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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과 기녀(妓女) 소춘풍(笑春風)
성종을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는 중국 요(堯) 나라 순(舜) 임금처럼 지혜로운 왕이지만 밤이면 하나라의 걸(桀) 임금이나 상나라 주(紂) 임금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긴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유흥을 즐겼다고 말한다. 당시 어우동은 왕실 종친과 관료들과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과 잠자리를 가졌던 어우동이 이번에는 노비와 간통을 했다. 임금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반상의 질서를 깨뜨린 사실이 왕의 귀에 들어간다. 성종은 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 교부대시(絞不待時)를 명령한다. 의금부에 지시해 시간을 끌지 않고 즉각 목에 올가미를 메어 사형시켰다. 성종의 여색에 탐취한 단면이다.
한 번은 성종이 의정부, 육조판서, 경연당상, 승지, 홍문관, 예문관 등 고위관료와 함께 장악원에서 달구경을 한다. 마침 구름이 달을 가리자 승지 조극치(曹克治)가 기생과 성행위를 벌렸다. 성종도 알았으나 자신이 워낙 여색을 탐하는 데다 남자 허리아래 일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여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성종은 전국에서 미모가 빼어나고 가무의 자질이 뛰어난 기생들을 뽑아 서울로 불러 올리게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뽑혀 올라 온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고 한다.
그때, 풍자와 해학과 기지가 뛰어난 영흥기생 소춘풍에 대한 소문이 한량과 양반들 사이에 퍼졌다. 성종도 이를 듣고 소춘풍을 불러 올리게 한다.
서울에 뽑혀 온 소춘풍은 그때부터 궁중곡연(宮中曲宴)에만 참석, 임금과 고관대작들을 상대하여 더욱 이름을 떨쳤다. 연회 중 좌중을 사로잡는 소춘풍의 해학과 기지는 성종의 아낌과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고 모든 대신들도 그녀의 뛰어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성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간 소춘풍은 의아했다. 궁중에 연회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들어왔으나, 그런 기미는 전혀 없고 보좌에 앉아 있는 성종의 용안이 그날따라 더욱 쓸쓸해 보였다.
"상감마마, 오늘은 무슨 연회이옵니까?"
"아니다. 오늘은 연회가 없다."
"그러하오면?"
"음, 오늘은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 너를 불렀느니라."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게 한 성종은 평소보다 더욱 다감하게 소춘풍을 대했다. 약주 몇 잔을 든 성종은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로
"오늘은 너와 같이 지내고 싶구나"
하고 그윽한 눈빛을 보낸다. 소춘풍은 예상을 했었으나 갑자기 대답할 말을 잊는다. 아무리 그 음성이 부드러울지라도 지엄한 왕의 명을 거역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소 흠모해마지 않았던 왕을 하룻밤만이라도 모시고 싶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그 하룻밤의 인연으로 하여 왕의 법도를 따라 평생 규방의 외로움을 참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춘풍이 말없이 머뭇거리자
"왜 마음이 내키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그 대답이 애매하구나"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소춘풍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종의 풍류와 남녀 간의 상사지정에 관대함을 알고 있는 그녀는 용기를 내었다.
"황공하오나.... 오늘 성상을 뫼시면 그 후부터는 평생 감당키 어려운 많은 구속을 받으며 살아야 할 일이..."
"음, 네 말이 맞구나. 과인은 일국의 군주이지만 인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너는 인생의 군주로다."
"......"
"알았다. 지금의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술이나 마음껏 마시자."
소춘풍은 쓸쓸한 성종의 모습을 보면서 임금만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늦은 밤에 어떤 한량이 소춘풍을 찾아왔다.
"여봐라, 이 집이 천하 명기 소춘풍 집이냐?"
소춘풍은 어둑한 마당에 서 있는 나그네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어찌 아시고 저를 찾으셨나이까?"
"하하, 천하 한량을 자처하는 내가 천하 명기 소춘풍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느냐?"
등불을 밝힌 소춘풍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하하하, 너무 놀라지 말아라. 오늘은 대궐이 아닌 너의 집, 임금이 아닌 지나는 한량의 자격으로 너를 찾은 것이니 달리 생각 말아라."
"하오나..."
"허허, 걱정 말래두. 꽃을 찾아온 한 마리의 나비라지 않느냐? 어서 주안상이나 가져오지 않고 뭘 그리 당황하느냐?"
"네...."
불을 끄고 금침에 들었다. 성종은 팔을 뻗어 소춘풍의 손을 더듬어 잡고 살며시 끌어다 가슴에 안았다.
"나는 13살 철없는 나이로 왕이 되어 20여 년간 권세와 아첨 속에서 허깨비로 살아왔다. 오늘 저녁 너로 하여 나 자신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다시없는 기쁨을 맛보고 싶구나. 군왕이 아닌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겠느냐?"
"오직 황공하올뿐이옵니다"
그날 밤, 성종과 소춘풍은 군주와 천기의 신분이 아니라,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 아니 한 사람의 풍류남아와 정염에 가슴 설레는 여인으로 밤이 새도록 사랑을 불태웠다.
다음 날 새벽, 소춘풍의 집을 나서는 성종은 이렇게 다짐을 받는다.
"오늘 이후도 전과 다름없이 궁중회연에 참석하여 주겠느냐?"
"여부가 있사옵니까. 다만 오늘 이후부터는 군주를 뫼시는 기녀로서 뫼시겠사옵니다."
그 후에도 성종은 궁중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소춘풍을 불렀다. 그녀도 전과 다름없이 발랄하게 행동하였다.
일개 천기(賤妓)의 몸으로 군왕(君王)을 모시고도 속박의 몸이 되기를 거부한 여인. 인생을 자유분방하게 산 기녀, 그녀가 소춘풍(笑春風)이다.
소춘풍은 ‘봄바람을 웃는다’는 뜻으로 그것은 '인생을 잠깐 스치는 봄바람처럼 우습게 본다'는 뜻도 되고 달리 보면 '세상사 봄바람처럼 덧없다라는 달관한 자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함경도 두메산골 마을에 홀로 사는 과부가 있었다. 원체 박색이어 그 과부를 업어 가려는 사람도 없어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을 원하는 남정네한테 쉽게 몸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석양 무렵 칠십이 다 된 늙은 탁발승이 과부의 집에서 머무르기를 청했다. 그날 밤 노승은 과부와의 동침을 요구하며 어젯밤의 꿈 얘기를 했다. 꿈에 만경창파가 눈앞에 전개되더니 잠시 후 망망대해 한 복판에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오른다. 그 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꽃이 자꾸만 커져 바다 전체가 꽃 한 송이로 가득 차 버렸다는 것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 과부도 그 전날 저녁에 산속에서 웬 백발노인이 과부에게 연꽃 한 송이를 주며 집에 가지고 가 정성스럽게 키우라면서 사라지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본래 남자라면 젊은이든 늙은이든 가리지 않았던 과부는 그날 밤 노승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노승은 떠나면서 애가 태어난 후에는 상관없으나, 애가 태어나기까지는 일체의 외간 남자를 삼가라는 다짐을 했다. 떠나는 노승에게 과부는 이름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어느 절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떠도는 몸이라고만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과부는 그날부터 일체의 남자를 거절하고 열 달 후 어린애를 낳았는데 태어난 아이가 소춘풍이다.
이렇게 하여 성도 이름도 모르는 늙은 탁발승에게서 태어난 소춘풍은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났고 머리가 총명하였다. 5살 때부터 쌍용사의 선원에서 글과 불경을 배웠고 열 살이 지났을 때에는 불경에 무불통지(無不通知)했다 한다. 그녀가 12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쌍룡사에서 스님이 되기를 권했으나 거절하고 있다가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어느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영흥으로 오게 되었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 수업을 받았다. 어린 기생은 15, 6세가 되면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여 성인식을 올려야 했는데,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재주에 많은 부자들이 서로 거금을 주고 머리를 얹어 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이를 뿌리치고 스스로 가난한 선비를 택하였다.
돈은 나중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소춘풍은 고이 간직해 온 첫 순정만은 돈으로 살려는 남자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에 처음이자 한번인 순정을 바치는 것이라면 비록 기생이지만 아무나 하는 사랑, 이별처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후에 명성이 높아질수록 돈 많은 한량들이 문전에 줄을 이었으나,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와도 풍류를 모르는 남자에게는 절대로 몸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 풍류를 아는 한량만은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성종은 군신들과 자주 술자리를 하면서 즐겼는데 한 번은 소춘풍에게 행주(行酒)를 하게 했다. 행주란 임금을 대신해서 군신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술을 따르는 것이다. 소춘풍이 술잔을 들고 문신인 영상 앞에 나아가 잔을 권하며 노래한다.
당우(唐虞)를 어제본 듯 한당송(漢唐宋)을 오늘 본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저 설대 역력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 태평시대를 이룩한 요순시대를 어제 본 듯하고 중국문화의 바탕을 이룬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 문화를 오늘 본 듯하다. 선비들이 이 같을 진대 어찌 선비들을 두고 제자리가 어딘지도 모르는 무인武人들을 따르겠는가 하고 노래한다.
그러자 문신들은 좋아하지만 무신들은 화를 벌컥 냈다.
소춘풍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이번엔 무신 출신 병조판서 앞으로 가서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 마오
문무일체(文武一體)인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앞에서 문신들에게 한말은 우스개 말이었소. 노여워 마시오, 문과 무가 하나인줄 나도 알고 있는데 훤칠하고 씩씩한 무관들을 아니 따르고 어쩌겠습니까 하자 무신들의 화가 눈 녹 듯 녹아버렸다.
소춘풍은 다시 한번 노래를 부른다.
제(齊)도 대국(大國)이요 초(楚)도 역대국(亦大國)이라
조그만 등국(藤國)이 간어제초(間於齊楚)하였으니
두어라 이 다 좋으니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제나라(문신)도 큰 나라요 초나라(무신)도 역시 큰 나라입니다. 그사이에 조그만 등나라(소춘풍)가 끼었으니 등나라는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기겠소.
소춘풍은 조정의 문무고관들을 울렸다가 웃겨버렸다.
한때 어색했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손자병법에 싸움이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긴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했다. 수만 백성 위에 군림하고 수백 번의 싸움에 이긴 재상과 장수들과의 싸움은 이미 소춘풍 승리였다. 소춘풍은 노래 한곡으로 이것을 확인한 것이다.
소춘풍은 그저 노래만 불렀던 것이 아니다. 한낱 기생의 입담에 놀아난 고관들의 가련한 모습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종은 이 장면을 보고 비단과 명주 그리고 호랑이 가죽을 소춘풍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성종이 죽고 난 후, 소춘풍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소춘풍은 자신의 고향집을 찾는다. 그러나 수양어머니 마저 세상을 뜬 뒤였다. 어머니가 가끔 말하던 운지대사를 찾아 석왕사에 갔으나 금강산 유점사에서 입적했다는 말을 듣는다. 어쩌면 그 중이 자신의 아버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낙을 잃어버린 소춘풍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주지스님에게 애원해 머리를 깎고 운지대사의 법사에 참석한다. 소춘풍의 법명은 운심(雲心). 그때 그녀 나이 28세였다.
누가 이런 여인을 보고 단순히 천한 기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요조숙녀도 이 같지는 못할 것이다.
충북 괴산출생 역사,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저서 조선여속고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유식한 여자들을 네 종류로 구분했다.
양반집 부녀자로 글을 아는 여자, 양반 댁 부녀자로 시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 양반집 첩실로 시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 그리고 교방기녀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다.
이들을 시와 그림의 우열로 나누면 교방기녀가 첫째요. 양반첩실이 둘째, 다음이 양반부녀자가 되는데 이는 그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정감(情感)과 감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사대부 아니고는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 사람대접을 받는 순위는 사대부 남성, 양반여성, 서자녀, 양첩, 천첩, 양민, 기녀, 관노, 사노를 포함한 천인 순이다. 그런데도 최하 계층인 기녀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은 사대부들의 말을 알아듣게 만들어서 사대부 남성 그들이 즐기기 위해서였다.
흔히들 기생을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른다.
그렇다고 기생모두가 해어화는 될 수 없었다. 돈과 색만 밝힌 창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규방 규수들이 집안 깊숙한 곳에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일부기녀들은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웃음과 몸을 팔았다.
기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고대부족사회의 무녀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이다.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시절, 사제인 무녀가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고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가와 결합해 근대의 기생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얘기다.
조선 중기 이후 기생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유교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과 예술이 기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황진이, 이매창 같은 명기들이 이름을 날렸다.
한편 조선 말기에는 기생들을 일패(一牌),이패(二牌), 삼패(三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일패는 전통 무가(舞歌)의 보존과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며 대부분 관기였다. 그들은 내부 규율이 엄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패는 밀매음(密賣淫)을 주로 한 기생들이고 삼패는 공창(公娼)기능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거금을 주고 소실을 삼고자 했던 친일파에게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한테 주라고 거절했던 진주기생 산홍(山紅)과 일본 경무총감이 독립군의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돈 뭉치를 주자 이를 뿌리친 춘외춘(春外春) 같은 애국심을 가진 기생도 있었다.
소춘풍 같은 여인은 일패중의 일패였음이 분명하다.
소위 해어화라고 불릴 수 있는 기생은 자기만의 특별한 재능과 의리, 나름대로의 정조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임기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