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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묵상글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주님은 내게 어떤 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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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08 02:43
- 주님은 내게 어떤 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주님께서 제게 하셔도 저는 베드로와 똑같은 답을 할 것입니다.
정답을 얘기한다면 그렇게 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정답이 아니라 주관적인 답을 듣기 원하신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어떤 분이라고 답할지 오늘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보통 하느님을 얘기할 때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얘기하는데,
이 가운데서 저에게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제는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사무엘기의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시나이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시나이다.”
그런데 왜 이 말씀에 가슴이 찔렸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게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제가 너무 쉽게 또는 편하게 생각하여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제게 너무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냐오냐하니까 할애비 수염까지 끄댕긴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자애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버릇이 없는 놈일 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낭비하는 못된 놈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 생각에 버릇없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과 자비를 낭비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낭비는 남용이고 선용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그 엄청난 사랑과 자비가 더 이상 사랑과 자비가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눈물 나도록 고맙고 소중해야 내게 사랑이고 은총이지
하나도 고맙지 않고 당연하여 물 쓰듯 낭비하면
그것은 물이지 더 이상 은총과 사랑이 아니지요.
며칠 전에 한 분을 면담했습니다.
수도원을 몇 군데나 들락날락한 분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몇 번이나 한 분이고 은인도 몇 분을 만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도원을 몇 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하느님 체험을 했고 하느님이 보내주신 은인을 만났던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은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러 오신 것인데
제가 그분을 도와드리면 제가 그때는 은인이 되겠지만
그분은 이내 수도원을 나올 것이고 배은망덕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도 저도 들어갈 때만 은인이지
수도원을 나올 때는 은인이 아니게 됩니다.
은총과 사랑은 소중히 여길 때 은총과 사랑이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낭비하고 남용하면 더 이상 은총도 사랑도 아닙니다.
생명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이 생명을 주실 때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느님 생명을 살지
소중히 여기지 않고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죽게 되겠지요.
생사를 쥐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하느님께서 벌로서 죽음을 주지 않으셔도
사랑으로 주시는 생명을 내가 살지 않아서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내게 어떤 분입니까?
생명의 하느님입니까?
사랑의 하느님입니까?
구원의 하느님입니까?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까?
제자들처럼 이렇게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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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유명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식당 성공의 비결을 묻자, 사장님께서는 “손님에게 무조건 더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성공 비결일까 싶었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퍼주고 망한 장사 없다’라는 옛말을 인용하면서, 최고의 영업 전략은 손님들이 ‘본전 뽑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감동한 손님은 다시 찾거나 새로운 손님에게 소개해서 보답한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더 많이 제공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자기 성공 비결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역시 넉넉한 인심을 보이는 식당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고깃집 사장님은 손님으로부터 불만을 표현하는 말, 예를 들면 ‘자리가 지저분하다.’, ‘음식이 늦게 나온다.’, ‘주문했는데 다른 것이 나왔다.’ 등의 항의가 나오면 곧바로 음료수 한 병을 들고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사과의 말씀을 하시고 음료수 한 병을 건네는 것입니다. 이 고깃집은 잘 될까요? 안 될까요? 현재 3호점까지 냈으며, 모두 호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떠올리면서 장사한다면 오히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와 비즈니스 성공 비결 제1조는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이익뿐 아니라 즐거움과 감동 같은 정신적 이익을 준다면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에게는 무엇이건 주고 싶어 합니다.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지요. 이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닌,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큰 손해를 가져다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이익으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망하는 길을 걷는 것이고,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성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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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조그마한 친절이, 한 마디의 사랑의 말이, 저 위의 하늘나라처럼 이 땅을 즐거운 곳으로 만든다(J.F.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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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교회의 신비는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먼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바로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바위 위에, 곧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 우리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자신만을 챙기는 일로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우리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다 겪어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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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기를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나는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그에 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바람을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런저런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바람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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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매 미사 중에 ‘거룩하시도다.’를 고백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다른 것들은 다 이해할 수 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호산나’입니다. 호산나의 히브리어 어근을 시편 118:25, “아,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아, 주님, 번영을 베푸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샤’(구원)와 ‘안나’(간청)가 합쳐져서 “호산나”라 번역되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호산나는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또는 “제발 구원해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호산나라는 말은 신약성서의 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에 옷을 깔고,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렇게 ‘호산나’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은 5일 후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대상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에서의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구원자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와 명예 그리고 재물을 주시는 구원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눈 먼 이를 뜨게 하고, 중풍병자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구원자를 원했습니다. 그런 기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요한은 왼쪽에 야고보는 오른쪽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서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던 ‘호산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습은 제자들이 원했던 ‘호산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호산나’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을 말씀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상실된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시기, 질투, 분노, 원망, 욕심, 게으름, 욕정이라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나자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죽었던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재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호산나가 아니셨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죄와 악 그리고 죽음에서 결코 구원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들 또한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미사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호산나’가 되실 수 없습니다. 나를 죄와 악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진정한 ‘호산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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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도 특정한 날 혹은 특정한 축일에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 도미니코 축일에는 기억나는 선배 신부님이 있습니다.
도미니코 성인께서 어떤 성품을 지니셨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선배 도미니코 신부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기억합니다.
선배 신부였던 도미니코 사제는 온화한 성품이었습니다. 차분했고 따뜻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대할 때 늘 상냥했습니다. 글에 써놓고 보니 제 성품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도미니코 신부는 지금 하느님 품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선후배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진 사도 베드로에게 그 상냥함으로 다가가 우리들의 하늘나라 입성에 도움을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하늘나라로 돌아간 도미니코 선배를 기억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평온하기를 그리고 그의 기도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문득 누군가가 기억나는 날이 있습니다. 저의 오늘처럼 말입니다. 그때는 기억 속에 있는 그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우리의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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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한쪽은 돈을 잘 쓰기 위해서 벌고
다른 쪽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돈을 법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서로 도와주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선한 일을 위해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주신 것을 잘 사용하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입니다. 마음마저 부자니까요.
그러나 모으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그 가치를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부자가 아니지요. 써야 부자니까요.
루카 복음 12장은 사람의 이런 어리석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어리석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늘 하늘나라를 향해 걷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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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믿음과 지혜는 함께 간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8월의 말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라는 독립불개(獨立不改) 말마디를 상기하고 싶습니다.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진리를 말해 줍니다. 몸따로 정신따로가 아니라 둘은 함께 갑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거친 내일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다산>
“하늘이 문왕의 글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이 글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문왕의 글을 없애지 않을 것이니, 광(匡)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논어>
이런 자기 확신의 지혜와 자유는 하늘을 알고 자기를 알았을 때 저절로 솟아 나오는 말씀이겠습니다. 새삼 다산과 공자의 내적경지를 헤아려 알 수 있겠으니 두분은 말그대로 현자입니다.
요즘 과학잡지 ‘뉴톤(2023.2월)’에서 인지 편향의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무려 30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보고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되었습니다. 유일한 답은 성령의 은총에 의한 하느님의 지혜뿐 이겠다는,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이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무의시적으로 존재하는, 기억, 판단의 왜곡이나 치우침을 ‘인지 편향’이라 한다. 이른바 ‘생각하는 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지 편향은 직감적으로 빠른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비합리적인 생각에 빠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이렇게 알아가는 과정 또한 평생과정의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지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점차 무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탐욕, 분노, 질투, 편견등 무지로부터 벗어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 분열, 불화, 전쟁 또한 무지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이 물음이 무지 해결의 열쇠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믿는 우리들의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에 각자 답해야 합니다. 앎의 깊이는 끝이 없습니다. 앎의 깊이에서 만나는 참 주님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멋진 답변에 주님의 격찬과 더불어 상급같은 축복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제자다운 정답의 답변에 감격하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베드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정체를 깊이 깨달아 앎은 은총이요 주님을 깨달아 알 때 참나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탐구여정은 함께 갑니다. 주님을 모르면 아무리 물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참된 겸손도 지혜도 불가능하고 도저히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곧이어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의 반대의 반응이 매우 격렬합니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완전 착각이었음이 입증됩니다. 고백은 맞았지만 여전히 무지한 베드로요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습니다. 베드로를 통한 악마의 유혹임을 직감한 예수님의 지체없는 꾸짖음입니다. 어느새 광야에서 유혹했던 사탄의 재차 침입인 것입니다. 놀랍고 무섭지 않습니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반석이라 격찬받던 베드로가 졸지에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정말 베드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공부를 마친 것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질책의 기억은 늘 살아 있어 베드로의 믿음의 여정에 끊임없는 생생한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이어 곧장 떠오르는 요한복음 후반부(21,15-13) 베드로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삼차에 걸친 물음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또한 주님의 앞서의 물음에 이어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세차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후 말씀 역시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베드로와 사도들은 물론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애를 보면 말그대로 주님을 따르는데 자신을 온전히 소진시킨 순교적 삶이었음을 그의 51세 죽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인은 청빈한 삶과 설교로 알비파와 카타리파 영지주의 이단과의 치열한 싸움에 승리를 거둔 분입니다. 하느님은 때에 맞게 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인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과의 싸움에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낮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큼 온화한 사람이 없었으며, 밤에는 그만큼 온전히 밤을 새우며 기도한 분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은 성인입니다. 또 묵주기도의 보급에 성 도미니코 성인의 공헌이 지대합니다. 묵주기도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핵심이었으며 교황12세의 인정도 뒤따릅니다.
“마라이아의 묵주는 성 도미니코 수도회로 하여금 회원들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얻도록 해주기 위한 원리와 토대로 받쳐지게 되었다.”
성 도미니꼬는 죽기 전 마지막 자신의 동료들에게 남긴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성인은 자신을 수도원 형제들 무덤의 맨 가운데에 묻어 달라고 후임 수도원장에게 부탁을 남겼고 이어 유언을 남깁니다.
“형제들간에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겸손하십시오.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서 영적 보화를 쌓아 가십시오.”
성인이 선종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 60여곳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1300년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회원들은 1만여명이었다 하니 살아서는 물론 사후 큰 기적을 일으킨 참 성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념하고 기억할뿐 아니라 내 고유의 성인이 되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우리 삶의 좌표이자 이정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 계약이 우리 모두 성인이 되도록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31,33).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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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하나 있으니>
[베드로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밝히기 시작하셨다.]
참으로
나를 아는
벗 하나 있으니
무딘 사람들
틈바구니
좁은 길
기쁘게 헤쳐 나가네
참으로
나를 믿는
벗 하나 있으니
날선 사람들
틈바구니
거친 길
당당하게 헤쳐 나가네
참으로
나를 바라는
벗 하나 있으니
어두운 사람들
틈바구니
마른 길
환하게 헤쳐 나가게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벗 하나 있으니
차가운 사람들
틈바구니
언 길
뜨겁게 헤쳐 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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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20)
금지된선포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당신 제지들을 먼저 보내 당신의 도착을 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을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과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일반 용어인 반면, ‘예수’는 구원자의 고유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것올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곧, 피의 임무를 완수하신 다음 알맞은 때 당신의 사도를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려 했던 것입니다(마태 28,19-20 참조).
이어지는 구절은, 이것이 우리의 견해일 뿐 복음사가들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예수님께서 왜 선포를 금하셨는지 설명해줍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그렇다면 교회야말로 쓸데없고 그릇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엑카르트는 교회가 그럴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들판을 가로질러 가다가 하느님을 아는 것과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을 비교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가 더 쉬운 것은 그 사람의 결점 때문이지 하느님 탓이 아니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 더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판에 더 적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교회 이외의 다른 곳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너무나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의 영적 발달 상태는 딱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만물과 모든 장소에 똑같이 계시고,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똑같이 내주실 의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어디에서나 똑같이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제약 때문에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217)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천국으로
갑자기 히야친타가 루치아에게 비밀히 할 말이 있으니 빨리 와 달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프란치스코가 누워 있는 방에 셋만 남아 있을 때 히야친타는 루치아에게 말했다.
“성모 마리아께서 방문하셨었어. 성모님은 이제 머지 않아 오빠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러 오시겠다고 하셨어. 그리고 내게는 아직도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싶으냐고 물으시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성모님은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그 모든 고통을 다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끼친 죄의 보속과 회개를 위해 잘 참아 견디고 또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참으라고 하셨어,"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병세는 빠른 기세로 악화되어 갔다. 입맛이 완전히 없어졌고 체력은 날로 딸릴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프란치스코의 누나 데레사는 루치아를 데리러 왔다.
“빨리 와! 프란치스코가 이주 나빠졌고 너한테 말할 것이 있다더라."
루치아는 재빠르게 뛰어갔다. 프란치스코는 이야기가 비밀에 속한 것이기에 어머니도 형제들도 전부 방을 나가 주기를 부탁한 다음 단 둘이만 있게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나는 성체를 모신 다음 죽을 테니까 먼저 오늘은 고백 성사를 받으려고 해. 내가 무슨 죄를 짓는 것을 보였으면 말해 줘. 그리고 히야친타에게도 내가 죄지은 것을 알고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해 줘." 이때는 히야친타도 병석에 있었다.
“넌 어머니가 집에 있으라고 하셨을 때 때때로 말을 듣지 않고 내게 와서 숨었을 때가 있었잖니." 라고 말한 루치아는 히야친타에게도 프란치스꼬의 말을 전했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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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16,16)
높은 빌딩을 지으려면 그 높이만큼 깊고 튼튼한 기초가 필요합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빌딩은 눈에 보이는 높이만큼 아주 깊은 지하에 상상할 수 없는 기초공사를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욱 땅속 깊은 곳에 넓은 암반이 있어서 그 암반을 기초 삼아 건물을 세웠겠죠. 그런데 제가 살았던 베트남 호치민의 첫 번째 수도원도 신축할 때 2층 건물을 올리면서도 시멘트 말뚝을 건물 높이와 비례해서 촘촘히 깊게 박고 나서 그 위에 건물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회원들이 늘어나면서 증축 공사를 하려고 했지만 증축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바로 지반이 너무 약해 침하 현상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부지를 확보해서 4층 건물을 신축했었습니다. 이처럼 높은 건물일수록 튼튼한 암반 위에 집을 짓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게파, 베드로(=반석)라고 명명하고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깁니다.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하신 것은 베드로의 성격이나 성품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성숙하고 출중해서가 아니었잖아요. 다만 오늘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고 했던 신앙고백이 그 결정적인 선택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단지 그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백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바로 교회의 영원무궁한 반석이기 때문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그를 ‘시몬 바르요나’에서 새롭게 ‘베드로, 게파’ 라고 부른 것입니다. 물론 이 고백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교회의 튼튼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3.15) 이 질문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당신과 3년 정도 함께 지낸 제자들에게 지금껏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한 졸업 시험 문제와 같습니다. 이 질문은 복음의 최절정의 순간이자 자리입니다. 저는 가끔 구약성서는 메시아가 누구이냐는 책이라면, 신약성서는 바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책이라고 강조합니다. 바로 복음은 바로 이 점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책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의 답변 곧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는 고백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6,17)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칭찬하신 까닭이란 어떤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명백한 당신의 신원을 지칭하는 답변이었으며, 이 답변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놀라운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표현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마음속에는 늘 후회와 죄책감으로 마음 아파한, 나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욱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16,21)라고 언급하자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면서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16,22)하고 격하게 반발한 것도 아직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소리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이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졸업시험(=필기)에선 만점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실기(=삶의 체험을 통한 이해 부족)에서는 거의 영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입으로는 심오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정신과 의식으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라고 베드로에게 돌직구를 던지신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보다 자기 일에 관심하고 집중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예리한 송곳과 같은 일침을 찌르신 것입니다. 불은 불로 꺼야 하듯이, 어불성설은 촌철살인의 경구로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베드로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여정에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다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삶만을 기대하고, 수난의 예수님보다 영광의 예수님만을 따르려는 우리를 대오각성하게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 이후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한없이 자비하신 용서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성령께서 베드로의 나약한 인간성을 신적 본성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신적 능력으로 더욱 단단히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확고한 반석이 되셨습니다. 이젠 베드로가 왜 그렇게 격한 반박을 하였는지 묻기보다는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참으로 든든한 교회의 반석이 되고 기초가 되었는가를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 일만 생각했던 우리의 삶의 의식과 행동에서 하느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베드로 사도를 통해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물도록 합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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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받는 물음은 / 굿뉴스 게시판 우리묵상체험
박윤식 [big-llight] 2024-08-07 ㅣNo.174854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인 나를 두고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를 못할 것이다.”라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 말씀의 속내는 ‘베드로야, 내 뒤로 물러가라.’라란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앞이 아닌 뒤’로 가서 ‘걸림돌이 아닌 반석이 되어라.’라는 거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석이요, 걸림돌이라고 번갈아 돌려가며 비유하셨다. 반석은 그의 신앙고백 때문이었고,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만을 생각했기에 걸림돌이라 하셨다. 그렇다. 우리도 걸림돌보다 반석이 되려면 오직 예수님 뒤에만 있어야 할 게다. 많은 이가 눈치도 없이 그분 뒤가 아닌 닥치는 대로 앞에 서려 막 설친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크든 작든 취향에 따라 걸림돌이 될 게다. 사탄, 그것도 그 우두머리가 되려는 게, 어쩜 우리가 지닌 본성이 아닐까?
베드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스승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예수님에 대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결정적 고백을 하였다. 이는 어디선가 떠도는 이야기나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알려 준 사실을 그저 반복하며 인정한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솟아난 진심 어린 고백이었으리라. 자신의 삶을 그분께 송두리째 바쳐야 함을, 미리 예감한 대답이었을 게다.
이처럼 자신의 순수한 신앙 고백은 오랜 침묵 끝에 나오는 ‘깨달음’의 언어이다. 신앙인에게는 이 깨달음과 자각의 과정이 미음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할 게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아 발견하는 신앙 고백과 언어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자기보다 더 큰 진리의 빛이 이끄는 대로 주님께서 가슴속 깊이 들려주시는 소리를 듣는 이만이 발견할 수 있으리라. 창조주 주님 안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의 본성인 참된 그 모습을 발견하기에 그러하리라.
우리는 정녕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증언할까? 혹 여럿 보는데서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십자성호도 제대로 긋지 않는 건 아닌지? 우리는 그분 믿고자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이 믿음을 보시고 그 위에 당신교회를 일구신다.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차별도 없어야 하리라. 오직 주님 향한 믿음만이 필요할 뿐일 터이니까.
믿음은 하느님 선물로 그분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준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순종하는 믿음은 교회와도 관계를 맺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스도께 다가가 그분께 순종하자. 그러기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라는 그분 물음에 “당신은 저의 주님, 저는 당신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의연히 응답해야 할 우리이다. 이런 응답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너희는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하겠느냐?”라고 우리에게 또 물어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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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마태 16,17)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신 베드로가 부러웠습니다.
그분께서 누구이신지 알려고 애써 노력하여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인데,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셨으니 복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여 볼 때, 그것은 베드로의 나약함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신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울 때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받았다 하더라도,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내 생각이 곧 하느님의 생각이라고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늘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하느님의 생각과 나의 인간적인 생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 현세에서 겪는 삶이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베드로의 강인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16,23)라는 말씀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만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꾸짖으실 때도 그분께 매달리고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예수님께 좋은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않고, 지금 “사람의 일”(16,23)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 주실 때도 그분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는 것, 어쩌면 그래서 베드로가 반석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진 흠을 짚어 주실 때 그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믿음, 그것으로써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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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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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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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에서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급전락한 이유!
주님께서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드러내는 표시를 보여주십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 시기에 딱 맞는 성인들의 출현입니다.
교회가 갈팡질팡하며 총체적 난국 속에 허덕이던 중세 시기, 주님께서는 방황하던 당신의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이자 명설교가 도미니코 사제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때로 논리정연하면서도 감동적인 설교, 때로 벼락이요 철퇴 같은 강렬한 말씀 선포로 이단들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는 또 다른 도미니코 사제와 같은 명설교가를 요청합니다.
사실 우리 사제들은 다들 모두 명강론을 하고 싶어합니다.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게 만드는 그런 강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같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넘치는 자료들의 홍수 시대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유명 강사들의 명강의가 내 손안에서 펼쳐집니다.
고리타분한 강론 외에도 얼마나 많은 즐길 꺼리들로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뭔가 말 좀 해보려 시도를 하면, 즉시 눈을 감아버리고 딴전을 피우는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계속한다는 것, 참 난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강론은 우리 사제가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공의회는 강조합니다.
좋은 강론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주제로, 성경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청중들 지루해 죽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눈물과 동떨어진 강론은 백퍼센트 실패입니다.
너무나 강론하기 힘든 시대,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사제들의 강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론을 준비하기 힘든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강론에 진심인지 모릅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우들에게 우리 사제들께서 시원한 청량 음료 같은 강론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그런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으로부터 반석 소리를 들으며 사도단의 에이스로서 천국의 열쇠까지 건네받았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주님으로부터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흉측하고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주님 나라의 충신에서 역적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예, 박수갈채에만 몰두했지, 주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 고통과 십자가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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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예수님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이는 줄곧 주님과 함께 지냈고, 기적을 보고, 당신과 함께 많은 표징을 일으킨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베드로라 부르시며,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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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살 수 있는 자격은 내가 줄 수 있는 자격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 이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어도 허사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 열쇠를 받게 되면 그 사람도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먼저 인간 나라의 열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인간답게 인간들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그 인간답게 사는 이에게 인간성의 열쇠를 받아야 합니다.
영화 ‘더 로드’는 아버지와 그의 어린 아들이 원인 모를 화재로 황량하게 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화마는 온 세상에 먹을 것을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자녀를 낳는 것을 엄마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납니다.
엄마는 어차피 약탈자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탈자들의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합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아들에게 희망과 선함의 '불꽃'을 보존하려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압도적인 황폐함과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들이 "불을 옮기는 것"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나침반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희생합니다.
아버지는 죽어갑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준 희생을 통해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보다 더 못한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을 베풉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불안해하면서도 만족해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들을 쫓아오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쭉 지켜봤다며 자신들과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들은 이런 황량함 가운데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안전하고 먹을 것을 나누는 천국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나 사례는 너무나 많고 가장 좋은 사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들은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인간처럼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살과 피를 내어주며 가르칩니다.
영화 ‘타고난 재능: 벤 카슨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날 꼴지만 하는 벤 카슨에게 글도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실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게 하였습니다.
벤 카슨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가 붙은 아기를 분리 수술을 하여 둘 다 살려낸 천재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그 두뇌를 사용해야 한다.“
"읽을 수 있으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문이 열려 있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라.“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아야 한다."
"변명하지 말고 일단 하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베니, 너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만이 그것을 더 잘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하느님 자녀를 낳음입니다.
인간의 자녀를 낳을 수 있으면 인간 나라에 살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 자격은 하늘 나라의 열쇠에
있습니다.
이 사명이 나에게 초월적 능력을 주고 자존감도 준다.
자존감의 수준이 행복의 수준이고 부모는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있는 곳에 살 자격을 얻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신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도 다른 이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열쇠를 지닌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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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 뒤로 가라.”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1)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쫓아내신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 ‘반석’이 될 수 있지만, 앞에서 가로막거나 거치적거리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뜻도 아니고,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도 “앞에서 가로막지 말고 내 뒤로 가서 나를 따르기만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은,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시는 말씀이긴 한데, 그를 사탄의 유혹에서 지켜 주기 위한 ‘사랑의 말씀’이기도 하고, 그가 흔들림 없는 ‘반석’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비슷한 장면이 최후의 만찬 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도 같고, 그 일을 가로막으려고 했다는 점도 같습니다.
여기서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보다 더 엄한 꾸중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막으면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까지 많은 과정들을, 즉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고비들을 많이 넘겼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모두 극복하고 이겨냈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또는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3) 방금 전에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었고,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받았고, 하늘나라의 열쇠도 받았던
베드로 사도인데(마태 16,18-19), 어떻게 금방 그렇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혼나는 상황이 되었을까?
누구에게나 그 상황은 인간적으로는(‘살과 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의 관점에서 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고, 베드로 사도가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설명에 근거를 둔 말입니다.)
자신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은 것은 곧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그 당시에는 ‘머리로만’ 한 것이고, 아직 ‘삶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
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리려고 한 것입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응답’도 ‘머리’가 아니라, 또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때, 그때 비로소 응답이 완성됩니다.
<사도 직무 수행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 또는 말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온 마음과 삶을 다 바쳐서 끝까지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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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본격적인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기 전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당신의 신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에 비추어 그분을 바라보았지만, 그건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당신과 동고동락하는 제자로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다시 물으셨고 이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던 ‘모범답안’입니다. 이제까지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시간이 무의미하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좀 놓이셨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까지 제자들에게 꽁꽁 감춰두셨던 ‘고통의 신비’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십니다. 당신은 적대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 무기력한 모습과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마음 속에 걱정과 혼란이 생기겠지만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돌아가신지 사흗 날에 죽음을 완전히 이기고 새로운 존재로 되살아나실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고통이 그저 고통으로 끝나면 절망이 되지만, 고통이 희망으로 죽음이 부활로 승화되면 ‘신비’가 되니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수난과 죽음이라는 단어에만 꽂혀 심각해진 제자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를 앞세워 그러시면 안된다고,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시면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원망하며 따지듯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불호령을 듣게 됩니다. 사탄은 하느님 앞을 가로막으며 그분 일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라고 해도 그분 앞을 가로막고 서서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하시려는 일을 방해한다면 사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 눈 앞에서 썩 꺼져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뒤로 물러나서 묵묵히 그분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베드로처럼 ‘영적 추락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부족하고 약한 존재여서, 자주 생각이 바뀌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유부단한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당당한 신앙고백으로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었는데, 오늘은 작은 유혹 하나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뜨거운 신앙 체험을 통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거룩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는데, 오늘은 하는 짓이 마귀나 다름 없이 비열하고 간사한 나를 발견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온데간데 없고 내 생각 내 계획 내 욕심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느님과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한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삼시세끼 먹고 즐기는 일에만 신경쓰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사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우리라도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실패 체험 덕분입니다. 하루에도 널을 뛰듯 천국에서 지옥을 오갈 정도로 부족하고 약했던 그가 주님의 사랑 덕분에 용감하고 씩씩한 사도로 변화되었으니, 우리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기본’에 충실한다면 얼마든지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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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
사도 베드로는 얼핏 보면 특별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주님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보다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5)
주님께서 그렇게 대답하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8-19절)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결점이 있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성경기자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으시고
끝내는 당신 생명을 바쳐야 할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사도 베드로가 스승께서 그러실 수가 없다고 반대하며 나섭니다.
주님께서 이제까지 칭찬하시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격한 표현을 쓰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그러면 베드로가 주님 신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영광의 주님만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영광과 환희, 기쁨을 좋아하는 것은
다 사람의 마음이지요.
고통과 수모, 슬픔을 좋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디 우리가 겪는 일들이 ‘주님의 십자가’라고 써 붙인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하기 싫은 일, 꼴 보기 싫은 사람, 계획의 좌절과 포기,
듣기 싫은 잔소리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 오지요.
확실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나 자신은 아닐까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과연 한계가 있는 남이 마음에 들까요?
주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또 나무람도 받았던 사도 베드로를 묵상하면서
멋진 하루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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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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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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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모든 것이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2024.8.8>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8:11~25절)
❝모든 것이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며 기뻐할 때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이 풍요롭고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11~14절).
모압이 위치한 지역은 고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병에 담은 술이 한 번도 이 잔 저 잔에 옮겨지지 않은 채 보관되어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11절). 그러나 사람을 보내어 병에서 쏟아 버릴 날이 올 것이고, 모압의 병을 비워 버릴 것이며 잔들을 깨뜨려 버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절). 모압의 멸망에 대한 원인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벧엘 신을 의지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모압도 그모스 신 때문(13절,쉬운성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워 놓은 금송아지를 의지하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했습니다(왕상 12:25~29). 그러나 앗수르의 공격을 지켜 주지 못했고, 오히려 전리품이 되어 앗수르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호 10:5~9). 결국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적 앞에서 모압이 자부하던 용사와 능란한 전사도 조롱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14절).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흉악한 범죄의 대부분이 황금만능주의의 풍토와 재물에 대한 탐욕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압 족속에게 있어서 재물에 대한 탐욕과 우상 숭배가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님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처럼 우리 자신 역시도 재물에 대한 탐욕과 재물 자체가 우상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는 결과로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해 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믿음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15~20절).
평소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던 모압 성읍들이 점령당하고 용사라 자처했던 장정들이 추풍낙엽처럼 도륙당하게 될 것임을 예언(15절)하십니다. 결국 모압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것들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16절). 모압 주변 국가들을 향하여 모압의 멸망에 대하여 애가를 부를 것을 촉구하십니다(17절). 이는 갑자기 멸망한데 대한 놀램과 모압의 멸망의 원인을 하나님의 심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디본의 요새가 깨어졌습니다. 디본은 모압의 수도로서의 영광을 찾을 길이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아로엘과 아르논이 철저하게 짓밟혔습니다(18~20절). 단지 생존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통곡하고 크게 부르짖는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을 지키는 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주의 거룩한 군사가 되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보내심으로 안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무너질 요새 즉,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의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죄의 깊은 수렁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팔을 내미시는 감격스러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21~25절).
견고한 산성들을 빼앗은 정복자들은 평지에 있는 성읍들도 휩쓸고 지나갑니다. 홀론, 야사, 메바앗, 디본, 느보, 벧디불라다임, 기랴다임, 벧가물, 벧므온, 그리욧, 보스라와 같은 모압 땅 원근의 모습 성이 바벨론에 접수되고 말았습니다(21~24절). 이제 “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 팔이...”(25절)부러졌습니다. ‘뿔’은 권세를 의미하고, ‘팔’은 힘을 각각 상징합니다. 즉, 모압을 지탱했던 모든 권세들과 군사력의 파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형태의 우상도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하며, 권력이나 명예 또는 재물 등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인생을 맡길 때, 메마른 심령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와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아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단순히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역사에 의해 이루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며 기뻐할 때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이 풍요롭고 강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역사가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있음을 깨닫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8:11~2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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