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진한 사람들은 민비가 암살(살해)당한 것을 일본 사람들 만에 의해서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기고 나는 일본인 이라 할지라도 한국인 경비병들(시위대,친위대)을
물리치고 구중궁궐에 있는 왕을 공포에 몰아넣고 왕비를 살해한후 시신을
소각 처리하는 잔인하고 치밀한 범행에는 반드시 내부의 협조자나
내통자의 향도 역할 없이는 불가능하다,한일군 합동으로 이루워진 이민비
살해 사건을 역사는 이를'을미사변(乙未事變,1895년 10월 8일)'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이 거사 성공에는 한국인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
여러명이 있으나 그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들을 보자...
2, 1895년 5월 5일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사실상 지금의
요동반도(당시 명은 금주만의 金州반도 였다)를 반환하게 된 일본은 마음이
많이 아팠다(반환 배상금 5천만 냥만 받고 청에 반환,환부조약은
11월 8일에 체결).이 기회를 틈타 한국의 민씨정부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한 일본을 뒤로하고 돌연 친러정책으로 돌아섰고,이러자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채권국인 영국의 러시아 남하저지 정책의 채근과
함께 의무 불성실로 눈이 뒤집혔다.즉 반도 장악 문제를 놓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대들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선택한 것이 친러로 돌아선 민씨
권력의 수장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맘을 먹고,일본의 깡패(낭인)까지
동원해 잔인한 암살(시해)을 추진한다.적자생존,약육강식이란 공식만이
통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설치는 시장과 세상에서 인도주의나 양심,도덕은
아예 없었던 시대였다고 보면 아주 적절하다.
3, 이전에 일본은 반도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만들기 위해 1881년 신식별기군
창설때 부터 한국의 군인들에게 공을들였다.즉 친일파 군인들을 포섭
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요동(금주)반도의 반환이 결정되고(1895년 5월 5일)
한국이 친러로 돌아서자 일본은 1895년 9월 1일 강경파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 한국공사로 임명을 한다.
그런후 1달이 지난 10월 8일 거사를 위해 '일본의 깡패,신문기자,상인,경찰'까지
일본인들을 총동원하고 일본이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 양성해온 한국
군부내의 협판(차관) '이주회(李周會),훈련대 대대장인
우법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을 거사의 일원으로 포섭한다.
당시 군부대신은 춘생문 사건때 친일로 돌아선 안경수였다.특히 이중에 가장
적극적인 가담자이자 행동자는 미우라 고로의 수족같이 행동했던 우범선 이었다
.이들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서대문에서 일본군의 수비대와 한국군 훈련대와
합류해 한일군 합동 거사를 진행했다.
4, 한일 합성(연합)부대는 일본 낭인(깡패) 부대를 선두로 시위대를 격파하고
광화문을 돌파하여 국왕의 침전인곤령전(坤寧殿)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급습하여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여기서
우범선과 이두황은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한국군의 훈련대 대대장으로서
일본의 왕비살해 사건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을떠나 적극 가담했다는 것은
당시 한국 조정이 주체가 없었다는 사정을 잘 말해 준다고 할수가 있다.거사의
성공후 이어서 미우라 고로에 의해 친미,친러 내각은 해체되고 10월 12일
김홍집,어윤중,유길준 등을 비롯한 친일 내각이 들어선다.그리고 미우라는
이사건의 책임을 대원군과 합작한 한국군 훈련대에게 돌리고 자신들은 빠지려
하나 지켜본 눈이 너무 많아서 왕비 암살과 소각에 대한 은폐는 실패를 한다.
5, 육종학자이자 생물학자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왕비암살 적극 가담자 우범선(1857~1903)은 1881년 일본식 신식 별기군 창설
멤버였다.항상 친일적이었으며 척족들인 민씨 세력들과 늘 대립했었다.
갑오개혁에도 적극 참여했고, 1895년 일본 주도의 훈련대 창설시 이두황,이주회등과
함께 훈련대 대대장을 맡았었다.그는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함께 민비
암살계획을 세운후 훈련대의 군대를 동원할 책임을 맡아 잘 수행했고,시신의
소각 처리과정 최후까지 살피며 가담했던 인물이다.그러다 4개월후
아관파천(1896,2,11)으로 일본으로 도망한후 일본인과 결혼해 우장춘을 낳았으나
1903년 고종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 의해 구레(吳)에서 암살되어 46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6, 같이 가담한 이주회와 윤석우(尹錫禹)는 박선과 함께 아관파천후 고종의
명에 의해 사형 당하지만,같은 대대장으로 친일 골수의 이두황(1858~1916)은
사정이 다르다.그는 조선의 국모이자 왕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시 일본군을 위해
조선국인의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전담했었다.10월 8일 새벽
경복궁의 외부인 진입을 막기 위해서 였다.그는 민비학살 책임을 물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의 도움으로 몰래 일본으로 도망 갔다가 1907년 순종이 즉위
한후 이등박문의 특사로 '중추원 참의->전북 관찰사,이어 전북도 장관'가지
지낸다고 한다.필자가 보지도 못하고 확인한 바도 없지만 이두황의 묘가 지금의
'전주(全州)'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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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도 민비는 우리손으로 죽였으야
이두황의 묘는 전주에 있죠. 한옥마을에서도 새로 생긴 길로 5분 거리죠.
저건 전형적인 망국의 징조지요..예전에 후삼국 시절에도 후백제 견훤이 신라궁궐에 쳐들어가서 왕을 죽이고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추대한 것도 신라 내부 세력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암튼 저기에 동조한 자들은 완전히 나라 망하는데 일조한겁니다 아무리 민비가 나빴지만 저건 다같이 나라 망가트리자는 건데.. 지금도 일본의 추종세력이 있다는 사실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