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의 유파가 생겨났다. 르네상스 이래 이어진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같은 서구 철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고한 이 철학은 인간의 존재,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적인 실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 불렸다. ‘존재와 시간(Seit Und Zeit)’(1927)은 실존주의 철학의 기반을 마련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자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적 작품으로 평가 받는 책이다. 출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난해한 내용과 해석을 둘러싼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명을 얻고 있는 신(新)고전이다.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서론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에서 나타나 있듯이 마르틴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 철학의 핵심 과제였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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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와 시간 | 존재에 관한 질문과 고민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도 이것을 철학적으로 그 의미에 천착했던 예가 없었을 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전통을 철저히 들여다 봄으로써 전통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존 전통 서양 철학에서 ‘존재’가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의 철학자들은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정작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철학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 또한 간과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존재와 관련된 삶이나 죽음, 시간성이나 본래성 같은 개념들은 과학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 고유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기존 서구 철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실존주의를 정립해나가기 시작한 지점도 바로 여기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19세기까지의 서양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 정의하며 독단적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즉 인간을 당연히 존재하는 사물의 하나처럼 여김으로써 인간소외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서구 철학의 흐름을 바로잡고 인간 존재의 의미, 나아가 존재한다는 것의 일반 의미를 밝히고자 했고 10여 년에 걸친 철학적 성찰 끝에 플라톤으로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에 이르는 형이상학을 새롭게 조명하며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구축했다.
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생각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마르틴 하이데거는 거꾸로 ‘존재한다’에 방점을 찍는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시각에 따르면, 이마누엘 칸트의 명제에서는 ‘존재’의 의미가 전혀 탐구되지 않고 다만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기에 결국에는 ‘생각’의 의미마저 잃어버린다. ‘나’를 정신적 주체로 고정화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선을 그어 놓고 그 차이점과 정신의 본질을 논의하느라 정작 ‘나’의 존재양상 즉 실존을 망각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인간을 자연과 아무리 명확하게 구분하더라도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각각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서구 철학의 중심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옮겨 놓았다. 덕분에 인간, 세계, 시간, 존재 같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대답해주지 못했던 문제들이 철학의 틀 안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실존주의는 현대 철학 및 문학, 예술론, 언어학, 인간학, 생태학 등 정신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존재는 시간화하며 세계 속에서 공존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시간과 존재’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책의 1부는 ‘현존재에 대한 준비적인 기초분석’이고 2부는 ‘현존재와 시간성’일 정도로 현존재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키워드이다.
현존재란 과거 인간으로 통칭되던 것에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더한 개념이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나를 현재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의 의미를 시간성이라는 틀 안에서 밝혀내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시간성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시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저자에 따르면 시간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화하는 것’이며 시간화는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라 ‘도래’(자신보다 앞서다)-‘기재’(이미 존재하다)-‘현전’(존재와 함께 존재한다)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시간은 무한하지만 시간성은 유한하다. 이는 현존재가 죽음과 관련된 존재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거나 불편하거나 모든 시대와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근원적 시간’이라고 부르고 현존재의 존재 의미가 시간성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마르틴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 의미는 현존재의 분석을 통해 가능해진다. ‘나’는 ‘존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항상 다른 존재들과 접촉하고 교류한다. 나의 실존과 다른 것들의 실재성이 만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또한 ‘존재’는 단순히 ‘있다’는 것을 넘어 서로를 필요로 하는 통일적인 현상을 구성하는 내적인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갖가지 존재들이 출현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존재의 출현에 노출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하며 비로소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 삶은 곧 존재의 무구한 세계라고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존재의 세계’는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 조화롭게 펼쳐지는 진리의 세계다. 즉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단선적인 주-객 관계가 아니라 존재와 세계 사이에 무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복합적인 관계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여 이용하는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세계 안에 거주하는 만물을 아낌없이 보살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처럼 마르틴 하이데거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론적 천착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일상과 현실에 굴복해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인간의 ‘퇴락’을 안타까워했고 인간이 가장 적나라한 본래의 자기 존재와 대면할 것을 주장했다. 관습과 전통 속에 매몰된 채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존재와 세계에 대한 개념을 각성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앞을 내다보고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자신의 존재와 대면할 때 인간은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보듬으며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집필한 궁극적인 목표이다.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와 같은 ‘존재와 시간’의 철학적 사고 밑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깔려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서양의 역사가 수천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도달해 있는 지점, 즉 현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근대의 기계 문명이 인간의 소외를 가져왔다는 거시적 통찰과 1, 2차 세계 대전으로 인류의 진보라는 낙관론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시대적 상황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뛰어난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과거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토대로 미래에 대한 통찰을 내놓았다. 그는 앞으로 인류역사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의지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만큼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꿰뚫어보았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무엇보다 주목했던 부분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힘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혹은 조건들에 마음을 뺏겨 자기도 모르는 새 타인의 지배 하에 들어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그저 남과 다를 바 없이 획일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의 인간상이었다. 그의 주장은 1, 2차 세계대전 이후 불안과 동요가 지배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인류의 최고 수준이라 여겨왔던 유럽 문명에 절망하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자각하고 있던 인간의 실존을 예리하게 짚어 내며 커다란 공감을 얻어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길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만들어낸 성과도,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화려하고 편리한 도구도 결코 아니다. 결국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고독하고 유한한 자신의 존재를 불안 속에서 자각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디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미를 밝힐 수 있다”는 것. 그가 ‘존재와 시간’을 집필한 또 하나의 목적은 과학과 기계문명이라는 현실로부터 인간의 삶이 가진 다양한 차원과 풍부한 논리를 보존하고 되살리고자 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