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목소리가 아까부터 내 귀를 울렸다.
왠지 친근한 목소리인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가…누군가가..날 부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눈이 안 떠지는 거지?
“파브! 파브! 어휴..참.. 얘, 파베리아드!!”
포근한 손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낌이 어깨쪽에서 났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지은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잡혀 탈탈 털리는 것은 어찌 보면 기분 나쁜 일일수도 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파브! 학교 늦겠다! 오늘이 입학식이잖니?”
“힉!”
우앗..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도무지 떠질 것 같지 않던 내 두 눈꺼풀은 조건반사적으로 치켜올려졌다. 그렇지.. 난 잠을 자고 있었어. 날 지금껏 흔들어 깨운 것은 우리 엄마.. 그리고 오늘은 내가 앞으로 다닐 학교인 ‘사립 세인트 블루메이라스’ 의 입학식.. 입학식.. 입학식….?
무슨 소리야? 세인트 블루메이라스의 입학식은 한달 후라는 걸 기억하는데..
“오호홋, 드디어 일어나는 구나, 파브. 이 방법은 언제나 효과 만점이라니까?”
“우이… 엄마!!”
그렇다. 나는 언제나 이런 방법으로 깨곤 했었다. 치잇.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돼 아직 침침한 내 눈을 비비며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그때까지도 내 옆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우리 재.미.있.으.신 엄마를 향해 최대한의 불만을 표현 한 뒤, 덮고 있던 푸른색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휴,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이 상태에서 도로 누워 다시 수면을 청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내가 워낙에 한번 깨면 잠을 잘 못자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또 엄마가 나를 이렇게 깨웠을 때는 무언가 일이 있을 때 뿐인지라 난 투덜거리면서도 세면대로 향했다. 햐.. 이제 정말 습관이 되 버린 걸까? 요즘 들어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이 세면대인걸 의식한 나는, 나에게 지금껏 행해져 왔던 엄마의 세뇌교육이 드디어 효과를 발하는 거라고 믿어버렸다.
아, 아직 나에 대해 소개를 안 했나? 하핫.. 내 정신 좀 봐. 이제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내 이름은 파베리아드 조슈아슨. 짧게 줄여서 파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뭐, 하긴 그게 더 많이 쓰이는 이름 이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15살이고, 또, 음… 남자다. 내 옆에서 싱글 거리는 이 젊은 누나(?)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한 분의 어머니로서, 현재 우리가 15년 째 거주하고 있는 윌프레드 마을의 유일한 술집인 ‘산골 주점’을 경영 하시고 있는 주부였고, 굳이 특징을 말하자면 요리 솜씨가 뛰어나시고.. 성격이 엄청 별나시다는 거? 허.. 울 엄마가 특이한 것은 우리 술집의 이름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마을은 산맥지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평 지대라는 것.
산이라고는, 마을에서 제일 높은 탑 꼭대기에서 마력을 담은 렌즈를 동원해 멀리까지 보아도 안 보이는 우리 마을의 술집 이름이 ‘산골 주점’이라면 말 다 한거다. 언젠가 엄마한테 우리 특이한 술집 이름의 유래를 물어본적이 있었지만, 그때 내게 해준 말은 간단했다. 분위기 있어 보인 다나 어쩐다 나?
아무튼 그것으로 우리 엄마의 설명은 된 거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엄마의 엽기 행각들을 전부 나열 하자면 몇 권의 책이 완성될 것이다. 아, 당연히 나중에 크면 책도 써볼 생각이 없지 않아 있는 게 내 생각이지. 히히히
분명히 베스트 셀러가 된다는 것에 내 수입의 반을 걸어도 좋아.
음.. 그리고 나에게는 누나가 한명 있다. 나하고는 5살 정도 차이가 나는 친 누나 인데, 지금은 현재 사립 세인트 블루메이라스에서 학생이란 신분으로 생활 한다고 한다. 흐에.. 그러고 보니 누나 안본지도 벌써 2년이나 다 됬네.. 2년 전 겨울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온 게 전부니까.
이것 저것 떠올려 보던 나는 세면대에 차디찬 물을 받으며 손을 적셨다.
겨울의 차가운 냉수가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찌부둥한 내 손의 살결을 따갑게 주물렀다. 우하.. 손 시려.
“으하아암.. 엄마,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으아.. 아직 8시 밖에 안됬는데 깨우시고. 오늘은 술집도 쉬는 날이 잖아요?”
“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거야?”
나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내게 되물어 오는 엄마의 갸름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곤, 생각에 잠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오늘.. 12월 9일.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특별한 날이 아닌 것 같은데. 흠, 우리 술집인 ‘산골 주점’의 개업 기념일은 5월에 있고.. 우리 엄마 생신은 2월..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은 9월이고.. 누나의 생일은 기억 나지 않지만 12월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흠.. 12월 9일이라면..”
분명이 낯설지는 않았다.
12월 9일이라.. 9일..9일.. 어억!!!
“허억!! 그럼 오늘이 제 생일?!!”
“쯧쯧쯧.. 이제 16살이 벌써부터 두뇌 노화 현상이 일어나는 구나. 뭐, 어쨌든 축하해줄게.”
“아하하핫.. 에헤헷.. 헤헷..”
“왜 웃니?”
“그냥 요.”
딱.
우에.. 아파라..
우씨. 헛소리 한다고 엄마한테 꿀밤 얻어먹었다. 아아.. 16살의 시작도 어김 없이 꿀밤 한대로 시작하는 구나..
이게 다 엄마를 잘 만난 덕분이야. 헤헤
내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니, 어느덧 햇빛이 나를 비춰주고 있었다.
작년 이맘 때와 같은, 따스한 겨울철 햇빛이 말이다.
갓 받아논 냉수를 얼굴에 적셨다.
완연한 겨울로 이곳 윌프레드 마을에 다가온 1월은, 얼마전의 12월 보다 한층 더한 추위로 수돗물을 냉각시켰는지, 차갑다 못해 따끔따끔한 기운이 내 얼굴을 부벼주었다. 아.. 정신이 번쩍 드네.
마악 일어난 차라, 아직도 세포 분할이 왕성하지 않은 내 얼굴 피부는, 내 정신이 번쩍 나는것과 동시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암… 근데 아직도 졸려.”
무의식 적으로 내 입에서 새어나온 이 말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흠. 실제로 이상태에서 침상에 눕기만 하면 잠이 올걸? 하지만 다시 침상에 눕는 것 따위는 내 관심대상이 될 영광을 갖을 수 없다. 왜냐면! 헤헤헤, 오늘이 바로 수도인 라그넴으로 출발 하는 날이거든! 시골 촌뜨기인 내가 번화 도시인 라그넴에 무슨 이유로 가는지는 묻지 말길. 헤헤, 앞으로 내게 다가올 흥미 진진한 학교생활을 생각하느라 대답할 여유가 없을 테니까.
벌써부터 쭉 찢어진 내 입꼬리를 보면 알수 있듯이, 내 마음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우리 누나가 딴 장학금으로 나 까지 그 유명한 세인트 블루메이라스에 입학할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게된 작년 6월부터, 나는 정말 말 그대로 미친듯이 공부하고, 수련하며, 이것 저것 다 해오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수도에 있는 기사 양성 학관이나 검술학교, 국립 학원을 동경해 오던 나에게는, 그때의 우리 누나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없었다. 에..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라그넴에 있는 학교, 특히 세인트 블루메이라스는 장학금이 따기 어렵다고 소문이 자자한 학교였다. 그런데 거기서 1년에 20명을 우수한 성적대로 뽑아 장학금을 주는데, 우리 누나가 거기에 낀 것이었다. 정말 난 처음에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그것도 세인트 블루메이라스에서. 허어.. 갑자기 없던 존경심이 뭉클뭉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아직 받아논 물을 채 다 쓰지도 않은 체, 그 앞에서 혼자 히죽 히죽 웃고 있던 나는, 다시 씻기에 몰두하기로 하였다. 우화암.. 저 시계를 보니까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이게 되네. 왜냐하면 시계의 바늘은 정확히 8시를 알리고 있었으니까.
간단하게 몸을 청결히 한후, 나는 날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있는 아랫층, 즉 주점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내 딛으며 지상으로 내려온 나의 시야엔, 여느때와 다름 없이 손님맞을 준비를 하는 우리 술집의 풍경이 비쳤다. 가게의 이곳 저곳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타울 등을 거는 종업원인 하이트도 눈에 띄었다.
우리 엄마의 산골 주점은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이라서, 언제나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기지 않았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술집이 하나밖에 없는 곳은 이곳 밖에 없을거야.. 씨. 때문에 엄마도 고생하다 못해 종업원을 두실 생각을 하셨으니 말이야. 흠.. 한 6년 전 이야기던가? 헤.. 기억이 안나네. 하긴 너무 어렸으니까.
금방 계단을 뛰어 내려온 나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것은 종업원 중에 가장 막내격인 하이트 였다. 나보다는 3살 위인, 19살의 청년이었고, 나와 나이가 가까워서인지 가장 친했다. 한 2년전에 청소부로 들어왔던가? 하지만 나와는 금세 친해져 이런 저런 놀이도 많이 하고, 또 나이가 많은 연장자 답게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역시 많이 들려주었었다. 내가 검술에 관심을 갖은 것도 하이트 때문이 아닐까? 하핫. 그도 그렇듯이, 하이트는 내게 기사와 용병, 그리고 워리어 따위의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모두 검술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서인지, 내 흥미를 돋구었고 나는 점점 검술에 관한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여어, 파브! 왠일이냐, 네가 10시 전에 일어나고… 분명이 오늘 아침에 동쪽에서 뜨는 해를 감상했는데..”
“칫, 하이트는 그렇게 밖에 말 못해? 친한 동생이 험한 도시로 나간다면 뭔가 격려라도 해야할 것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히히힛, 짜식. 많이 컸네, 논리도 파악할줄 알다니.. 겨우 16살 짜리가.”
쳇, 하이트가 나를 자주 놀려먹는 말.
‘겨우 16살 짜리가..’라는 말은, 아니 한달 전까지만 해도 15살이었군. 여하튼 그런 말은 하이트에게도 많이 원한(?)이 있는 놀림말이었다. 알다시피 하이트는 종업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러다 보니 선배 종업원인 카아스 아저씨와 라거 에게 ‘겨우 신참내기 인 주제에..’라고 많이 놀려먹을 기회가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친했다. 그러는 것은 그들만의 애정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쩝.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이렇게 뼈까지 원한이 사무쳐 아무 죄 없는 나를 이렇게 놀려대니..참. 그나마 없던 존경심까지도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것은 내게 언제나 있는 일상일 뿐, 이런말로 하여금 풀이 죽을 내가 아니란걸 잘 하는 하이트 이기에 날 놀리는 것이다. 칫, 앞으로 쫌 딱딱하게 나가봐? 헤헷, 어차피 오늘 보면 한동안을 안볼텐데.. 쫌 아쉽네.
“헤헷.”
“엥, 뭐야? 그 소리가 듣기 좋은 거야?”
“헤헷, 하이트는 좋은 사람이야.”
“이자식,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잠꼬대를 하다니!! 어서 한숨 더 자라.. 그래야 세상이 하나로 보이지.”
“나 잠 다 깼어, 하이트. 나 이제 학교갈 건데.. 오랫동안 하이트 못보겠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하이트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구..”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로.. 난 정말로 하이트가 좋았다. 언제나 짓궂고 날 골려먹을려고 밤새워 작전까지 짜던 하이트 이지만, 형이 없던 내겐 더없이 따뜻하고 친절한 형이었다. 음.. 보고 싶을 거야 하이트.
“헛참, 이녀석 파브! 어디 죽으러 가는 사람 처럼 이야기 하네.. 거기서 텔레포트 마법이나 배워서 매일매일 놀러와, 임마. 아 참, 넌 검술이 배우고 싶댔지? 하핫, 그럼 방학때 놀러와라. 내가 손수 술 담가 주지.”
“에헤헷, 고마워 하이트.”
하이트도 웃고 있었다.
친근감 느껴지는 향토적 얼굴과 갈색 더벅머리. 모든게 다 그리울 것이다.
코 끝이 찡하게 울렸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맺히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엄마를 찾았다.
“아, 하이트.. 엄마는?”
“응? 아아.. 세라 아주머니? 아마도 밖에 카아스 아저씨랑 라거랑 눈치우고 있을 거야. 어제 눈이 좀 왔냐? 어휴.. 아침마다 매일 이 짓거리야.”
“핫.. 응. 그럼 나가볼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닦던 테이블을 마저 닦는 하이트를 뒤로하고 주점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이 한 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내 눈을 찌르는 눈덩이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차가운 눈들은, 주점 입구의 가장자리로 다 몰아져 있었고, 주점으로 들어오는 길목도 전부 닦아져 있었다. 이야.. 말끔히 치웠네. 밤새도록 온 눈 같은데..
첫눈이 올때는 즐거워서 거리에 나가 이리저리 뛰어다녔었는데…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지금은 내리는 눈만 봐도 투덜거림이 나올 지경에 다달아 있었다. 그만큼 우리 동네는 눈이 많이 오는 동네였다. 그렇기에, 저렇게 아침부터 나와 수고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아, 엄마, 그리고 두 종업원님들..정말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네요. 제가 없더라도 계속 수고하세요..
“으핫! 차가웟!!”
순간, 내 머리로는 극한의 차가운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무언가가 내 뒷통수를 때린 것이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때린 물체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것 같다. 바로 사방에 널려 있는 눈. 으힝… 차가워. 나는 내 갈색 머리에 엉켜 있는 눈덩이를 손으로 털어낸 후, 그 얄미운 눈덩이가 날아온 방향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름아닌 카아스 아저씨가 싱글거리며 서있었다.
“카아스 아저씨!!”
“아핫핫핫, 미안하구나. 원래 네 옆에 있는 문을 향해서 던지려고 한 눈이었는데.. 허헛, 참. 내 돌팔매 솜씨가 녹슬었구나.”
“농담 하지 마세요.. 씨이.”
그것은 명백한 농담이었다.
아침에 손님 맞을 준비를 누구보다 철저히 하는 카아스 아저씨인데 출입 문에 눈덩이를 날려 문을 더럽히는 일은 꿈에도 못할 것이다. 쳇, 언제나 이런식으로 장난을 거신다니까… 하아.. 그래서 하이트나 라거도 카아스 아저씨를 닮는거겠지. 물론 그것이 나에겐 아주 불리한 일일테고. 쯥.
“하핫, 눈치가 빨라졌구나, 파브. 이제 학교 갈 때가 다 되어서 그런건가?”
“피잇, 카아스 아저씨랑 딱 일주일만 지내봐도 아저씨 성격은 파악할수 있을거에요.”
“쩝.. 그런가?”
정말 카아스 아저씨는 단순함의 대명사였다.
6년전에 우리 주점에 들어왔을때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상당히 딱딱한 분위기를 풍겼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180도 달라진 기분이다. 에휴.. 언제부턴지 몰라도 내가 철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나? 아무튼 상당히 재미있게 변한것 같았다. 덕분에 그런 재미있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유쾌한 –물론 나와 하이트, 라거 에게만이다. 우리 엄마껜 언제나 죽어지내는게 카아스 아저씨다.- 성격을, 뒤늦게 들어온 라거와 하이트가 물려받은 것이었다. 헤헷,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닌게 다행이지.. 도시에 가면 딱 놀려먹히기 십상이라고 우리 촌장님이 말하시니.
내 머리에 묻은 눈을 다 털어낸 나는, 그 부분을 손으로 비비며 카아스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엄마랑 라거는요?”
“으응? 아, 세라 아주머니라면 금방 돌아온다며 촌장님 댁으로 가셨구나. 그리고 라거녀석은 달걀사러 존지네 가게에 갔고. 그나저나 몇시쯤 출발할 거니? 일주일 내로 도착하려면 아무래도 일찍 떠나는 편이 좋을것 같은데…”
“우… 막상 떠나려고 보니까 더 있고 싶어지네요. 카아스 아저씬 잊지 못할 거에요.”
“아하핫, 녀석. 어디 죽으러 가는 사람 처럼 말하는 구나. 네가 빨리 졸업해서 훌륭한 검사가 되어 돌아오면 되잖니?”
정말.. 말하는 것도 하이트랑 판박이었다.
아까 들은말을 거의 그대로 카아스 아저씨에게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헤헤헷, 그만큼 둘이 닮았다는 거니까. 아무래도 하이트는 이 넉살 좋은 카아스 아저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헤헤, 그럴게요. 그때까지 살아계셔야 해요!”
“이녀석, 놀리는 거냐 지금? 난 아직 30대라구!”
카아스 아저씨와 나는 한동안 즐겁게 웃었다. 이제 이별인데.. 앞으로는 오랫동안 카아스 아저씨도 못 보겠지.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나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철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쨍쨍한 아침 햇살은 내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었다.
어느덧 카아스 아저씨는 주점 안으로 사라졌고, 나는 촌장 할아버지 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흠.. 엄마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해 놓고서 왜 아직 까지 돌아오시지 않는 걸까? 어쩔수 없이 내가 가봐야 겠네. 또 촌장 할아버지 사모님이 끓여 주시는 홍차를 찬미하는 감탄사를 늘어놓고 계실지 누가 알아?
촌장 할아버지 댁은 우리 집에서 2블록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촌장 댁이래봤자 별로 넓지도 않고, 아담한 집이었고 –오히려 우리집이 좀 더 넓은 듯 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부담 없이 놀러가곤 하였다. 이 마을에 내 또래라면 얼마전에 이사온 필립이라는 아이가 있지만, 그 전에는 나만한 아이가 나 밖에 없었기에, 촌장 할아버지는 나를 특별히 귀여워 해주시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겨울용 부츠도 촌장 할아버지께서 생일 선물로 손수 만들어 주신 거라니까..헤헷.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나는 촌장 할아버지 댁에 다달아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갈색 지붕의 집, 이것이 바로 이 윌프레드 마을의 촌장님 댁이었다.
나는 대문에 있는 쇠고리를 당겼다 놓았고, 그것은 마찰음이 되어 집 안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문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칼칼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저 파브에요.. 엄마 여기 계신가요?”
“오오..! 그래 그래, 귀여운 파브. 허허헛, 들어오려무나… 네 어머니도 여기 있단다. 안그래도 마침 불르러 가려고 했는데 잘 와주었구나… 허허헛.”
“예..”
난 부츠를 벗어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부츠를 털어 가지런히 신발탁에 놓고, 촌장님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니, 그곳엔 다름 아닌 엄마와, 그리고 마을 경비원인 조디프 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엄마와 조디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나는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아앗, 실수다. 어휴. 엄마가 늘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 져라 하고 노래를 부르셨는데.. 특유의 당당하지 못한 체질은 여전한가보다. 으음.. 출발하기 전에 잔소리나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엄마는 내 예상과는 달리 활짝 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반갑게 말씀 하셨다.
“어머, 네가 제발로 왔구나 파브. 호홋, 잘왔다… 안그랬으면 또 이 연약하신 어머니께서 쇠약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야했을 텐데…”
그 말에, 내 눈은 꿈틀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틀 거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엄마가 ‘연약’과 ‘쇠약’이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씀 하셨을 땐… 솔직히 웃음이 나오려고 했었고, 난 아주 어렵게 그것을 참아냈다. 이햣, 대단한 노력의 성과야. 예전에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언제나 집에가서 엄마한테 ‘친절한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히히힛, 이제 때가 되니까(?) 뭔가 달라져도 달라지는군.
“오랜만이다, 파브.”
“아, 응. 조디프도 오랜만이야!”
지금 나를 향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올리는 20대 중반의 청년 조디프 그라셈은 이곳 윌프레드의 십여명 밖에 안되는 경비원중의 하나로, 경비원이 되기 전인 제작년 까지는 조디프와 동갑인 라거와 이야기를 나누러 우리 산골 주점에 자주 찾아왔었다. 나와의 친분도 그때 쌓은 것이고-경비원들은 무척 바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정말 조디프를 보는건 오랜만이었다. 어휴. 경비원들의 임무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평상시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는건지. 가끔씩 라거를 만나러 밤중에 찾아온다고 그러던데, 난 밤에는 일찍 자기 때문에 2달 전에 한번 보고 전혀 보질 못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조디프를 만나니까 기분이 좋았고, 나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하핫, 파브. 듣자하니 오늘이 출발일이라면서? 오래전부터 네가 학교에 입학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음. 그래서 나도 오늘 아침 일찍 연락 받고 달려온 거야.”
“응? 조디프가 왜? 그냥 나 볼라고?”
“허허헛, 조디프 군은 너를 수도까지 바래다 줄 용병 비슷한 거란다.”
옆에 계시던 촌장 할아버지께서 웃으며 말씀 하셨다.
조디프가 나를 바래다준다고? 그럼 나는 조디프랑 동행 한다는 이야기네..헤헷. 사실 혼자서 가는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어제 엄마한테 물어보니, 엄마는 오늘 이면 알게 될거란 아리송한 말씀만 하셨고… 조디프가 동행인이었다니,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매우 기뻤다. 내가 어려서 부터 조디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었고, 또 상당히 편안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디프에게 검술을 약간이나마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절로 입가에 곡선이 그려졌다.
“이야, 정말요, 할아버지? 헤헷, 정말 기대돼네요…”
“하하하핫!”
나의 들뜬 모습을 보고 있던 조디프는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이지, 조디프는 웃음이 많은 것 같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2년 전까지 조디프가 우리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만들어 주었던 밝고 활기찬 분위기 덕분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그것만 보아도 조디프는 밝은 분위기 메이커라고 칭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 후로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내가 오후 2시에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촌장님께 작별 인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나, 엄마, 조디프- 서둘러 산골 주점으로 돌아왔고,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시계가 1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간으로 나를 맞이 하였고, 나와 조디프는 마굿간으로 가서 말 두필을 골랐다. 내가 고른 말은 암컷으로 회색빛을 띄고 있는 예쁜 말이었는데 약간 고집이 세 보였고, 조디프의 말은 갈색 성마로 매우 온순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말을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하이트와 라거와 같이 승마를 배워본적이 있었는데, 다른 것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상당히 어려웠다는 점만은 내 뇌리 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에… 아마도 그땐 말이 사나워서 그랬을 거야… 라고 내 자신을 위로해 봤지만, 별로 효과가 없는지, 지금도 쉽사리 말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것이 현실이었다. 그러자, 나의 이런 모습을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던 조디프가 한마디 했다.
“왜그래? 말 처음 타보는거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에? 으, 으응… 저번에 배웠어.”
“흠… 근데 왜 말을 무서워 하는 눈치지? 혹시 공포증 있는거 아냐?”
공포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저 말 곁에 가기 싫을 뿐이었다. 맨 처음 엄마가 수도로 가는 길은 말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부터 기분이 별로 않좋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럼 언제 출발 할거야?”
“으하하핫, 짜식. 말 공포증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하하핫, 걱정 마라 파브. 이번에 수도까지 바래다 주면서 승마 교육은 단단히 시켜줄테니까.”
“쳇…”
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채 내 옆에 서있는 회색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드리는 조디프를 쏘아보았다. 우씨… 누가 승마 가르쳐 달라고 했나?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검술이란 말이야!
“그럼 검술은?”
“응? 검술?”
“응! 검술!”
조디프가 되물은 것을, 단어 하나 바꾸지 않은 체 억양만 좀 바꿔서 대꾸했다. 그는 오른쪽 눈썹을 낫모양으로 구부린 채 나를 내려다 보았다. 좀 의외라는 듯한 의사 표현을 갈망하는 표정을 한 조디프는 그의 연갈색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검술을 하고 싶어 한다고? 흐음... 도시까지 나가는데 왠만하면 고급스러운 마법학을 공부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파브는 머리도 좋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검술은 어디서나 스승만 있으면 배울 수 있는거잖아?”
“싫어.”
나는 조디프가 당황할 정도로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조디프도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니 약간은 당황 했을 걸? 헤헷, 지금 얼굴에 써있잖아.
잠시 뜸을 들인 나는, 마무리를 위하여 입을 열었다.
“난 지금까지 검술 연습 했다구… 마법은 관심 없어.”
솔직히 마법에 아예 관심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관심이 있다고 하면 저 끈질겨 보이는 조디프가 날 설득 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들들 볶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우와.. 엄마의 가르침이 상당히 효과가 있잖아? 무슨 일이든지 딱 절도 있게 끊으라고 했는데, 그말이 지금 들어맞았네. 헤헤헷, 조디프는 포기했는지, 졌다~라는 얼굴을 한채 내키지 않는 투로 내게 말했다.
“어휴… 좋은 기회를 차버리다니. 아무튼 네가 그렇게 까지 나온다면 어쩔수 없지, 뭐. 가는길에 내가 아는 몇가지를 가르쳐 줄게, 파브.”
“정말? 이얏호!!”
내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직까지도 조디프의 손에 있는 내 회색 말은 깜짝 놀라며 펄쩍 뛸뻔 했다. 그 말을 위해서 몸을 내 던진 조디프는 말의 목덜미를 양팔로 움켜잡았고,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말은 곧 다시 금 차분하게 정신을 되 찾았다. 우화… 위험했다.. 저 말이 이 마굿간 안을 날뛴다면… 으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운 나쁘면 학교 가는것 자체가 취소됬을 지도… ‘마을에서도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 녀석이 수도엔 어떻게 가? 안돼, 취소닷!’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디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행여라도 이번건을 꼬투리로 조디프가 마법을 배우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그러나, 예상외로 조디프는 순순히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고, 또 나를 설득 시킬 생각이 없는지, ‘이제 어서 출발할 준비를 마치자’ 며 내 팔을 붙잡고 마굿간에서 나갔다.
“하아… 큰일 날뻔 했네.. 진짜.”
“하하핫, 짜식. 앞으로 조심해라. 음, 그리고 지금 몇시나 되었지?”
“으음… 1시 30분이야. 헷,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서 가자, 조디프!”
요즘들어 내 취미는 다름아닌, 시계 쳐다 보기였다. 작년 내 생일때 받은 이 시계는, 갈색 가죽으로 되어있으면서도 꽤나 고급품 처럼 위엄있게(?) 내 손목 위에 붙어 있었다. 시계는 귀한 물건이라, 아무나 갖는게 아니라고 한다… 물론, 시계를 선물로 주었던 하이트를 비롯한 다른 종업원들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하이트, 라거, 그리고 카아스 아저씨가 보고싶을땐 이 시계로 그 사람들을 기억하면 되겠구나, 라는 등의 생각을 하며, 나는 앞장서는 조디프 뒤를 따라 힘있게 발을 내 딛었다. 조금 걷자, 저 멀리로 이 윌프레드 마을의 정문이 눈에 들어왔고, 그 곳에서 나를 반갑게 맞는 여러 사람들이 내 시야에 가득 찼다. 엄마부터 시작해서 촌장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하이트, 라거, 카아스 아저씨, 그리고 대장간의 제리, 정육점의 해롤드, 그리고 그외 여러사람이 나를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얼마전에 이곳으로 온 필립도 보였다. 아하하… 이것 참.. 모든 가게의 주인이란 주인들은 다 나와있네.. 손님들 오면 어쩌려구. 특히 카아스 아저씨가 나올 줄은 몰랐는걸? 주점의 치안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저씬데.. 이렇게 비워둬도 괜찮을지… 하핫. ..괜히 목이 메잖아…
마을 사람들 앞에 내가 다다랐을때에도, 나는 목이 메어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에 머리를 맡길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울어서는 안된다…고 엄마가 말해주셨다. 이제 훌륭한 검사가 될 사람은 눈물을 보여선 안됀다고. 어차피 울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잖아?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인데.
헤헷, 그래서 나는 모두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겨울을 상징하는 차가운 공기가 내 얼굴에 이리저리 부딛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내가 탄 말이 그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는 것이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나의 얼굴을 따끔따끔하게 쏘아주는 바람이 얄미워서 이런 표현을 써버렸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 워낙 내가 겁을 내다 보니가 그렇게 된거라나..- 피부를 건조케 하는 찬바람이 얼굴을 바람의 칼로 긁으며 지나가는 통에, 난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릴수 밖에 없었다. 나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삐를 쥐며,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조디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후와, 이런 추위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다니 과연 경비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조디프도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힐끔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파브.”
“으, 으응.”
그의 말에 나는 더욱 더 고삐를 세게 쥐었고, 조디프는 옆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 싱글 웃어댔다. 휴우.. 정말 나도 언젠간 작정하고 승마를 배워야 겠어. 검사도 말 타는 사람이 있던데, 난 그런건 무리일것 같지만 배워보는 것이 더 좋을거야.
가볍게 숨을 고른 나는, 그제서야 주위에 펼쳐진 절경을 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울창한 숲이, 왼쪽으로는 눈 쌓인 드넓은 초원이 드리워져 있었고, 하늘은 더 없이 파랬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나의 입학을 축하해주는 선물 같이 느껴졌다. 나의 기분은 정말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조디프.”
“음?”
“우리가 얼마동안 달렸어?”
“흠.. 글쎄, 한 2시간은 족히 달리지 않았을까? 배고프니?”
“응, 약간.”
그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의 속도를 차츰차츰 늦춰갔다. 결국 말이 완전히 멈췄을땐, 나와 조디프는 말에서 내려 작은 개울가로 걸어갔다. 이곳 숲은 그리 추운 지역이 아니었는지, 개울에는 얼음 한조각 찾아 볼수 없었다. 개울 밑바닥 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은, 곧 내 두손에 담겨졌고 그리고 내 얼굴 피부와 맡 닿았다. 굉장히 차가운 물이 내 얼굴을 훑어내리자,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자, 주위의 환경이 사뭇 달라보인것 같기도 하였다.
“흐아, 차가워!”
어쩔수 없이 내 입에서 새어나온 비명이었다. 그에, 옆에서 물을 쭈욱 나무 병에 담고 있던 조디프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도 물을 얼굴에 적셨다.
“후, 정말 차갑군.”
“것봐, 내가 뭐랬어.”
나는 차가워서 얼굴에 아직도 묻어 있는 물기를 닦아 내는 조디프를 보고 웃어댔고, 조디프도 덩달아 나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대충 시간이 흐르자, 조디프가 나뭇 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고기 덩어리들을 나뭇가지에 꾀어 굽기 시작하였다. 음..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헤헷, 저 익숙한 고기 굽는 냄새는 정육점 주인인 헤롤드씨가 직접 양념을 해준 고기 같은데… 아, 맞구나. 고기를 꺼낸 종이 봉투에 해롤드씨의 정육점 이름이 큼지막지하게 적혀 있으니까.
나는 조디프가 고기를 완전히 구울 동안, 쓸만한 막대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검술 수련을 하려면, 대충 검 비슷한 거라도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음… 식사를 마치면 조디프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다. 헤헷, 식후 운동겸이라는 것이 좋은 명분이 되어주는 것은 행운이었다.
“에… 찾았다!”
나는 드디어 발견한 기다란 나뭇가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그걸 손에 쥐어본 후, 그것이 썩은 가지임을 깨닭고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 정말 되는 일이 없단 말이야.
나는 내 손에 잡히는 기다란 물건을 들어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적당하게 들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에헷, 이거 무겁네… 쇳덩어리일까?”
정말 상당한 무게였다. 특히 나이에 비해 체격이 외소하다는 말을 자주 듣던 나에게는 그것이 한손으로 들기에는 무리였나보다. 결국 나는 힘없는 몸을 탓 하며 두손으로 그걸 들어올릴 수 밖에 없었고, 두손으로 들어도 무게감이 확실히 느껴지는 그것은 간신히 내 손에 의해 딸려왔다. 음… 검고도 딱딱하고, 긴 물체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걸 들고는 밝은 곳으로 나아갔다. 아직 날이 그리 어두운것은 아니었지만,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선 어두운 숲에선 그 물체의 생김세를 정확히 알아내는게 무리가 있었기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수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밝은 곳으로 나와 보니, 그건 검은색의 기다란 몽둥이 같았다. 에헤, 이상하네.. 몽둥이라. 응? 근데 왜 어째 겉은 나무같은데 이렇게 무겁지?
“….흠…”
나는 결국 조디프에게 물어보기로 하곤, 다시 그 무거운걸 두 손에 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내가 돌아가자, 조디프는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고기가 다 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고 있었다. 에.. 걱정했을까? 하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말도 안하고 사라졌으니.
“파브, 이녀석아. 어디 갔었어?”
“아, 미안해 조디프… 검술 배우려고 나뭇가지 찾아 다니고 있었거든…”
“그래서 쓸만한걸 찾았니?”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줏어 온것을 조디프에게 말해볼까? 그러면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은걸.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군. 왠지 말하면 안될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이걸 주웠을때만 해도 물어봐서 궁금증을 풀고 싶었는데, 막상 이야기 하려고 보니 무언가가 나의 혀를 붙잡는 듯 하였다.
나는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것은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었고, 그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조디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불러 모닥불 주위의 바위로 날 인도했고, 나는 수풀 사이에 그 무거운 물건을 내려놓고 바위에 기대에 앉았다. 이 장소가 가까워 지면서 부터 내 콧가에 맴돌며 나를 놀리던 고소한 고기 냄새를 음미하며, 나는 조디프와 함께 나뭇가지에 꼽힌 잘 익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음식이 너무 맛있었는지, 우습게도 고기를 뜯는 우리들의 모습은 가히 몇일을 내리 굶은 사람들을 방불케 했다.
“으압!”
내 기합소리는 만족 스러웠다.
배가 부른 상태로 내는 기합치곤, 상당한 기합이라고 조디프는 말했다. 특히 내 전체적인 체격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미리 말해 두었지만 나는 내 나이 또래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한다- 상당한 기합이라고 했다. 조디프의 말을 듣다 보니, 언젠가 하이트가 내게 해준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으음. 그때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지. 고수는 기합 소리부터 다르다고. 헤헤헷. 물론 기합 소리만으로 고수가 되는 것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아니지만, 그래도 기합이 우렁찰 수록 정신력이 강해진다는 하이트의 말.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내가 그당시에는 모순이고 어쩌고 따질 여유가 없었이에 하루 종일 방에 특여 박혀서 기합 내는 연습만 한 적도 있었다. 으음… 분명 그래서 엄마에게 뒷통수를 멋지게 가격당했었다. 후, 역시 이런 어린시절-지금도 한참 어리지만-의 특별한 추억들은 모두 엄마를 중심으로 일어났던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조디프가 보여준 대로 나뭇가지를 일직선으로 쭈욱 뻗었다. 바람이 나를 향해서 불어서 그런지, 나뭇가지를 일직선으로 찔르는 것도 마치 바람을 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어, 파브. 팔과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잖아! 몇번을 말해야 알겠어? 네 체격으로는 힘을 쓰는 검등은 사용 못하니까 유연성을 기르라고 했잖아.”
“아앗.. 나도 모르게…”
웃, 나는 실수를 급히 만회하려고 다시 한번 찔러들어갔지만, 그것 역시 조디프의 까다로운 시선을 만족 시키지 못하였는지, 이내 조디프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우… 이거 너무 힘든데. 벌써 200번 이상은 찌르는 연습을 했지만 전부 조디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나보고 100번은 더 하라고 한다. 흐이… 이러다가 팔 빠지는거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유연하게 검을 찌를수 있는 거지? 찌르기는 거기에서 거기 아닌가? 흐… 팔 아파.
“으이입!!”
나는 다시금 최대한 유연하게 검을 찔렀다.
“틀렸어! 오른발은 뒤로 더 빼!”
애고…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야압!”
“다시! 어깨가 올라갔잖아!”
“흐얍!”
“틀렸어! 다시!”
“히야압!!”
“됐어, 잠깐 쉬어봐.”
“흐아…. 팔 아퍼…”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내 혹사당한 오른팔을 주물렸다. 계속 오른팔을 써서 그런지, 오른팔을 조금씩 움직일때 마다 찡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디프는 다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허공을 향해 나뭇가지를 찌르고 있었다. 음, 내가 보기에도 별로 특별한것은 없는 것 같은데. 나의 찌르기랑 뭐가 다른거지… 그리고 찌르기는 강력하면 좋은거 아닌가? 대충 어중간히 찔렀다가 제대로 안맞으면 오히려 자신이 당할 위험이 크다고 알고 있는데.
조디프는 몇번을 더 찔러보더니, 나뭇가지를 팽개치고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큰 소드를 뽑았다. 그리곤, 다시 찌르기에 들어갔다. 에… 뭐 별로 다른건 없는 것 같은데… 그 폼 그대로잖아. 쩝. 경비대의 실력은 상당하다는 말을 라거한테 들은적이 있는데. 특히 라거의 친구인 조디프는 그중에서도 특출나다고 했었고. 흠… 뭔가 다른게 있을거야.
조디프는 잠시 동작을 멈춘 후 나를 불렀다. 내가 급히 달려가자, 조디프는 나에게 그 검을 주고서 찔러보라고 하였다. 흠, 이거 꽤 무거울것 같은데… 어디 볼까?
“으악!”
흐앙… 한손으로 한손으로 드는게 아니었는데. 팔 빠지는줄 알았네. 흠, 그래도 아까 내가 숲속에서 발견한 기다란 물건 보담은 안무겁네… 헤헷, 잘됐다. 그래도 한손으로 들수 없는건 마찬가지. 난 어쩔수 없이 두손으로 들고 검을 찔렀다.
“우앗!”
몸이 앞으로 쏠렸다. 검을 떨어뜨린 후, 두 팔을 있는 힘껏 바둥거려 중심을 겨우 잡은 나는 조디프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염려되어 즉시 검을 줏어들었다. 역시나 무거운 검은 급히 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흐아… 너무 무거운데…”
“흠, 두손으로 찌르니까 중심을 잃잖아. 한손으로 찔러야지.”
“으아…난 못해! 내가 천하장사가 아닌 이상 저런 무거운 소드를 들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 그러니까 넌 조금 더 기초 수련을 해야겠어.”
“기초수련?”
나는 의문 섞인 눈초리로 조디프를 바라보았고, 조디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번 씩 웃고는 검을 들고 휘청대는 내게 손짓을 하였다.
“일단 넌 체력이 너무 약해. 검사 지망생이 체력이 약해서 쓰겠어? 마법사라면 또 모르지만. 어릴때 부터 체력을 꾸준히 쌓다 두는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신체가 성장 하였을때 상당히 편하게 육체를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지. 지금 수도 근방에서 위명을 떨치고 있는 검사나 기사들도 전부 어렸을 때 부터 기초 체력 훈련을 많이 했다라고 나와 있어. 그러니 파브, 너도 처음부터 검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려 하지 말고, 일단 몸의 균형 부터 잡는데 힘을 쓰도록 해라.”
“체력…? 우움.. 그럼 정확히 어떤것을 해야지 체력을 쌓을 수 있지?”
“달리기도 괜찮지. 물론 대충 달려서는 안돼지만. 물론 내가 앞으로 스케쥴을 정해 줄거야.”
“응.”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검을 조디프에게 돌려줬다. 검을 돌려줄때 마저도 그 검의 무게는 날 괴롭혔다. 내가 과연 이런걸 들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내가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한들 조디프처럼 팔이 굵어질수 있을까? 정말 상상히 안갔다. 몇개월 전부터 내가 무턱대고 팔 굽혀펴지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팔씨름으로 엄마도 이길수가 없던 나였다. 끄응… 뭐, 그때마다 엄마는 크면 힘이 세질 거라고 위로하셨지만… 나에게 이겨서 기뻐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까 위로 받은 효과가 대폭 감소했던 기억도 남아있다.
“이럇!”
아, 추워. 난 지금 거의 어두워진 밤길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 숲에서 너무 늦장을 부려서인지, 지금 잘못하면 노숙이란걸 해야 할 위험에 처해있었다. 조디프도 노숙은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밤길이라 조심하면서도 상당히 빠르게 말을 몰고 있었고, 그 덕분에 차가운 밤공기가 나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따가움을 맛 봐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달려서 늦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면 얼마나 좋을까… 헷. 나는 한번도 노숙을 안해봤지만 여러본 노숙 경험이 있다는 조디프의 말에 의하면 노숙이란게 즐겁지많은 않다고 들었다. 특히 이런 추운 날에 어지간한 장소에서 모포 덮고 잤다가 얼어죽으면 묻어줄 사람도 없대나? 흐, 정말 말로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다.
적당히 겁을 주는 조디프의 말에 더욱 힘차게 말을 몰던 우리의 시야에는 저 멀리서 깜빡 거리고 있는 불빛이 들어왔다. 혹시나 마을인가 해서 조디프를 바라봤지만, 조디프는 대충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불 빛은 해변의 등대같은거야. 아무래도 우리 오른편으론 바다가 펼쳐져 있는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다면 제대로 온것이군.”
“아, 헉… 헉… 제대로 왔다니… 그거 다행인걸…? 그럼 이제 얼마나 걸릴까?”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물었고, 조디프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가 본 지도에 의하면 앞으로 1시간만 앞으로 쭉 달려가면 현재의 목적지인 바렌 마을이 나오게 되어있으니 오늘은 그곳에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 하는 거야. 어때, 견딜만 하니, 파브?”
“아… 팔이 아파. 한시간이라고… 으응…”
“자! 기운 내자!”
내 착각 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을 마친 조디프는 더욱 속도를 내었던 것 같았다.
말을 달리던 도중, 나는 내가 얼마전에 발견한 검고 긴 물건을 의식하곤 그것이 묶여 있는 말의 안장 왼쪽 부분을 살짝 바라보았다. 다행이도 꽉 붂어서인지 떨어질 것 같진 않았고, 덕분에 안심하고 달릴수 없는 이유중 하나가 줄었기에,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왠지 버리기 싫어서 가지고 온 물건이지만 수시로 신경이 쓰여서인지, 뭔가 조금 불안했다. 그냥 평범한 나무 막대기는 아닌것 같다. 그 검고 긴 물건은 굉장히 무겁고, 또 적당히 굵직하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냥 평범한 쇳덩어리는 아니겠지? 흐음. 그럼 안돼는데. 내가 계속 끌고다니는 의미가 없잖아.
“쿨럭, 쿨럭.”
조디프가 나의 앞으로 말을 몰자, 흙 먼지가 약간 날아왔고, 나는 기침을 하였다. 엣… 잠시 한눈을 판 것에 대한 벌인가? 쩝.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 보단 싸니까 어쩔수 없지 뭐. 그나저나 조디프는 꽤나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 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연갈색 머리가 펄럭 거리는 것이 확실히 눈에 띌 정도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말을 몰고 있는지 설명이 되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한시간 후라도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닐 텐데, 이렇게 서둘러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하지만 나는 그런 궁금증을 의문문으로 조디프에게 제시할 여유가 없었다. 나도 부리나케 말을 몰아야 겨우 조디프와 발을 맞출 수 있는 상태여서, 지금은 말을 안전하게 모는 것 만큼 집중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으하, 헉! 헉..!”
무의식 적으로 새어 나오는 나의 거친 숨소리가 걱정되었는지, 조디프는 어느정도 속도를 줄이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그 속도가 그 속도였기에, 나는 조디프에게 계속 빠른 속도로 가자는 제스처를 있는 힘껏-지금은 말 위에 있어서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취했다.
그러나 조디프는 약간 잘못 이해 한 것 같았다.
“여기서 잠깐 쉬자구?”
조디프도 숨이 찼는지 아까 보다는 약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경험과 나이에서 비례하는지 나 만큼 초죽음 상태는 아닌것 같았다. 쿨럭, 그래도 다행이지 뭐. 내가 쓰러져서 죽더라도 조디프는 무사히 학교로 갈 수 있을테니까…. 으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오락 가락 해서 말이야.
“아! 니! … 크학… 아학…!”
나는 간신히 숨을 참으며 또박 또박 대답하였다. 그러나 조디프는 나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조디프가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봤는지는 설명할수가 없다. 그냥 본 것이다- 속도를 점차 늦춰갔다.
“으헉… 으하… 아하… 하아…”
머리가 어질 어질 해짐을 느끼며 나도 속도를 늦췄다.
“워, 워..”
말은 조디프의 외침에 점차 발을 약하게 구르더니 얼마후엔 완전히 멈춰버렸고, 나의 말 역시 고삐를 쥔 나의 손에 의해 멈췄다. 나는 말이 멈추자 마자 말 등에서 떨어져 흙먼지 바닥을 굴렀고, 그걸 본 조디프는 급히 말에서 내려 나를 부축했다.
“괜찮니, 파브? 이런. 역시 무리하게 말을 달리는것이 아니었는데.”
“으하… 하아…”
나는 대답 대신에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물통을 집어 마개를 벗기고 물을 들이켰다. 굉장히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나는 세상이 조금 밝아진 듯한 착각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가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엔가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덜컹 거리는 소리와 전신의 진동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안으며 내가 눈을 떠 보니, 내 눈에는 옆에 앉아서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디프가 들어왔다. 조디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얼핏 보아 50대 중후반 쯔음 돼 보이는 턱수염을 기른 아저씨였고, 우리가 있는 곳은 작은 마차 안 같았다. 나는 내가 일어난 것을 알리기 위해 약간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에 조디프는 나를 바라보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내게 말 하기 시작했다.
“오, 파브. 얼마나 걱정 했는줄 알아? 갑자기 쓰러져서 정신을 잃다니. 훗. 그건 그렇고 체력을 좀 더 길러야 겠구나.”
“으응. 그런데 이곳은?”
“아, 이곳은 마차 안이야. 그리고 이분을 소개할게. 이분은 하워드 메이플리프라고 하고, 또 덧붙이자면 우리를 바렌 마을 까지 데려다 주실 분이지. 인사드려.”
나는 그제서야 턱수염 아저씨를 바라보고 인사를 했다. 좋아보이는 인상도 그렇고, 우리를 바렌 마을 까지 데려다 주신다는 것도 그렇고, 정말 마음씨가 좋은 분 같았다.
“안녕하세요, 전 파베리아드 조슈아슨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파브라고 불러주세요.”
“오, 파브 군. 만나서 반갑다네. 허허. 그리고 신세진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나, 조디프 군. 나도 어차피 바렌 마을로 가는 길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어쩌려고 했나? 바렌 마을은 9시경에 되면 외부인 통행증 검문을 실시하는데. 보통 마을과 다르지. 다른 마을은 통행증 검문 시간이 10시 부터이지, 아마?”
하워드씨의 물음에 조디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 없게 말했다.
“아 예. 하워드 씨를 못 만났으면 큰일 날뻔 했군요. 하핫. 그것도 바렌 마을의 주민이시니 안전하게 통과 될수 있겠군요. 정말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됬네. 감사는 한번으로 족한거야. 계속 그러면 내가 무안해지지 않는가, 하하핫.”
그렇게 그들은 웃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이런 분위기가 싫은것은 전혀 아니었기에-내가 술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언제나 이렇게 호탕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를 좋아했다-싱긋 웃으며 분위기에 한껏 동참했다. 문득 하나보단 둘이, 둘 보단 셋이 좋다는 카아스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빗대어 하는 말 같기도 해서 상당히 공감이 갔다. 헤헷, 뭐 물론 음식 나눠 먹을때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 수록 좋지만.
하워드 씨의 말에 의하면, 나와 조디프의 말은 지금 이 마차의 말과 함께 마차를 몰고 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그 검고 긴 물건이 생각나서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 했지만, 그것은 조디프의 완강한 팔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으음, 달리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면 위험하다는 조디프의 말은 나를 설득 시키기엔 약간 부족함이 없지 않았고-지금은 평지를 달리고 있는 상태라서 무언가가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갈 염려는 없었다-나는 끝끝내 고집을 피우며 ‘더워서’라는 핑계로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헷, 말도 안되는 핑계에 조디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밖을 내다 보았다.
다행이도 나의 말 에 있던 짐은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안장에 단단히 묶여 있는 그 검은 물건이 조금씩 덜썩이는 것 같았지만 나를 태우고 계속 달렸어도 멀쩡한 것이었기에, 그 물건에 대한 걱정은 접기로 하고 나는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래, 이제 조금 시원해?”
“응, 아하핫! 밤 공기가 상쾌했어.”
“그래? 흠, 흙 먼지가 장난 아니었을 텐데.”
“뭐, 별로.”
물론 거짓말이다. 밖의 흙 먼지는 조디프의 말마따나 장난이 아니었지만, 나는 무의식 적으로 대답을 해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얼버무릴 수 밖엔 없었다.
흠, 이제 긴장이 조금 풀리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은 시간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해가 지기 전이었기에 시간이 꽤 됬으리라 짐작되었다. 특히 나와 조디프는 먼길을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렸기에, 아까 숲 속에서 먹었던 저녁은 전부 소화된 것이 옛날 이야기였다.
“훗, 배가 고프구나. 아까 먹은 음식이 다 소화가 되었겠군.”
음? 내가 하려던 말을 먼저 꺼내버린 조디프는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곤, 이내 거의 발 밑에 놓여져 있던 작은 헝겊 주머니를 집어 들곤, 거기에서 말린 육포 3개를 꺼낸 뒤, 나와 하워드 씨, 그리고 조디프 자신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막 건네받은 육포도 정육점 주인인 헤롤드씨의 선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여행 경험이 있는 듯 한 헤롤드 씨는 직접 말린 고급 육포를 한아름 조디프에게 싸 주었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들의 반가운 간식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헤헤, 정말 고맙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뚱보 아저씨라고 놀리는것이 아니었는데.
“우물 우물. 쩝, 쩝. 꿀꺽.”
잠시간 마차 안에서는 육포를 뜯고, 먹고 찢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그런 것엔 관심이 없는 듯 계속 육포를 먹는데 열중하였고, 나도 고개를 으쓱이며 내 손에 두갈래로 찢어져 있는 육포 중 한조각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참 육포를 씹고 있던 조디프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아차. 이거 마부 씨에게도 줘야 되는 건데. 아하,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헥, 조디프의 말을 들은 나도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마부가 있을줄은 생각을 못하고 이 마차 안의 세사람이 전부인줄로 착각했던 것이었다. 으아, 멍청한 파브! 어떻게 마부 없는 마차가 있을 수 있는건지.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 석으로 통하는 작은 칸으로 육포를 들고 다가갔다. 그러나 하워드 씨는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어 나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허허헛, 폴은 마차를 몰 땐 아무것도 먹지 않는 다네. 그러니 걱정 하지 말고 먹기나 하게나. 그나저나 늦게나마 말하는 것이지만 육포 고맙네. 때 마침 나도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는데 말일세.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맛 있는걸?”
“아 그렇습니까? 하긴 말을 몰때 만큼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때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고마워 할 사람은 오히려 저희라구요. 염려 하지 말고 드십시오.”
하워드 씨는 사람 좋게 껄껄 웃으며 육포를 다시 금 뜯기 시작하였다. 마차를 타고 한시간 쯔음 더 달린 뒤, 우리는 술과 포도주로 유명한 마을 바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밤 이라 그런지, 주위가 어둑 어둑 해서 마을 안의 야경 밖에는 볼 수가 없었지만, 야경 마저도 아름 다운 것이, 날이 밝고 햇볓이 내리 쬐면 굉장히 아름다울 것 같았다. 그냥 대충 보면 우리 윌프레드 마을과 마을의 발전 상황이 거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조디프의 말에 의하면 이 바렌 마을은 오래전부터 문명이 발달 해서 전통이 깊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주민인 하워드 씨 덕분에 우리 일행은 말과 함께 무사히 통행증을 끊고 여관을 빌릴 수 있었고, 우리는 하워드 씨에게 감사하단 말을 연거푸 한 뒤 여관의 우리 방으로 올라갔다.
“으하아암. 졸려라.”
“씻고 자야지, 파브. 먼지 때문에 얼굴이 얼룩 덜룩 해졌다.”
조디프는 내 얼굴을 보며 웃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들어누웠던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가야만 했다. 우리 주머니 사정상 방을 두개 빌릴 수 없었기에 하나 빌린 것이었지만, 방 하나가 굉장히 넓은 것이 4명이서 자도 괸찮을 것 같았기에 나는 아무 불평 없이 – 원래 이런 것 가지고 불평을 하지 않는 나이다- 방에 만족해 했다.
간단한 세면이 끝 난 후, 조디프가 세면대를 차지 한 동시에 나는 몸을 가볍게 날려 침대에 온 몸으로 착지 하였고, 내가 단언하건데, 나는 침대로 떨어진뒤 1분 도 안 돼어서 잠에 취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어젯 밤 사이의 약간의 기억이었다. 현재 나는 여관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식당에서 조디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헤롱 거리고 있는 중이었고, 조디프는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다.
“우핫. 훗, 살것 같군. 어서 먹어라, 파브. 안그럼 내가 뺐어 먹을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후후후.”
“에, 그럴순 없지!”
나는 은근한 조디프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빵을 들어 입에 갖다 꽂았다. 그러나 잠이 덜 깬 상태라서인지, 그 빵은 이 입이 아닌 오른쪽 뺨에 직격했고, 조디프는 웃겨 죽겠다는 듯 입을 틀어 막고 킥킥 대고 있었다.
“크큭, 키킥. 파브 이녀석아, 안 뺐어 먹을 테니 먹기나 해.”
우씨, 그럼 처음 부터 안 뻈어 먹는 다고 하던가! 졸지에 나는 앞 테이블과 옆 테이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잖아. 나는 툴툴 대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우물쭈물 하고 있다간 언제 조디프에게 빵을 빼았길지 몰랐기에 나는 서둘러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빵을 먹기 전에는 몰랐는데, 빵을 먹다 보니까 점점 배가 고파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덧 빵 한개를 가뿐히 해 치우고 추가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아주머니, 여기요! 빵 두조각 더 주세요!”
조디프의 몪 까지 더 시킨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우유를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조디프도 금새 컵의 반을 비우곤, 우유가 담긴 컵을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일정에 대해 궁금한게 많은 걸? 시간 났을때 물어봐야지. 이 바렌 마을은 언제 떠나야 할지… 또 오늘 밤엔 어디서 묵을 건지.
“조디프,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갈거야?”
“음? 우선 지도를 보면서 이야기 해야 겠군. 어디 보자, 그래. 우리가 지금 바렌 마을에 있으니까, 이대로 북서 쪽으로 쭈욱 올라 가고, 흠. 그럼 신나게 달리다 보면 로펜함이 나올거야. 거기는 꽤나 커다란 영지(領地)거든? 그래서 오늘은 거기까진 가야겠어. 주인인 영주님이 소유하는 영지는 마을과는 달리 조금 법이 엄격 해서 통금 시간이 이르거든. 그래서 아마 적어도 7시 까지는 도착해야 할거야. 나도 확실힌 모르겠지만 이르다고 나쁜것은 아니니 상관 없겠지.”
“으응. 그럼 오늘은 일찍 출발해야 겠네?”
나의 아쉬움이 어린 물음에, 조디프는 뒷 머리를 약간 긁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약간 아쉬운 것 같았지만, 예정이 예정인지라 어쩔수 없는 것 같았다. 나도 한발 늦어서 근처에 노숙을 하는 것 보단, 여기서 조금 일찍 출발해서 편안하게 자는것이 더 좋았기에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