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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계명
요일 2:7-11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일 2:7-11 / [새 계명]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지금 여러분이 지켜야 할 새 계명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고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옛 계명입니다. 8) 그러나 이 계명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참되다는 것이 드러났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도 참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킬 때 우리의 생활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의 빛이 비추어 옵니다. 9) 누구든지 말로는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동료들을 미워한다면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로 다니며 어둠과 죄에 넘어지는 일 없이 자기 갈 길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셨습니다(마 22:36-39).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7) 요한은 수신자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꼭 집어 불러 그들 스스로가 사랑받는 자들이며 사랑을 드러내야 할 자들임을 깨우칩니다. 요한이 이제 편지로 써 보내려는 것은 새 계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미 과거부터 들었고 잘 알고 있었던 옛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옛 계명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사랑의 계명을 의미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8) 옛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사랑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품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4:8-11).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너희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의 빛 비추심의 행위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비추는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본질적인 행위가 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9-11)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8)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낸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행해지는 주체이며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사랑으로 영원한 삶을 얻은 우리의 존재 방식도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인 사랑의 빛, 생명의 빛을 모르는 어둠의 사람일 뿐입니다.
적용: 마태복음 22장 36-39절, 마가복음 12장 28-31절을 살펴볼 때, 당신의 삶의 존재 방식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살펴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 숙고해보세요.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스타 배우일 뿐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는 행동가입니다. 브래드 피트와 자신이 낳은 아이 셋을 두고도 에티오피아,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한 아이씩을 입양해 키우는 빅 마더이기도 하죠. 특히 그녀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아무 힘이 없는 아이들의 고통에 아파했습니다. 그녀가 아이들을 돕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 우리의 미래를 돕는 것입니다.
< 설 교 >
요한일서 2:7-11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서신서를 살펴봄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다뤄야 할 부분 중의 하나는 발신자에 대한 정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신의 서두에는 간략한 소개와 함께 발신자가 누구인지가 기록됩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말미에 기록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발신자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어진 수용 여부와 평가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볼 요한일서에는, 그 어디에도 발신자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발신자를 특정하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본문이 담고 있는 교훈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집고 넘어 가고자 하는데, 이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가 누구인지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는 사상과 문체, 용어 등이 요한복음의 내용과 유사하고,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속사도)은 이 서신의 발신자가 사도 요한임을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요한일서의 발신자를 사도 요한으로 봅니다. 본문을 보다 생동감 있게 보기 위해서는 사도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막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그의 별명은 ‘천둥의 아들’ 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과격했을 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의 호전적인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들른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눅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오늘 본문은 동일인이 쓴 것이 맞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7-8)]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에는 다음과 같이 수신자들을 향한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아이들아’, ‘형제들아’ 등.
이중 오늘 본문은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애정 어린 부름에 이어 그가 가장 먼저 전한 내용은, 이전에 전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에 대한 변증이었습니다.
그는 계명의 실천에 대한 교훈 앞서, 이것이 전에 없던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같은 순서는 당시 사람들이 그 계명 자체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음을 가늠하게 합니다.
서신이 기록된 당시 이단 중 하나인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해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저열한 신으로 간주한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롭고 우등한 신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어느 틈에 초대교회 공동체에 스며들어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가 전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유대적 신앙 노선에는 없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교훈과 그 맥을 같이했습니다.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다시’로 번역된 원어 πάλιν(팔린)은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앞선 7절에서 언급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동음이의어로 생각해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7절에 기록된 ‘새 계명’은 과거에 없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8절에 기록된 ‘새 계명’은 그 깊이와 넓이가 한층 더 깊고 넓어져 승화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보이신 계명은 구약과 같은 맥락이라는 차원에서는 분명 새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없는 원수 사랑의 내용을 담고 있고, 그분이 몸소 행해 보이셨다는 차원에서는 새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친다는 것은, 옛 계명은 알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계명을 알지 못했던 어둠의 시대는 지나갔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힘이어 참된 사랑의 빛이 세상에 비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제 새 계명에 대한 변증에 이어 실천적 권면을 전합니다.
[빛과 어둠(9-11)]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한은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가늠하게 했습니다. 빛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 사용하신 용어였습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제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지만, 정작 그 안에 계명을 쫓아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의 상태에 있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크리스천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고, 그분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자리에서 빛이 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인 경우가 상당합니다.
오늘 저희 역시 말씀에 자신을 맞추려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말씀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는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요한이 전하는 이 계명은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다 손쉽고 분명하게 확인 시켜줍니다.
이제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에 이어,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임하는 불행에 대해 전합니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거리낌으로 번역된 원어 σκάνδαλον(스칸달론)은 ‘덫’,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동사로 쓰일 때는 ‘실족하게 하다(벧전 2:8)’, 명사로 쓰일 때는 ‘올무(계 2:14)’ 등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실족할 일이나 걸려 넘어질 장애물이 없습니다.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에 있고 그 안에서 행하며, 그 어둠에 눈이 멀어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눈’으로 번역된 ὀφθαλμοὺς(옵달무스)는 문자적으로는 ‘눈’을 뜻하지만, 비유적으로는 ‘판단력’을 의미했습니다. 또 ‘멀게 하였다’로 번역된 ἐτύφλωσεν(에튀플로센은) ‘시력을 잃다’ 내지는 ‘정확히 보지 못하다’라는 뜻으로 물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혹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계속해서 누군가가 떠오르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지 또는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단숨에 확인시켜줍니다. 동시에 이 서신의 발신자가 누구보다 호전적이었던 천둥의 아들이라 별명을 지닌 사도 요한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작은 희망이 되어 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음을 되새기며, 우리 역시 그와 같이 형제를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는 변화를 함께 기대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기억하며, 정의롭게 공의롭게 형제를 사랑하기를 힘쓸 때, 틀림없이 저희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는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누구보다 호전적이었던 요한의 서신을 살펴보며, 우리의 민낯을 마주합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빛이 아닌 어둠에 거하고 있는 저희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합니다. 그간 빛 가운데 존재하는 것처럼 타인을 속이듯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더 이상 타인을 향해 형제를 사랑하느냐고 힐난하며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닌, 저희 스스로 형제를 사랑하기를 힘쓰며 빛 가운데서 참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 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으로 허락된 것은 무엇입니까?
2. 삶의 자리는 빛 가운데 있는지, 어둠에 있는지 돌아보시겠습니까?
3. 미워하는 형제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겠습니까?
4. 주변에 빛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동일한, 그러나 새로운
요한일서 2장 7-11
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지요.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참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야’라고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도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표현이지요. 성경에도 역설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면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역설이지요. 인간이면 인간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너무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이 가르침은 모순처럼 보이니 나는 그 가운데 하나만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는 결코 참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참 인간이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입니까? 안 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면 온 거고, 아직 안 왔으면 안 온 것이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는 죄악이 가득하고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쓰고 있으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저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그러나 새로운 오늘 본문에도 역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곧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금 더 넓게 해석한다면 신약성경 전체, 혹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말씀이거니와” 무슨 말씀입니까? 요한일이삼서를 비롯하여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은 누군가 새롭게 고안한 말씀이 아니고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었던 내용,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 그래서 그것은 새 계명이라고 보다는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하고 있을 그 때에도 많은 이단의 가르침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계명 –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은 –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과거에도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선포되며, 이후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해도 예수님의 계명, 곧 예수님의 가르침은 동일하게 선포되고, 동일하게 가르쳐야 하는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 성경의 교훈은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특별히 이단의 공격이 갈수록 대범해지는 우리 시대에, 여러분 모두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교회를 출석하면서 배웠던 복음의 내용 이외에 무엇인가 특별한 계시, 무엇인가 특별한 복음의 내용, 무엇인가 특별한 하늘의 비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집사님, 권사님, 제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성경공부는 없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여러분 마음속에 ‘아~ 뭔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선포하고, 우리가 듣고,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 – 곧 예수님의 계명은 – “옛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 이른바 기도 가운데 특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8절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여기서는 또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8절에 등장하는 새 계명은 다른 계명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전혀 다른 내용의 새로운 계명을 다시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7절에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옛 계명이 동시에 새 계명도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이것이 새 계명의 특징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이미 성도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그러나 그 옛 계명은 그저 과거의 유물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옛 계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새 계명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어둠이 지나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능력의 말씀이요 능력의 계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활력을 얻고, 다시금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기를 원하신다면 어떤 새로운 내용,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을 찾으시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옛 계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새 힘을 얻고, 활력을 얻고,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게 될까요? 이미 알고 있는 옛 계명, 이미 알고 있으며 믿고 있는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의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생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변함없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옛 언약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수 천년 동안 동일한 내용으로 전해오던 옛 언약의 말씀이 동시에 나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씀 생활이 깊어지고, 나의 말씀 생활에 늘 활력이 넘치기를 원한다면 성경 이외에 다른 자료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손때가 뭍은 성경을 다시 읽고, 다시 묵상하고, 다시 생각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성경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름 행사가 모두 은혜 가운데 마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9월을 맞이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생활, 기도생활, 예배 생활에 힘을 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신앙생활과 다른 어떤 것을 찾지 마시고, 그저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이 더욱 힘을 내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매일 시간이 지날수록, 매월 시간이 흐를수록, 매년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여러분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 – 사랑의 계명 오늘 본문에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두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곧, 변함없는 옛 계명이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새 계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조금이라도 익숙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붙잡히시는 바로 그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가르치시는 이 말씀을 잘 관찰해보면, 이 말씀에는 평서문과 명령문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평서문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이 모든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구절들입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죠. 예수님의 계명,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한 예수님의 계명 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죄인이었던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여 구원하여 주셨다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평서형 문장이 등장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명령형 문장도 등장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옛 언약이요, 동시에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교회 안에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실상 자신의 삶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들에 대해 평가하기를 믿음은 있는데 그에 따르는 행함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깨달아 알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 말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믿음의 고백이 자신의 삶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여 여전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9절의 마지막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의 형제를, 믿음의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9절의 말씀에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반드시 비추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빛 안에 거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내용을 듣고,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랑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참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0절의 마지막 구절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 여기에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등장하죠. 이 문장에서 거리낌이라는 것이 ‘스칸달론’이라는 헬라어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지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납하니, 누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거리낌이 없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믿음도 크게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걸리는 돌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자신의 믿음이 굳건한 반석 위에 놓여서 제 아무리 크고 위협적인 비바람과 풍랑이 몰려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튼튼합니다. 견고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교회가 따뜻한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이 든든한 반석 위에 놓이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을 무너트리려는 수많은 공격이 몰려올 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여기에도 또 하나의 역설이 있네요.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
요한일서 2:7-11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숙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명에 대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계명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계명을 실천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여 지켜낼 수 있는 약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는 계명의 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함이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흔히 지금을 은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다만 신약에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확증하셨고 구약에는 다만 은혜의 예표가 주어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앙을 보면 교리는 은혜이면서도 실제 삶은 계명에 매어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즉 은혜로 시작한 신앙이 결국 실천, 행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자기 신앙에 안심을 하지만 행함에 게을렀던 사람은 결국 낙심하기도 하고 자기 신앙에 대해 큰 의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은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우리가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 기도가 만들어 졌고, 40일 금식 기도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기도라는 겉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예전에 들었던 계명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면 굳이 새 계명, 옛 계명으로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계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7절과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7절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이지만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명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본질상 뭔가 새롭기 때문에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간에 중요한 것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입니까?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소위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 대해 친절을 베풀고 조금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 힘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여지는 열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6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신자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후螁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때문임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란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말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행함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사랑을 행한 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새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성도의 사귐
요일 2:7-11 / 우인태 목사
여러분,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필수적으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따르게 되고 그로인해 우리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때에 이러한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어떤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데 있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의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그를 변화시켜 주실, 그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까?
남편만 보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남편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남편이 변화할 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자녀가 변화될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보다도 더, 그 아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실망스런 남편을 보고, 속 썩이는 자녀를 보면서도 실망하지 않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던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또한 붙드시고 이끄시어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가시와 같이 찌르는 성도, 문제 많은 성도들을 바라볼 때, 비난보다는 오히려 그를 변화시켜주실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사귐’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서로 간에 아름다운 믿음의 사귐을 이루는 교회공동체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눈을 갖고 살기에 힘쓰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먼저는 나 자신의 생각이 변화되고 그로 인해 내 입술의 고백이 달라지고 결국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데, 오늘 말씀은 이러한 멋진 성도의 사귐을 이루기 위한 우리 성도들의 삶의 기본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사도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요한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은 내가 주는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도요한은 바로 그 새 계명, 곧 사랑에 대하여 쓰면서 그것이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던 옛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요한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사도요한이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전부터 있었던 옛 계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이 그러하듯 이 사랑의 계명 역시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 역시 율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18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분명히 새로운 계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옛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에 의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그 질적인 면에 있어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 양적인 범위는 ‘이웃’으로 국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은 그 질적인 면에 있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같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양적인 범위도 모든 한계를 초월합니다.
이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계명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옛 계명인 것도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새 계명’의 ‘새것’이라는 말은 옛것, 새것과 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나 질이 새로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은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이 됩니다.
사랑은 구약의 핵심인 동시에 신약의 핵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구약의 하나님의 뜻과 신약의 하나님의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모든 계명의 기초를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할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계명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심하여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도요한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대교회에 들어온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날카롭게 분리시켜,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잔인한 짓을 일삼는 저열한 신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으로서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고, 사랑으로 다스리는 우등한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영지주의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이 구약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영지주의의 그러한 주장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자기가 지금 권면하는 계명이 오래된 정통신앙을 따른 것임을 말하기 위해 ‘내가 지금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어지는 8절에 “다시 내가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새 계명을 알지 못하던 때를 어두움에 비유하고, 새 계명을 알고 난 후를 참 빛이 비친 것에 비유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죄사함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어둠의 시대를 마감하시고, 새로운 빛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의 시대에 걸맞은 새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새 시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하셨고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심으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도요한 당시에도 예수님을 믿고서도 여전히 과거의 율법이나 거듭나기 전의 나쁜 습성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 3장에서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음란과 부정과 탐심을 가졌던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라”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음란과 부정과 탐심에 빠진,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성경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까지 말씀했겠습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9절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지금 사도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계속 나열하고 있는데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4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과 6절의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는 것’과 더불어 영지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주장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은 특별한 빛의 비췸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자신들만이 특별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주장했는데, 그들이 주장하던 빛의 비췸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신천지 이단’처럼 자신들만이 그러한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러한 영적인 지식을 받았다면 반드시 참된 빛에 거하는 삶이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참된 빛의 비췸을 받은 자의 삶은 예수님의 사랑의 새 계명이 그의 삶의 행위로써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빛의 비췸을 받고 빛에 거한다 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전혀 거룩하지 못했던 이단들에 대한 사도 요한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빛 되신 예수님의 생명력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 사랑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형제는 예수님 안에서 형제된 자 곧 성도를 뜻하는데, 내가 진정한 성도라면 빛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예수님의 사랑의 성품을 삶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도라도 서로 의견이 다르고 감정이 상하면 얼마든지 서로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완전한 의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언제라도 형제라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그와 같이 순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잠시 흥분해서 다른 성도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미움이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빛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잠시 실수로 분쟁에 빠지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쟁을 지속하며, 계속해서 상대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회개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성령께서 책망하심으로 먼저 자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고 화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11절 말씀처럼 어둠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습관처럼 하지만, 거듭난 성도는 어찌하든지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항상 고심하고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난 성도 안에는 거룩한 영, 사랑의 영,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우리 예수님의 영, 곧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시고 감화시켜 괴롭게 하고, 결국 회개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서로 더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요한일서의 전체 주제가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원의 확신 문제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냐? 네가 정말 거듭났느냐?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열매가 나타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새 계명, 곧 형제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성도간에 서로 사랑함으로써 구원받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그 뜻대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성도의 사귐은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죄사함의 확신을 얻고, 그를 통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루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새 계명 안에서 성도의 사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의 출발이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신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오늘, 서로 용납하고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성도의 사귐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욕심에 빠져 주안에서 형제된 성도간의 온전한 사귐을 이루지 못하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모습이 혹 저희에게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들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 짐을 고백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하므로 구원의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믿음에 대한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
요한일서 2:7-11 / 김홍덕 목사
어떤 사람도 사람을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원치 않음에도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이런 미움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심한 자책을 하거나 종교적인 수행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할 만큼 우리 안에 실존하는 마음의 단면이 미움이다.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빛이 아닌 어두움에 거하는 자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2:9~11)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과정 혹은 단계가 있다면 미워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것이 있는데 미워하는 대상에 대한 판단이 선행이 된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전에 우리는 상대에 대하여 나름의 판단을 하고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이 판단하고 못 마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자기가 가진 사람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물론 그 기준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까지 다양하다.그러나 세상에 종교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 해도 그것에 대하여 그 사람이 그 기준들이 옳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므로 기준이 문제라기보다 자신이 어떤 기준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요한 사도가 빛 가운데 있으면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형제라는 것은 같은 혈통 곧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빛 안에 있는 같은 생명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또한 빛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청세기적 표현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라는 것이고,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이 빛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렇게 연약한 육신으로 지으신 이유와 목적과 의를 인식할 수 있는 밝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므로 그런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그런 사람은, 사람은 연약하고 세상적인 기준이나 도덕적인 기준이나 사회적이고 법적인 기준으로 볼 때 늘 실수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그런 사람의 형제는 또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요한 사도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요한일서 2:7-11 : 조정의 목사
347년경 태어난 4세기 신학자 제롬은 사도 요한의 일화를 들려 준다. 사도 요한이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자,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한 마디 권면하는 것으로 만 족하게 되었는데, 그는 권면할 때마다 “어린 자녀여, 서로 사랑 하십시오”라고 늘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에 식상한 청중이 견디다 못해 왜 이렇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냐고 묻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것만 잘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데이비드 잭맨, <요한서신강해: BST>, 11p).
요한은 그만큼 사랑을 강조한 사도이다. 스스로를 “주가 사랑하 는 제자”라 칭했고(요 19:26), 요한일서에만 53번 “사랑”을 말 했다(요한복음 포함 110번, 신약 전체 거의 30%). 그런데 이 “사랑”은 영생과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 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불어 믿음으로 사랑의 사귐을 누리는 것인데(요 1:1-4; 요 17:3),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 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명령에 즐거이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사랑을 표현한다(1:5-2:6).
그러면 사랑의 주와 동행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사랑하지 않아도 될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를 심히 미워하고 성도 간에 갈등의 불이 꺼지지 않고 내 안에 성도를 향한 사랑이 턱없이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빛과 어둠을 나누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 현 주소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리신다. 이 말씀을 통해 형제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영생을 가진 자에게 얼마나 비정상 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여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길 바란다.
1. 이유1: 성도 사랑은 예수님의 명령이다(7-8)
예수 안에 살면서 성도를 미워해도 될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과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밝히신 뜻을 예수님이 변경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옛 계명 을 통해 분명히 밝히신 뜻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요한은 먼저 편지의 독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른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친 밀하고 진실한 말로 독자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를 위해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
요한은 자신이 지금 그들에게 쓰는 것이 새 계명이 아니라고 말 한다.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그들이 들은 말씀이다. 참으로 하 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부터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명하시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돌판에 새겨 말씀하셨다(출 34:28; 신 10:4).
또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첫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고(마 22:37), 둘째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다(마 22:39). 사도 바울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 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갈 5:14).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어쩌면 당신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노력은 하겠지만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고 여긴다. 하지만 계속된 요한의 설명에 주목하라.
요한은 성도 사랑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그리고 그들이 말씀 을 통해 들은 옛 계명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8절을 보면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그렇게(“새 계명”)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은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의 “새 계명”은 내용에 있어선 달라진 게 없다. “서로 사랑 하라.” 하지만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근거와 본과 원동력이 되어 주신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① 근거: 예수님 없이 우리는 하나님도 성도도 사랑할 수 없다. 하 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사랑의 사귐을 누리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성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는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벧전 1:2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진리를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진실한 성도 사랑을 할 수 없다. 그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사랑의 근거다.
② 본: 예수님은 서로 사랑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새 계명이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말했다(8절).
예수님(“그”)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하나님 사랑의 본, 겸손히 발을 씻기고 우리 죄를 담당하신 형제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에게 “사랑”이 온전히 나타난 것처럼(참된것 = 입증 된 것, 발견된 것), 그분 안에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③ 원동력: 요한은 8절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춰주시므로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예수님께 서 사랑의 빛의 원동력이 되시기 때문에 그 빛을 성도에게 반사 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이 계명을 주실 때의 의도대로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다”(309페이지).
그러므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옛 계명에 예수 님으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몰아내시고 성도 사랑에 순종할 수 있게 하셨고(근거), 성도 사랑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시며(본), 계속해서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빛을 우리 안에서 비추고 계시기 때문이다(원동력). 예수님 의 계명은 분명하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순종에 필 요한 모든 자원이 되신다. 그래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예외도 될 수 없고 핑계도 댈 수 없다.
2. 이유2: 성도 사랑은 예수 안에 사는 증거다(9-11)
이후 요한은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당신은 영생을 누리면서 성도를 미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생 을 가진 자의 확실한 증거가 성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중립지대 가 존재하지 않는 빛과 어둠의 비유로 요한이 이를 설명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9절).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 즉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영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다(현재형).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 자에 대해 요한은 “지 금까지(still, “여전히”,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해 참빛이신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실상 예수님 밖 곧 어둠에 있는 자라고 정죄한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증오, 폭력, 분노, 비방과 같은 외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한 주석가의 말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 의 부재”로도 나타난다(데이비드 잭맨, BST). 성도에 관한 철저한 무 관심, 공감이나 동정도 없고 사랑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 것 역시 어두움 가운데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사는 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10절을 보라.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10절)
참빛 곧 예수님 가운데 거하는 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다 (현재형). 앞에 나온 미움이 그 사람의 특징을 규정하듯, 형제 사 랑도 빛 가운데 거하는 이의 참 특징을 규정한다. 그는 형제자매 를 사랑하는 삶을 산다. 분명히 그것이 삶에서 보인다. 특별히 요 한이 말한 “형제”엔 넓게 원수와 이웃도 포함되나, 좁게는 예수 안에 같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공유한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넓게는 이웃 사랑, 좁게는 성도 사랑이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면, 내가 지금 성도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외적으로) 주중에 전화를 많이 걸고, 자주 성도를 찾아가 만 나고, 성도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 시간과 물질을 성도를 위해 사용하는 것, (내적으로, 성품적으로) 성도와 관계 속에 미움과 분노, 자랑, 시기 등 죄를 멀리하고 오래 참고 온유하고 이타적으로 성도의 유익을 구하는 것 등이 될 것이다(고전 13장). 하지만 특별히 요한이 주목하는 성도 사랑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 곧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 이 없다(10절).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거리낌(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 13번 정도 언급되는데, 누군가 를 “넘어지게 하는 것”(마 13:41; 16:23), “실족하게 하는 일”(마 18:7; 눅 17:1), “거치는 것”(롬 9:33; 11:9), “걸림돌”(갈 5:11; 계 2:14) 등을 말한다. 참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앞이 나 성도 앞에 죄의 덫이나 미끼를 두지 않는다. 죄의 유혹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 결과 다른 성도가 죄에 넘어질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 요한이 여기서 주목한 성도 사랑은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 영생 을 가진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 속에 죄를 두는 자, 곧 죄로 자기뿐 아니라 성 도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그 안에 어둠이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 과도 사귐이 없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성도 사랑이 예수 님 안에 사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 고 예배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면 서도 성도와의 관계에 많은 걸림돌을 두고 제거하지 않고 아무렇 지 않게 사는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이 별개로 분리 된 것처럼 여기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가? 틀렸다. 그럴 수 없다!
마치 상의는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하의는 발가벗은 사람처럼 당 신과 하나님의 사귐이 아무리 기품있고 빛나고 아름다워 보여도 성도(가족 포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인이다. 요한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했다(요일 4:20). 그만큼 성도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직결 되어 있다. 다음 말씀이 내린 평가를 보라.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절)
그는 분명 어둠에 있다. 어둠에 속한 자다. 그래서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은 마음이 죄로 완고해졌다는 것이다(요 12:40).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과 성도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참빛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도 형제자매 에게 그 빛을 반사하지 못한다면, 분명 중간에 그 빛을 가로막는 어둠 곧 죄가 있다는 말이다. 상류에서 흐르는 물이 막히면 하류 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이 형제자 매에게로 흘러가지 않는 사람은 중간에 죄라는 쓰레기가 꽉 틀어 막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죄가 돌처럼 굳어졌다는 말이고,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슬프게도 처 음부터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란 게 밝혀진다.
3. 적용
설교 제목이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이다. 원래 제목을 “미워할 수 있을까?”로 지었다가 바꾸었다. 우리는 성도를 미워할 수 있다. 여전히 옛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성도를 미워해도 된다’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형제를 미워하는 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과 함께 사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이가 사랑하지 않는건 비정상이다. 하나님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오랜 세월 미워하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거리를 두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 간에 불협화음을 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회개하고 돌이켜라. 하나님께 자백하고, 성도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예수 안에 사는자 답게 서로 거치는 것을 두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자. 이것만 순종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새 계명과 형제 사랑
요일 2:7-11
신자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 자들에게서는 절대로 형제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한가를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형제 사랑은 윤리적인 것도 기계적인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높은 자 낮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월이 없고 비교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서 씻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씻어주신 것입니다. 요 13:14-15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을 보여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안에서 제자들은 서로 높고 낮음이 없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흔히 행하는 세족식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족식을 하지 않아도 형제를 만날 때 높고 낮음이 없이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안에 거하는 형제로 만나면 그것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이어 요 13;16-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종일뿐입니다. 그 어떤 형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종으로 만나는 것이지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만이 상전으로 존재하실 뿐, 내가 다른 사람의 상전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복이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종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예수님의 종으로서 감히 형제의 상전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 적게 배운 자, 이것은 절대로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은 죄안에서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서로 만날 때 세상의 것을 앞세워서 자신의 우월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임을 서로에게 증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높고 낮음이 없는 관계에서의 만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형제를 섬기고 봉사하라고 주신 은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높이는 것 또한 어둠에 거하는 모습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인간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2:28-29절에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육신의 할례를 할례로 보지 않고 마음의 할례를 진정한 할례로 본다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도 같은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구약에는 육신의 할례를 중요시하다가 신약에 와서 마음의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변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10:16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는 것은 참된 행함이란 마음에서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달음 심령이라면 행위는 자연히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는 어떤 신앙적인 행위로서 우리를 높일 수 없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신앙적인 행위라는 것으로 서로를 비교하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것으로 신자의 관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모든 의와 공로가 여호와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힘을 부인하는 것이 곧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행위를 보지 않는 자가 형제를 비교하고 구분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가치는 형제 사랑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처럼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고, 설사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나의 전부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여러분은 능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대할 때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요일 2:7-11
하나님의말씀을 따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은 '사랑하라'는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입니다. 하나님이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날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 다음에 실천하게 되는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7,8절을 봅니다.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일]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새계명과 옛계명은 신약과 구약을 의미합니다. 신약과 구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되었습니다. 구약의 내용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고 잘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계명은 그들이 들었던 말씀이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새계명을 쓸 때에 그것은 옛 계명과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옛 계명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라고 한 것입니다. 옛 계명을 폐기하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을 완성하는 새 계명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둠이 지나나고 참빛이 비쳐서 모든 것을 밝게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옛 계명에 부족했던 것을 새 계명이 설명하면서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어둠속에서우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본다 하더라도 희미하게 혹은 부분적으로만 볼 뿐입니다. 어둠 속에서 바라를 보십시오. 넓은 바다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비추어지고날이 밝으면 비로소 한도 끝도 없는 바다가 보이게 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옛 계명에서는 완전하게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에서는 잘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빛되신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새 계명에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9,10절을 읽어봅시다.
"[요일]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좀더 의미를 찾는 말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반대는 미움입니다. 왜냐하면 미움이 하나님의 계명의 반대와 불순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미워하는 자가 어둠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거부하고 그 빛이 비추는 대상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는 빛이 있으나 어둠에 있는 자가 됩니다.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빛 가운데거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긍휼히 여길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두고서 잠시 외출을 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동안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잘 있으면 부모님이그 자녀들을 기뻐하겠지만 반대로 그동안 서로 싸우며 미워하고 있었다고 해보십시오. 부모님이 돌아와서형제를 미워하고 잘못 한 아이에게 벌을 주고 혼을 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이한 사람 한 사람 맡겨주시고 인도해 주셨는데 그들을 혼내고 벌을 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에 비로소 그 빛이 우리 삶에 비추어지게 됩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사랑으로 살면 그 빛의 아름다움 속에 살게 되지만 미움으로 살면 그때부터 어둠속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니우리는 언제나 사랑 속에서 빛의 풍성함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괴로움을 성경은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미움이 어둠이라고 하신 것은 가장 적절한 비유입니다. 어둠은 앞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눈이 멀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둠 속에있는한 걷는 것이 향방이 없고 뛰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가야하는 곳, 가져야하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 모든 어리석음이 바로 미움 속에서 생겨납니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고 그 미움 속에서 평생 하나님의 기업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거주한 곳은하나님의 기업과는 멀어져 있는 세일산이었고 그곳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결국은 어리석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미움 속에서 가야할 곳을 잃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잘 지키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사랑이 아닌 미움으로 채워지면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의 길로 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를 기억하고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비로소 성도의 삶이 완성됩니다
요일 2:7-11 / 찬송 218장
누군가가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직책에 대하여 갖는 보편적인 기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판사라는 직책에는 언제나 의롭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의사에게는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인지 잘 찾아내는 것은 기본이고 의료행위뿐만 아니라 인술을 펼치는 의사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목사에게는 어떤 기대치가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설교를 잘하거나 목양과 심방을 잘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마 기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갖는 기대일 것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진실하고 인품이 훌륭하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어떤 기대치를 갖고 있을까요?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입니까? 봉사를 잘 하는 것일까요? 기도와 전도를 잘하는 것입니까? 교회 안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꼽을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에게 갖는 기대감은 목사에게 갖는 기대치와 똑같을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보다 더 정직하고 사랑이 많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으로 사는 길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 즉 계명을 잘 지킴으로 나타납니다. 본문 앞 4절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아는 성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가르쳐주신 모든 말씀이 우리가 지킬 계명이지만 이것을 요약하면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을 더욱 함축하여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5-40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을 다시 두 문장으로 줄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켜야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중요한 계명을 상기시켜줍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구약에 명시된 계명에는 사랑하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구약에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라는 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주시는 방식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방식이 무엇일까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지극히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통해 사랑으로 용납하셨기에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 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먹던 다락방에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에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의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거룩한 성품은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같은 믿음의 지체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특징 첫 번째는 ‘빛 가운데 거하여’입니다. 이는 빛 속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빛이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시험하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빛 안에 거리낌이 없듯이 서로 간에 거리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거리낌’이라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말합니다. 이 단어에는 ‘덫’, ‘미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거리낌’은 다른 사람을 미혹해서 범죄 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랑이 결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베드로 사도의 말대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시며 빛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그 삶에 거리낌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까지 덮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나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열심히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11절입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의 특징은, 첫 번째로 ‘어둠에 있고’입니다. 이런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시며 빛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빛이 없으며,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면, 어둠은 사단의 속성이지 않습니까?
두 번째 특징은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에 행하며’ 이 문장의 문법적인 시제를 살펴보면 지속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계속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정확한 도착지, 명확한 목적지를 몰라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십시오. 만약 지금 내 인생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의 험난한 연속이라면 미움과 원망의 마음부터 없애야 할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청산하지 않고는 방황하며 굴곡이 멈추지 않는 험난한 인생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을 지킴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됩니다. 사랑의 행동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생활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내어 주기가지 섬기신 것처럼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종노릇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고, 계명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 그 계명을 삽시다
요한일서 2:7-11
요즘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유명한가 봐요. 대한민국 상위계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왔던 세계인 최고의 계급을 누리기 위해,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그런 드라마더라구요. 겉으로 보기에는 최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요.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거짓과 기만, 그리고 그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고통 등이 얽혀 있어서, 인간의 끝 모를 욕망과 그 욕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약함을 동시에 보게 하는 드라마인 것 같아요. 이 드라마의 메인 OST가 ‘We all lie’랍니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해 가끔 우리는 웃으며 쉽게 거짓말을 하지”, 이런 가사라고 해요.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통을 감수하며 서로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세계를 위해 알면서도 웃으며 할 수 있는 거짓말이 있어요.
그런데요, 그렇지 않은, 모르면서 하는 거짓말도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 4절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기 누가 나는 예수 믿으면서 진리는 없이 거짓말만 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잘 따라 지키고 있을까요. 성경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의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면요, 어쩌면 우리 기독교도 거짓의 캐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계명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여전히 나의 구원만 중요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점점 더 손가락질 받는 교회라면, 그게 스카이캐슬과 뭘 그리 다르겠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우리 그렇게 진짜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삶, 그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예수 믿는 거고, 그래야 성도이고, 그래야 교회인 거죠.
옛 계명
오늘 본문부터는요, 그렇게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갑니다. 한 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계명은요, 이미 오래전 성경이 말하는 것이었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었어요. 그래서, 요한은 이것을 옛 계명이다, 새 계명이다, 이렇게 말해요.
7a절 한 번 같이 읽을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그리고 8절은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이렇게 시작해요. 이 7절과 8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분 계신가요. 문장만으로는 구조를 아무리 봐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왜 이렇게 설명하는가, 생각 속에 있는 컨텍스트를 읽어야만 해요. 오늘은 같이 그 요한의 생각을 따라가보지요.
먼저 옛 계명이라고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의 하나님의 율법에 녹아 있는 정신이었어요. 레위기 19:18절에서는 이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이렇게, 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 온 하나님의 명령이셨고, 율법의 핵심이었어요. 그러니 옛 계명인 거예요. 두 번째로는, 이 계명이 예수님께서 직접 오래 전에 가르치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해요. 지금 요한이 편지를 쓰는 요한 공동체는 이미 기원후 90-100년 즈음의 공동체에요. 이때의 주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그들은 거의 다 죽고, 2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에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수십 년 전 오래 된 분이에요. 그러니,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오래 전 가르침이었고, 그래서 옛 계명이라고 부르는 거구요.
하나님의 율법을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율법은 핵심은 십계명이에요. 이 십계명은 두 개의 큰 틀로 이루어져 있어요. 1-4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계명이구요, 5-10계명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 지켜야 할 계명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1-4계명을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요약하셨고, 5-10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요약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게서 가르치신 게 이렇잖아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27-39) 이것이 율법 정신이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이 사랑을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외치셨어요.
요한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랑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 율법으로 선지자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 사랑은 예수께서 다시 그 무너져 가는 세대에서 다시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니,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요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말씀하셨던, 사랑을 다시 떠올리며, 서로 사랑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게 옛 계명이에요.
요한 시대의 상황
그런데요, 이렇게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데에 있어서 요한만이 가진 아주 큰 특징이 있어요. 그 넓이의 차이에요.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구요, 그리고 바울도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요. 그런데요, 유독 요한의 서신서에는요, 사랑하라고 말할 때,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이렇게 가르쳐요. 이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는 말은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말해요.
그럼 요한의 사랑은 편협한 것일까요. 아니에요. 요한에게 있어서도 예수님의 사랑은, 그 지고한 가치는 끝이 없는 사랑이에요. 이것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요한서신에서는 왜 그렇게 모든 초점을 공동체에 맞추고 있을까요. 요한의 사랑이 편협한 게 아니에요. 요한은 지금 공동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고 있어서 그래요.
지금 요한 공동체는 상당히 큰 어려움을 교회 내부에서, 그리고 교회 외부로부터 겪고 있는 중이에요. 교회 내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치명적인 싸움이 진행되고 있고, 또 교회 외부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일어나고 있어요. 요한은 서신 곳곳에서 적그리스도나, 세상의 미움, 이런 표현으로 당시의 어려움을 내비칩니다. 요한 시대의 공동체가 당한 긴장과 탄압은 아주 커서요,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거예요.
이 공동체의 어려움을 잘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가 미움이에요. 9절을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다, 11절 말씀을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어둠이 그 눈을 멀게 하였다, 이렇게 말해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것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원래 요한이 말하는 미움이 뭐냐면요, 이건 요한의 다른 글들, 요한복음과 계시록에도 같은 의미로 계속 등장하는 단어인데요. 교회를 박해하고 어렵게 하는 적대자들 있잖아요. 그들이 요한의 기독교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를 ‘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요한일서를 읽다보면, 그 컨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요, 요한 공동체는 하나의 섬처럼 보여요. 박해와 고난, 어려움, 이걸 하나의 단어 ‘미움을 당한다’고 표현하구요, 그렇게 미움에 둘러쌓인 섬 같다는 인상을 받게 돼요. 그런 상황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럼, 이런 상황을 이길 힘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그게 사랑이라고 믿어요. 그러니, 요한의 이 사랑은 고난과 박해에 함께 맞서는 사랑이고, 왜곡되고 거짓된 복음에 함께 저항하는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교회를 살리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며,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이라서, 그것으로 서로 일어서게 될 것을 믿어요.
그런데요, 그런 미움이 공동체 안에도 있어요. 형제를 미워하고, 서로 미워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요한은 단호하게 말하는 거예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들은 어둠에 있다, 어둠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이렇게요. 교회 공동체가 사랑을 해야지, 미워해서야 되겠냐구요,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요한이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가, 하구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나요. 제가 설교 앞부분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거짓말하는 줄 모르는 채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예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없이, 수고와 헌신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예수 공동체일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팔아 공동체를 위해 내어 놓았고, 자기의 것을 들고 와서 다 같이 나누어 썼는데, 누구도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나누다보면,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 그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 복음인 한, 그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본질을 제쳐두고, 본질을 말하지 않고, 제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저는 말은 많은 데, 100명이 1명을 살리지 못하는 교회는 사랑하는 교회가 아닌 거 같아요.
연탄길 작가 이철환씨 알죠. 그의 책 중에 ‘행복한 고물상’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안에 있는 내용이에요. 기니까, 중간 중간 생략하면서 읽어볼게요. 10년 전 나의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친구 형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정말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형주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예식이 끝나갈 무렵 형주의 아내가 아이를 등에 업고서 토막 숨을 몰아쉬며 예식장 계단을 올라왔다. 초라한 차림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나타난 친구의 아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등 뒤의 아가는 엄마의 낡은 외투를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친구의 아내를 통해 친구가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철환아, 형주다. 나 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만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커 사과장수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이가 오늘 밤 분유를 굶어야 한다. 철환이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 종일 추위와 싸우며 번 돈이 만 삼 천 원이다. 하지만 슬프진 않다. 아지랑이 몽기몽기 피어오르던 날 흙 속을 뚫고 나오는 푸른 새싹을 바라보며 너와 함께 희망을 노래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외롭지 않았다. 사자바람 부는 거리에 서서 이원수 선생님의 ‘민들레의 노래’를 읽을 수 있으니 나는 부끄럽지도 않았다. 밥을 끓여 먹기 위해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철환이 장가간다.... 철환이 장가간다.... 너무 기쁘다.’ 아내 손에 사과 한 봉지 들려 보낸다. 지난 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 가서 먹어라. 이 좋은 날 너와 함께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해다오.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 해남에서 형주가 -” 편지와 함께 들어 있던 축의금 일만 삼천 원,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장, 형주가 어젯밤 거리에 서서 한 겨울 추위와 바꾼 돈이다.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있는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할까, 이를 사려 물었다. 이철환씨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해요. “형주야, 나도 너처럼 감나무가 되고 싶었어. 살며시 웃으며 담장 너머로 손을 내미는 사랑 많은 감나무가 되고 싶었어.”
여러분, 이게 사랑이잖아요.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태초부터 당신이 가진 본질이셨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위해 주신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먼저 온전히 예배하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구요, 서로 사랑해라,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보여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 누구도 고난과 아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 매일이 고통인 분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육체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또 환경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가진 교우들도 있어요. 여전히 길을 모르는 형제 자매들이 있고, 부모님의 어려움을 두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래서 위로와 함께 나눔이 필요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섬김으로 사랑을 보이고, 헌신함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일어서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습니다. 얼마나 안 해 봤으면, 서로 위로하는 법을 모를까요, 우리가 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까요. 저는 이게 너무 안타까워요.
새 계명
왜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이 옛 부터 내려오는 율법이고, 그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것으로 공동체가 세워지니까요. 그런데, 사랑해야 하는 이유, 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새 계명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옛 계명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요한이,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 이렇게 말해요. 같은 계명인데, 똑같이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이 왜 다시 새 계명이 되는 걸까요.
새 계명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셨어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럼, 왜 예수님은 이미 있던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새 계명이 예수님께는 이미 참 된 것이라고 해요, “다시 내가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 된 것이라”. 여기에서의 ‘그’가 예수님이에요. 이 사랑의 계명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삶 속에서 완전하게 성취된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삶이었고, 십자가의 죽음이었어요. 그 사랑의 깊이나 방법은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였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요, 이미 오래전 하나님의 계명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실현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게 어떤 계명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거예요. 서로 사랑하라는 그 언약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셔서요, 살아 계실 때는 삶으로 보이셨어요. 사랑이 필요한 곳, 아픔이 있는 곳, 고통이 있는 곳, 그게 어디든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에는 예수님이 계셨어요. 그냥 고치신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하셨고, 같이 눈물 흘리셨고,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셨어요. 그리고는 당신이 죽으실 때에는, 우리의 어떤 상상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보이셨어요. 그게 예수님이 이루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먼저 삶으로 성취해 내셨어요. 얼마나 큰 역사인지, 얼마나 큰 감동인지, 그게 예수님이 보이신, 이루신 사랑이에요. 그래서 그게 새 계명이고, 그래서 그 새 계명은 예수님으로부터에요.
그런데요, 여러분, 그게 그 예수님뿐만 아니라 ‘너희에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그 계명은 참되다고 해요. 우리는 예수께서 그 사랑으로 이루신 것을 감탄하고 은혜로 여기고, 그게 예수님이 하신 가장 놀라운 사건이고 역사로 생각하는데요, 오늘 요한은 우리 안에서도 그 계명은 참 되다, 이렇게 말한다구요. 어떻게 그럴까요,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어서요. 이런 뜻이에요. 그 계명은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되어, 그래서 새 계명일뿐만 아니라, 그래서 이 땅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언약이 시작되었어요. 그 구속의 언약은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서요, 우리도 그 예수님을 닮아 살 수 있게 하셨어요. “새 계명은 너희에게도 참 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속의 역사를 통해 빛으로 오셨고,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계셔서, 누구든지,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다 그 빛 아래에서 새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살게 되는 거예요. 빛이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다시 말해서요, 새 계명의 핵심은 현재성이에요. 지금 우리가 그 계명을 살 수 있다는 것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빛 아래에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그 가능성을 여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하십시다. 우리의 삶에서 진실함으로 행함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얻는 위로를 모두가 다 받았으면 좋겠어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여기에 넘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의 사랑이셨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기 우리 중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 없습니다. 여기 우리 중 누구라도 사랑이 필요 없는 부자도 없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계명이고,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께서 비추신 빛 아래에서 서로 비추어, 서로 사랑하며 사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사랑, 그리스도인의 시금석
요한일서 2:7-11
서론: 여러분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소설가 문순태씨가 쓴 에세이 중에 <사랑하지 않는 죄>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온 내용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성당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가 고해성사를 보려고 고해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한동안 기다렸으나 할머니는 입을 열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서 신부님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 뭘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사는 것이 죄요”라고 말하더랍니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어쩌면 우리 모두 사는 것이 죄일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중에서 실상 그리 죄를 짓지 않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의외로‘죄를 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애경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큰 죄를 졌습니다'라고 말하고, 돈을 벌지 못하거나, 성공을 하지 못한 아들도 부모한테 ‘죄를 졌으니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딸이 슬픈 일을 당하면 어머니는 ‘딸 가진 죄’라고 합니다. 이처럼 죄 없는 사람들은 곧잘 죄 지었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하지만 진짜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말을 쉽게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뻔한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오리발을 내밀거나 나보다 상대방이 더 심하다고 비방합니다.)
그렇다면 죄 가운데서도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먼저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행위처럼 큰 죄가 없습니다. 특히 잘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신을 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행위는 꼭 계약의 파기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약속을 어긴 것만이 배반이 아닌 것입니다. 타인에게 피해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모두가 배반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사람을 미워하고 도둑질하며 폭행과 살인하는 것도 인간의 배반 행위입니다. 또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현대의 우상이라고 하는 명예욕과 물욕과 권력욕에 집착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헛명예를 지키고 물욕을 채우고 권력을 쟁취하려면 인간을 배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배반하는 것 못지 않게 큰 죄는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이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 큰 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배반하는 것이며, 인간이 자연과 신에게 똑같이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우리는 나는 죄가 없다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양심이 시멘트 바닥처럼 단단하게 마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옷이 저절로 더러워지는 것과 같이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기 마렵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며, 죄를 벗어남은 신적인 것입니다.
최후에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못난 사람이거나 잘난 사람이거나, 모두를 열심히 사랑해야 하며, 특히 우리에게 신비로운 생명을 주신 창조주와, 우리를 포옹하고 있는 하늘과 대지와 나무들과, 이름 모를 풀꽃 하나까지라도 사랑하여, 사랑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늘 일깨우며 살 일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임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평화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에 얼마만큼 공감하십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매일 부딪히며 사는 사람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지 말라는 금령에 대해서는 비중 있게 듣지만 하라는 계명에는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살인 죄는 나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처럼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남을 직접 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키면 좋지만 굳이 지키지 않아도 남에게 해 끼치는 것이 아니기에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계명은 단순히 죄를 짓고 안 짓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형제를 시기하고 미워하면 우리가 말만 그렇지 실상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검증해 주는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한 기독교 변증학자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도 ‘사랑’을 가리켜 ‘그리스도인 표지’라고 정의했습니다. “오직 이 사랑의 표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진정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께서 진실로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분임을 우리는 세상에 알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지식이 많고, 정통 교리를 붙잡고, 기도 많이 하고,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참 유익하고 필요한 것입니다만 이것들로써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가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그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입니다.
1. 옛 계명과 새 계명
7-8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희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들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이 새 계명은 내용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들었던 그 말씀입니다. 이것을 새 계명으로 다시 말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새 계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3:34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이런 계명이 없습니까? 구약에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9:18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기에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로서 서로에 대해서 책임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에도 있는 대로 형제 사랑하라고 말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내용은 똑같지만 그 계명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에스겔 34: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양을 돌보아야 할 목자들이 오히려 양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양과 양 사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스겔 34:20-21절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먹고, 양들 사이에서도 힘 있는 양들이 약한 양들을 어깨로 밀치고 뿔로 받아 흩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계명이 주어졌지만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양떼를 친히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4:22-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한 목자, 다윗을 세워서 그들 중에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훗날 오실 메시야의 표상입니다.
이 약속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자신의 살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계명이 새 계명입니다. 이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내용면에서 같습니다만 그 성취의 면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고서 이웃을 사랑하느라고 구제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함이었고 결국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기에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예언합니다. 이 일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신,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성령님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셔서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도록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앞뒤 문맥을 살펴 보면 유월절 만찬 중에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여기서 영광이란 무슨 영광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까지를 다 포함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자기 피로 이루어내신 새 언약의 결과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33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윗의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예언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다윗 같은 목자를 세워 자기 양떼를 먹이는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바대로 성취된 것입니다.(겔 34:24)
8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계명을 쓰는데 이 계명이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되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 참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새 계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다 지키었습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셔서 자기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새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물론 여기서 내 이웃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믿는 형제 자매, 곧 그리스도의 몸의 함께 된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을 과연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어두움 가운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침이라” 어두움이란 계명을 지키고자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애쓰는 것을 또한 포함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참된 이웃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조차 어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새 계명을 지키는 자리에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빛이 비췄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에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상기시켜 줍니다.
2. 사랑, 그리스도인의 시금석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서신(골로새서)에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리스도인이란 어두움의 왕국에서 이미 빛의 왕국으로,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 따라 살아갑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질서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질서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보여 주신 길입니다. (요 13:13-1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 주님이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사랑을 행함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를 통해서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내가 빛 속에 있다’(9절)라는 이 말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요일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왜냐하면 사랑은 빛의 영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행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두움 영역의 대표적 행실이 미움인 것에 대조하여 빛의 영역의 대표적 행실이 ‘사랑’인데,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사랑의 행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미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다는 것이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어 빛 가운데 사는 사람 속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기서 ‘거리낌’이란 원어로‘스칸달론’(스캔들)으로 ‘방해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의 관계에서 거리낌(거침돌)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도록 만드는 ‘거리낌’이 됩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거리낌’이 없습니다. 거림낌이 없으니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21-2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고할 수 있는 진정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3. 형제를 미워하는 자, 어두움에 속한 자
반면에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라면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입으로 ‘내가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산다면 그 미움의 행실을 통해서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는 자라는 것입니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사도 요한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의 왕국에서 살고 있고, 그 왕국의 질서에 따라 삽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삶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이 삶의 모습이 지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완벽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방송과 신문의 뉴스에서 보여 주는 모습이 지금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아니라고 부인할 지 모르지만, 비록 그럴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하여도 뒤에서는 서로 미워합니다. 마음 속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악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운 속에 있기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해서 살아가지 못하고 주변 환경과 상황에 의해 휘둘리며 삽니다. 일이 잘 진행되면 기뻐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나쁘고 화를 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나 분위기, 일어나는 현상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삶의 기준도 없고, 자신을 주관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 본질에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 세상의 신,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심판대 앞에서 엄위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게 될 것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에 형제 사랑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원한 운명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어둠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걸림돌이 됩니다. 남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자는 언제나 문제거리를 찾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무시 당했다고 모욕감을 느낍니다. 항상 무엇에인가에 흥분하고 화를 냅니다. 불필요하게 예민하여 다루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그들을 또한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살아가는 모습이고 방식입니다.
결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합니다. 계명을 지킵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장 모임에서 서로를 보면 아주 반갑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저들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어서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는데 저들도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에 ,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에 정말 사랑합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으로 인해서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기뻐합니다.
이런 형제 사랑이 초대교회에서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를 보십시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극적으로 회심합니다. 그리고 즉각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지른 포학한 과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꺼려하였습니다. 이 바울을 바나바가 추천합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그를 형제로 맞이하며 교제의 악수를 합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형제로 교제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를 입었기에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습니다.(롬 16:4)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었습니다. (갈4:15)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수많은 성도들이 이런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자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 위하여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하여 있게 합니다.(행 16:15)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자고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께서 이 새 계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어두움에 비치듯이 새 계명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아름다운 변화가 발견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축원합니다.
* 참고문헌
문순태, "사랑하지 않는 죄"
마틴 로이드 존스, <요한일서 강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