1060m)
상무주암을 떠나 싱그런 나무의 향을 느끼며 호젓한 숲길을 따라 살짝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걷는다. 커다란 바위 아래 흐르는 약수가 길손의 목을 축인다.
길을 재촉하여 살짝 고개를 넘어 풍광이 아름다운 암자에 도달한다. 규모는 작지만 정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암자 뒤편 커다란 바위에는 자연의 ‘천인굴(일명 천용굴)’이 파여 있고, 이곳에선 마르지 않는 석간수가 흘러나와 문수암의 식수로 쓰인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 천여 명이 이곳에서 몸을 피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삼십 명이 있어도 가득한 이곳에 그만한 숫자가 있었다는 것은 과장된 전설이고, 사실이라면 아마도 이곳 근처 어느 장소에 많은 인원이 난을 피했으리라 새겨본다.
문수암 좁은 마당에 작은 의자가 놓여있다. 스님이 자리를 잡고 앉아 객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혹여 스님이 일어나실까 기대해보지만 한참을 그대로다. 의자에 앉아 넓게 펼쳐진 눈앞의 산을 바라보면 삼라만상을 품은 자연을 가슴에 한가득 품어보련만 자리에서 붙박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꼭 다시 오리라는 다짐과 함께 삼불사로 향한다.
#5. 삼불사(三佛寺, 해발 990m)
문수암에서 삼불사까지는 먼 거리는 아니지만, 오르내림도 있고 돌이 많은 너덜길이라 만만하지는 않다. 돌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새 삼불사가 눈앞이다. 행복한 칠암자 걷기에 몸은 힘이 드나 마음은 상쾌하다.
삼불사 앞의 요사채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비구니스님의 참선도량으로 알고 왔는데, 비구니스님은 보이지 않고 비구스님이 암자를 지키고 있다. 삼불사 본사보다 더 특이한 전각이 산신각이다.
스님의 말로는 여러 사찰의 산신각 중 이곳이 아주 영험하여 전국의 많은 분이 이곳에 온다고 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이다.
앞이 환히 트여있어서 금대산과 백운산까지 눈앞에 잡힐 듯하다. 한동안 눈을 팔다가 약수암으로 길을 잡는다.
#6. 약수암(藥水庵, 해발 560m)
약수암까지의 길은 아주 편안하고 최고의 길이다. 삼불사를 나서서 초입은 너덜길로 힘들고 오르내림이 심해서 고생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초반에만 잠깐 힘들고 내내 소나무 잎이 쌓인 부드러운 흙길이다.
약수암에 도착했다. 약수암은 경내에서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약수샘이 있어서 약수사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보광전(普光殿)의 목조 탱화는 보물인데 문이 닫혀있어서 보지 못해 안타깝다.
산중은 해가 평지보다 짧아 곧 어두워 진다. 마지막 실상사까지는 1.5킬로 남짓 해가 떨어지기 전 실상사를 보려면 마음이 급하다. 약수암을 나서 실상사로 향했다. 시간이 벌써 오후 여섯 시를 넘기고 있다.
#7. 실상사(實相寺, 해발 330m)
지리산 칠암자의 마지막 종착지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인 실상사다.
천왕봉과 마주하고 있는 대찰로 통일신라의 승려 흥천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국보10호인 백장암삼층석탑과 실상사삼층석탑(보물37호)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을 간직한 사찰이다.
특히 실상사 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불국사 석가탑 상층부를 복원할 때 이 탑을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길을 시작할 때는 까마득하지만 돌아보면 아쉽기만 하고 다시 그리워지는 게 길이다. 걷는 내내 지리산의 웅장한 능선과 천왕봉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작은 나와 대자연의 숭고함도 느끼며 나를 괴롭히던 근심을 하나씩 덜어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해서 걸은 칠암자 순례길은 나를 채우는 길이며, 동시에 나를 내려놓는 길이었다. 순례자는 선문 밖 석장승의 배웅을 받으며 산문을 나서 해탈교를 건너갔다.
● 박성기 도보여행자는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서출판 깊은샘' 대표이다. 일상에 쫓겨 바삐 살다가 어느 순간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이 궁금해져서 휴일이 되면 배낭과 카메라를 메고 우리나라 곳곳을 30년째 걷고 있다. 어떤 길이 펼쳐질지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날지 많은 기대와 소망을 안고 길을 나서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자의 기쁨'이 있다.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지안의 문화이야기] 지리산 암자 순례
불광미디어 기사 승인일 : 2021.09.30.
글 : 노승대
지리산 암자 순례를 하기로 했다.
3개 도에 걸쳐있는 지리산은 그 너른 산세만큼 수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골골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로 산속의 암자들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피아골 연곡사 큰 절도 탔다.
빨치산의 아지트가 된다 하여 토벌대가 태워버린 것이다.
화엄사나 연곡사 등이 살아남은 것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공로다. 그의 기념비가 화엄사에 있다.
지리산 줄기인 삼정산(1261m) 능선 자락에 있는 7암자는 15km에 이르는 긴 코스여서 일행이 전부 완주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칠선계곡 입구 금계마을에 사는 지리산 아우의 집에서 편히 잔 뒤 아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 도솔암으로 향했다.
그러나 차가 당도한 곳은 두 번째 목적지였다.
도솔암 남쪽 입구에 내려야 하는데 북쪽 입구로 데리고 온 것이다.
아우가 내 마음을 알고 있었나?
도솔암은 다음 인연을 기다리기로 하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여기서부터 6암자는 약 10km, 여유로운 마음으로 순례할 수 있었다.
7암자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 상무주암이다.
고려시대 보조국사(1158~1210)가 창건하고 2년간 수행하며 크게 깨달은 곳이고 근래에도 조계종 종정을 지내고 열반하신 혜암 스님이 정진하신 수행처다.
지금은 30여 년간 홀로 밭을 일구며 정진하시는 현기 스님이 머물고 계신다.
두 번째 암자인 영원사다. 통일신라시대 영원대사 창건이라 한다. 너와를 얹은 선방이 9채, 100칸이 넘는 방이 있었다고 한다. 두류선림이란 당호가 있다.
지리산은 조선시대까지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렀다. 백두의 정기가 흘러내린 산이란 뜻이다. 영원사 산신각의 자연산 돌계단이 옛 절 입구를 생각나게 한다.
영원사에서 오르막길을 올라와 빗기재에 서니 이제는 편한 능선길이다. 고려의 보조국사가 2년간 머물며 크게 깨달았다는 상무주암이다. 출입금지다.
통도사의 고승 경봉 스님의 상무주(上無住) 현판.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가 ‘上’이며 머무름이 없는 자리가 ‘無住’다. 나는 어디에 있나?
상무주암에서 홀로 비탈밭을 일구며 수행하고 계신 현기 노스님을 언뜻 뵌 것만으로도 발길이 가볍다. 문수암을 향해 돌담장을 낀 오솔길로 들어선다.
상무주암 좌선대에서 지리산 능선을 망연히 바라본다. 천왕봉부터 형제봉, 벽소령, 토끼봉, 반야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명당자리다. 떠나기 어렵다.
문수암이다. 해발 1100m로 널찍하게 파여있는 천인굴 앞에 지은 작은 암자다. 1965년 혜암 스님이 복원했다. 앞쪽으로 덕유산, 가야산도 조망된다.
문수암 현판도 경봉 스님(1892~1982) 글씨다. 불교계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큰스승이었다. 임종게가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였다.
암자 뒤편 천인굴은 절벽 아래 넓게 파인 석굴형태다. 임진왜란때는 마을 사람들이 이 석굴로 피신했었다고 한다. 천장 바위가 불에 그을려 새카맣다.
축대 끝에 겨우 서 있는 듯한 문수암의 해우소다. 살아 있으면 먹어야 하고 먹으면 누어야 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다. 인생 별거 아니네!
문수암 축대 아래 작은 텃밭에는 방울토마토가 저절로 익어 즐비하게 떨어졌다. 햇빛 듬뿍 받은 토마토, 그 맛이 기가 막히다. 그래, 바로 이맛이야.
삼불사는 조선시대에 창건한 사찰이지만 산속 마을 고향 집 같은 느낌이다. 큰 개울가 아랫마을이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이제부터는 계속 하산길이다.
약수암은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타지 않은 귀중한 암자다. 연륜이 묻어나는 보광전이 넉넉한 터에 듬직하게 서 있다. 1724년 천은 스님이 창건했다.
보광전 안에 모셔진 목각 아미타여래설법상은 보물 제421호다. 이러한 목각 후불탱은 6점이 남아 있는데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1782년 조성이다.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 편액은 제주도의 대표적 서예가 소암 현중화(1907~1997)의 작품이다. 그는 취중에 쓴 글씨가 명작이라고도 알려졌다.
약수암의 해우소는 대숲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이 일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계절마다 다른 소리, 누가 듣는가?
9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국사의 제자 편운화상의 승탑이다. 910년에 건립되었다. 후백제 견훤의 연호인 정개(正開) 10년이 쓰여 있다.
9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도 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진되고 석물만 남았다. 200여 년 뒤 침허대사가 300명 스님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중창하였다.
실상사에는 삼성각이 없고 보광전 옆에 칠성각이 있다. 1932년에 지은 건물이다. 조선후기에 사찰에 들어온 칠성신앙이 이때까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쌍탑 뒤 중앙에 있는 석등은 신라말기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화창이 8개, 기둥돌이 장구 모양, 지붕끝과 좌대 귀꽃이 잘 말해 준다. 디딤돌이 이채롭다.
노승대 :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지안의 문화이야기] 지리산 도솔암
불광미디어 기사 승인일 : 2021.11.04.
글 : 노승대
1박 2일 일정으로 지리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전 달에 삼정산 7암자를 순례하면서 첫 번째 암자인 도솔암을 들리지 못하고 6암자만 순례했기 때문이다.
이왕 내려가는 김에 단성 겁외사에도 들렸다.
성철 스님 생가터를 사찰로 만든 곳이다.
성철 스님이 출가 전에 수행했던 대원사도 참예했다.
지금은 석남사, 견성암과 함께 비구니스님 선방으로 유명하지만 초입의 계곡도 아름다운 곳이다.
잠은 개그맨 전유성 씨가 머물고 있는 인월 중군마을에서 잤다.
소탈하게 대접해 주시는 전유성 씨와 저녁도 함께하고 따님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제비’에서 맛있는 차도 마셨지만 사위가 보여주는 마술이 너무 재미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보여주는 마술인데 일행들은 훅~ 가고 말았다. 유쾌한 저녁이었다.
아침 7시에 전유성 씨가 맛있게 지어놓은 냄비 밥에 가져간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도솔암으로 올라갔다.
가는 길은 천연의 오솔길이다. 경사가 심한 곳도 있다. 그래도 마음을 쉬게 하는 길이어서 또 오고 싶은 길이다.
도솔암은 청매 선사(1548~1623)가 수행하시던 암자다.
산 정상에 가까운데도 맑은 샘이 흘러나오고 물맛 또한 빼어나다.
틀림없이 물맛 소믈리에가 감탄할 맛이다.
스님이 주시는 차도 얻어 마시며 1시간여를 머문 후 하산.
오도재 지리산조망공원을 거쳐 남계서원을 들린 후 상경길을 서둘렀다.
겁외사(劫外寺) 입구 누각의 주련글씨는 성철 스님이 처음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증도가>의 첫 구절이다. “배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무 살 청년이던 성철 스님은 건강 때문에 드나들던 대원사에서 참선을 시작했다. 생가터에 복원한 건물.
대원사 가는 길의 계곡 풍경. 아름다운 계곡길이어서 이제는 주차장에서 절까지 안전한 데크가 2km가량 설치되어 있다. 평일에는 절까지 차가 들어간다.
대원사 석탑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1784년에 다시 세운 탑이다. 성철 스님은 탑전에서 홀로 수행하며 42일 만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경지에 들었다.
지리산의 산신은 여산신이다. 마고할미, 마고선녀, 지리성모 등으로 부른다. 인근 사람들은 천왕할매라 한다. 대원사 산신각에도 여산신상과 탱화를 모셨다.
산신각 아래 정연하게 늘어선 장독대의 항아리들. 비구니사찰답게 정갈한 손길로 항상 어루만지는 듯 깨끗하고 야무지다. 이 절의 절밥을 먹고 싶어지네.
전유성 씨가 머물고 있는 중군마을 한옥집. 중군마을은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칠 때 큰 승리를 거둔 곳이라 한다. 우리는 2층 오른쪽 방에서 푹 쉬었다.
음정마을에서 벽소령으로 올라가는 작전도로에도 가을빛이 물들었다. 저 멀리 숲길을 비추는 햇살이 마치 다른 세계가 열리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조릿대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 그윽한 정취가 가득하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가볍다. 온몸이 산 기운으로 채워지니 어느 신선도 부럽지 않다.
갑자기 된서리가 내린 탓으로 지리산 단풍도 그렇게 곱지가 않다. 그래도 이 오솔길에는 이렇게 가을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황홀하다.
하늘이 감추었던 땅이었는가? 이렇듯 산정 가까운 곳에 얕은 산 능선을 뒤로하고 도솔암 법당이 남향으로 앉았다. 바람도 없어 조용하고 따뜻하다.
너른 마당 서쪽에는 소나무 그늘 아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올망졸망 모여 담뿍 햇살을 쐬고 있다. 바람 불 때는 강풍인지라 쟁반 위에 돌도 얹혔다.
도솔암 바깥쪽 샘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 듯하지만 꽤 오랫동안 암자의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파이프로 연결해 어디든지 끌어다 쓰는 호시절이다.
도솔암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 정견 스님이 스승 혜암 스님을 모시고 1985년 무렵 다시 세웠다. 현판글씨가 종정을 역임하신 혜암 스님 글씨다.
도솔암에서 내려와 오도재 지리산조망공원으로 향했다. 지리산 전체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장쾌한 지리산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은 9곳이다. 함양 남계서원도 그중 하나다.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대원군 서원철폐령에도 무사했다.
조선시대 사대부 학맥은 고려 말 야은 길재에서 시작된다. 길재는 김숙자를 키웠고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을 가르쳤으며 김종직은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 강희맹 등을 배출했다.
김굉필의 제자가 바로 조광조다. 정여창은 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되었지만 사대부가 정계에 포진한 후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판각 문 위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호랑이가 삼재를 물리친다는 민간풍속이 서원에도 나타난 것이다. 풍영루 누각에도 민간의 민화가 많이 그려졌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2년 옛터에 중건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된 서원이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지리산 삼정산 7암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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