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부 버스를 선두로 해서 감은사지로 향해 갔다. 왼쪽으로 당당하고 힘찬 삼층탑 두개가 보인다. 모두 내려서 동탑으로 모였다. 유명한 곳이니까 정안거사님이 개략적으로 간략하게 설명해주셨다. 문무대왕 때 지어졌지만 완공은 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다.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지은 절이지만 이름은 대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한 것이다. 어지러운 시운에 전쟁을 하며 통일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동해의 용이 되었건만 후손들은 그 유산을 지키지 못하고 절터에 덩그런 탑만 세워두고 세월을 탑에다 묻으며 쌓고 있다. “내가 죽은 뒤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해서 감은사 금당은 특수한 구조로 되어 왕의 화신인 용이 드나들도록 만들어져 있었고 절 앞에 연못, 대종천, 그리고 동해바다가 문무대왕의 화신이 드나들던 길이였다고 한다. 불교미술에 대해 잘 몰라 예술성, 미적승화 이런 것은 아직 어디에서 연결을 지어야할지 모르는 아둔한 사람이다.
역사적인 의미 하나는 감은사가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바뀌는 신라의 일탑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일금당으로 바뀌는 과정에 보이는 최초의 절이라고 한다. 탑 높이가 13.4M이니까 굉장히 높은 탑인데 어른이 서도 키가 하층 기단부를 넘지 못한다. 정안거사님이 서 있을때 보았는데 난쟁이 같이 보였다. 우리는 동탑 3바퀴, 서탑 3바퀴 탑돌이를 했다. 김영임의 노래 ‘탑돌이’를 들으면 “도~세 도~~세 108번을 도세~”라고 시작하는데 우리는 시간상 3바꾸만 돌고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마쳤다. 탐돌이라고 하면 전설의 고향에서 달밤에 한 많은 여인이 하얀 소복을 입고 남몰래 혼자서 탑돌이 하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 무의식적으로 합장하고 따라 돌다가 아니다 싶어서 흔히 말하는 대의명분이지만 국태민안을 기원해 보았다. 왜냐하면 감은사지이니까. 단체사진을 찍고 돌아 나오다가 널부러져 있는 주춧돌을 모아둔 곳을 보니까 마음이 처연해진다.
버스로 바로 근처인 동해바다 문무대왕릉으로 갔다. 지난 밤의 세찬 비의 일기가 말했듯이 파도가 높고 거세었다. 그런데 맑은 날 보다 훨씬 감동이 있었다. 문무대왕의 영기가 온바다에 서린 듯 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의 거센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중릉을 자처한 군주의 무덤이다. 문무대왕은 임종시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하고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지 말고 임종 후 왕궁의 고문 밖 뜰에서 서역의 법식대로 화장하라고 유언하셨다고 한다. 대왕암의 돌섬 가운데 바닷물이 드나드는 십자형 못이 있고 못 한 가운데 뚜껑돌이 놓여 있다고 한다. 오늘은 그 대왕암에 파도가 와서 부서진다. 문무대왕하면 또 萬波息笛만파식적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대왕의 아들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떠다녀서 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가니 용이 옥대를 바쳤다. 용은 선왕이 시켜서 보낸 것인데 젓대를 만들어 불자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장마가 그치므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젓대(피리)라는 뜻이다.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는 지금 거센 파도가 쉬임없이 달려와 부서지고 저 아득한 먼 바다로부터 파도는 끊임없이 일어나 이 바닷가까지 밀려올 것이다. 그 파도가 우리의 업파랑과 같았다. 문무대왕이 만파식적으로 나라의 우환을 없애주었듯이 우리는 어서 빨리 대광명의 지혜를 증득하여야 생사의 업에서 해탈을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아직은 생사고해 헤매는 중생이니 부처님의 자비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파도가 가장 거세게 칠 때가 멋있다며 바람이 세찬 바닷가에서 지부별로 사진을 찍었다.
이제 이번 성지순례의 절정인 남산답사를 하러 간다. 철야한 사람들 피곤하다고 박카스도 마시고 과자도 이것저것 뜯어서 먹고 산에 갈 때 먹는다고 사탕이랑 몇 가지를 챙겼다. 어른들이 아이들 보다 더 유난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 우리의 순례코스는 ‘삼릉에서 용장까지’로 남산답사 일번지이다. 버스를 망월사 주차장에 대고 점심으로 먹을 김밥 도시락과 생수 1명을 배급 받아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의 남산 가이드이신 분을 따라 망월사 우측으로 가면서 남산답사는 시작되었다. 머리도 좋지 않으면서 메모지도 없이 그냥 들었다. 왔다갔다 헷갈리는 부분이 있고 계속 보는 것이 불상에 마애불이니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이 보이며 처음의 진지한 신심은 사라지고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얕은 마음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배리삼존불 앞에서 우선 가이드님으로부터 답사에 대한 사전 설명을 들었다. 가이드를 하시는 분은 첫인상보다 갈수록 사람을 감동시키는 분이셨다. 현재 경주남산연구소에 계시며 성함은 김구석이시고 사이버세상에서는 아이디가 ‘남산구석님’이시다. 벌써 30년동안 남산을 다니시고 남산을 1000번 넘게 올랐다고 하신다. 이 천 번이라는 숫자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님을 내가 안다. 금강경 삼천 번 독송한다고(앗, 나의 실수!! 이런 망언을.~~ㅎㅎ)표 그려놓고 지워나가는데 백의 고개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힘듦을 안다. 차라리 절 삼천 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분에 대해 이리 자세한 것은 정말 오늘 답사에 부처님이 보내주신 문수보살이시다. 안 그래도 선생님께서도 오늘 원래는 당신이 아닌데 선약이 취소되어서 우리에게로 오신거란다. 철야법회하고 온 우리를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셨고 덕분에 다른 답사객보다 애정이 쏟아진다고 하셨다. 아니 그러겠는가. 부처님이라면 열혈남아가 되는 해인사수련동문회가 아니던가. 석불의 모습이라던가 미술사적 이야기는 문외한인 까닭도 있고 다른 자료로 쉽게 찾아 볼 수 있기에 많이 생략하고 우리가 발로 걸은 길과 남산의 바람과 햇살과 들은 이야기 위주로 이야기해야겠다. 오늘까지 합쳐 남산을 4번 간 사람이 천년의 세월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정도도 못 되지 싶다.
경주 남산은 천 년 신라의 문화예술과 정신을 그 모습 그 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직 신라가 부처가 천여 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미소 짓고 있는 곳이다. 남산선생님은 이러한 유산을 볼 때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신라인의 마음으로 보아야한다고 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그대로 보아야한다고 하셨다. 과연 신라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남산을 불교의 성산으로 만들어 영원한 해탈의 세계를 꾸며놓았을까? 지금까지 중생을 기다리는 남산은 환하나 눈부시지 않게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있다.
배리 삼존불에서 20여분 동안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앞으로의 진행에 사전지식 같은 것이다. 배리 삼존불은 보호각이 씌어져 있어 얼굴에 미소가 없었다. 햇살이 비칠 때는 티없이 맑은 아이의 천진무구한 웃음이라고 하시며 보호각이 없을 때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다들 감탄했다. 자연과의 일치, 조화를 이루고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나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다양성이 유적의 특징인데 보호라는 명제 아래 정작 빛을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답사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가야했다. 남산에는 화장실이 없는데 우리 답사가 9시부터 시작해서 4시 정도에 끝나니 미리 대비를 하라는 것이였다.
우르르 선생님을 따라 석불좌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가 아무리 불자이지만 선생님은 삼릉을 언급하지 않고 유유히 지나쳐버렸다. 가다가 계곡에 파묻혀 형태만 조금 보이는 탑의 일부를 보았다. 아직 이렇게 묻혀있을 가능성이 높은 유산이 많을 거라고 했다. 곧이어 석불좌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 목이 없는 석불좌상이 바위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잔인하게도 목을 치고 두 손을 잘라내었다. 옷주름과 매듭이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부처님이신데 불교 탄압의 참수형을 당하셨다. 이 석상도 땅에 파묻혀 있던 것을 발견해서 파내어 가까운 바윗돌위에 자리 잡은 것이 여기라고 했다. 석불좌상 왼쪽 11시 방향으로 50m정도 떨어진 곳에 기둥처럼 솟은 바위에 마애관세음보살입상이 있다. 직접 가지는 않고 석불좌상 앞에서 설명만 들었다. 1.5m의 아담한 키에 입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이시다. 날래신 남산거사님과 두 보살님이 직접 다녀오신다. 나도 갔다 오려다가 선생님 설명을 더 듣겠다고 그냥 참았다. 완전하게 말하자면 마애관세음보살입상은 하체부분이 조각이 덜 된 미완성의 작품이기에 하늘에서 하강하는 듯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인지 마애선각육존불 앞에서인지 헷갈리는데 선생님이 시를 한 수 읊조려 주셨다.
남산
시. 김원룡
남산의 소나무 옆
두리뭉실한 바위가 갑자기 부처가 되고
흐르던 시간이 소리없이 멎어서
신라로 돌아간다
천년! 부처는 그렇게 앉아계시고
천년! 부처는 그렇게 서 계신 것이다.
부처는 바위, 바위는 부처
우러러 보는 사람도 부처
모두가 피가 통하는 한마음 한 몸이다.
푸른 하늘, 흰 구름
구름 그대로, 바위 그대로 그저 그대로다.
천년이 왔다 가는 그저 그대로다.
첫댓글 그 자리에 서면 그렇게 하나로 통할까요?....저도 언젠간 인연이 닿길 바라믄서...잘 머물다 가여~~*
네모님 답사기행 글을 읽고 있으니 기분 좋으리만큼 차가운 새벽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기분이랄까요...너무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