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예총에서 발간하는 잡지 ‘예술부산’에 실린 비평 - #옛날옛적에훠어이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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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보기 · 연극
문학작품 같은 한 편의 무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글_김민수 극작가
느린 호흡의 연극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최인훈작, 전상배 연출, 러닝타임 155분(인터미션포함), 공간소극장, 2023, 4.5. ~ 4. 15)는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이 남긴 6편의 희곡 중 하나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동명의 원작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널리 알려지고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는 희곡이 무대에 오르면 원작과 연출의 해석 사이에서 무게 중심의 차를 가늠해 보게 된다. 이번 연극은 연출의 창의적 해석적인 무대 구현보다는 원작 희곡의 충실한 재현에 보다 더 방점이 찍힌 작품으로 보인다.
애기 장수 설화
희곡은 작가가 밝힌 것처럼 평북 지역의 전설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전승되는 '애기 장수 설화'를 원화로 하고 있다. 애기 장수 설화의 기본 플롯은 '세상을 구원할 영웅인 애기 장수가 태어나지만, 이는 나라의 반역이 되어 멸문지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영웅으로 자라기 전 부모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는 단순구조의 비극적 서사다. 최인훈의 희곡은 이에 메시아적 구원의 의미를 더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4·4조의 우리 전통 시가 운율을 따 온 노랫말 등 세부적인 내용 구성도 알차며,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눈 내리는 겨울
막이 오르기 전 어둠 속에서 늑대 소리인 듯, 바람 소리인 듯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린다. 무대가 밝아오면 소리의 실체가 드러난다. 검은 도둑고양이처럼 무대를 에워싸듯이 어슬렁거리는 배우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불안과 공포가 존재하는 극 중 현실과 인물의 불안한 심리적 내면을 직관적 시각화로 구현한 오프닝이다.
무대는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힘없고 가난한 백성의 살풍경한 방을 중심으로, 한겨울에서 진달래꽃이 피는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달이 찬 아내(최현정 분)는 양식이 될 씨앗을 구하러 나간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조정우 분)이 지게에 씨앗으로 쓸 곡식인 조와 콩 두 자루를 얹고 집으로 돌아온다. 눈밭을 힘겹게 걸어오는 남편의 발걸음은 느리고 느리다. 느리고 느린 발걸음은 몇 년 전 부산시립극단에 의해 공연된 오타쇼고의 침묵극 <물의 정거장>에서 큰 짐을 등에 진 배우의 느린 발걸음과 오버랩되었다. <물의 정거장>에서도 그러했지만, 느린 무대 장면은 확실히 집중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 삶의 무게, 힘겨운 현실을 상징하는 한겨울의 눈길을 걷는 느린 발걸음은 비현실적이며 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
인형 같은 민중의 삶
최인훈은 희곡의 서두에 극중 인물을 인형처럼 다룰 것을 주문하고 있다. 민중은 꼭두각시이며,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내부의 흉년, 외부 권력의 수탈)에 휘둘리는 힘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극 중 민중의 삶은 그저 생명이 붙어 있으니 살아있음이고, 산 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도적이 된다. 도적의 삶은 관가 높은 기둥에 목이 잘려 매달려야만 끝이 난다. 죽어야만 끝(구원, 해방)이 나는 것이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영웅인 애기 장수가 태어난다. 영웅의 출현을 알리는 용마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용마의 울음은 애기 장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이기에 권력 에게는 위협이 된다. 권력의 색출작업은 시시각각 불안과 공포로 다가오고, 아비는 아들을 죽인다.
진달래꽃 피는 봄
아비의 손에 아들을 잃은 어미는 목을 맨다.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아내마저 잃은 아비는 울부짖는다. 그때 그의 앞에 죽은 아들, 애기 장수가 용마를 타고 나타난다. 손에는 진달래꽃을 들고, 무덤에서 부활한 것이다. 진달래꽃은 죽은 어미를 살려낸다. 봄이 겨우내 얼었던 땅과 산야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애기 장수의 진달래꽃은 죽은 생명을 살린다. 그리고 애기 장수는 어미, 아비와 함께 용마를 타고 승천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신들린 듯 춤춘다. '훠어이, 훠어이, 다시는 우리 마을에 오지 마라'고 사람들의 떼춤은 살기 위한 몸부림의 예술적 표현이며 동시에 구원해줄 구원자를 내쫓는 역설적 현실을 드러낸다. 애기 장수는 다만 '희망'만을 남겼을 뿐이다.
문학작품 같은 무대
연출의 무대 구현과 배우들의 열연은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 주었다. 도적의 어미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노파(황미애 분), 비극적 아름다움을 충분히 보여 주었던 남편의 동작과 몸 사위, 몸을 던지면서까지 혼신의 연기를 다한 설화적 느낌의 아내, 무거운 극 중 분위기를 완화 시키는 웃음코드 캐릭터 개똥어멈(임선미 분), 그리고 무대 밖 소리의 주인공들까지 모두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연극이나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은 늘 공통된 과제를 안는다. 이 작품이 오늘의 현실에 어떠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오늘의 현실은 흉년과 수탈, 죽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대적 봉건주의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말마따나 인간의 보편적 비극성 측면에서 본다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기쁨, 슬픔, 고통, 이별, 희망의 감성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으니. 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밤, 첫 공연, 진득한 여운이 가슴에 남았다.