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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24일 월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수도회] 관대함과 자비와 희생을 통한 영혼의 치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4,32─5,8
† 복음 루카 13,10-17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한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열여덟 해란 긴 기간을
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도 없이 살았다면, 그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갑니다.
치유와 기적은 하느님 자비의 결과이고, 그 자비는 ‘측은지심’, 곧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누려야 할 인간의 본디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는 ‘통애’(痛愛)에서 시작됩니다. ‘통애’(痛愛)란 말 그대로
‘아프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내 아픔[痛]으로
공감하면서 상대방을 향해 먼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행위[愛]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통애’를
말씀으로, 삶으로 세상에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힘조차 없이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치유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녀의 보속의 삶에 맞갖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마음과 정반대로,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를
인간의 규범과 원칙에 가두려는 회당장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안식일에 자기의 동물들에게는 먹이를 먹이면서도,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여전히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사탄에 묶여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분명히 물으십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자비를 입은 우리는 자비를 베푸는 삶에
초대되었습니다. 자비의 실천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감사의 말만 하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말씀이 실천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2─5,8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종종 자기계발 책을 둘러봅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구입하는 책도
있지만, 사실은 책 제목이 재미있어서 둘러 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계발
책들은 제목 자체가 참으로 자극적입니다. 이 책만 보면 정말로 만능이
될 것 같고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책을 읽은 단 며칠 만에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서 공동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취업이 안 되어 고생하고 있어도 이 책만 있으면 대기업에도 거뜬하게
들어갈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돈을 그냥 내 주머니로 다 쓸어 모을
수 있다는 유혹을 하는 책도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정말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로또
복권을 구입하면서 1등을 꿈꾸는 것보다도 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달달 외운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책의 제목처럼 실제에서 이루질 수 있으려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몸으로 실천해야지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지극히 실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을 위한 다짐들, 건강을 위한 많은 생각들, 지금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생각 등을 볼 때, 지금까지 수십 번 변화를
이루고도 남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별 성과를 이루지 못할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으로만 막연한 변화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이렇게 하면 변화될 거야.’ 정도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또 다른 사람을 고쳐줄까봐 군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안식일법에 의거해서 타당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지요.
그러나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는 이 여인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안식일은 이 회당장의 생각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닙니다. 6일의 창조를 마친 하느님께서
쉬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루를 쉼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당시 근동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이 쉬는
날이 있기는 했습니다. 즉, 보름 일하고 하루를 쉬는 구조였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획기적으로 6일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안식일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바로 인간을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푼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날인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한 회당장처럼 이론적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머릿속에
담고 따라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실천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진정한 변화가 내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변할 수 없는 것은 조용히 받아들이는 힘, 변해야만 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R.니부어).
어제 특강 다녀온 인천의 갈산동 성당입니다.
미디어의 공격
현재 한국인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접하는 미디어의 종류와 시간을
적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문 읽기 30분, 책 읽기 23분, 라디오 청취 1시간 1분, 태블릿PC
사용 1시간 28분, 노트북 사용 1시간 50분, 스마트폰 사용 1시간 57분,
TV 시청은 3시간 9분이라고 합니다. 이를 전부 더하면 자그마치
10시간 18분이나 됩니다. 이는 곧 매일 엄청난 미디어 메시지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하루가 100시간이면 10시간 정도야 10분의 1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이라는 점을 기억할 때, 10시간은
엄청난 양의 시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미디어 메시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남의 생각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위 ‘카더라(~하더라) 통신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다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현명함도 사라집니다. 그저 자극적인 메시자가 동물적인 반응만
촉발할 뿐입니다. 깊은 묵상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미디어 메시지를 보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되면 어떨까요? 분명히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디어의 공격에 무방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관대함과 자비와 희생을 통한 영혼의 치유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관대함과 자비와 희생을 통한 영혼의 치유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어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고
말씀하시면서 “손을 얹으시어”(13,12-13) 치유해주십니다(13,11-13).
그러자 그녀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13,13)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에 옮기신 것입니다.
우선 이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도 없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으니 나날이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고 몸뚱이 하나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는 날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하니
사람들을 찾아가 생각과 정서를 나누고, 회당에 찾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단순한 관계 단절 그
이상이었습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한’ 상태는 자유가
구속되고 창조 활동이 멈추어버린 상태를 말하지요. 병상에서 지내온
‘열여덟 해’는 소외와 속박의 암흑을 헤맬 수밖에 없었던 극한의
비참함과 죽음의 밑바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녀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시고, ‘아브라함의
딸’(13,16)이라 불러 그 ‘존귀함’을 소중히 여기시어 치유해주셨습니다.
이 치유는 단순한 육신의 치유가 아니라 절망과의 구렁에 빠진
그녀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소외와 단절과 구속으로 갇힌 영혼에
자유와 해방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신 지고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매순간 이런 주님의 사랑 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사랑에
응답하고 그 사랑을 나누고 되돌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지요.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먼저 상호간의 관계에서“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라고 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하나 되게 하고 살리는 길이 되겠지요. "자기가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각 형제에게 자비를
행하고 지니며, 어떤 형제의 죄악 때문에 그 형제에게 화를 내지 말고
오히려 온갖 인내와 겸손을 다하여 너그럽게 권고하고 부축해야 할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신자편지 43-44)
다음으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라고
권고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기꺼이 희생할 줄 압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놓는 희생의 삶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끝으로 사도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 그리고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을 입에 담지
말고 감사의 말만 해야 한다.”(5,3-4)고 가르칩니다. 증오와 살의를
품은 한마디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사랑어린 말, 선을 지향하는 언어, 감사의 말을 통해 서로에게 희망과
생명을 불어넣어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관대함과 자비심과 희생을 실천하고 감사의 말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고, 영혼의 병마에서 서로를 해방시키고 행복해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5,8)
한때 우리는 어둠 속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발을 헛딛어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였고
길을 잃어버려 엄청 고생도 하였지요.
그런데 용케도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지금은 길을 비교적 잘 걸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가끔은 또다른 터널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겁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빛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안에 빛이 있었더랬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였더랬습니다.
그 빛을 밝히는 법을 몰랐을 뿐입니다.
이제 그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언제나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밝힐 수 있으니 어둠이 두렵지 않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받아 들이기만 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발광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 쉬운 방법을 모르고 어둠이 너무 짙다고 무서워하였더라구요.
나 혼자 빛을 밝혀 보겠다고 용을 써 보았지만 다 허사더라구요.
오늘 빛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여러분의 빛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비추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 16)
모든 단풍과 모든 나뭇잎은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소중한 치유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시 건강하게 변화시키십니다.
이끄심과 치유를 부정하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보게됩니다.
아픈 현실을 치유하는 치유의 시작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되어야합니다.
안식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존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안식일은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 빠져버린 안식일은 무의미한
안식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까지도 가로막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안식일은 열려계시는 주님처럼
우리의 닫힌 마음을 기쁘게 여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더 이상 우리의 이기심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치유와 자비를 가로막았어는 안됩니다.
안식일은 자비가 필요한 나자신과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는 거룩한 날이 되어야합니다.
너그러움이 없는 안식일은 서로를 병들게하는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속박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일임을 믿습니다.
매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교구청의 제방은 5층입니다. 조금 걸어야 하지만 전망은 좋습니다.
이곳에서 4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멀리가지 않아도 제 방에서
붉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단풍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단풍도 제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 분노와 원망이 마음을 흔들면 단풍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벨탑 위에서는 아름다운 단풍도 이익의
수단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단풍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푸른 하늘과 구름, 뺨을 스치는 바람,
계곡을 흐르는 물,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우리는 담을 쌓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듯이, 아름다운 사람이 모인 곳은 어느
단풍보다 더 곱고, 예쁠 것입니다.
단풍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색이 바란 것도 있고,
벌레가 먹은 부분도 있고, 잎이 상한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단풍은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드물기 마련입니다. 저도 점도 있고, 주름도 있고, 흰
머리까락도 있고, 지난 삶의 얼룩도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있고, 회개한 사람도 있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도
있고,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단풍은 빛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는
단풍을 볼 수 없습니다. 새롭게 핀 나뭇잎은 오전에 보아야
아름답겠지만, 단풍은 오후에 보아야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가
2000년 시간이 지났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과 사랑으로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더러운 곳에서, 냄새나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람이 희망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사람이 희망이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요즘 정치권이 하는 행태는
정말 절망스럽습니다. 왜 그리 뻔뻔스러운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 하려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 넘습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 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겠습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제 속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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